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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Sep 11. 2023

난폭하게 굴지 말고 힙하게

살아남기 #5

1970년대 미국 뉴욕의 브롱크스 지역, 가난한 흑인과 라틴계 청소년들 사이에서 힙합이 탄생했다. 힙합은 “엉덩이를 흔들다”라는 유쾌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실은 흑인의 생활양식을 기반으로 백인 주류 문화에 대한 반발의 성격이 더 강하다. 표현방식도 음악, 그라피티 아트, 래핑, 디제잉 등 다양한 예술 형태를 포괄할 정도로 다채롭다. 그렇기에 하나의 장르라기보다는 음악, 댄스, 미술 등이 복잡하게 섞여있는 종합적인 문화현상이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의 역사에서 창조된 유일한 문화라고 불리고도 있다. 


미국은 이주와 노예무역으로 시작한 불과 300년 남짓의 역사다. 유럽으로부터 이주한 사람들은 원주민이었던 인디언을 쫒아내 그 자리를 차지했고, 더 부유해지기 위해 아프리카 등지에서 납치된 흑인들을 노예로 소비했다. 때문에 미국의 흑인들은 사회에 대한 깊은 모멸감, 분노, 원망, 응어리와 같은 감정들이 축적되었다. 노예제도가 사라지고 해방된 후에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경제적 약자의 위치였다.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 문제가 아니라 성실과 근면하지 않다는 흑인에 대한 오래된 사회적 관습과 인식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흑인들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아무런 근거가 없거나 매우 예외적인 상황에서 나타나는 특수한 것이었음에도 그것을 마치 일반적인 모습으로 생각했다. 무의식적 편견이었지만 최소한 백인들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다. 


미국사회에서 흑인의 라이프 스타일이 무시하는 현상은 하나의 문화였다. 겉으로는 인종차별의 부당함을 비판했지만 내면에는 차별적인 인식을 정당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인들이 인종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흑인에 대한 게으름, 약한  의지, 약물중독, 범죄자라는 사회적 인식이 만들어질 수 없다. 그러나 교묘하게 숨겨져 흑인의 성공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물론 흑인들도 이를 모르지 않았지만 딱히 해결할 능력이 없어 애써 외면하거나 인내할 뿐이었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달랐다. 그들은 미국사회가 갖는 인종에 대한 잘못된 인식 그리고 일상적인 부조리에 맞서기 시작했다. 그것이 힙합의 시작이다. 힙합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자신들의 삶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그렇기에 어떤 면으로는 미국 사회의 고질적인 인종차별이 힙합이라는 위대한 문화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힙합은 백인 주류사회의 본질을 폭로하고 차별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그렇기에 힙합에는 인간의 평등과 자유라는 해방의 서사와 조롱과 해학이 서려있다.


사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흑인들에게 백인 주류사회의 전통적인 규범이나 가치관은 실익이 없었다. 오히려 그러한 가치관이 가난과 차별의 원인이었다. 따라서 힙합은 자연스럽게 무시, 차별, 편견에 맞서 자유와 해방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그런데도 힙합은 폭력적이지 않은 놀이와 즐거움이 섞여있는 문화적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다수의 지지를 얻기에 충분했다. 평화적이고 유쾌한 표현으로 인해 진입장벽이 낮았기 때문이다. 특히 제도의 틀 밖으로 밀려나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 흑인, 라틴, 아시안 혹은 주류백인에 편입하지 못한 백인들에게 있어 힙합은 자유가 보장되는 해방공간이 되었다.


만약 힙합이 원망이나 피해의 구제를 위한 복수의 형식을 취했다면 이렇게 까지 폭넓은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평화적이고 유쾌한 문화였으므로 가능했을 것이다. 표현의 자유와 개성의 추구가 만든 시너지였다. 


뮤지션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금목걸이를 흔들며 건들거린다거나, 현금다발을 허공에 뿌려대는 행위를 연출하는 등 파격적인 실험을 했다. 가끔 구찌와 같은 명품을 입고, 명품 홍보 대사처럼 행동하긴 했지만, 때론 가짜명품을 과감하게 선보이는 페이크 패션(fake fashion)을 통해 명품을 조롱하거나 이를 신봉하는 소비자들에게 반격하기도 했다. 그들은 가짜 아이템을 입으면서도 자신이 진정한 명품이라는 당당함을 보여주었다. 물질에 대해 통속적인 성격을 갖으면서도 또한 초월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명품도 좋고, 페이크 패션도 충분히 좋을 수 있음을 몸소 증명한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해설이나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으려 했다. 그러함에도 힙합이 갖는 속성, 인간의 편견과 억압에 대한 저항의 태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단지. 그 누구도 그것을 올바름으로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자신은 단지 메시지를 던질 뿐 대중은 각자의 기준과 방식대로 느끼면 충분했다. 


이것은 때때로 메시지의 일관성이 결여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자존감을 기반으로 하는 자신감을 상징하는 것이다. 표현하는 방식이 사회적 기준에서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전통이나 권위에 복종하거나 통제 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힙합은 자기만족의 한계를 뛰어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더욱 확대되었다. 일부 뮤지션 중에는 과거 실제로 마약이나 강도와 같은 범죄를 저지른 이력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과거를 감추기보다 드러내려했다. 사회적 윤리나 도덕적 기준에 따라 죄책감을 느끼거나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순된 구조 속에서 특별한 경험이 가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뮤지션으로서 인정받았다. 


그들이 랩을 통해 욕설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공격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태도 때문이다. 종종 이러한 행위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수준을 넘어 위험을 유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뻔뻔함은 힙합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고, 옳고 그름의 가치 체계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측면이 있었다.


그렇기에 힙합을 이해함에 있어 일반적 상식이나 도덕적 기준과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을 통해 자유를 확대하는 힙합의 독특한 성질 때문이다. 이는 어떤 의미로는 전통위에서 전통을 대담하게 해체하는 용기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은 실수하고 실패하며, 때로는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힙합은 그러한 결과에 굴복하지 않고 과정으로서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는 운동을 보여준다. 그래서 탈 보편화 또는 개인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과거와 미래를, 관성과 변화를 동시에 추구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도 힙합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신세대와 기성세대 사이의 사회적 갈등에서 신세대의 태도는 힙합이 추구하는 가치와 유사한 면을 보여준다. 대체로 신세대는 기성세대에 대해 '내로남불'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이는 기성세대가 '관행'을 이유로 불공정성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적인 태도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며, 이러한 인식에는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한 기회 박탈의 분노가 내재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기성세대와 신세대 간의 관계는 주로 일방적이었다. 경험과 전문 지식을 가진 기성세대가 훈육의 역할을 하고, 신세대는 그들로부터 배우며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방식이었다. 사회의 필요에 따라 분명한 위치와 역할이 정해져 있어 비판조차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이러한 지식 전달 체계가 크게 변하게 된다. 인터넷 검색이나 AI 등의 도입으로 기성세대에게 독점되었던 특수한 경험과 정보를 언제든지 충분하게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이에 따라 명령과 복종의 일방적 관계는 더 이상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오히려 동등한 입장에서의 경쟁 관계가 필요했다. 


그러나 사회는 관성이라는 특성이 있고 여전히 공정한 경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기성세대가 독점하고 있었던 사회적 부와 일자리는 신세대에게 제공되지 않았다. 이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거나 나누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들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권위를 앞세우며 비윤리적인 행동을 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세대가 설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기성세대는 신세대의 시선에서선 기만적인 집단이 라 할 수 있다.


기회의 공정도 부와 일자리의 분배도 없기에 신세대는 결국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성세대와의 단절을 선택하며, 플렉스(flex)와 같은 새로운 문화를 추구했다. 플렉스는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경험과 변화를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경제적 불확실성의 증가, 고용 시장의 불안정, 기술의 변화 등으로 전통적인 질서에서 꿈을 펼치기 어려워진 신세대는 개인의 성장과 경험에 더욱 주목하게된 것이다.


그래서 플렉스는 돈, 부, 권력, 인기 등으로 삶을 전시하는 일종의 자기만족이라고 할 수 있다. 기성세대는 이를 물질주의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플렉스는 개인의 삶에 대한 선택과 자율성을 상징하므로 단순히 물질주의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는 권위와 억압적인 사회 구조에 대한 반발이라 해야 적절할 것이다.

힙합 오디션 쇼 '쇼미더머니(Show Me The Money)'라는 타이틀에서 보여지 듯 마치 돈을 추구하는 것처럼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참여하는 래퍼들의 메시지는 대체로 돈 자체보다는 돈에 대한 태도에 무게가 실려 있다. 이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본에 종속된 사회 구조를 조롱하거나 비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신세대의 이러한 문화를 단순히 물질주의에 묶어서 설명하는 것은 과도하게 단순화되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 신세대는 종종 "당신을 규정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것이 당신이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인정하라는 요청이다. 


그러니 돈이 없던 과거에서 벗어나 돈을 자유롭게 쓰는 모습,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시계나 고급차를 구매하여 자랑하는 퍼포먼스는 역설과 비틀기의 일종일 수 있다. 이는 돈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 아니라, 돈이란 결국 그저 물건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해학이며, 돈의 쓰임새에 대한 사회적 비평이다.

실제 스윙스라는 유명 랩퍼가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수천만 원짜리 명품 손목시계가 훼손되는 사건이 있었다. 상대 진행자가 스윙스의 시계를 술잔에 빠뜨린 것이었다. 장난인 측면이 있었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는 불쾌를 넘어 재산상의 피해를 끼치는 것이었다. 다행이도 시계는 고장 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시계가 아니라 이 황당한 사건의 피해당사자인 스윙스의 태도에 있다. 그는 매우 쿨하게 충분히 코미디의 영역에서 할 수 있을 법한 일이라며 당황했지만 충분히 유쾌했다는 견해를 밝힌 것이다. 문제는 유튜브 방송을 제작했던 제작진의 태도였다. 방송을 설명하는 공간에 스윙스에 대한 인격적 모독으로 해석될만한 글을 올려놓았던 것이다. 그 후 논란은 타인에 대한 태도의 문제로 옮겨지게 된다. 더 이상 시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수천만 원을 호가한다는 자극적인 말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물질주의와 전혀 상관없이 인간이 수천 년 동안 고민해왔던 윤리적 논란의 연장이 되었다.

어떤 사람이 물질에 초연할 수 있을까? 당연히 스윙스도 자신의 명품시계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그는 힙하게도 인간의 태도와 가치에 대해 접근한 것이다. 스윙스는 그 어떤 변명도 허용되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힙합을 보여주었다.


오래전 유명 뮤지션 제시가 '언프리티랩스타(Unpretty Rapstar)'에 출연하여 "네가 뭔데 날 판단해?"라고 외친 적이 있다. 제시의 이 외침을 기성세대들은 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살아온 방식으로 타인을 함루로 평가하지 말라는 경고이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는 종종 누군가를 판단할 때 관성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관성을 과감하게 꼬집고 성찰을 촉구하는 제시의 메시지는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진다. 신세대는 이런 방식으로 기성세대에게 분명히 자신의 입장과 가치를 이야기 하고 있다. 그 목소리는 일관되게도 누군가에게 규정되고 자유를 잃느니 차라리 불편한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돈을 과시하거나 잘난 체 하는 사람을 비난하지만 힙합 뮤지션들과 신세대는 그러한 행위를 거부하지 않는다. 이러한 잘난 체라도 자신의 메시지에 충실하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말하는 자유가 있어야 하고, 그러한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힙합 뮤지션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가사에 녹여내며, 상처를 숨기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이들의 행위는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가식이나 낚시성 장사라기보다는 복잡한 감정의 표현일 수 있다.


반대로, 가식이 발견되는 순간 진심을 중요시 여기는 신세대는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신세대가 플렉스 문화를 즐기는 것도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고가의 명품을 구매하면서도, 생필품은 가성비를 따지며 구매하고, 그것을 숨기지도 않는다. 명품은 자신을 위한 단순한 선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플렉스를 즐기는 방법도 명품뿐만 아니라 여행과 같은 다양한 형식의 비물질적인 방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따라서 신세대의 이러한 양면적 소비는 단순한 허세라고 보기 어렵다. 이들은 스스로 만족을 찾고 즐기기 위한 선택과 책임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이 원하는 물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기 위해 지출을 줄이고 절약하는 것은 합리적 소비 행태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런 신세대만의 독특한 소비 행위는 진정성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기성세대의 가식에 대응하기 위해 자신들만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방식인 것이다.


힙합씬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른바 디스전을 통해서도 신세대가 생각하는 진정성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힙합에서 '디스'는 '디스리스펙트(Disrespect, 무례)'의 줄임말로, 언뜻 타인에 대한 비방이나 비난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통과 질서로 인한 억압에 대한 반발심과 이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강하다. 그렇기에 돈, 가치관, 사회적 규범이 디스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인간의 본질적 권리인 자유를 지켜내고자 하는 것이다.


2013년 8월, 미국에서 '컨트롤 대전(Control War)'이라는 디스전이 발생했다. 래퍼 빅션(Big Sean)이 '컨트롤(Control)'이라는 신곡을 발표했다. 이곡에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와 제이 일렉트로니카(Jay Electronica)가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발단은 켄드릭 라마의 피처링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의 힙합이 트렌드나 패션을 따르면서 경쟁력을 잃었다고 생각한 라마는 피처링을 통해 뮤지션들이 부와 명예를 추구하고 사치스럽게 살아가는 것을 힙합인 것처럼 말한다고 비판했다. 비판 대상도 놀라울 정도였다. 당시 미국 힙합씬을 주름잡는 빅 크릿(Big K.R.I.T.), 맥 밀러(Mac Miller), 제이콜(J.Cole), 심지어는 에미넴(Eminem)과 나스(Nas) 같은 레전드까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라마의 디스는 사실상 미국의 힙합씬 전체를 도발하는 것과 같았다. 그 결과, 힙합씬에서 활동하는 23명의 래퍼가 켄드릭 라마의 비판에 대응했다. 디스전이 발발한 것이다. 그들의 메시지는 자본의 속성을 비판하고 뮤지션의 태도를 꼬집는 성찰로 가득했다. 그래서 미국의 래퍼들은 이 '컨트롤 대전'을 통해 미국 힙합씬은 더 발전하고 도약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디스란 양면적인 속성이 있다. 얼마든지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상처 주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라 표현해도 형식적으로 디스는 타인에 대한 비난 그자체이기 때문에 타인이 쌓아올린 가치를 얼마든지 왜곡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사적 이익을 채우는 도구로 이용할 수도 있다. 

물론 개인적인 담론이라도 공론의 장에서 충분히 소통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힙합의 형식을 빌려서 타인을 부정하고 상처 주는 공격은 힙합적이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이런 방식의 디스는 사실상 힙합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 이는 그동안 힙합이 강자의 목소리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의 절박한 외침을 중요시 여겨왔다는 그 진정성에 대한 명백한 부정이다.


진정성 없는 힙합이라니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디스가 개인의 이익이나 상처를 주는 도구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은 힙합의 상업화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힙합의 본질인 '자유와 저항'이 상업이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성공하고 싶은 마음에 얼마든지 ‘눈에 띄는 디스’를 통해 타인을 비방하며 인지도를 높인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인지도를 높여 얻는 이익이 무엇일까? 그것은 긴 설명이 필요 없이 자신의 부와 유명세에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경우 최소한 힙합이 요구하는 자신에게 솔직한 것, 그러니까 진정성이 있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행위는 그 자체로 힙합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단순히 팔리는 상품, 혹은 홍보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 힙합은 상당한 수준의 사회적 지위를 얻었다. 또한 그로인해 성공의 수단으로도 여겨지고 있다. 그만큼 건실한 시장을 확보했다는 것이지만 힙합에서 진정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만일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고 힙합이 단지 음악의 한 장르로서만 소비된 된다면, 그렇다면 힙합은 소비자가 기대하는 자본시장의 세련된 문화상품이라 할 만하다. 부와 명예가 힙합의 정신을 대체하는 것이다. 


이런 흐름에서는 새로운 시도나 도전적인 퍼포먼스보다는 익숙한 형식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면 더 이상 힙합은 최소한 한국사회에서는 자유와 저항의 상징을 맡을 수 없을 것이다. 힙합이 그동안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것은 치기어린 반발심도 아니고 시장에서의 지배력도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자유와 그 자유가 추구하는 지향 그리고 변화 그 자체에 대한 진정성 있는 요구였다. 그래서 우리에게 힙합은 단순한 트렌디한 상품일 수 없다. 


누구에게나 돈과 장래는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가장 우선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기성세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자신의 완고함, 편견, 오만으로 쌓인 권위가 삶의 방향이 되었기 때문이다. 권위에 의존해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오래된 가치관이다. 


그래서 힙합은 전통적 규범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는 것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힙합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패기와 역설의 새로운 언어였다. 하지만 모든 변화의 과정에서 나타나듯이 새로움은 언제나 낡은 것으로 변한다. 힙합 역시 그 기로에 서게 되었다. 우리 자신도 예외일 수는 없다.


최소한 힙합에게 있어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해왔던 방식대로, 합리적이고 점진적으로, 안전하게, 변화 없는 현상 유지”와 같은 말은 금지된 언어다. 기성세대가 추구하는 자기변명과 자기기만 그리고 내로남불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힙합이 단순히 음악이나 무대 위의 퍼포먼스를 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이고 또한 진실이며, 자유를 추구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 경우에만 자유와 저항의 상징이 된다. 힙합의 역사와 발전과정에서 나타나 듯 힙합은 언제나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따라서 힙합은 음악의 한 장르가 아닌 우리의 태도이자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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