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세부로 출발
몇 년 전 여름휴가를 앞둔 주말이었다. 무더운 날씨에 나는 거실에서 에어컨의 찬바람을 즐기며 뒹굴고 있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면서 땀방울이 맺힌 붉은 얼굴의 아내가 들어왔다. 미간을 찌푸린 채,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찬바람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 더워. 더워. 더워. 죽을 만큼 더워.”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아내가 왜 저리 되었는지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아내는 텃밭의 잡초를 저주하고 있었다. 그녀의 텃밭은 다채로운 식물들이 살아 숨쉬는, 아내만의 작은 우주였다. 하지만 최근, 그 우주에 이름 모를 잡초가 침입해버렸다. 그 모습은 결코 작지 않았다. 봄부터 수개월 동안 아내가 부지런히 가꿔온 기억들이 침입자로 인해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내 눈에는 그 모습이 마치 노예처럼 보이는 귀여운 아내일 뿐이었지만.
나는 아내의 공간에 절대 개입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운 남편이었다. 아내에게 분명히 말했다. “텃밭에는 어떤 경우라도 개입하지 않겠으니, 텃밭에 관한 한 강요하지 말아 줘.” 내겐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만, 아내의 공간에 가까워질수록 내 자유의지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억압적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내가 텃밭에 나갈 때마다 나는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난 그냥 집안에 있을래.”
그 순간, 여름의 열기가 더욱 짙게 느껴졌다.
물론 아내는 나의 속셈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나무라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아내에게 남편이라는 인간은 본래 게으름이 삶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며 그 운명에 순응하는 인종이었다. 사실 그녀의 부탁이나 강요만으로 남편의 몸이 섣불리 움직일 리도 없었다. 그러니 남편이 뒹굴고 있는 것은 자유의지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선택의 여지가 없는 물리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엇다.
하여튼 그날 오전부터 아내는 잡초를 학살하기 시작했다. 미워하는 것들을 파괴하고 제거하는 일은 언제나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그 덕에 아내의 심신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우리 내일, 시원한 바다가 있는 필리핀으로 스킨스쿠버 자격증이나 따러 갈까?”
일부러 아내의 흥미를 끌기 위해 그런 제안을 했다. 사실 아내가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면 “뻥이야~”라고 농담을 할 작정이었다. 에어컨 앞에 앉아 있는 아내의 뒷모습은 부르르 떨리는 듯했고, 아내가 웃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그녀는 아마 즐거운 여행을 상상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아내의 대답을 허무하게 만들기만 하면, 내 계획은 완성될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내 제안에 흥미가 없는 듯 주머니에서 모바일폰을 꺼내 들고 담담하게 뭔가를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또 속마음을 간파당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맴돌았다.
십여 분이 지나고 아내는 누군가와 톡을 주고받았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지금 뭐해? 그리고 왜 답을 안 해?”
내 질문이 끝나자, 아내는 자신의 모바일폰을 내밀었다. 톡창이 열려 있었고, 대화 내용이 보였다. 아내는 필리핀 업체를 검색하며 상담톡에서 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일 출발해서 스킨스쿠버 자격 과정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업체의 답변은 대략 이랬다.
“통상적으로는 불가하지만, 정말 기막히고 신기한 우연으로 두 자리가 비어서 가능하며, 심지어 숙박과 식사, 공항 픽업까지 포함된 서비스 전체를 받을 수 있습니다.”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이제 내 장난 같은 제안은 농담이 아닌, 현실이 되어버린 순간이었다. 에어컨 앞에 있었음에도 더위가 심하게 느껴졌다. 아내에 의하면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5일 이상이었다. 스킨스쿠버 자격증은 단계별로 나뉘어 있었고,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은 오픈워터와 어드밴스드 과정까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나만의 휴가는 끝났다.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마치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내일 필리핀에 도착해야만 하는 미션이 주어진 것이다. 항공권을 구매해야 했고, 옷가지 등 여행에 필요한 준비물을 챙겨야 했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나는 문제 해결 기계가 되어 있었다.
항공권을 마구잡이로 구매하고, 준비물을 챙기고 보니 새벽이 다 되어 있었다. 피곤을 견딜 수 없어 잠시 눈을 감았고, 잠이 들었다. 그러다 뻔쩍~~!! 눈을 떠보니 비행기에 탑승해야 하는 시간이 촉박해졌다. 티켓팅과 출발 게이트까지 가는 시간을 생각하니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돈도 모두 지불했는데.' 그런 걱정을 하며 정신없이 공항으로 출발했다. 다행히 항공사 카운터는 닫히지 않았다. 부랴부랴 티켓팅을 하니, 항공권에 표시된 출발 시간이 지나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엄청난 착오 같아 바로 문의하자, 항공기가 연착되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티켓팅을 한 사람들이었다.
게이트에는 여행객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이때 탑승 안내 방송이 시작되었고, 갑자기 우리 이름이 호명되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며 긴장해야만 했다. 이유는 오버부킹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황당하게도 우리 의사를 묻지 않고 좌석을 업그레이드해주었던 것이다. 의사를 무시당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던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게 스킨스쿠버 자격증 도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