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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Sep 08. 2023

폭력의 이해

살아남기 #1

사회에는 수많은 폭력이 존재한다. 폭력은 상대방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는 의도로 나타나는 행위지만 단순히 물리적이고 불법적인 형식만 갖는 것이 아니다. 때론 '전통', '문화', '사랑' 같은 명분으로도 나타난다. 그러나 명분이 정당하다고 여겨질 때, 그 폭력은 사회 구조 속에 숨겨져 더 이상 폭력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실제 이러한 현상은 가정부터 군대, 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집단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폭력은 결국 사회 전체의 안정성을 해치며, 공동체의 신뢰를 약화시킨다. 특히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신뢰를 무너뜨린다.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와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숨겨진 폭력'을 드러내야 한다. 


우리는 자주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는 사회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반영된 이상적 원칙에서 비롯된다. 이는 구성원들 간의 윤리적 및 도덕적 책임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곧잘 다름으로써 좋았던 것이 같음으로써 편안함을 방해하며 불편함으로, 틀림으로, 싫음으로 변하고 만다. 이러한 변화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이해하려는 원칙과는 상충한다. 이렇게 우리의 이상과 실제 행동 사이의 간극은 때로 위선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위선은 그 자체로 사회의 신뢰가 추락시키는 요인이다. 왜냐하면 사회에서 사람들이 상호작용할 때 일정한 기준이나 규칙이 있어야 하는데 위선은 이러한 일관성과 예측가능성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결국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협력할 수 있는 기반을 약화시키고 안정성마저 위협한다. 


누구나 위험을 제공하는 당사자가 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비록 자신의 행동이 위선일지라도,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 그래서 “당신의 생각이 독특해서 신선하긴 하지만 상식적이지 않다. 당신의 생각이 틀린 것이다. 당신은 당신자신과 우리를 위해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당신과 함께 할 수 없다.”라고 말로 자신의 위선을 상대에게 전가한다. 변한 것은 오직 자신의 마음뿐임에도, 입장변화의 명분을 확보할 수 있다. 이는 타인에 대한 존중과 이해대신 억압하고 지배하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그렇기에 타인의 자유와 존엄을 침해하는 것이다.


폭력은 의외로 작은 영역에서 시작되며, 자주 이성적 합리나 객관화된 자기논리로 위장한다. 이러한 위장은 배려가 아닌데 배려인척, 합리적이지 않은데 합리적 인척, 이익이 아닌데 이익인척 하는 것처럼 본래의 모습이나 진심을 숨기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사회 속에서는 위장된 폭력과 맞닥뜨릴 가능성이 높다. 물론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배경과 성격을 가지고 있어 각기 다른 입장과 관점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갈등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이는 집단 내에서 약자는 무시나 조롱과 같은 부정적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마음이 상하거나 자존감이 떨어지는 상황도 생기며, 때로는 사회적으로 고립된다는 느낌까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사회는 이를 자연스러운 어려움으로 인식하고 상호 이해와 인내를 요구한다.


이처럼 폭력은 종종 문화적 관습, 사적 자치라는 명목 뒤에 숨겨져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제로 배우게 되는 인내란 결국 집단 내에서 작동하는 힘의 우열과 그에 따른 억압과 복종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정, 종교 집단, 스포츠 팀, 군대 등에서 나타나는 폭력의 경우 그 정당성을 전통, 문화, 통제의 효율성, 사랑 등으로부터 얻는다. 그로인해 집단 내의 문제로 여겨지며, 외부에서의 개입을 사실상 받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관습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또한 결속력이 중요한 조직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관찰된다. 간호사의 '태움', '열정 페이' 등이 그 예시다. 자신의 확고한 믿음 또한 이러한 폭력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이 경우는 수많은 스토킹, 데이트 폭행, 성폭행 등 헤어리가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다. 이들 모두는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가 합리적인 목표나 사랑, 필요성 등의 이유가 존재한다. 그로인해 폭력은 "그래도 된다"거나 "그럴 수 있다"는 사회적 인식에 기반을 두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문화나 관습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 본질은 자유의 약탈과 침탈이다. 


기업이나 정부의 부정행위를 고발한 공익제보자 또한 이러한 부당한 대우를 경험한다. 이러한 현상은 인터넷 상의 익명 행동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며, 두 상황 모두에서 개인의 도덕적 책임과 집단의 이익 사이에서의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그들은 집단 내에서 배신자로 비난받고, 고립되거나 따돌림을 당한다. 특별한 개인이 집단을 예외적으로 질서를 위협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집단 내에서는 종종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끼리끼리" 또는 "우리"라는 집단적 동일시를 강조하며 잘못된 관행조차 용인한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지키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이러한 생각은 결국 공익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선호하고 문제를 제기한 제보자에게 공격적으로 나서는 이유가 된다.


한국의 유명 자동차 회사의 엔진 결함 사건은 이런 현상을 잘 보여준다. 결함을 발견하고 제보한 사람은 회사로부터 해고당했고, 업무상 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소되기까지 했다. 우리 사회는 공익제보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 결국 이 문제는 미국 같은 수입 국가로 확산되었다. 미국 정부는 제보의 공익성을 인정하고 제보자를 보호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제보자의 삶은 상당히 피해를 입었다.


우리 사회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이 옳다는 도덕적 기준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현실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낄 수 있고, 그로 인해 극단적인 고민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개인이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현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해학도 폭력이 될 수 있다. 해학은 날카로운 공격이 아니라 착각이나 오류의 모순을 지적하는 역설적 표현이다. 그러나 무차별적인 공격을 해학이라고 믿는 경우가 있으며, 이로 인해 도덕적 명분을 확신하며 타인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정당성을 부여한다.


인터넷과 같은 익명의 공간에서 폭력은 더욱 빈번하다. 사회적 강자를 비판하고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일종의 정의감이 반영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질투나 부러움과 같은 부정적 감정을 해소하며 얻는 쾌락적 행위에 가깝다. 이런 폭력을 행사한 사람은 다양한 이유를 들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떳떳한 얼굴을 한다. 때문에 아무리 절박하게 구해달라고 외쳐도 가해자에게는 닿지 않는 목소리가 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가해자의 기만이다. 이러한 가해자의 자기합리화는 종종 그들 자신에게도 위험할 수 있으며, 사회적인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폭력은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폭력에는 공격적 폭력과 방어적 폭력이 있다. 그러나 이 둘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공격적 폭력과 방어적 폭력은 그들이 같은 사회, 문화, 정치적 맥락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하나가 다른 것을 유발하거나 증폭시킨다. 


최초의 폭력은 공격적 폭력이다 이는 불필요하게 또는 이기적인 목적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다. 그래서 종종 권력의 확장, 지배, 또는 자원의 착취로 나타난다. 반면 방어적 폭력은 자신과 다른 사람 또는 집단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는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은 공격적 폭력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데 그 목적은 공격적 폭력을 중단시키거나 위험을 해소하는 것에 있다. 방어적 폭력은 공격적 폭력에 의해 촉발된다.


예를 들어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찬탈하고 국민을 억압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 국민은 저항을 시작한다. 이때의 저항은 국가라는 공동체에 속한 개인이 국민의 지위를 벗고 시민의 지위를 회복하며 가능하다. 국가와 국민은 분리할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소속감을 잃은 개인이 국민의 스스로 지위를 버릴 경우 국가와 국민간의 관계는 해체된다. 국민이 없는 국가는 성립할 수 없으므로, 군부가 장악한 국가도 해체되며 이곳에는 자유로운 시민만 존재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군부의 통치권은 공격적 폭력의 형태가 되고, 시민의 저항은 방어적 폭력의 형태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군부의 쿠데타는 불법적 권력 찬탈로, 시민의 저항은 자유와 권리를 되찾기 위한 자기구제의 행위로 인식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공격적 폭력에 노출된 개인이나 집단이 이를 쉽게 극복하거나 저항하기 어렵다. 폭력이 발생하는 주된 원인 중 하나는 사회적 맥락과 구성원 간의 힘의 불균형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거나 저항할 힘이 없어, 폭력을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폭력은 종종 한 행위의 결과로 다른 폭력을 유발하는 순환적 특성을 보인다. 폭력을 겪은 사람이 복수나 자기파괴를 통해 자신의 고통을 해소하려 할 때, 그 행위 자체가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촉발할 수 있다. 이렇게 폭력은 연쇄적으로 이어지며, 그 연쇄를 끊는 것은 쉽지 않다.


폭력을 당한 사람은 종종 억울함을 느끼고 복수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감정은 '받은 것은 돌려줘야 한다'는 인간의 본성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복수나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그 감정은 우리의 무의식에 축적되고, 특정 시기나 상황에서 갑자기 분출될 위험이 있다.


폭력은 인간의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과도 깊게 연결되어 있다. 폭력 행위는 항상 미리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갑작스럽게 발생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이유를 이해하려면,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이 둘을 연결하는 '자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칼 융(Carl Gustav Jung)의 이론에 따르면, 의식은 외부 세계를 인지하고 관계를 형성하는 공간이다. 이 과정에서 '나'와 '다른 것'을 구분하고, 이를 통해 인격이 형성된다. 이러한 인격을 융은 '페르소나'라고 부른다. 이 페르소나는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 행동을 결정한다.


자아는 이러한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자아는 '나'라는 주체를 인식하고, 이를 통해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다. 의식에서는 규범과 사회적 기대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고, 이를 통해 페르소나가 형성된다. 무의식에서는 억울함이나 복수 같은 감정이 축적되며, 이는 특정 상황에서 폭력으로 표출될 수 있다. 

만일 자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외부로 드러나는 인격도 나타나지 않아 개인의 성숙도를 정확히 평가하기 어렵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회에서 개인의 평판이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아는 내면의 다양한 인격을 통제하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내속에는 내가 너무도 많다"는 표현이 가능하다. 이는 어떤 하나의 인격만이 나를 전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격이 나라는 사람의 전체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단지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인격 중 하나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의식 영역은 자아의 통제를 벗어나는 공간이다. 이곳에는 의식에 저장되지 않은 과거의 경험과 선험적인 인식이 축적되어 있다. 이에 융은 무의식 영역을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으로 세분화했다.

개인무의식은 자아의 그림자, 즉 직접적인 경험인 억압이나 충동을 저장한 공간이다. 이는 후천적으로 얻은 감정들이 모인 공간이다. 자아가 의식하지 못하는 경험들이 내면의 무의식적 요소들로 모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반면에, 집단무의식은 인류가 축적해온 선험적이고 보편적인 성질들이 저장된 공간이다. 이는 인류의 공통된 역사와 문화적 배경에 기반한 내면의 구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융은 집단무의식에는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본능과 같은 원형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원형은 남성성이나 여성성 등의 동일체적 본성들을 의미하며, 이는 집단무의식의 실체적 구조이다. 이를 통해 인간의 무의식적인 공통성과 창조성의 근원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순간적으로 외부에 드러나는 인격은 무의식 공간에 저장된 원형들이 현실 세계에서 발현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의식이 무의식에 축적된 모든 정보를 능동적으로 인지할 수 없기 때문에, 특별한 경험을 통해서만 원형들이 인식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특히 콤플렉스는 주로 개인의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는 원형 중 하나로, 보편적인 경험에서 비롯되는 특성이 있다. 콤플렉스는 보통 눈에 띄지 않지만, 개인의 특정 경험을 통해 의식 세계로 들어와 특별한 형태나 태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콤플렉스는 특정 상황에서 우리가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게 만들며, 이는 폭력 행위로 외부에 드러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폭력을 당하면서도 저항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상황을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참고 인내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불쾌한 감정이나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무의식 공간에 축적되는 것뿐이다. 그래서 무의식에서 축적된 감정이나 충동이 어떤 특정 상황에서 의식적 행동으로 나타날 때, 이는 때론 폭력적인 반응으로 나타날 수 있다.


영화 '조커'는 이러한 콤플렉스가 어떻게 들어나게 되는지 잘 보여준다. 주인공 아서 플랙은 편집장애와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에 입양되어 어머니의 폭력에 시달려야 했던 아픈 기억도 있다. 어머니는 아서를 폭행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러면서 어린 아서는 모순적인 요구를 경험하며 자라야 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아서의 모순적인 삶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어릿광대로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미소를 지어야 하는 직업이었다. 이로 인한 내면의 괴리감은 강박적 웃음이라는 이상 증상을 만들어냈다. 이 증상은 무의식적인 억울함과 분노를 통제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결국 아서의 강박증은 그의 가면이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내면적인 갈등과 불안을 숨기려 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아서의 사례는 개인의 무의식과 콤플렉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외부 세계로 드러나는지를 잘 보여준다.


아서는 사회의 지원이 필요했으나, 대신 외면 받았다. 그는 사회에서 고립되어 고통이 더욱 가중되었고, 이로 인해 무의식 속의 콤플렉스를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의식세계는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판타지와 같이 보여 진다. 연인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갈망이 현실과 망상의 경계를 허물어, 마치 실제인 것처럼 보이는 환각증상을 보인다.


아서의 성장 과정을 다시 살펴보자. 아서는 어린 시절, 감당하기 어려운 폭력에 시달렸다. 강인한 아이라 할지라도, 폭력의 고통 속에서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서에게 총이라는 권력이 생기게 되었지만, 그의 첫 생각은 자신의 죽음이었다. 이미 사회적으로 외면 받은 그의 자존감이 바닥으로 추락했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가치 없는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였다. 그러나 아서는 이러한 자기 파괴의 욕망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람들이 그의 겉모습만을 보고 그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서는 자신의 고통이 스스로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파괴의 대상이 바뀌게 된다.


이것이 바로 조커의 탄생 배경이다. 조커라는 존재는 사회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이 만든 탈출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고담시는 이미 지옥 같은 곳이었고, 그 고담시가 조커를 만들어낸 것이다. 노력해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 그리고 그로 인해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들이 이를 일으킨다. 법과 원칙이라는 이성의 지배가 강력히 요구되는 고담시에서, 조커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콤플렉스와 원형을 통해 인간의 무의식과 그 표출 방식을 탐구하는 일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다.


영화는 조커가 그를 모멸감에 빠뜨린 대상을 차례로 살해하면서 전체 서사를 완성한다. 아서의 통제되지 않는 콤플렉스는 분노로 변하고, 이것이 파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단순히 악을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편하겠지만, 그가 악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설정은 "상대방이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악하지 않을 수도 있고, 너는 네가 믿는 것만큼 선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명제를 던진다.


조커의 탄생은 폭력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따라서 조커는 괴물이 아니다. 괴물이라는 개념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힘과 권력이 있어야 하며, 파괴의 대상이 무차별적이어야 한다. 아서는 총이라는 힘을 가졌지만, 그의 대상은 그를 조롱하고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이었다. 이런 이유로, 아서가 조커로 변모하는 과정을 괴물의 탄생으로 볼 수는 없다.


'조커'는 폭력에 시달린 한 개인의 자아가 자신의 무의식 속 상처에 지배당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상처에 지배당하게 된 원인보다는 그 상처가 왜 지배당하게 되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그가 태생적으로 의지가 약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모든 행동의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에서 자신을 보호할 기본적인 힘조차 없는 사람들의 원망을 그들만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비겁한 행위일 수 있다. 개인이 처한 환경에 대한 사회적 의미를 먼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조커가 악당인지, 괴물인지를 논하는 것은 사실 별 의미가 없다. 이미 조커는 괴물이자 악당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당을 악당으로, 괴물을 괴물로 부르기 어려워질 때 우리는 불편해진다.


우리는 아서와는 같지 않지만, 누구나 마음의 상처를 감추고 있을 것이다. 그저 억울함과 분노와 같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애써 억누르고 있는 것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면을 쓰게 된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고, 사회가 원하는 모습으로 타인과 소통한다. 이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다. 이를 예의로 포장한 거짓된 연극이라 해도 좋고, 긍정적인 삶의 태도라고도 해도 좋다. 그러나 상처가 쌓이고 쌓이게 되면 언젠가는 결국 그 가면이 벗겨지게 된다. 


폭력의 연쇄는 개인의 분노나 억울함에서 시작될 수 있지만, 그 지속성은 사회의 방치와 외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폭력의 가해자가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사회가 그것을 용인할 때, 피해자는 자신을 구제하거나 피해에 대한 보상을 원하게 된다. 이 경우 자신만이 직접 문제를 해결해야하기 때문이다.


괴물을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타인을 외면하고 무관심을 보임으로써 괴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타인의 상처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문제는 괴물이 점점 늘어나면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위험에 노출되고, 안전대신 불안이 계속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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