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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Sep 09. 2023

가해자의 기억법

살아남기 #2

모든 폭력은, 그것이 공격적인 것이든 방어적인 것이든, 우리에게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상처를 남긴다. 이는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얻게 되는 이익과 상관없이, 가해자나 피해자 그리고 때로는 사회 전체에  악영향을 미친다. 가해자는 스스로의 폭력에 의해 인간성을 상실할 수도 있고 그로인해 사회적으로 격리될 수 있다. 또한 방어적 목적으로 폭력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대응의 한계로 근본적인 치료가 되지 못할 수 있고, 폭력을 행사했다는 점만으로 자신에 대한 죄책감과 같은 정서적인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다. 이처럼 폭력이 일상화되는 사회는 일종의 폭력의 반복적 실행이 나타나 결국 사회적 신뢰와 안정성이 무너져 구성원 전체에게 상처를 제공하게 된다. 


물론 신체적 상처의 경우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대체로 자연스럽게 회복이 되지만 정신적, 정서적 상처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정신적 상처는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규정하는 것으로 신념화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부정적 신념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위치를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가 유지되는 한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만약 이 사람이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치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문제는 자기비난과 수치심이 지속성을 갖게 되면 타인을 믿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적개심과 같은 분노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에서 나타나는 모든 유형의 폭력을 관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다양한 이해관계, 상대적 정의, 법과 제도와 같은 구조적 질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원의 한계, 전통과 문화, 무지와 무관심과 같은 다양한 요소들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회는 서로 다른 입장과 관점이 존재할 수 있고 그에 따라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공존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다 주목해야하는 것은 폭력으로 인한 상처가 미치는 영향이다. 누군가는 원인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인에만 집중하는 것은 사회의 변화를 너무 가볍게 보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폭력의 특정 형식이 갖는 유사성은 존재할 수 있지만 늘 새로운 형식의 폭력을 생산하고 있음도 분명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폭력으로 인한 상처가 개인에게 미치는 관계를 더욱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 하지만 이조차도 쉬운 문제는 아니다. 사실 우리는 타인의 상처를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인간의 감각기관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기에. 타인의 경험을 직접적으로 공유할 수 없고, 그 감정도 직접 느낄 수 없다. 또한 타인이 살아온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런 한계로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손가락에 찔린 작은 바늘 상처가 자식을 잃은 부모의 아픔보다 더 아프게 느껴질 수 있다고 비유 한다. 물론 도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둘을 비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누구나 타인의 아픔에 대한 무감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타인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런 제한된 상황에서도 우리는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다고 믿거나 공감해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더 흔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타인과의 공존은 필연적이고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인의 감정을 이해해야한다. 그래서 인간은 타인의 자신의 기억과 연결한 인접성과 유사성으로 아픔이라는 감정을 공유해왔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기억 속에 간직한 상처와 아픔이 저장되어 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우리가 본질적 사회적 결핍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기억조차 가지지 못했다면 공감은 애초에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공감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타인이 겪고 있는 아픔이 자신의 아픔과 비교되면서 또 다른 형식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기인한다. 


그렇다면 공감은 실제로 발생한 아픔과 연결되는 직접적 감각이 아니라, 자신만이 간직한 아픔이 재생되며 만들어진 새로운 체험일 수 있다. 물론 타인의 아픔을 통해 드러나지만, 아픔의 주체는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감은 단순히 나누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느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쟁과 참상에 대한 뉴스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는 그 자체만으로 어떤 감정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그러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목소리, 얼굴 표정, 그리고 그들의 눈물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슬픔을 느낀다. 이는 사고 현장에서 혼자 우는 아이, 자신의 자식을 잡고 우는 노인의 눈물 등을 통해 그 감정의 고통이 전해지는 것이다. 누구나 가족이 있고 가족을 잃는다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작동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해 진다. 그래서 이러한 감정은 우리가 이미 인식하고 있는 유사한 기억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기 위해서는 그 아픔이 반드시 전시되어야 한다. 숭고함, 고결함, 자부심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도 마찬가지다. 전시된 감정은 새로운 체험과 기억을 제공하며, 이를 통해 우리의 태도는 타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형성하게 된다. 우리가 죄의식을 갖는 것은 우리가 죄를 짓기 때문이 아니라, 타인의 상황을 통해 얻어진 반성과 성찰이 발생하고 그로인해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가 사회에서 좋은 평판을 얻으려 노력하고 예의를 중시하는 것은 반드시 자기성공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오히려 아픔과 같은 감정이 전시되고, 이로 인해 사회적 태도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공감은 아픔의 주체로서 자각하는 것이다. 체험할 수 없는 감각은 환상에 불과하므로, 아픔은 객체로서만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픔은 반드시 전시되고 체험되어야 한다. 이것은 사회의 형식이 발전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이 느끼는 상처와 아픔을 가볍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를 무시하면, 개인과 사회 사이의 관계는 결국 파탄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 폭력에 직면한 사람들은 때때로 무기력함에 빠져 자기존재를 부정하다 자신과 사회에게 있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는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을 해결할 수도 없고 견디기도 어려울 때 나타난다. 이처럼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은 사람을 극단으로 몰아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주 이런 상태에 놓인 피해자를 정신적으로 유약하다고 단정 짓고 개인 탓으로 돌리곤 한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또 다른 형태의 매우 강력한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인간은 살기위해 태어난 것이지 죽기위해 태어나는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를 개인의 일탈로 보는 사회적 해석방식이나 태도는 결코 용인되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사회가 균형감을 상실했음을 인식하고 개선하려는 성찰적 태도가 요구된다. 이러한 현상의 본질은 사회적인 타살이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은 인간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 이는 사회적 안정성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내적속성이 아닌 외적원인에서 이유를 찾는 것이다. 사실 사회에서 개인은 다른 사람의 비난을 감수하면서 법과 도덕적 규범에 맞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구조화된 질서와 타인의 시선과 같이 외부에서 가해지는 압력이 그만큼 강한 경우 더욱 그렇다. 그로인해 저항할 힘이 부족한 개인은 결국 사회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자살의 원인을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의 이익과 행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태도에서 비롯하는 이기적 자살이다. 예를 들어 학교폭력이나 사업실패 등으로 사회적 고립 상태에 놓인 개인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 이들은 실패를 통해 관계망이 완전히 파괴되고, 외로움과 삶의 허무감에 시달리다가 자신이 상황을 스스로 바꿀 수 없다고 느끼며, 유일한 탈출구를 세상과의 완전한 결별, 즉 그것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이나 집단의 이익을 도모하는 행동이나 태도에서 나타나는 이타적 자살이다. 개인의 욕구나 욕망이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지 못할 때, 진심으로 존경했던 유명인이나 정치인의 죽음을 자신의 무력함으로 인해 자신을 비관하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은 이타성이 강한 개인이 사회와의 관계에서 독립성과 주체성을 잃었기 때문에 발생한다. 결국 개인은 자신을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기게 된다.


세 번째는 뒤르켐이 특히 중요하게 다룬 개념인데, 사회가 급속히 변화하는 상황에서 개인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아노미적 자살이다. 예를 들어 자연재해나 전쟁, 경제적 공황 등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이면, 전통적인 질서가 완전히 무너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강한 무기력감을 느끼는데, 이는 사회적 규범의 동요, 이완, 붕괴 등에 의해 일어나는 혼란이다. 이러한 변화를 경험한 개인은 도덕적 불안정 상태에 놓이게 되고, 이를 극복할 방법이 없다고 느껴 삶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지나치게 억압적이거나 규제가 많은 사회에서 발생하는 잠재적 자살이 있다. 우리는 살면서 종종 집단의 엄격한 통제로 인해 개인의 열망이나 열정이 무시되는 경험을 한다. 이는 안정성과 지속성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적 요구로 나타난다. 그렇기에 강력한 권위나 명령, 엄격한 훈육 등으로 개인의 자유와 능동성을 제한한다. 결국 인간의 존엄성은 상실되고,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지만 사회 구조가 너무나 강력한 나머지 탈출구를 찾기가 어렵다. 때문에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죽음을 통해 벗어나려 한다.


이처럼 인간의 자살은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이 원인일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이 원인들은 사회적 관습에 의해 정형화되어 있어, 개인이 이를 바꾸기도 어렵고 벗어날 수도 없다.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지지 않으며, 각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능력이나 생김새도 모두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동일한 모습을 요구하며 타인의 개성을 억압하고 제약하는 일이 있다. 이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유용한 수단이라는 정당성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에게 이기심을 버리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회에 적합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이유도 여기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사회적 기준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많은 장점이 있음에도, 개인이 스스로 죽음을 생각하는 경우 사회는 그 개인에게 어떤 의미일 수 있을까?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죽음을 선택하려는 이유는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남기지 못할 것 만 같은 불안에 기인한다. 이는 매우 모순적인 감정이다. 왜냐하면 결국 이 사람의 마음은 사회에 소속되기를 원하고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얻기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뒤르켐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에게 이기심이 중요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때의 이기심은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자신의 가치를 사회가 규정하도록 방치하지 말라는 의미다. 어린아이들은 무능력한 이기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생존할 능력이 없고 부모나 사회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이러한 도움을 미안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이 타고난 이기주의자들은 스스로의 생명을 포기하는 일이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반드시 내부에서만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도움을 받는 것은, 그것이 이기적이더라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삶의 동기가 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갖는 것만으로도 때론 극단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오직 독립된 존재로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할 수 있다. 또한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태도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상식이라는 기준만으로 판단하는 태도를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생각해야 한다. 이 생각은 상식과 같은 규정된 인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상식은 결국 자신의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 사회에서 합의된 원칙, 그러니까 타인이 규정한 기준이다. 따라서 이는 곧 개인의 상처마저 평균화해내고 그 정도를 제공한다. 결국 우리로 하여금 아픔을 흉내 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은 주체적인 가해자나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이 애초에 부정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모두 적어도 한 번쯤은, 타인을 무시하거나 조롱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타인에게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동시에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애써 스스로를 객체화시켜 떨어진 공간의 관찰자가 되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우리의 행동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자신은 그러한 일을 한 적이 없고 또 당한적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인해 타인에게 발생한 상처와 아픔을 덧나게 하는 것도 분명하다. 왜냐하면 상처를 당한 사람은 여전히 사회적 기준에 맞게 자신의 아픔마저 규정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피해자'의 상처와 아픔은 오직 자신의 내면에서 억울함과 분노를 축적할 수밖에 없다. 반면 상처를 주는 주체인 '가해자'는 결과적으로 면죄부를 받게 된다. 이는 가해자로 하여금 아픔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는 효과를 발생시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건 자체마저 기억에서 지워버리게 한다. 이러한 이유로 과거의 상처와 아픔이 오직 피해자만의 부담으로 남게 된다.


그래서 가해자의 기억법은 대체로 단순하고 편협하고 기만적이다. 아픔을 주는 발화주체인 가해자가 아픔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물리적 한계, 폭력을 일으키는 상황에 대한 합리화를 통한 기억의 선택과 왜곡, 그리고 무의식적 편향으로 인해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폭력을 가했다는 인식이 있더라도 자신을 보호하려는 감정이 우선시되어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결여될 수도 있다. 결국 이는 무관심으로 이어지고 피해자의 감정이나 반응을 무시하게 되며, 그들의 상처마저 왜곡하고 만다.


그러므로 아픔을 위로하거나 치료하려면 사건의 객관적 상황을 분석하면서도 아픔을 느끼는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그들의 아픔에 접근할 수 있다. 상처나 아픔의 크기를 잣대로 측정하는 것은 사람을 기계와 같이 동일한 자극에 동일한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재판관, 검사, 변호사의 역할 놀이에 불과하다.


이런 이유로, 어떤 경우에든 타인이 원하지 않는 일을 강요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한다. 성공하기 위해 참아야 한다는 식의 충고도 신중해야 한다. 이런 충고가 상대의 태도 교정이나 더 나은 삶을 위한 위로라고 생각하더라도, 타인의 입장에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 될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그 누구도 타인의 인생을 책임질 수 없다는 점이다. 오직 자신만이 자신의 인생을 다룰 수 있다.


물론 사회를 유지하고 안전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힘의 우위에 있는 개인이나 집단이 다른 개인이나 집단에게 조언을 하거나 개입할 여지가 완전히 부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균형과 적절성을 잃지 않아야 그러한 노력도 설득력을 갖게 된다. 그것을 쉽게 그리고 자주 소홀히 하기 때문에 폭력이 증폭되고 재생산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가해자일 수도, 피해자일 수도 있는 존재다. 이 사실을 무시하면 2차적인 폭력의 연쇄가 발생하고, 더 큰 상처와 아픔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가해자는 상황에 대한 변명이나 이해 요구가 아닌, 진심으로 느껴지는 후회가 필요하다. 후회는 어떠한 변명이나 설명도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후회는 자신의 과거 선택에 대한 다른 가능성을 열어주는 일이다. 이 가능성의 성찰을 통해 다른 현재를 상상하고, 그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가해자는 현재 자신이 가한 폭력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보다, 과거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떤 현재가 만들어졌을 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충분히 거쳐야 변명이 아닌, 타인에 대한 진심이 담긴 사죄가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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