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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Oct 26. 2021

우연한 그러나 강렬한

필리핀 세부로 출발


몇년전 여름휴가를 앞둔 주말이었다. 무더운 날씨에 나는 거실 에어컨의  찬바람을 즐기며 뒹굴뒹굴 거리고 있었다. 현관문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더니 땀방울이 송송한 벌건 얼굴의 아내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찬바람으로 뛰어들었다.

“아 더워. 더워. 더워. 죽을 만큼 더워.”

피식 웃음이 났다. 아내가 왜 저리 되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전부터 아내는 텃밭에 있는 잡초를 저주하고 있었다. 아내에게는 텃밭이 있었는데 식물도감을 그려낼 수 있을 만큼 다양한 개체가 살아있는 아내만의 공간이었다. 아내의 공간에 이름 모를 잡초가 침입한 건 최근의 일이었다.  노는 결코 작지 않았다. 봄부터 시작해서 수개월 동안 텃밭에 소비한 시간 아내의 추억이 침입자에의해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 눈에는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 귀여운 아내가 보일 뿐이지만 말이다. 나로 말할 거 같으면 아내의 공간에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는 남편이다. 아내에게 분명하게 이야기해 두었다 “텃밭에는 어떤 경우라도 개입하지 않겠으니 텃밭에 관한 한 강요하지 말아 줘.”라고 말이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아내의 공간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내 자유의지는 속절없이 박탈당한 채 억압적 고통을 경험하고 말 것이다. 때문에 아내가 텃밭에 나갈 때마다 나는 의도적으로 목소리에 힘을 크게 주어 말하곤 했다. 

“난 그냥 집안에 있을래.” 

<당시 아내의 텃밭에 자라고 있었던 꼬마 수박>


물론 아내는 나의 속셈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딱히 나무라거나 강요하지는 않는다. 워낙 게으름을 타고난 운명처럼 신념화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내의 부탁이나 강요만으로 섣불리 움직이는 몸매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뒹굴 거리는 것은 자유의지 때문이 아니라 실은 선택의 여지없는 물리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하여튼 그날 오전부터 아내는 잡초들을 학살했다. 아무리 미워하는 것이더라도 무엇인가를 파괴하고 제거하는 일은 언제나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덕분에 아내의 심신이 만신창이가 된 것은 자연스럽다. 

“우리 내일 시원한 바다가 있는 필리핀으로 스킨스쿠버 자격증이나 따러갈까?”

일부러 아내에게 혹할만한 제안을 했다. 사실 아내가 긍정적인 기대를 가진 대답을 해주면 ‘뻥이야~’할 요량이었다. 에어컨 앞에 있는 아내의 뒷모습이 부르르 떨리는 듯했다. 아내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내는 아마 즐거운 여행을 상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아내의 답변을 허무하게 만들기만하면 나의 계획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아내는 아무 말 없었다. 나의 제안에는 흥미가 없다는 듯 주머니에 있는 모바일폰을 꺼내 들고는 담백하게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모습을 연출할 뿐이었다.

 ‘또 속마음을 간파당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맴돌았다.

십여 분이 지났을까 아내는 누군가와 톡을 주고받았다. 더이상 기다릴 수는 없었다.

“지금 뭐해? 그리고 왜 답을 안 해?”

내 질문이 끝나자마자 아내는 자신의 모바일폰을 쑥 내밀었다. 톡창이 열려있었고 대화 내용이 보였다. 아내는 필리핀 업체를 검색하곤 상담톡에서 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일 출발해서 스킨스쿠버 자격과정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업체의 답변은 대략 이랬다. 

“통상적으로는 불가한데 정말 기막히고 신기한 우연으로 때마침 두 자리가 비어서 가능하고 심지어 숙박과 식사 그리고 공항 픽업까지 포함한 서비스 일체를 받을 수 있습니다.”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이제 내 장난같은 제안은 더 이상 농담이 아니게 되어버리는 순간이었다. 에어컨 앞에 있었는데도 더위가 심하게 느껴졌다. 아내에 의하면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필요한 시간은 5일 이상이었다. 스킨스쿠버 자격증은 단계별로 있었는데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은 오픈워터와 어드벤스드 과정까지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만의 휴가는 끝났다. 이젠 되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홀린 것만 같았다. 반드시 내일 필리핀에 도착해야만 하는 미션이 주어진 것이다. 항공권을 구매해야 했고 옷가지 등 여행에 필요한 준비물을 챙겨야 했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나는 문제 해결 기계가 되어있었다. 

항공권을 마구잡이 방식으로 구매했고 준비물을 챙기고 보니 새벽이 다되었다. 피곤을 견딜 수 없어서 잠시 눈을 감았는데 잠이 들었다. 그러다 뻔쩍~~!! 눈을 떠보니 비행기에 탑승해야만 하는 시간이 빠듯하게 되었다. 티켓팅하고 출발 게이트까지 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정말 끔찍한 기분이었다. '돈도 모두 지불했는데.' 그런 걱정을 하며 정신없이 공항으로 출발했다. 다행히 항공사 카운터가 닫지는 않았다. 부랴부랴 티켓팅을 하고보니 항공권에 표시되어있는 출발시간이 오버되어 있는 것이다. 엄청난 착오같아서 바로 문의를 했더니 항공기가 연착했기 때문이니 걱정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티켓팅을 한 사람들이었다. 

게이트에는 여행객들이 긴 줄을 만들고 있었다. 이때 탑승 안내 방송을 시작했다. 그런데 방송에서 갑자기 우리 이름을 호명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어 긴장해야만 했는데 이유는 오버부킹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황당하게도 우리 의사를 묻지 않고 좌석을 업그레이드를 해주었던 것이다. 의사를 무시당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던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렇게 스킨스쿠버 자격증 도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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