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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Sep 11. 2023

반드시 살아남으라

살아남기 #4

우리는 왜 무기력에 빠질까? 대체로 우리는 경쟁이 치열한 사회적 구조에서 살아간다. 이로 인해 높은 수준의 성과를 지속적으로 요구받는다. 만일 성과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패배감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발생한다. 자신의 능력이나 가치를 의심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사회적 격차나 불평등과 같은 실체적 차별이 발생한다. 이는 경제적 상태, 교육 수준 등이 정해져 기회조차 차별되는 구조적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다른 이와의 관계에서 많은 것을 얻지만 주변에 지지할 수 있는 사람이나 집단이 부족하다면, 개인은 사회적으로 고립된다. 따라서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 이것이 우리가 느끼는 무기력이다. 이처럼 무기력은 특정한 상태에서 발현되는 제한된 감정이 아니다. 수많은 실패와 좌절의 경험이 우리의 생각에 불가능의 확신을 심어주며, 삶의 태도에까지 영향을 끼칠 때 완성되기 때문이다.

 

1967년에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은 '학습된 무기력'에 대한 실험을 진행했다. 세 실험군에 속한 개들에게 서로 다른 환경을 제공하고 전기충격을 가했을 때 나타나는 반응을 관찰하는 것이다. 첫 번째 실험군의 개에게는 전기충격을 가했을 때 코로 밀어낼 수 있는 장치를 달아 도피할 수 있게 만들었다. 두 번째 실험군의 개에게는 전기 충격에 대한 도피나 회피가 불가능하게 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실험군에는 전기 충격의 강도와 시간이 동일하게 적용했다. 그러나 세 번째 실험군에는 아무런 자극도 주지 않고 그저 가두어만 두었다.


1차 실험은 반복적으로 전기 충격을 가하고 반응을 관찰하는 것이고, 2차 실험에서는 탈출이 가능한 환경으로 바꾸어, 다시 전기 충격을 가했을 때  개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첫 번째와 세 번째 실험군의 개들만 탈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도피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학습한 두 번째 실험군의 개들은 탈출을 포기했다.  


이 실험으로 억압적 환경에서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경우 탈출에 실패한 개들은 무기력을 학습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두 번째 실험군의 개처럼 억압적 한경이 제공되지 않았음에도 전기충격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대로 수용했다는 점은 무기력이 학습되어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는 동물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 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중노동에 시달리며 탈출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탈출에 실패했고, 일부는 총살까지 당해야 했다. 이런 상황을 목격한 다른 수감자들은 자신들이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탈출을 포기했다. 문제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무기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가정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문화, 경제, 환경, 가치관 등의 엄격한 전통과 체계적 질서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체계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지만, 동시에 권력과 권위에 의한 억압적인 환경을 구성하기도 한다.


따라서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은 이러한 권력 구조에 의존하게 되며, 명령과 복종의 경험을 통해 생활하게 된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주인의 삶을 살아가며, 권력이 없는 사람들은 종속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는 지배자가 아닌 피지배자, 주인공이 아닌 주변인이 되는 삶을 강요받는 삶이다. 그렇게 우리는 자주 무기력을 학습하고 있다.


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Pierre Clastres)는 “인간에게는 복종의 욕망이 존재한다. 그 욕망이 실현되도록 방치하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재앙의 시작이며 비극적 사건이다. 서로가 서로를 비참하게 파괴하고, 사회가 가 건강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자유와 평등을 파괴하는 복종을 향한 욕망이 실현되지 않도록, 이 욕망을 방해하는 끊임없는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인간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의지하고 싶은 욕망으로 인해 권위에 복종하고 억압을 받아들이곤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재앙의 시작이었다. 때문에 복종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방해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클라스트르의 말처럼 인간에게는 복종의 욕망이 있을 수 있지만 자유의지도 있다. 억압을 당하고 그래서 무기력을 학습한다고 해서 반드시 무능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해 억압에 맞서 포기하지 않는 노력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실행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 갈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억압적 환경이 때론 삶의 동기로 승화될 수도 있는 것이다.

1982년 2월 18일 부에노스아이레스 오페라극장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1978년 군부정권을 피해 스페인으로 망명한 가수 하이디 메르세데스 소사(Haydée Mercedes Sosa)의 목숨을 건 귀국공연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소사는 1935년 아르헨티나의 시골 마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노래에 재능이 있었다. 그녀가 15세 되던 해 친구와 함께 놀러간 라디오 방송국에서 우연히 프로듀서의 눈에 띄어 가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소사의 가수활동을 반대했다. 여성이 노래하는 일을 교양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가부장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 소사는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없었다. 무대에 설 때마다 공포를 느꼈고, 그로인해 대중들로부터 인정받지도 못했다.


가수로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궁핍했다. 가정부 생활을 하며 생계를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에게 버림받고 이혼하고 말았다. 그녀의 인생은 불행과 불행의 연속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1965년 남미 코르도바의 포크음악 페스티벌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마침내 대중의 관심을 얻으며 가수로서 성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르헨티나의 정치상황이 급격히 악화되더니 1976년 군사쿠데타가 발생했다. 그렇게 아르헨티나는 군부독재의 억압적 시대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탄압받으며 때론 목숨을 잃었다. 소사에게도 이는 충격이었다. 그녀는 이를 외면하지 않았다. 군부에 저항하며 아르헨티나의 자유를 노래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당연히 그녀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높아졌다. 그러나 그녀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군부는 불편하게 생각했다. 


참다못한 군부는 1978년 10월 라플라타 시 공연 도중 300여명의 청중과 함께 소사를 연행하면서 그녀를 본격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 후 소사는 더 이상 아르헨티나에서 활동하기 어려웠고 스페인으로 망명해야 했다. 


낯선 곳에서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다행히 유럽의 대중들은 그녀의 음악에 매료되었고, 가수로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며 엄청난 명성과 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정치적 자유와 물질적 풍요가 보장되는 삶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아르헨티나에 대한 그리움과 군부독재에서 시름하는 사람들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 군부에 저항했던 3만 명 이상의 아르헨티나 시민들이 사망하거나 실종하는 일이 벌어지는 등 두려운 삶이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국가가 국민을 살해했던 시대였다. 1982년 그녀가 망명지의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을 결심한 이유였다.


소사에게 나타난 사회적 상황과 개인적인 시련은 분명 고통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녀는 자신보다 힘없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두었고 때론 함께하려 했다. 고통을 나누는 삶이 그녀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소사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함께 아파했던 따듯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군부의 방해를 뚫고 소사가 부른 첫 노래는 ‘그라시아스 아 라비다(Gracias a la vida)'라는 곡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운명에 감사한다는 의미다. 그 순간 공연장은 붉은색 카네이션 꽃이 비처럼 뿌려졌다. 그것은 그녀에 대한 아르헨티나 시민들의 존경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고통스러운 운명조차 감사함으로 승화했던 소사는 2009년 10월 소사는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사망했다. 그럼에도 오늘 날 남미의 사람들은 그녀를 ‘라틴아메리카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거대한 기억이 되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부족함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인 부분이든 사회적인 부분이든, 모두가 다루기 어려운 상어 떼와 마주하게 된다. 이런 상황들은 자신을 압박하고 지치게 하며, 때론 고통스럽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열등감에 휩싸이고 콤플렉스에 빠지게 되며, 무기력함을 느끼고 삶의 의욕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약물에 의존하여 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때문에 우리는 순응할 것인지, 아니면 저항할 것인지 언제나 시험받는다. 하지만 질서나 규범과 같은 억압에 무조건 순응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미래를 조성하려 하는지, 그리고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는 것은 충분히 정당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실증적 역사가 가르쳐준 '포기하지 말라' '결국 이길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개인은 연약하고 때때로 힘이 부족하다. 그러나 삶은 절대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불행이나 행복이나 모두 자신뿐 아니라 외부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적 부정으로 인한 좌절감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적극적인 의지를 유지하려 노력할 수 있는 기회도 열려있다. 왜냐하면 사회에서 고통 받는 개인의 옆에는 반드시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기회는 찾아올 것이다. 그 때를 위해 인내하며 도전을 계속해야 한다. 이것이 고립되고 억압받는 삶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닌 것은 아니다'라는 마음으로 세상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현재의 우리가 가진 힘이 미약하기 때문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참고 기다려야 한다. 언젠가는 반드시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큰 힘을 발휘할 때, 그것은 더욱 가능해질 것이다. 그렇기에 반드시 살아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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