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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Sep 16. 2023

지극히 인간적인 자본주의

오늘의 세계 #2

모든 사회는 특정한 기준과 형식을 갖추고 안정성을 유지한다. 사회의 안정적 구조는 구성원이 사회에서 누리는 자유의 범위라 할 수 있다. 예측 가능한 행동 패턴을 유도함으로써, 안정적인 사회 구조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엄격한 규제가 있는 사회들은 대체로 전쟁, 혁명, 경제위기 등과 같은 강렬한 역사적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구성원의 자유를 일정한 범위 내에서 규제하고 조절하면서 사회의 형식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특히, 불안한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서는 규제의 중요성이 더욱 도드라진다. 혼란한 상태에서 개인들은 사회의 유지보다 자신의 생존에 관심을 더 두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률이 있더라도 쉽게 위반하게 되어, 사회적 안정성이 훼손될 위험이 발생한다. 이러한 불안을 통제해야만 사회가 안정적 구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안정성은 사회의 문화적 동질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 유사한 가치관과 생각은 구성원 간의 신뢰를 높이고, 예상치 못한 변수를 줄여 안정을 유지한다. 그래서 많은 사회는 전통과 같은 형식에 중점을 둠으로써, 구성원을 보호한다는 인식을 갖는다. 이는 일종의 사회적 관성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동질성만으로는 사회적 안정성을 보장할 수 없으며, 오히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분열과 갈등을 초래할 수도 있다. 어떤 집단이라도 집단을 구성하는 모든 구성원의 요구를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적은 희생을 또 다른 누군가는 큰 희생을 했을 것이다. 따라서 관성에는 반드시 저항이 존재한다. 사회 역시 이러한 법칙이 적용되며, 그 결과로 항상 유동적이고 복잡한 구조를 가지게 된다. 때문에 혼란을 유발하는 이러한 다양성은 때론 억압의 대상이 된다. 그렇기에 법률에 의해 형성된 정부는 합법적 권력을 확보하고 다양성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우리를 억압하는 폭력의 합법화 또는 정당화과정이다. 구성원들의 사회적 합의에 의한 조치지만 그 과정에서 자주 소수의 의견이 무시되고 때로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그렇기에 고정된 형식이나 절대적인 가치가 유지되는 사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사회가 다양한 배경을 가진 개인과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나 목표가 서로 다를 수 있고 그로인해 불필요한 혼란을 방어할 수단도 필요한 것일 뿐이다.


다양성을 경직되게 바라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것을 최대한 허용하는 것이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특정한 정치적 또는 경제적 상황, 심지어는 기술적 혁신 등에 따라 사회의 기준이나 형식이 급격히 변할 수 있다. 이런 변화가 반영되지 않는, 과도하게 통제적이거나 완고한 사회는 새로운 도전과 변화에 적응하기 어렵다. 반면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회구조는 더 빠르게 새로운 정보나 기술을 통합할 수 있으며 이는 사회의 발전을 촉진한다.


그렇기에 어떤 형식이나 기준도 그것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를 이해하는 수단일 뿐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완전히 공정하거나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 우리가 더 주목하고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사회가 지니고 있는 복잡성과 다양성과 자유의 수용정도다. 이를 통해 사회 구성원들이 다양한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얼마나 제공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사회적 규범과 상호 작용하는지를 측정할 수 있다.


사회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복잡하게 형성되고, 이런 복잡성은 사회 내에서 '자유'와 '규제' 사이의 균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렇기에 특정 사회의 규범이나 법률체계는 사회마다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사회마다 축적된 고유한 경험과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회 형태나 형식을 평가할 때 중요한 지표는 얼마나 다양한 의견과 가치가 공존할 수 있는지, 즉 '자유'의 허용 정도로 한 사회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점검해볼 수 있다.


이는 사회가 단일한 구성 요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구성 요소와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동적인 구조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구조 내에서 자유와 규제, 동질성과 다양성, 전통과 혁신이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유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지만, 무제한적인 경쟁을 허용하지 않는다. 법과 규범에 의해 제한되며, 비경쟁적인 복지 지원도 존재한다. 반면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경쟁과 소유가 완전히 사라지거나 통제되는 것은 아니다. 노동을 임금으로 교환하며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거래도 허용된다. 이렇게 각 사회는 각자의 사정으로 자유와 규제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한다.


이것은 단순히 '좋음'과 '나쁨', '정의'와 '불의'로 나누어 볼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 어떠한 사회도 그 자체로 완벽하게 '안정적'이거나 '자유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는 그 안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상황과 문제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 즉 '적응력'이 중요할 뿐이다. 


실제 우리의 역사가 그래왔다. 비교적 과학이 발달하기 전 고대나 중세에는 세상의 변화를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신화나 종교에 의지하며 스스로를 억압하고 통제해왔다. 억압은 변화를 최소화하는 효과가 있었고 그 결과 사회적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불확실성이나 복잡성을 피하기 위해 종종 스스로를 제한하거나 규제하려는 경향이 있다. 


만일 어떤 사회가 억압이 강조되어 있다면 사회가 가지고 있는 과학과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 있다.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예측할 수 없는 상태를 만들 수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원인인 것이다. 해결수단이 오직 자유의 억제를 통한 변화의 최소화에 있는 것이다. 


확실히 과학의 발달과 실증적 지식체계의 등장은 사회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한다. 18세기 기술의 발달과 산업혁명은 그러한 사회의 변화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이시기 인간은 공상과 추상보다 실증적 세계에 대한 이해가 높았고 스스로를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각 하게 되었다. 그로인해 전통적으로 유지했던 모든 억압적 사회체제에서 본격적으로 해방될 수 있었다. 개인은 더 이상 사회의 부속이 아니라 중심인 주체가 되었다. 


이는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를 권리로서 보장받는 것과 같았다. 사람들은 창의적으로 도전하고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또한 누구나 경쟁에 참여할 수 있었다. 마침내 사회가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개의 구조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함에도 여전히 왕이나 귀족 같은 상속되는 법률적 계급이 존재하는 국가들도 많다. 이는 분명 모순적이고 퇴행적인 문화지만 구성원들은 아름다운 유산으로 인식하고 유지하려할 수 있다. 이처럼 역사는 내적, 외적 조건에 따른 반응의 결과를 보여줄 뿐, 어떤 특정한 법칙에 따라 발전한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따라서 역사가 특정한 법칙에 따라 발전 단계로 분류될 것이라는 단정은 신중해야한다. 


다만 특정 사회의 형식은 그 사회에서 수용되는 자유의 정도에 따라 표현되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그 사회를 설명할 수는 있다. 이러한 형식과 기준은 사회의 안정성과 자유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며, 이 두 가지는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다. 즉, 안정성 없이는 자유가 지속될 수 없고, 너무 많은 제약이 있으면 자유도 누릴 수 없게 된다.


사회를 이루는 모든 구성원이 이러한 안정성과 자유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공동의 책임이다. 그렇기에 개개인의 다양한 가치와 신념, 경험을 존중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가 된다. 존중과 이해를 기반으로, 사회 구성원은 공동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협약과 규칙을 형성해 나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한 구성원들이 각자의 가치와 신념으로, 이들 사이에서 공동의 목표와 가치를 찾아내는 과정은 쉽지 않다. 또한 그것을 끌어내었더라도 다른 문제들이 발생한다. 


오늘 날의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본격화 된 시점에서도 소수에 의한 자본의 독점으로 불평등과 경제적 불균형도 생겼다. 더구나 자본을 인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도 생겨났다. "자본주의적으로 사고하라"는 말은 이런 상황을 잘 반영한다. 이 말은 명확한 수지 타산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선택하라는 충고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부와 돈을 인간의 감정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물질중심의 이념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자본주의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개인과 사회의 상호작용에서 나온 산물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인간이 그 중심축에서 존재해야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관계와 현상이 자본주의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이해는 인간의 자유와 소유의 관계에서 시작해야한다. 자연 상태에서는 점유가 독점적인 권리로 배타성이 없었고, 물건이나 물질을 얻은 후에도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거나 처분할 권리가 없었다. 소유가 보장돼야만 물건을 사용하고 처분할 권리를 주장할 수 있고, 타인의 개입이나 관심을 거부할 수 있다. 이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역사에서는 큰 발견이었다.


만약 인류가 동물이나 식물과 같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자연 상태에서 살아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만이 유일하게 사회를 만들고 '권리'라는 개념을 이해했다. 그것은 인간이 다른 사물과는 다른 격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 타인과 서로 소통하고 연대나 협력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일 수는 있지만 이조차 대상을 종합화하는 이성적 능력이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이성은 권리를 인정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일한 나'와 '대상과 다른 나'를 알아보고,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는 데에 도덕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자연 상태에서 누구나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러한 자유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최대한 인정하고 존중한다. 이것이 이성의 힘이다. 이성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합의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점유는 배타성을 갖게 되고, 소유가 권리로서 인정되었다.


그 덕분에 인간은 자신을 사물과 구분된 독립적인 주체로 볼 수 있게 됐다. 이를 '인격의 부여'라고 할 수 있다. 인격이 있다는 것은, 인간이 행위의 주체로서 존재하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추상적인 권리가 실제성을 얻게 된 것이다.


하지만 자연 상태에서의 절대적 자유는 관성적으로 현실의 사회라는 상호 보완적인 구조를 방해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점유물이 소유로 인정받으려면, 그 점유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이는 점유 상태가 점유자의 의지에 따라 유지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는 점유물에 대한 통제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고, 그 범위가 바로 소유의 개념이다. 하지만 동의하지 않는다면 어떤가? 마치 표범이 사냥한 사냥감을 사자가 빼앗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자연 상태의 절대적 권리는 사회에서 상대적 권리로 바뀌어야 한다. 점유자의 허락 없이 점유 상태에 개입할 수 없도록 사회가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소유는 배타적인 권리로 보장된다. 따라서 점유물에 대한 강제적인 탈취를 금지하는 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의무가 된다. 또한 그 의무는 사회적 규범체계에서 권력을 통한 강제력으로 억제된다.


권리와 의무는 상호 연관되어 있고 함께 발전한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물건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노력과 노동을 보호하고 그것을 통해 사회의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다.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물질을 습득하는 것을 자유로운 노동이라고 한다. 이렇게 얻은 물건을 보호하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노동을 보호하는 것이며, 그 뒤에는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한다.


사회에서 권리와 의무의 관계는 대개 당사자들 간의 명시적 혹은 암묵적인 합의, 즉 '계약'에 기반한다. 이 계약은 법적 구속력을 가지고, 계약 위반 시에는 엄격한 제약을 통해 그 유효성이 확보된다. 강제력이 없다면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는 등의 행위로 계약을 무효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계약이 명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계약이라고 불리는 암묵적인 계약도 존재한다. 이 사회계약은 개인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규칙과 의무, 그리고 사회가 개인에게 보장해야 할 기본적인 권리를 정의한다. 사회계약의 존재로 인해 개인은 다른 사람의 생명, 자유, 재산을 존중하고, 반대로 자신도 이러한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는다.


인간은 사물과는 다르게, 법적 지위인 '법인격'을 통해 계약의 당사자라는 자격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이 법인격은 법적으로 권리와 의무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며, 인간뿐만 아니라 기업이나 단체에도 적용된다. 따라서 이러한 법인격의 개념을 통해 복잡한 사회 구조 속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계약을 성립하고 유지할 수 있다.


오늘날, 단순한 물질이나 공간에 대한 소유권은 정보, 지식, 심지어는 데이터와 같은 형태의 지적 권리까지 포함한 재산권의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이처럼 인간은 사물 간의 구분, 점유와 소유의 이해, 그리고 권리와 의무의 규정을 통해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했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는 등의 사회적 조절의 정당성을 통해 발전한 개념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사회에서 구현되는 자유의 실재성이라 할 수 있다. 애초에 자유라는 개념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지만, 물질의 점유를 소유에 대한 권리로 인정하는 등의 구체적인 상호작용으로 자유의 실재가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개인의 소유가 결국 계급을 형성하면서 사회적 위계라는 모순을 만든다며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인간은 사회에 종속된 존재이기 때문에, 개인의 사회적 위치가 규정되고 그에 따라 의식이 형성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인식은 헤겔의 변증법적 형식을 따랐지만 내용에서는 차이가 있다. 헤겔은 인간이 자기부정의 인식 과정을 거쳐 모순을 인식하고, 합의 단계로 이어지며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의식이 형성된다고 생각했다. 헤겔은 역사의 발전을 인과적 연속으로 본 것이다. 이는 역사의 각 단계에서 충돌하는 이념이나 가치들이 통합되면서 새로운 시대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완벽하고 절대적인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헤겔의 입장은 인간이 주체적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바라본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로 인해 인간은 능동적인 존재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외부에 의해 인간이 규정된다는 점에서 개인이 사회적 구조와 제약에 취약해서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사회적 계급은 그 자체로 모순적이었다. 인간은 모두가 평등한 존재여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살기 위해서 반드시 재화의 생산과 소비가 필요하고, 이를 얻기 위해서는 노동을 해야만 한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사회의 경제적 생산 활동에서 노동을 중심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 지배 계급과 노동력을 판매하는 노동 계급 간의 대립이 생산관계를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생산관계는 사회 구조와 상호작용하여 사회 전반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며, 사회적 계층과 권력 구조, 정치적 제도 등을 형성한다. 따라서 모든 재화의 생산은 사회적 생산 활동에 의한 것이며, 생산관계도 같은 방식으로 규정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하는 사람과 노동하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생산관계는 생산수단과 노동이라는 상호관계에 의존하는데, 이때 '소유'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 소유에 따라 사회 구조 내에서 서로 다른 계급이 형성되고, 이로 인해 각 계급은 다른 사회적 위계를 갖게 된다. 따라서 계급은 곧 사회적 지위이며 조직화된 상태이자 곧 사회의 구조라고 볼 수 있다. 마르크스가 모든 역사가 경제적 토대인 생산관계 위에 정치적 상부구조가 형성된다고 주장했던 이유다. 


예를 들어, 봉건제 사회에서는 토지를 소유한 영주가 농노에게 경작을 시키고 이익을 얻는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생산수단을 독점하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고용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제공해서 임금을 받지만, 생산의 이익은 자본가에게 돌아간다. 이렇게 사회의 형태에 따라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각기 다른 집단으로 조직화되어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를 계급이라고 정의했다. 생산관계에 기반한 경제구조와, 정치구조가 신분적 위계로 불평등을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르크스가 살았던 산업혁명 초기에는 노동자들이 극심한 착취를 당했다.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들은 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대부분의 이익을 가져갔던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깨달은 마르크스는 당연히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비판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관계로부터 나오는 모순적인 계급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 즉 생산의 주체가 자신의 사회적 위치인 계급을 인식하고 집단적 의식을 가지면, 투쟁을 통해 사회체제를 바꾸고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마르크스의 경제이론은 노동해방을 통해 인간의 자유를 회복해야한다는 열망에서 시작된다. 이런 관점에서 마르크스도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했다고 볼 수 있다. 근대는 인간이 주체적으로 능동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시대다. 전통적인 법과 제도로 인한 불평등한 신분을 뛰어넘어 동등하고 평등한 세계로 발전했다. 왕이 국가를 다스리던 시절에서 국민이 중심인 국가로, 그리고 인치의 국가에서 법치의 국가로 전환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억압받는 노동자들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현실이 마르크스의 고민이었던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라는 개념은 근대 이후 새로운 사회 질서 형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억압적 사회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인간은 자기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생산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지만, 자유와 평등은 완전히 보장되지 않았다. 대신에 경쟁적인 생산 활동은 자본가의 독점과 노동자의 착취로 이어지며, '소유'라는 형태로 불평등한 체제가 완성되었다. 이런 구조 때문에 불만과 부당함이 생겨나게 된다. 인간이 약육강식이나 승자독식의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갈등과 전쟁이 도사리는 위험한 상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도 안정적인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싶어 한 인간은 소유에 더 집착하게 됐다. 이를 위해 제도적인 법적 인정이라는 계약적 합의 외에도 더욱 강력한 강제력이 필요했다. 사회는 소유에 대한 법적 지지와 강제력을 강화했고, 이에 따른 독점적 권리를 더욱 정당화했다. 소유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해서 생계를 유지할 뿐, 속박된 상태에서 자기 존재를 보존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자유를 인식하면서 시작되고, 합리적 계약이라는 형태의 소유권 인정을 통해 규범적 질서에 안착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합의는 배제된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방향으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비록 모순적이었으나 이는 성공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렇기에 자본주의는 계속 확대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 사실 정치제도도 소유할 자유만 충분히 보장된다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독제든 왕조든 상관없어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유의 개념도 물질적인 것에서 비물질적인 것으로 확장됐다. 예를 들어, 과수원에서 과일을 따려는 목적이 옆집 과수원보다 먼저 시장에 팔기 위해서라면, 이 정보는 매우 중요하다. 이런 정보가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옆집 과수원 주인도 알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럼으로써 자신은 이익을 못 보는 게 아니라 피해를 볼 수도 있다. 이렇게 사적 공간에서 벌어진 일도 개인의 소유 범위에 포함됐다. 이 권리는 일반적인 재산권과는 다르지만, 개인의 사적 공간을 소유하는 측면에서 법적 질서에 들어가 보호받는다. 관음이나 염탐 같은 행위가 도덕적으로 문제시 되고, 범죄로 처벌되는 이유도, 이런 공간과 정보의 개념이 소유권으로 확장됐기 때문이다.


소유권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소유물에서 얻는 이익을 소유권자가 갖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유물을 사용하거나 처분할 수 있는 권리도 소유권자가 갖는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은 어떨까? 만약 자기 자신을 소유물로 여기고 권리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신체도 사용하거나 수익을 얻거나 처분할 수 있다. 그럼 자신을 팔수도 있을 것이다.


장기매매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장기를 팔 수 있는지 여부를 살펴보는 것이다. 우리 헌법에는 소유권을 재산권으로 말하고 있다." 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한다.",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민법 제211조에는 "소유자는 법률의 범위 내에서 그 소유물을 사용, 수익, 처분할 권리가 있다"라고 되어 있다. 헌법과 민법이 말하는 것은 소유물의 범위와 사용, 수익, 처분의 방법을 법률로 정한다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자기 자신의 신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다 해도, 법률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게다가 자기 신체를 처분해서 이익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면, 인간의 존엄성까지도 물건으로 취급되게 돼서 모순이 생긴다.


그래서 우리 민법 98조에서는 물건을 "유체물 및 전기 기타 관리할 수 있는 자연력"이라고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다. 민법이 말하는 물건이란 유체물이나 관리가 가능한 자연력, 그리고 배타적으로 지배하고 관리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비인격성을 만족해야 하는 대상이다. 이는 소유나 소유권은 비인격적인 대상인 물건에만 한정된다는 것이다.


최소한 인격을 가진 인간이나 그의 장기 같은 것은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처분도 할 수 없다. 이는 분명 최초 소유와 권리의 관계가 도출될 당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존재임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따라서 그러한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인간이 존엄한 존재로 인격을 가졌다는 것을 법의 기본 정신에 담아 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인간이 다른 인간을 소유하거나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살다보니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모든 관계가 계약에 의해 처분할 수 있다고 보는 물질주의는 자본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이다. 물질주의를 자본주의로 본다면, 그 체제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무런 제한 없이 소유를 무한정 인정한다면, 약육강식이나 승자독식 같은 현상이 정당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소유를 얻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노예 상태로 되돌아가거나 자유를 잃을 수 있다.


그래서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관, 즉 금욕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 통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건 목적으로서의 물질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이렇게 물질주의를 제어하면 자본주의가 지속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인간은 죽을 존재이기 때문에, 소유라는 것은 결국 환상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노동이 삶의 소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이유다. 노동을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소명으로 볼 때, 종속되지 않는 인간상을 그릴 수 있다. 이것이 베버가 자본주의에 부합하는 도덕적인 생활양식을 제시하는 이유다. 쾌락적인 물질주의가 자본주의의 확장에 큰 영향을 미친 반면, 금욕주의는 자본주의의 안정성을 도와 영속성을 갖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인간 없이는 성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의 독점이나 기회의 박탈 같은 불평등을 사회적 문제로 본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다. 자유의 확장이나 소유의 고착화도 결국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결과다. 하지만 이것을 바꿀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적 갈등이나 모순이 문제가 될 때, 얼마든지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사회의 어떤 체제든 결국은 인간 중심인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오히려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생각일 수 있다. 결국은 더 큰 이익을 위한 선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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