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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Sep 09. 2023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살아남기 #3

해결되지 않는 수많은 문제들. 가질 수 없는 것들. 우리는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길을 잃기도 하고 실패하며 때론 배신당해 상처를 얻고 고통을 경험한다. 이런 좌절들은 종종 무기력한 자신의 현재를 완성하기도 한다.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도 없고 회피하려 할수록 선명해지기만 할 뿐이다. 냉정하게 들리는 이야기겠지만 현실이 그렇다. 마치 운명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한 순간 얻어진 결과에서 멈추지 않는다. 또다시 새로운 목표가 생겨나기에 그렇다. 그래서 삶은 과정 그 자체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맞서 싸워보기라도 해야 한다. 그것은 고통을 인정하고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다. 세계를 긍정하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극복하는 인간을 우리는 성숙한 인간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지 않아도 스스로 존엄함을 증명하는 사람이다. 


쿠바에는 자신의 존엄함을 증명한 두 사람이 존재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 이방인, 미국 출신의 위대한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체 게바라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운명은 아이러니였다. 1932년 쿠바에 정착한 헤밍웨이는 1960년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의 혁명이 성공하면서 더 이상 쿠바에서 살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헤밍웨이가 쿠바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정확하게 전달되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평생에 걸쳐 수차례의 뇌진탕, 두개골 함몰, 피부암, 당뇨, 성불능, 전쟁에 참전해 얻게 된 수백 개의 파편을 안고 살았으며, 어린 시절 아버지의 자살, 어머니의 우울증으로 인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경험한 아픈 사람이었다. 


때문에 헤밍웨이는 우울증과 자살충동과 같은 정서적인 문제가 있었고, 그로인해 수차례의 이혼과 결혼을 반복했다. 뿐만 아니라 자녀들과의 관계도 좋지 못했다. 그 자신과 그가 맺고 있는 기초적인 관계들마저 무너져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은 그를 더욱 궁지에 모는 것이었다. 때문에 자신의 고통을 다루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그 중 하나가 쿠바에서의 정착이었다. 


헤밍웨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1936년에 그의 두 번째 아내 폴린 파이퍼에게 보낸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아내에게 “열심히 일하고 있어. 꽤 우울할 때는 발작도 있었고, 처음에는 그것 때문에 글을 쓰지 못했고, 약 3주 동안은 잠도 자지 못했어. 전에는 정말 이런 오랜 우울증을 경험한 적이 없었는데 좋은 점은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이 어떤 기분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거야. 그것이 아버지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더욱 관대하게 해."라는 메시지를 보냄으로서 그의 우울증과 현재의 상태 그리고 그 원인에 대해 설명했다.  


어떤 면으로 헤밍웨이의 인생은 안쓰러울 만큼 온통 상처로만 채워져 있다고 말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그가 다이끼리나 모히또와 같은 술에 의존했던 이유도 어쩌면 현실의 고통과 허무에서 벗어나기 위한 절박한 수단일 것이다. 그래서 헤밍웨이는 자신을 괴롭히는 복잡한 문제들로 벗어나기 위해 글쓰기와 같은 창의적 노력이나, 물리적인 위험과 긴장감을 수반하는 상어 낚시, 복싱과 같은 활동을 통해 자신을 한계에 몰아넣고 도전과 극복을 시도했다. 


그런 그에게 쿠바는 아름다운 바다와 자연을 제공했다. 또한 열정적인 문화나 따듯한 사람들은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그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작품 활동에도 도움이 되었다. 최소한 헤밍웨이가 쿠바에서 머물 때만큼은 그의 우울증과 자살충동이 어느 정도 관리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가 혁명에 성공하면서 그의 평화로운 삶도 함께 멈추고 말았다. 그해가 1960년 이었다.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상황이었다. 결국 미국으로 쫓기듯 돌아간 헤밍웨이는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고, 이듬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하고 말았다.


쿠바라는 공간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지 않지만, 쿠바를 배경으로 하는 헤밍웨이의 자전적 소설 '노인과 바다'를 통해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자신의 상처와 결핍들과 싸워왔는지는 알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노력과 실력으로 인정받는 선원이자 어부였지만, 나이는 그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는 가족이 없는 외로운 노인이었으며,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다. 산티아고에게 세상과의 유일한 연결 고리는 소년 마놀린이었으며, 그의 순진한 동경과 존경심만이 산티아고의 삶에 가치를 부여했다.


그렇기에 산티아고의 삶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실패한 인생, 늙어버린 몸뚱이가 전부인,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살기 위해선 타인의 차가운 시선으로부터 도망치거나 회피해야만 한다. 때문에 산티아고는 잠을 자고 꿈을 꾸며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곤 했다. 스스로를 가두고 자신만의 공간에서 평안을 얻었던 것이다. 그가 상처 받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 누구도 늙은 어부가 살아온 과거의 삶을 동경하지 않으며 관심 갖지 않았다. 그를 판단하는 기준은 오직 증명할 수 있는 현재의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억울하고 분했을 것이다. ‘왜 혼자가 되었을까? 왜 아무도 없을까? 왜 자신은 존중받지 못하는가?’ 그의 이상과 미래는 시간과 현실 앞에서 지나간 과거로만 존재하는 그는 완벽하게 패배한 인간이었다. 그러함에도 살아야 한다는 게 비굴하고 비참하게 느껴지게 할 뿐이다.


산티아고는 과거 영광스러운 어부였지만 현재는 변명할 수 없는 노구가 분명하다. 그렇기에 그의 결핍은 늙음으로 얻게 된 무능력과 외톨이라는 열등감이다. 그럼에도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84일간이나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기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허탕이었다. 때문에 소년 마놀린의 부모는 마놀린마저 그에게서 분리시켜버렸다. 소년이 실패를 배우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는 더욱 고립되었지만 물고기 잡는 일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는 40일 동안 끈질기게 바다를 항해했다. 마침내 그에게 청새치가 출연했다. 이것은 다시 한 번 능력 있는 어부로서 돌아갈 수 있는 기회였다. 힘든 싸움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가 살아가기 위한 목표였다. 그 순간에는 다른 사람들의 인정이나 평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다시 한 번 욕망을 가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노인 산티아고는 외쳤다. 


“그래도 난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견딜 수 있는지 보여줄 거야. 저놈에게 말이야.” 


산티아고는 갈등과 번민 속에서 회피하고 도망치기도 했지만, 좌절에 빠져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지 않아도 노력만으로도 인간의 존엄이 무엇인지를 충분하게 보여준 것이다. 처절한 투쟁은 무기력한 자신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고,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므로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 않는다.”라는 산티아고의 말처럼, 스스로를 존중하며 성숙한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운명에 맞서 싸움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소년 마놀린은 노인의 경험보다 노인의 삶에 대한 태도를 존경했을 것이다. 노인은 그만큼 위대했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 역시 헤밍웨이처럼 건강이 좋지 못했다. 1928년, 아르헨티나 중산층의 가정에서 미숙아로 태어난 그는 평생을 천식이라는 난치병으로 힘들게 보냈다. 그의 가족이 치카스 산악지방, 인디오가 거주하는 알타가르시아로 이사 간 것도 그의 천식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정착한 마을에서 어린 게바라는 충격적인 경험을 한다. 마을에서 사귄 친구의 집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한 칸짜리 오두막에서 가족 일곱 명이 살고 있었다. 심지어 변변한 이불조차 없어 신문이나 넝마조각으로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그 모습에 놀란 게바라는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사람들이 왜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지 따지듯 물었다. 가난과 불공정에 대한 의문이 생긴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게바라에게 실제 가난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에 맞서 싸워야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이것이 게바라가 경험한 첫 번째 정치적 대화였다.


게바라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던 아버지는 사회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 당시 자신의 조국 스페인에서 발생했던 내전에 대응하는 그의 태도에서 잘 들어난다. 스페인 공화정에 불만을 품은 프랑코 장군 세력이 나치와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고 내전으로 이어진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이를 불법적인 것으로 보았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뿐만 아니라 쿠데타를 반대하며 공화정부를 지지하는 후원회를 조직할 정도였다. 점차 게바라의 집은 민중의 집으로 바뀌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굶주린 게바라의 친구들이나 광부의 아이들, 호텔 노동자의 아이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헤밍웨이 역시 스페인 내전에 대해 유사한 입장과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헤밍웨이도 게바라의 아버지처럼 단순한 비판에 그치지 않았다. 직접 종군기자가 되어 전쟁의 한복판으로 뛰어 들었던 것이다. 참혹한 전쟁 상황을 세상에 알리고, 이 불합리한 쿠데다 시도에 자신의 조국 미국이 스페인 공화정을 도와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전쟁에서 헤밍웨이는 포탄 파편을 피하지 못했고 큰 부상을 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전쟁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을 그만두지 않을 정도로 정의감이 높았다. 


지식인으로서 체 게바라와 헤밍웨이는 모두 사회 참여에 적극적이었다. 게바라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었고, 헤밍웨이는 전체주의를 비판하며 자유주의적 세계관을 구축하였다. 두 사람 모두 개인과 사회적 결핍이라는 주제에 집중하였으나, 그 접근 방식은 서로 달랐다.


헤밍웨이는 개인의 결핍을 중심으로 이를 극복하는 방안에 주력하였다. 그의 작품들에서 주인공이 개인적인 문제와 직면하며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도 이를 반영한다. 반면 게바라는 사회적 결핍에 더욱 초점을 맞추었다. 물론 첫 시작은 아버지의 영향이었지만 그 후 자신만의 독특한 경험을 통해 확신하게 되었다. 때문에 게바라는 개인의 문제가 사회 구조에서 비롯된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개인의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게바라가 사회적 결핍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그의 특수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린 시절의 경험뿐만 아니라 성장 후 의대에 진학 한 후 본격화 되었다. 게바라는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와 함께 아르헨티나에서 칠레까지 이르는 여행을 계획했다. 여전히 천식환자이고 의사 면허 시험을 앞두고 있어 가족들은 이 여행을 반대했지만, 그의 결심은 굳건했다. 


당시 남미는 빠른 경제 발전을 이루었지만, 빈부 격차만 커져 갔으며, 개인의 자유는 무시되거나 억압받는 것이 일상이었다.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시기였다. 이는 한 국가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남미라는 거대한 지역 전체에서 마치 유행처럼 발생하는 일이었다. 이것이 게바라가 살고 있는 남미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불만만을 가질 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의사 면허를 따는 것 외에는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냥 현실을 외면하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그의 두 번째 남미여행이 시작되었다. 이 여행은 그의 인생에 급격한 전환점이 된다. 여행 중간 과테말라에 도착한 게바라가 페루 출신의 진보적 지식인 일다 가데아 아코스테(Hilda Gadea Acosta)를 만났기 때문이다. 일다는 1948년 페루의 군사 쿠데타에 저항하다가 목숨이 위태로워져 과테말라로 망명한 상태였다. 게바라는 일다를 통해 폭넓은 정치적인 활동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이는 호감으로 이어져 마침에 결혼하게 되었다. 사실상 그의 여행이 과테말라에서 끝나게 된 이유였다. 그러나 신혼의 단꿈도 잠시 과테말라에서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체 게바라가 혁명가가 되는 과정에서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19세기 초 과테말라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여전히 엘리트 소수에 의한 지배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식민지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봉건적 사회 질서였다. 19세기 후반에 과테말라는 농업 수출경제가 호황을 맞기 시작했음에도, 국민의 삶은 오히려 악화되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이유도 비교적 선명했다. 농산물 수출이 확대될수록 토지소유권이 권력자나 자본가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농민들은 소규모 토지마저 빼앗기고 임금노동자로 전락하게 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인구의 3분의 2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던 과테말라에서 이러한 변화는 국민의 삶을 더욱 궁핍하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참다못한 국민들은 마침내 저항을 시작하였고, 부조리한 권력을 몰아냈다. 그 후 과테말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선거를 통해 정부를 선출했는데 그 첫 번째가 개혁 성향의 아레발로 정부였다. 사회가 제자리를 찾는 듯 보였다. 아레발로 정부로부터 권력을 이양 받은 아르벤스 정부도 마찬가지로 개혁적 성향이었다. 그렇기에 급진적인 정책 변화는 계속될 수 있었다.


특히 이 정부가 추진했던 정책은 사용되지 않는 토지를 정부가 수용하는 방식의 토지개혁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땅의 소유권을 두고 대지주와 소작농 사이의 대립은 과열되었고, 때때로 폭력사태까지 발생하며 사회는 급격히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과테말라 정부는 미국의 유나이티드 프루트 회사가 소유한 토지까지 수용하려 했으며, 이에 대한 보상금으로 약 62만 달러를 제안했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는 대신 약 1,585만 달러를 요구했고,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 일로 과테말라와 미국의 갈등을 증폭되기 시작했었다. 1954년, 참다못한 미국은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 대령의 반정부군을 지원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었다. 쿠데타는 성공했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르벤스 정부는 축출되고 말았다. 


쿠데타가 발생했던 시점에 과테말라에 머물고 있었던 체 게바라와 그의 아내 일다는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국민이 선택한 정부가 정당한 정책을 펼치고 있었음에도, 외부 세력인 미국이 불법적인 쿠데타세력을 지원하여 정권을 찬탈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을 갖는 그들에게 쿠데타에 성공한 군부는 호의적일 수 없었다. 급기야 게바라의 암살 계획까지 세워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게바라는 가족과 함께 멕시코로 망명하게 되었다. 이 망명으로 게바라는 멕시코에서 쿠바 출신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당시 카스트로 역시 쿠바혁명을 추진하다 실패해 멕시코로 망명한 상태였다. 처한 상황과 이념적 지향이 유사했던 이들은 쉽게 의기투합했고 쿠바혁명에 함께하기로 했다. 이후 게바라와 카스트로는 함께 쿠바로 넘어가 무장 게릴라로서 투쟁에 합류했으며 1959년에 쿠바의 바티스타 독재 정권을 전복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게바라는 쿠바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고, 1967년 볼리비아의 해방을 위한 혁명에 참여하여 전투 중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헤밍웨이와 체 게바라의 삶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안타까움을 제공한다. 그들의 삶에는 인간의 고통과 한계,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과 고뇌, 치열함이 담겨 있지만 행복한 결말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체 게바라의 성공이 헤밍웨이의 비극으로 이어졌음도 분명하다. 이처럼 우리의 삶도 누군가의 성공이 또 다른 이의 비극이 될 수 있고, 한 번의 성공이 영원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헤밍웨이와 체 게바라의 삶에서 나타나듯 결과가 다소 비극적이더라도 반드시 패배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 하면 그들 모두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넘어서까지 영향을 끼치는 사람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는 문학과 문화에, 체 게바라는 정치와 사회 혁명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는 그들의 성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과 그 과정에서 어려움을 극복하려 했던 노력들과 목표 자체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쿠바는 그들을 기억하고 또 그들의 삶을 추앙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열등감에 패배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다. 스스로를 존엄하게 여기려, 용기를 냈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 애썼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에게 "스스로 자존감을 가져라" "너를 패배시키는 건 너 자신이다. 아무도 너를 패배시키지 못한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자유롭고 존엄한 인간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직면하고, 그로 인한 좌절과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의지를 가지는 것이 살아가는 힘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 존재다. 우리의 부족함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의지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결과가 비록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아도, 그것이 나의 삶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나의 노력이 그 자체로 존엄하며, 그것이 극복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는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최종 목표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결국 그것은 개인마다, 문화마다, 시대마다 다르겠지만 두 인물이 보여준 것처럼 의지와 노력 그리고 자신의 이상을 위해 싸우는 것 자체가 가치 있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존엄성은 우리의 노력을 헛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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