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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Sep 14. 2023

껍질을 가진 영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의 세계 #1

유니버스(universe)는 ‘우주’ 또는 ‘세계’다. 어원은 라틴어 유니버수스(universus)로 ‘하나’라는 뜻을 가진 단어 우누스(unus)와 ‘둘러싸였다’는 뜻을 가진 베르수스(versus)의 합성어다. ‘하나로 둘러싸인 것’ 또는 ‘전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베르수스(versus)는 ‘분화되다, 반대하다, 대립하다, 비교하다’ 등 다른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 경우 유니버스는 ‘분화된 전체’ 혹은 ‘분화된 세계’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우주(universe)가 근본적으로 다양한 개체들이 상호작용하고 대립하며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주는 변화하는 전체이면서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동적성질을 가진 운동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럼 우리가 말하는 세계란 무엇인가? 우리가 말하는 세계는 흔히 일상에서 경험하는 자신과 가족의 집, 이웃의 동네, 국민이나 민족의 국가와 같은 확장되는 공간을 의미한다. 이를 '경험공간 또는 경험세계'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세계 역시 개인으로 분화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사회라는 전체를 구성한다. 사회에 속한 개인들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생활양식을 축적한다. 그것은 곧 전통이 되고 사회의 안정구조를 완성한다.


우리가 사회에서 경험하는 정치, 종교, 인종의 문제로 분열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또는 새로운 문화와 전통이 융합되는 과정을 생각해보라. 이처럼 사회는 끊임없이 분열과 융합을 반복하며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낸다. 상호작용이 우리의 경험을 만들고 그것이 또한 자신의 완성된 세계를 확장한다. 우리에게 더 넓게 다가오는 인간관계, 정치, 종교, 문화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을 고립과 소외에 두지 않으려는 본성이 있다. 이는 세계의 구조가 자신을 중심으로 결합되거나 융합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실제 변화는 자신을 중심으로 나타난다. 최대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결과인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변화가 두 가지 대립적인 성질의 작용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지키려는 관성이고 다른 하나는 바꾸려는 저항이다. 두 힘은 우리의 상태와 위치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사회에서 두 사람의 이익이 충돌하는 경우 어느 한쪽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수준에서 힘의 균형에 따른 안정구조가 완성된다. 힘이 강한 쪽도 힘이 약한 쪽 모두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의 이익을 확보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대립적인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공정한 분배와는 다른 문제다.


그렇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복잡하고 동적인 세계에서, 사회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통제와 관리의 가능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허락되는 것은 방향의 설정이나 의미의 부여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단지 현상의 변경 혹은 어떤 상태에 대한 입장이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생산되는 에너지의 효율적, 효과적 사용에 있다.


그러나 변화는 반드시 희생을 동반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택함으로서 자신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방해할 수도 있고, 또한 그 선택으로 얻은 이익이 다른 이의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이처럼 희생은 개인이나 집단 심지어 다른 생태계의 유지와 발전의 기반이다. 


그렇기에 모두에게 완벽한 만족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에너지의 효율적, 효과적 사용은 모두에게 완벽한 만족추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이익, 예를 들어 안정과 같은 것을 위해 무엇인가를 희생한다면 그 희생과 교환되는 미래의 가치가 동일한 혹은 동등한 수준에서 적합하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할 뿐이다. 이러한 성찰은 곧잘 우리의 선택에 도움을 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또한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하는지 명확히 해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환경보호를 위해 일정수준의 편의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미래세대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의미 있는 희생이 된다. 또는 세금을 내는 것도 이와 같다. 자신의 소득을 희생하는 것이지만 공공의 이익 예를 들어 교유, 보건, 안정 등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그렇기에 에너지의 효율적, 효과적 사용은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수구, 보수, 중도, 진보, 급진 등과 같은 정치적, 사회적 분류체계가 존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지표를 통해 개인이나 집단이 어떤 가치나 목표에 따라 어떤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지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는 변화의 속도를 파악하고 우리가 처해진 위치를 알수 있다는 것이다.


수구적인 사람들은 전통이 절대 변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진다. 반면 보수적인 사람들은 전통을 중요시하면서도 변화를 점진적으로 인정한다. 진보적인 사람들은 변화를 추구하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 급진주의자들은 변화를 중시하며 전통을 무시한다. 중도는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선택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매우 미세하고 협소한 위치만 있어 실제로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이처럼 사회적 역사적 위치는 속도와 적응의 관계에서 구체화된다. 


어떤 경우든, 전통을 절대적으로 추종하는 사회라 해도, 모든 변화를 부정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여성은 치마, 남성은 바지'와 같은 상징화된 인식, '어른과 술을 먹을 때는 고개를 돌려야 한다'는 문화적 예절, '호주제'와 같은 법적 제도 등 상황과 요구에 따라 변화하고 조정되어왔다.


여성과 남성의 의복 차이는 깊이 뿌리박힌 문화적 전통으로 여겨져 왔다. 실제 1920년대 유럽에서는 여성이 바지를 착용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통상적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여성이 바지를 입는 것은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패션계에서는 남성이 치마를 입는 트렌드도 등장하고 있다. 젠더리스(genderless), 젠더뉴트럴(gender neutral), 젠더플루이드(gender fluid), 젠더인클루시브(gender inclusive), 젠더프리(gender free) 등의 용어들은 성별의 경계를 허물고 개인이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정의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직장의 상사나 선배와의 술자리 예절도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과거에는 술잔을 두 손으로 들거나, 술을 따를 때 상표를 가리는 것과 같은 세세한 예의가 필수로 간주되었으나,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형식에 너무 얽매이지 않는다. 오히려 과도한 예의를 강요하는 경우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호주제도 논란 끝에, 2005년 3월에 국회에서 민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2008년 1월에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우리 사회는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며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모든 변화는 어떤 형태의 희생을 반드시 동반한다. 증기기관차의 탄생을 생각해 보라. 19세기 중반에 증기기관차가 등장한 것은 혁명적이었다. 이것은 에너지를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뛰어난 예였다. 증기의 힘으로 열차를 움직이게 하는 이 기술은 물류와 인구 이동을 한 차원 높여, 산업 혁명을 주도했다. 그러나 이 기술의 발전은 환경적인 비용과 인간 노동의 가치에 대한 문제를 일으켰다. 증기기관차는 대량의 석탄을 쓰고, 그 결과로 대기오염과 기후 변화 문제가 악화했다. 또한 기계화와 자동화는 일자리를 줄이는 등의 사회 문제를 불러왔다.

따라서 기술의 발전도 어떤 형태의 '희생'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희생을 통해 얻은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그 희생을 정당화하는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가치관, 수구, 보수, 중도, 진보, 급진 등이 이런 생각을 통해 형성되고, 이것이 기술의 발전의 속도와 방향을 결정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에너지의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사용이나 기술의 발전은 '진보'나 '효율 증가'를 넘어서, 어떤 희생을 하고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미래의 가치'를 고려해야 하는 문제다. 이것이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발전에 있어 중요한 지점일수 있다. 따라서 미래의 기술을 선택하거나 현재의 기술을 어떻게 쓸지 결정할 때, 그것이 효율적인 에너지 사용에만 국한되지 않고, 더 넓은 사회적, 환경적 문맥에서의 가치를 고려해야 한다.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의 저서 《엔트로피》에 따르면, 기술 발전과 풍요는 엔트로피, 즉 무질서도를 증가시키는 원인이다. 이는 열역학 제2법칙에 기반한 주장으로, 이 법칙은 열이 고온의 물질에서 저온의 물질로 흐르는 것이 비가역적이라는 자연의 법칙을 말한다. 이 법칙에 따르면, 고온 상태와 저온 상태의 결합으로 평균 상태가 형성되면 열은 더 이상 흐르지 않게 되며, 이는 분자의 움직임이 멈추게 되어 열역학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했던 생활 방식과 행동 패턴이 실질적으로 지구상의 유용한 에너지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하거나 소비할 것인지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유한한 자원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결국 열역학적인 '죽음'을 가속화하는 행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반도체 산업은 희토류 채굴 과정에서 환경오염을 일으키며, 화력 발전소는 에너지 생성 과정에서 이산화탄소, 오존, 미세먼지 등을 배출해 환경 문제를 야기한다. 또한, 에너지 생산과 소비로 인해 자원은 빠르게 고갈되고 있다. 대규모 전기 자동차 및 에너지 저장장치의 소비로 인해 리튬, 코발트 등의 자원 고갈 문제는 이미 현실이다.


이런 문제들은 우리가 빠른 속도로 열적 평형 상태로 진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을 사용할수록 궁극적으로 극한의 엔트로피 상태로 이동하는 역설적인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이것이 완전한 의미의 열적 평형상태인 열역학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론적으로 열역학적 죽음이란 현재의 우주에서는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이와 유사한 개념을 상정해 볼 수는 있다. 물질의 죽음이라는 개념이다. 물질의 죽음이란 물질의 원래 가지고 있었던 화학적 구조나 기능을 상실한 상태라고 규정할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해왔던 석탄이라는 에너지 자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석탄은 자연적으로 분해된 유기물이 죽음에 이르러 탄소 찌꺼기로 변환된 물질이다. 더 이상 본래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물질의 죽음은 열역학적 죽음과는 다르게 재활용의 영역이 존재한다. 인간은 기술 발전을 통해 이 석탄에 내재된 에너지를 추출해 사용해왔다. 이것은 엔트로피가 극대화된 상태라고해도 인간이 기술을 통해 에너지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물질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석탄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한 그 석탄마저 연소과정을 통해 대부분의 화학적 에너지가 변환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로 생겨나는 석탄재는 도로건설이나 토목공사 등이나 산업용 원료로 사용될 수 있다. 그래서 물질의 '죽음'이라는 개념은 고유물질의 성질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이지 열역학적 죽음이라고는 할 수 없다. 


2016년에 노르웨이 하르당에르비다 국립공원(Hardangervidda National Park)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벼락에 맞아 순록 323마리가 한꺼번에 죽은 것이다. 생태계에 심각한 교란이 예상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공원 관리자들은 사체를 그대로 두었다. 이 결정은 이례적인 연구 기회를 제공했는데, 4년이 지난 후 노르웨이 대학의 셰인 프랭크 교수는 이 사건이 생태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 연구를 발표했다. 그의 연구 결과는 놀랍게도, 순록의 사체는 독수리, 까마귀, 여우 등 여러 육식 동물의 먹이가 되었고, 이로 인해 곤충이나 작은 동물들이 몰려들어 새의 먹이가 되었으며, 식물이 번성하는 현상으로 이어지며 생태계과거보다 좋은 환경으로 변했다고 보고했다. 


태양은 모든 생명의 원동력이다. 태양에서 일어나는 핵융합 과정은 원자핵이 결합해 더 큰 핵을 만들며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무질서하며 엔트로피를 증가시키지만, 이 무질서한 에너지가 지구로 도달하면 식물들에 의해 포착되어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에너지로 변환된다. 하르당에르비다 국립공원의 사건과 연결되어 새로운 질서를 만든 것이다.


로벨 화학상을 수상한 화학자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은 자연에서 발생하는 '자생적 조직화' 현상에 대해 연구했다. 이는 식물이 태양의 무질서한 에너지를 착취해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것과 유사하다. 프리고진의 연구에 따르면, 자연의 작은 변화들이 고도로 조직된 구조를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도 엔트로피의 원칙을 따르며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끊임없이 소비하며 생성하는 쓰레기는 처음에는 무용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자연이 이를 재활용하고 다시 에너지로 변환하면서 생태계는 우리의 폐기물을 처리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끌어낸다. 이렇게 자연은 끊임없이 변화와 발전을 계속하며 새로운 질서를 창출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물질이 어떤 형상을 가지고 있는 고정된 상태를 보편적인 상태로, 변화가 이어지는 상태를 특수한 상태로 생각한다. 다르게 프리고진은 '있음'이라는 상태를 일시적이며 예외적인 경우로 봤으며, 반면에 '되어감'이라는 비평형 상태를 보편적인 현상으로 인식했다. 형태나 질서와 같은 요소는 '있음'의 상태를 대표하기 때문에 예외적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되어감'은 물질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본질을 보여주므로 보편적인 상태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인류가 만든 모든 질서는 일시적이라는 이것은 삶이 항상 혼란스러운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리고진은 이 혼란스러움이 삶의 본질적인 부분이며, 이 혼란에서 질서가 재창출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의 재창출은 폐쇄계가 아닌 개방계에서만 발생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개방계에서만 가능한 이유는 외부와의 에너지 교환을 통해 엔트로피를 줄이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혼란과 질서 사이의 변화가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예를 들어, 태양과 지구의 관계에서 볼 수 있듯이, 햇빛과 식물은 만나고 결합하여 새로운 질서를 창출한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사건'이라 부르며, 이 '사건'은 우연적인 것이며, 현재 상태에서는 그 변화 과정을 파악할 수 없다.


외부의 시선에서 보면 이 사건들은 다양성을 보여주지만, 그 계 내부에서는 이들은 무질서하며 혼란스럽다. 그러나 이 무질서한 상태는 자기조직화의 과정을 거쳐 결국 소산되고, 유용한 에너지로 다시 활용된다. 따라서 사물의 본성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프리고진은 혼란과 질서, 그리고 엔트로피의 소산과 같은 개념을 통해 어떤 대응을 준비하고 해야 할지를 제시한다.


사회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특정 사회에 난민이 유입될 경우, 이질감과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불안을 완화하기 위해 전통적인 가치가 강하게 고수되곤 한다. 이 때문에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라"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와 같은 속담이 생겨났다. 그러나 난민들은 자신의 문화와 생활 방식을 쉽게 포기하기 힘들다. 그 결과로 갈등과 경쟁이 발생하며, 무질서와 혼란이 도래하게 된다.


변화가 없는 사회는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져 결국 소멸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멸을 방지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는 다양한 요소와 문화가 융합되어야 한다. 이러한 융합은 때로는 기존의 전통을 도전할 수 있으나, 새로운 가치와 시각을 더해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


물리적 관점에서 이런 사회현상을 살펴보면, 폐쇄계는 안전한 평형 상태로, 에너지가 최소 상태에 도달해 엔트로피가 최대인 죽은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개방계에서는 안정적인 평형 상태가 없으며, 에너지가 최대 상태에 있어 생명의 요구가 강하게 나타나는 사회다. 따라서 생존을 위해서는 새로운 참여자를 인정하고 이와 결합하거나 융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통해 각 참여자의 문화와 생활양식이 확산될 수 있다. 다양성은 무질서함을 수반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새로운 변화를 통해 최종적으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난민 등의 유입이 있더라도 전통과 문화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문화와 생활양식을 수용할 준비가 필요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회의 안정성과 다양성을 유지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처럼 전통 사회에서는 이민자나 난민의 증가로 인해 생활양식이 충돌하는 것이 반복되고 지속적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질서는 항상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변화 과정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새로운 문화가 생겨나는 것은, 거시적 합의와 미시적 변화의 지속적인 결합을 통해 가능하다.


자기조직화나 자가발전은 지속적인 변화 과정을 거치며 엔트로피를 줄이고 새로운 형태를 창출하는 것이 분명하다. 구조 내부에서 발생한 무질서를 유용한 자원으로 변환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실제로 이런 변화는 인류의 이동과 함께 흔하게 일어나며, 차이나타운, 코리아타운, 아랍 공동체 등에서 보듯, 각기 독특한 문화 형태를 유지하고 결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요리는 배고픔을 채우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진 지역의 문화적 및 역사적 배경을 반영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짜장면과 짬뽕은 사실 중국의 전통 요리가 아니다. 짜장면은 화교들이 중국의 춘장을 변형해 만든 것이며, 짬뽕은 볶음 요리인 초마면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 또 다른 예로는 돈카츠를 들 수 있다. 돈카츠는 오스트리아의 슈니첼에서 영감을 얻어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처럼, 한 요리가 다른 문화와 접촉하며 새롭게 변화하고, 그 결과로 전혀 다른 요리가 탄생한다.


단지 짜장면과 짬뽕, 돈카츠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세계의 모든 요리들은 그 지역의 생활 습관, 환경, 재료, 기술, 심지어는 정치적 혹은 경제적 변화에 영향을 받아 발전해왔다. 아메리칸 피자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지만,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그 형태와 맛이 변화하였다. 이탈리아의 간단한 토마토와 치즈 위주의 피자는 미국에서는 다양한 토핑이 추가되어 복잡하고 풍부한 맛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음식의 세계에서도 개방계의 원칙이 적용되며, 그 결과로 새로운 창조적인 요리가 탄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제1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따르면, 모든 물질의 원소는 그것이 해체되거나 소각될지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 원소들은 다른 형태로 재결합하여 존재할 수 있다. 예컨대, 매머드는 지구상에서 소멸했지만 그 구성 원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원소들은 다시 매머드라는 형태로 결합할 수 없다. 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계가 공간적 변화를 겪으며 새로운 형태와 조합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과거의 형태가 결코 현재에서 다시 재현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흘러간 것은 흘러간 것으로 끝이 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변화를 수용할 준비가 필요하다. 물질이 미시 세계에서 자체적 변용을 겪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생물은 화학 반응을 통해 끊임없이 변종을 생성한다. 인간이 이 세계에 개입하여 의지로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미생물이 자신들만의 세계인 폐쇄계에서만 존재하려 한다면 소멸은 필연적이다. 변이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개방계의 원칙이 필수적임을 확인할 수 있다. 변화와 적응 없이는 생존하기 어렵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의 과학은 생명체의 수명이 텔로미어의 길이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세포가 분열될 때마다 텔로미어는 줄어들며, 그 길이가 특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생명체는 죽는다. 그러나 바다가재는 이러한 경향에서 예외다. 바다가재는 텔로머라아제라는 효소를 통해 텔로미어를 복구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특징 덕분에 바다가재는 이론적으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바다가재의 평균 수명은 2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바다가재가 죽는 주된 원인은 다른 생명체에게 먹이가 되거나 사고를 당하는 경우이며, 자연스럽게 죽는 경우는 대게 탈피에 실패했을 때다. 나이 많은 바다가재는 껍질이 두꺼워져 탈피가 어려워지는데, 이 때문에 영생할 수 있는 텔로미어를 지닌 바다가재조차 탈피 과정에서 죽게 된다.


열역학 제2법칙은 죽음의 필연성을 예측한다. 이 법칙에 따르면, 우리는 죽음을 향해 계속 이동하게 된다. 바다가재의 껍질과 같은 강한 방어 메커니즘이 존재할수록, 우리는 죽음에 더욱 가까워진다. 만약 우리가 살기를 원한다면 자신을 보호하는 껍질을 깨야한다, 대신 위험이 도사리는 무한한 세계로 나아가야한다. 이것이 삶의 지속을 위한 절대적인 전제조건이다.


사회적 구조와 시스템이 개인의 의지나 행동보다 우선시 되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억압과 구조를 탈출하고자 하는 본능을 가진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렇기에 얼마든지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고 권리를 보호하는데 필요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사회적 구조에 통합되면서도, 때론 그 구조를 해체하고 발전시킨다. 


개인과 집단, 인간과 자연,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들이 삶의 지속성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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