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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Sep 07. 2023

현실을 구분하라

욕망의 이해 #5

삶에는 수 많은 우연이 존재한다. 때로는 아무런 이유 없이 나쁜 일들이 우리를 좌절시키고 혼란스럽게 만든다. 계산하기 어려운 변수는 자주 알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하고 삶을 쉽게 통제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복잡하고 불확실한 현실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거의 경험과 정보를 재현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른바 재현의 방식이다. 과거의 경험, 지식, 정보를 바탕으로 미래에 나타랄 현상이나 사건을 새롭게 해석하고 재구성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어떤 결정을 내려야할 때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인류의 역사에서 재현은 오래된 방식이었다. 석기시대 동굴벽화는 대체로 사냥이나, 신성한 의식 등을 표현했다. 경험이 없는 사람들도 벽화를 통해 동물의 행동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처럼 재현은 소통과 문화와 전통을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


현대의 재현 역시 이 목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확실성 사이를 연결하는 최소한의 자기구제로서 가치를 지닌다. 과거 데이터를 기반으로 통계적 모델을 만들어 현 상황을 파악하면 동시에 미래 패턴을 예측할 수 있다. 그래서 재현에서는 과거라는 비교군 즉 원본이 중요하다. 그러나 모든 재현에서 원본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신의 의지를 전달하기 위해 '신의 얼굴'로 권위를 묘사했다면, 그 묘사는 분명 재현이라 할수 있다. 하지만 신의 얼굴은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자하고 따듯하고 자애로운 신의 이미지를 연출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신념과 믿음 그리고 우리의 행동까지 제시할 수 있다. 이처럼 원본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특정한 가치를 전달이 가능하다. 그래서 실재하지 않는 현상이나 사건도 상상으로 구체화 한다. 그렇다면 재현은 원본의 복제를 초월해 창조적 실현과 현실의 재해석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표현의 자유로서 보장된다. 그러나 원본이 부재한 재현은 그것이 무슨 목적으로 생성되었건, 단순히 태도와 지향만을 나태하며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지는 못한다. 비교할 근거와 기준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원본이 부재한 재현에 대해서는 그것의 정확성과 믿을만함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현대 사회에서는 다양한 매체와 끊임없이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현실과 그것의 재현 사이의 경계를 구별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한 예로 사진기자가 집회나 시위현장을 촬영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렇게 취재한 사진의 경우 기자의 의도에 따라 전체를 촬영할 수도 있고, 부분만을 촬영할 수도 있다. 그렇게 생산된 사진만으로 독자는 집회나 시위의 규모를 예측하기 어렵고, 때문에 다수의 의견인지 소수의 의견인지도 파악할 수 없다. 사진은 그 자체로 현실의 단면을 포착하는 데 있어 강력한 매체이나, 그것이 전체 현실을 반영한다고는 할 수 없다. 원본은 존재하지만 촬영자의 입장과 관점에 따라 왜곡될 수 있고, 사용된 기술과 자료에 따라서도 변형될 수 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 인해 현실의 전체를 포착할 수 없는 한계마저 가지고 있다. 이처럼 재현은 창작자의 관점, 사용된 기술, 선택된 자료, 시간, 그리고 공간의 제약 속에서 만들어진다.


물론 재현에 대한 한계성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목적한 결과가 다르더라도 그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허구적인 시나리오나 소설을 읽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시나리오나 소설에는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다. 또한 글이라는 표현방식의 한계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실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활용 한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미지에 대해 상상과 주관을 마음껏 반영한 체험과 표상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과거가 없는 기억의 장소이자, 오지 않은 미래라고 할 수 있다. 


재현의 결과가 처음 기대했던 것과 다를 수 있지만, 이는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기회가 될 수 있다.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 해도, 그 과정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은 다른 상황이나 미래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처럼 재현의 가치는 현재를 초월해서 존재한다. 


연금술사들이 납으로 금을 만들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생각해보자. 연금술사들은 원소를 다른 원소로 바꿀 수 있다면 납도 금으로 변형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이 노력은 실패했지만 과학에서의 실험은 이론을 재현하여 검증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때문에 연금술은 현대과학으로 이어지며 지식의 연속성을 갖게 되었다. 그들이 실험했던 원소 변형에 대한 기대가 과학, 특히 핵물리학, 핵화학, 금속학, 약학 등의 발전에 중요한 기초를 제공한 것이다.


이후 별과 같은 대규모 천체에서 핵융합을 통해 원소가 변형될 수 있음도 밝혔다. 이는 연금술사들이 그토록 원했던 금이 생성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었다. 물론 금과 같은 무거운 원소들은 보통 별의 내부에서 생성되는 것은 아니고, 초신성 폭발이나 중성자 별 충돌과 같은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현상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연금술사의 노력은 분명 역사적인 가치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연금술사들은 금을 만들지는 못했다. 이처럼 재현을 통해서 직접적인 이익을 얻지 못하는 경우 이를 실행하는 사람에게는 단순한 연습에 불과해 질수 있다. 때문에 재현이 그 목적에 맞게 정확하게 구현되는 문제는 중요하다. 


이러한 중요성으로 인해 재현의 기술도 정확성을 바탕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현재 우리는 테마파크부터 메타버스와 VR까지 다양한 재현세계를 경험하는데, 이는 이러한 고민을 극복한 결과다. 보다 정밀하게 과거의 시간과 장소, 문화, 그리고 사회적 상황을 재현함으로써 생동감 있고 시각적 완성도가 높은 체험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허구적 공간을 현실적으로 구축하는 것은 현실과 허구, 그리고 재현세계와 현실세계를 구분하는데 어려움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재현세계가 실제와 너무 유사해지면서 이를 현실로 오해하는 상황이 생긴 것이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재현공간인 에버랜드나 민속촌과 같은 놀이공원은 현실을 초월하는 체험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직원들의 업무공간이기도 하다. 이처럼 놀이공원은 현실과 환상이 동시에 존재하는 복합적인 공간이다. 그러나 놀이공원의 매력은 그 곳의 판타지가 현실에서와는 다르게 동작한다는 인식에서만 보장된다. 만약 관람객이 그 판타지를 너무 깊이 들여다보기 시작한다면, 그들이 알게 되는 것은 직원들의 피곤한 일상과 지쳐있는 현실이다. 마법 같은 분위기가 깨져 즐거움이 사라진다. 따라서 놀이공원에서는 판타지에 몰입하는 것이 중요하다. 허구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믿음 척 함으로써 원하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놀이공원은 현실과 허구, 이해와 경험,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섬세한 균형을 유지하며 존재한다. 이것은 일종의 적절한 타협, 혹은 묵시적 합의다. 


만일 놀이공원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진정한 현실로 인식한다면 어떨까? 판타지로 제공되는 상황을 정말로 믿는다면 말이다. 이 경우 판타지를 구분하지 못함으로써 안전 조치를 무시하는 등의 위험한 행동을 취할 수 있게 된다. 이외에도 다양한 캐릭터에 대한 과도한 공포나 심리적 트라우마가 발생할 수 있다. 결국 다양한 사람들이 소통하고 협력하는 사회에서 정상적인 대화와 상호이해는 물론, 사회적인 협력도 어려워지게 된다.


돈키호테를 생각해보라. 돈키호테는 기사도로서의 명예를 위해 풍차를 괴물로 오해하고 싸우는 등의 이상한 행동을 했다. 그런 행동은 단순히 그 자신뿐 아니라 주변사람들까지 곤란하게 한다. 따라서 현실, 위장, 가장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현실'이란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실제로 경험하는 것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판타지를 현실화하는 방법으로서의 '가장'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있는 것처럼, 또는 반대로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반면 '위장'은 존재하는 사실을 숨기는 행위로, 이는 진실을 다른 형태로 변형하거나 가리는 행위다. 따라서 판타지는 허구에 실제성을 부여하는 활동이라 할 수 있다.  


놀이공원에서의 흥미로운 체험은 이 세 가지 요소, 현실, 가장, 그리고 위장의 교차점에서 이루어진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잘 조화를 이루어야만, 방문객들은 허구와 현실 사이에서 적절하게 넘나들며 흥미롭고 안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놀이공원에서의 균형 잡힌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런 능력은 단순히 놀이공원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구체적으로, 연극에서 배우의 연기는 가장이고, 범죄자가 경찰복을 입어 자신을 숨기는 것은 위장이라 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배우의 연기를 현실로 착각해 과도한 감정적 기대를 걸게 되면, 배우에 대한 부적절한 감정이나 판단을 초래하며, 배우가 항상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강요, 또는 그들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배우가 이런 기대에서 벗어나게 되는 경우 부당한 비난이나 모욕과 같은 폭력으로 이어지곤 한다. 이로 인해 배우는 억울하게도 스트레스와 정신적 부담을 가지게 되는데, 가해자는 이러한 행위를 폭력이라고 인식하기가 어렵다.


한편, 범죄자를 진짜 경찰로 착각하는 경우에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범죄 피해자가 되어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이처럼 개인적 차원에서의 오해는 사회적 차원에서도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이런 예시는 우리의 실생활에서 너무 많이 등장한다. 사이비 종교를 맹목적으로 믿어 전 재산을 기부하는 상황, 또는 일부 정치인에게 권력을 넘겨주어 사회가 불안정해지는 상황처럼 말이다. 


이처럼 대중의 무비판적인 신뢰는 위장된 허구를 현실로 인식하면서 나타나는데 결국 사기꾼의 재산 증식과 정치인의 권력 확대의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그렇기에 재현을 단지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가장과 위장이 현실로 인식되는 순간 언제든지 개인이나 사회에 문제를 일으키게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반대로, 재현을 단순히 거짓으로만 보는 것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예컨대, 영화나 미술 작품에 대한 해석이나 감상을 억제할 수 있으며, 이는 개인이나 사회가 이러한 문화적인 재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통찰이나 즐거움을 제한할 수 있다. 이러한 의심과 부정이 판단과 경험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사람들이 더 이상 어떤 것에도 진심으로 몰입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창의성과 창조적 사고를 제한하며, 결국 변화와 혁신에 대한 대응능력을 감소시키게 된다. 


모든 것은 결국 우리가 재현과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구분하는지에 달려 있다. 재현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그를 통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재고해야하는 이유다. 이해의 어려움은 재현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 관점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가장이나 위장이 반드시 사실과 환상의 혼합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고 단정 짓기란 어렵다. 이들은 분명 우리의 인식을 분열시키고 착각을 유발하지만, 생산적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가상현실과 그래픽 기술은 가장의 방식으로 제공하는 새로운 상상의 세계다. 또한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현실의 복잡성을 제거하고 주요 이슈를 부각하는 것은 위장의 방식이다. 그러함에도 사회적 개선 같은 긍정적인 효과의 기대가 가능하다.


재현의 복잡성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종종 재현 자체로 사회적 논란을 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영화계나 출판계에서 발생하는 작가의 사후 검열과 원본 왜곡과 같은 논란이다. 다소 최근의 일이지만 디즈니의 영화 '인어공주'에서 흑인 배우를 캐스팅한 사례나, 마크 트웨인의 작품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출판사가 작가의 사후 인종차별적인 묘사를 삭제하고 수정하여 출간한 사례는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독자들은 이런 방식의 재현이 작가의 의도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며, 원본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강력하게 비판한다. 사회에서 요구되는 다양성 추구로 소비자의 도덕적 욕구를 충족시키지만, 실은 판매 촉진이라는 상업적 목적달성이 본질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비판에 앞서 이러한 현상에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점이 있다. 디즈니 영화 '인어공주'는 덴마크 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를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원작에서 안데르센은 인어공주의 피부색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인어공주의 피부색이나 그에 유사한 인종을 유추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인종으로 캐스팅을 해도 원작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예쁜 백인 공주의 이미지를 포기하지 못하고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한다. 이는 '인어공주'에 대한 정형화된 인식과 이를 부정당하는 불편한 경험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 있다. 이는 대체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앞서 언급한 원작의 훼손 문제와는 별개로 발생하는 문제다.


그래서 이러한 논란에 대한 논의를 보다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인 인물인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을 표현하는 영화를 만든다고 가정해보자. 순전히 다양성 추구를 위해 흑인이나 아시아인 배우를 엘리자베스 여왕으로 캐스팅한다면 이는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아 영화의 신뢰성이 떨어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을 백인이나 흑인 배우에게 맡기는 것도, 이야기의 전개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더라도 배역을 맡은 인종에 대한 이질감으로 인해 몰입이 어려울 수 있다. 오히려 역사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유발해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실제 역사를 다루는 작품에서는 이러한 재현 방식이 더욱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시도를 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창작물이라면,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겠다는 기록물이 아니라면, 다양성을 추구하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창작물은 말 그대로 창의적인 상상에 의해 새롭게 구성된 작품이다. 따라서 이를 허용하는 것은 기록물에서의 기록을 위조하거나 변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영역이다. 이 경우 흥행이나 작품완성도는 또 다른 문제다.


그렇기에 인종차별이 원작을 훼손하는 것보다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라고 인식하는 경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사회에 알려 변화를 이끄는 것을 우선시 할 수 있다. 실제 이러한 시도로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다양한 인종에게 배우로서 더 많은 기회와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언어와 행동을 수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이 갖는 한계와 모순을 지적하고 더 나은 미래상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서 재현을 활용하는 것은 우리의 보편적 인식체계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공정성이라는 개념을 확대하고 변화시키는 노력이다. 따라서 특정 집단이나 개인을 모욕하고 배제하는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마냥 어리석은 것이라고 무시할 수는 없다. 이들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평화적인 방법으로 재현을 활용하는 것이며, 이는 그들에게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 과연 적절한지, 그리고 그런 도덕적인 올바름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은 해결되지 않는다. 실제로 역사적인 사실을 흐리게 만들어 버리는 순간, 그동안 사회를 유지해온 중요한 가치들을 부정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사실이나 원작에 충실하려고 노력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과거를 올바르게 기억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논란의 중심에는 사회적 수용력, 인식 수준, 그리고 표현의 자유와 같은 이슈가 관련되어 있다. 어느 입장을 선호하던, 그 입장의 합리성은 각자의 가치에 따라 충분히 이해될 수 있기에 한쪽의 입장을 틀린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떤 것을 금지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전제 아래에서 논의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 


결국 이런 논란은 표현의 자유와도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표현의 자유를 이유로 백인 역사물에 흑인이나 아시아인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선택일 수 있다. 자유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제한된 규범과 가치체계에 대한 물음을 수 있고, 내용적으로는 우리가 갖는 인식적 고정관념을 깨고, 예상치 못한 시각에서 다양한 인종과 문화에 대한 통찰력을 얻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작이란 그 시대의 작가가 당시의 가치와 철학을 통해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원작자의 고민은 단독으로 떨어져 있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진 논리의 흐름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원작을 훼손하는 경우, 당시의 고민을 알지 못하게 되고, 그로 인해 연결된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어려워질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재현을 통해 어떤 긍정적인 미래를 기대한다고 해도 반드시 존중해야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원작자의 의도나 역사적 사실성이다. 우리가 재현을 통해 달성하려는 목적이 무엇이든, 결국 그것을 해석하고 즐기는 것은 관객이나 독자의 몫이다. 그렇다면 급진적인 변화나 한 번도 경험한적 없는 독창적인 시도는 그 자체로 낯설어서 불편함을 유발할 수 있음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 무조건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찬성이든, 반대든, 그 시대 사람들의 의식 수준에 따라 재현의 허용 범위는 결정된다. 재현과 관련된 논란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서 어떤 이야기를 소통하게 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문제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재현이 불편함을 유발 하더라도, 다양성과 포용성을 증진시키고 더 큰 이해를 촉진한다면, 사회는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도 있다. 반대로 지나칠 정도로 과도하게 인위적이거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변형되어 억지스러운 강요로 느껴질 때는, 거부할 수도 있다. 때문에 자유와 창조성을 보장하면서도 동시에 공동체의 가치와 문화적 정체성을 해치지 않는 균형이 필요하다. 


균형이라는 정도를 파악하는 게 가능한 것일까? 사실 모든 인간은 각기 다른 경험과 유전적 성질을 가지고 있고, 사회마다 다른 가치관, 문화적 배경이 있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사람들의 의식수준에 따른 합의를 도출하란 사실상 불가능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입장과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입장을 견지한다는 의미에서 노력해야한다”라는 공허한 의견만 남게 된다. 이 말은 결국 개인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참고, 인내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라는 말에 불과하다. 그러한 이유로 자신의 믿음을 부정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왜 참아야 하는 지에 대한 명분과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이러한 문제를 대할 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다. 어쨌든 재현은 실현된 상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를 위협받는 것처럼 느낄 수 있고, 반대로 가볍게 여긴다면 그 안에 담긴 중요한 사회적 역사적 문제를 무시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표현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보장받고 싶다면, 코미디라는 장르는 의미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코미디는 대체로 다른 장르보다 표현의 제약이 적고, 심지어는 가능한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을 탐구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 얼마든지 인과적 문법을 비틀거나 파괴하고, 상식을 조롱하는 역설을 통해 현실 가능한 세계를 벗어날 수 있다. 슬랩스틱 코미디가 만들어내는 물리학적 역설, 사회 체제나 질서를 조롱하는 코미디언의 도발적인 표현들은 모두 '무엇이 아닐 가능성'을 통해 겸손과 성찰을 제공한다.


따라서 우리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그것이 가지는 특별한 재현 방식을 통해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을 가능하다. 또한 코미디는 단지 농담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가 불편과 불안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예상치 못한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고, 비판하는 자유를 통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게 하는 훌륭한 도구라 할 수 있다.


특정 질서 체계를 너무 완벽하다고 믿고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강제하는 것을 우리는 전체주의적 사고라고 부른다. 이는 결국 우리의 생각과 인식이 절대적 질서에 의해 규정되고, 그에 따라 모두가 일관되게 행동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체제에서는 개성이 무시되고, 다양성은 사라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종종 코미디마저도 정형화된 규칙에 따라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가 있다. 예를 들어, 코미디가 정치나 경제적 이슈를 다룰 때 자주 유리한 사회적 지위와 위치를 가진 집단들이 이를 불편하게 생각하고 이러한 재현을 괴담이나 왜곡으로 비평하며 규제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가 정당하게 받아들여지고 마침내 코미디마저 규제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다양한 입장이 갖는 사회적 비판이나 논쟁을 할 수 없게 된다. 오직 현재의 제도와 선택에 따라 미화하고 추종하는 제한된 세계에 머무르게 된다.


그렇기에 이런 제한된 틀에서 생산되는 표현은 평범함의 반복만을 초래한다. 코미디를 규제한다는 것은 사실상 미리 정해진 '옳다'라는 규칙을 강요함으로써 모든 변화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막혀버려 획일화된 사회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론 “냅둬라”라는 말이 필요하다.


흥미로운 것은 어떤 금기에 대한 도전은 올바름의 추구나 부정 그 모두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그 모두는 새로운 금기를 만들기도 한다. 올바름의 추구에서 나오는 금기에 대한 도전은 대체로 사회적 가치나 규범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동기에서 시작되었든지 옳다고 믿는 그 자체가 새로운 금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삶이 순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올바름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에 도달하는 그 과정 자체 즉, 메커니즘에 있다. 


어떤 경우든 엄격한 규제로 통제되는 사회에서는 '열심히 살아본다'와 같은 자발적 노력이 무의미하게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정해진 방식으로만 살아야하기 때문에 주어진 조건에 따른 결과는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구분만을 명확하게 하고 이 체계를 지속시킬 뿐이다. 답이 없는 문제에 답을 제시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우리는 과거에 얽매이기보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싶다면 무엇에 얽매이기 보다 그것을 존중하면서도 다른 역설을 생각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삶의 역동성과 지속성은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수용에서 시작된다. 그것으로 우리는 새로운 시도와, 새로운 창조가 가능하다. 유명한 코미디언 찰리 채플린은 코미디 정신을 어두운 세상을 밝혀주는 빛으로 묘사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코미디는 우리를 웃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세상의 부조리와 불공정함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다.


자신의 미래를 바꾸려는 사람들은 표현 방식이 형식과 틀의 규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꿈을 꾸는 자유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한다. 실제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한 우리의 삶은 리얼리티보다는 코미디에 가깝기에, 우리가 마주하는 어려움에 유연해짐으로써 더 쉽게 적어도 조금은 유쾌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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