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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Oct 05. 2023

누구도 내일은 안살아 봤잖아

오늘의 세계 #5

그 누구도 내일을 살아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지식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계획하며 행동한다. 이는 반드시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합리적인 대응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지능, 언어 능력, 그리고 창의성이라는 독특한 특성을 통해 복잡한 사회 구조와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이를 통해 윤리, 도덕, 책임감과 같은 추상적인 가치도 창출했다. 


인간의 이러한 특성은 그들 자신, 그들이 속한 집단, 그리고 전체 인류의 지속성을 위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따라서 인간의 미래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 세상을 이해하며 그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찾아나가는 더 높은 의미의 과정이다. 우리는 지난 시간 동안 수많은 문제와 위기를 극복해 왔지만, 앞으로도 새로운 내일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의 운명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인간은 환경, 상황, 타인의 선택 등 다양한 변수의 영향을 받는다. 때로는 주체적으로 삶을 살지 못하고 상황에 맞추어 객체로서의 역할만을 하게 된다. 누구나 주목받는 삶의 주인공이 되고 싶겠지만, 현실은 항상 그렇지 않다. 그렇더라도, 실제 자신의 인생이 갖는 영향력이 미약할지라도, 매순간 내리는 선택들, 그것은 결국 자신만의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이는 주인공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인간은 누구나 미래를 예측하고 구성하는 자율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다만, 사회의 구조, 문화, 그리고 역사적 배경에 따라 개인의 선택의 자유와 그 범위가 달랐을 뿐이다.


계몽주의가 개인주권과 사적소유권을 확산시키기 전, 영국은 전근대적인 봉건적 제도를 가진 전통지향적인 사회였다. 그 사회는 영주와 농노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의 지위나 신분 그리고 가족관계에 따라 토지가 분배되었고, 영주는 농노를 관리하며 농지를 경작했다. 법적인 신분에 따른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도, 모든 구성원들은 강한 공동체의식을 가진 ‘우리’로 묶여있었다. 때론 영주는 농노가 거주하는 촌락을 사회단체로 인정했으며, 이들은 자치공동체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토지의 진정한 소유자를 인간이 아닌 신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영주는 신을 대리해 관리하는 사람이었을 뿐 실제 소유자라는 인식이 약했다. 토지와 그에 종속된 농노를 관리하고 지배하는 법률적인 실질적 권리를 가졌음에도, 토지를 자기마음대로 처분하거나 사용하기도 어려웠다.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법적인 신분에 따라 권리와 의무가 강력하게 작동하였고, 각자의 역할만 다르게 맡았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외 식민지 무역이 확대되고, 상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당시 영국은 모직물 공업이 국가의 중요한 산업으로 부각되었는데, 무역이 늘어날수록 수익도 많아졌다. 경작보다 모직물의 원료인 양모를 생산하는 것이 더 큰 이익이었다. 따라서 토지의 사용에도 변화가 발생했다. 


영주는 공유지와 소작지에서 농노를 축출하고 배타적인 소유권을 확보하면서 봉건영주에서 지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 큰 수익을 얻기 위해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하기를 원했다. 그렇게 경작지를 줄이고 양모를 생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갔다. 경작지는 지주의 욕망에 따라 급격하게 사라졌고 촌락의 자치공동체는 농노의 삶과 함께 처참하게 파괴되어갔다. 무역의 발달과 국가경제환경의 변화에 따른 영향력 확대가, 결국 토지의 사적 소유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만든 것이다. 


사회는 농노의 처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살길이 막막해진 그들은 촌락을 탈출해 도시의 노동자가 되어야 했다. 대규모 인구가 유입된 도시는 빠른 속도로 성장했고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들은 자본가라는 새로운 경제적 계급을 형성했다. 이들 역시 농노의 값싼 노동력으로 막대한 수익을 얻었다. 그러나 더 큰 수익을 기대했다. 방적기계의 발명은 자본가들의 수익증대 욕망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로 인해 수공업 중심의 생산방식이 기계를 활용한 대량 생산시스템으로 대체되었다. 역사적인 산업혁명의 시작이었다. 


산업혁명은 기술의 발달과 함께 시작되었지만 생산관계 전반을 변화시키며 사회구조마저 바꾸었다. 봉건영주와 농노의 관계를 붕괴시켰고,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새로운 계급을 생성했다. 지주에게 집중되어있던 부는 도시의 자본가에게 이동되었고 결국 그로 인해 정치적 권리도 나누어야 했다. 지주들의 욕망이 소수였던 자본가를 사회의 주류세력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선택이었으나, 결과적으로 타인에게 이익을 제공한 셈이다. 이것은 역사적인 아이러니라 할만하다.


도시의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다. 1520년 6만여 명에 불과한 런던은 1650년 40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1800년까지만 해도 도시인구는 100명중 3명 정도였지만, 19세기 산업혁명이 본격화된 후 1900년에는 인구의 75%가 도시에 살고 있었다. 그중 25%가 런던에 거주했다. 도시의 번영은 촌락의 쇠퇴를 가져왔다. 이는 영국 뿐 아니라 산업화를 경험하는 대다수 국가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고 도시는 더욱 성장의 상징이 되었다. 촌락의 불편한 시설, 부족한 환경, 부족한 일자리 보다 도시의 편리한 시설, 풍족한 환경, 넘쳐나는 일자리는 더 많은 기회였다. 그렇게 도시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풍요와 함께 새로운 규범과 질서를 형성했다. 그러나 촌락의 공동체에서 이루어졌던 공동경작과 분배의 관습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도왔던 부조의 문화는 약화되어 갔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욕망으로 인간은 내일을 준비한다. 그러나 여전히 불확실성과 우리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저축이든 보험이든, 안전을 위해 자산을 축적해야만 안정감을 얻을 수 있었다. 돈을 버는 것은 그 만큼 중요해졌다. 그래서 지속적인 투자와 생산량 증가에 몰두해야 했다. 일자리를 늘리고 임금을 올려야 소비가 증가하고 다시 돈을 벌수 있었다. 이러한 선순환 구조가 유지되어야 우리의 내일을 보장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도시는 어느새 주거, 교통, 환경, 교육, 사회, 범죄 등 수많은 문제들을 야기했다. 우리가 직면한 대부분의 문제는 도시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도시를 해체할 수는 없다. 여전히 사람들의 기대를 보장하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대체할 만한 다른 대안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4차 산업혁명이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인간 중심의 노동은 점점 로봇과 ICT 기술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스마트 공장에서 로봇과 IT 기술의 도입이 늘어나면서 일자리 부족과 고용 축소 현상이 도시 내에서도 발생했다.


더 나아가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전유물이었던 인지판단 영역까지도 침범하였다. 인공지능 의사나 변호사가 등장하는 등, 기술의 발전은 법적 영역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럽의 소국 에스토니아는 이미 AI 판사를 실제 재판에 도입하고 있다. 세계 최초의 로봇 변호사를 주장하는 미국의 두낫페이(DoNotPay)는 2023년에 캘리포니아에서 인공지능 변호를 계획했었지만 변호사단체의 반발로 인해 중단되었다. 


근대 이후의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안정적인 경제 순환 체제도 그 지속 가능성에 의문이 생겨났다. 새로운 기술개발로 맞춤 생산과 필요소비가 가능한 환경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스마트 공장은 생산 공정의 자동화뿐만 아니라 수요와 공급의 최적화도 가능했다. 필요에 따라 소량생산이 가능했다. 때론 고객의 요구에 맞는 맞춤형 제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비효율적인 생산량 조절이 목적이었지만 결국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한 결과였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의 잉여 노동인력을 증가시키는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의 빠른 등장은 인간이 자기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선택했던 모든 경험들마저 의심하게 한다. 핀테크에 익숙하지 않다면 은행 서비스 이용이 어려워지는 환경에서, 기술의 발달은 분명 인류에게 편리함을 선물했지만 우리 삶을 지탱했던 노동과 환경 그리고 적응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심지어 온라인이 강화된 지금 어떤 것이 진짜 삶인지조차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온라인에서의 활동이 늘어남에 따라 온라인상의 자신과 현실에서 살아가는 자신 중 어느 것이 진정한 자신인지 조차 명확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인간관계의 형식마저 변하기 시작했다. 온라인의 인간관계가 오프라인만큼 때로는 그 이상 중요하게 여겨지며, 개인주의적이고 독립적인 삶이 중요해진 것이다. 그로인해 가족의 해체가 가속화되었고, 1인 세대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인구의 자연증가율은 해마다 떨어지고, 그럴수록 개인들은 더욱 고립감을 느끼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지 않는 문화가 자연스러워졌다. 골목의 상가는 문을 닫게 되었다. 상가 공실율 증가는 그래서 우연히 아니다. 도시는 서서히 낡아가고 있다. 온라인 중심의 양면시장이나 구독경제의 확산 그리고 비대면 소비의 확대는 소유의 개념마저 흔들었다. 소유가 접속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오래전 예언이 적중한 순간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우리는 어떠한 행동을 취하고 어떻게 생활을 유지해야 할까? 도시 생활에서는 통제와 관리에 익숙해져서, 자유와 자율성을 강조하는 현재의 사회 정치적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기가 어렵다. 큰 난제라 할 수 있다. 통제되지 않는 도시는 우리에게 공포다. 그것은 더 이상 익숙한 환경이 아니다. 주거비 상승, 환경오염, 범죄라는 현실적인 문제들, 그리고 일자리가 사라져 빈곤과 실업이 넘쳐나는 도시는 그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두려운 상황이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 소규모 마을에서 새로운 생활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유지해온 도시체계를 쉽게 버릴 수 있을까? 또한 도시를 유지하면서도 변화에 적극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정보기술과 데이터 분석, 지능형 시스템을 활용한다면 개인은 더 이상 고립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접근 방식에서는 개인정보가 훼손될 수 있다. 개인의 모든 정보, 단순한 상태정보를 넘는, 욕망과 생각까지 데이터화해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누군가 이러한 데이터를 자신의 이익으로 활용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린다. 또한 개인정보를 국가와 정부가 관리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이 갖는 본질적 자유를 넘어서는, 그러니까 집단과 공동체의 안전을 최우선하는 사회를 실현하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그러한 이유로 국가와 같은 강력한 권위나 권력에 의한 지휘나 통제는 더욱 강화되고 과거 우리가 투쟁했던 자유에 대해 다시 고민해야 할 상황이 올수도 있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세계를 형성함에 따라, 인간의 억압과 자유 간의 대립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르게 된다. 사적자유와 공적자유가 혼재하게 되는 상황은 자유와 통제의 관계가 쉽게 해결되는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생각의 방식은 여전히 도시에 맞춰져 있다. 우리는 생활에 필수적인 에너지나 식량 문제도 도시 중심으로 생각한다. 도시 밖에 세계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들, 그러면서 우리의 삶이 변화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모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모순이 없다고 느낀다면, 이러한 인식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전통 지향적인 사회에서는 큰 변화를 유발할 만한 요소가 없으면, 사람들은 특정한 생활양식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계속 유지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한 충격이 발생해야 사람들이 이를 인식하고 대응하기 위한 수단을 찾게 된다.


대체로 세계 각국의 정부들은 생산가능 인구의 증가와 소비의 축소로 나타나는 실업률 증가 문제에서 여전히 헤매고 있다. 오히려 실업률의 안정 기준을 올려 사회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며 안정적인 상태임을 주장하기도 한다. 때문에 정부를 신뢰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의 상황이 안정적이라고 믿고 현실을 외면하려 한다. 정부가 제시하는 새로운 실업률의 안정 기준은 사람들의 현실 인식을 왜곡하는 일종의 '가스라이팅'이 될 수 있다. 살아왔던 방식대로의 생활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이런 상황에서도 강하게 남아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다.


그러나 눈속임은 금방 들통이 난다. 정부의 균형예산과 낮은 인플레이션 추구는 예기치 못한 사건들, 예를 들면 전쟁이나 자원의 공급 부족, 등으로 인해 실패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도 기업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면 일자리를 확보할 수 있다는 믿음은 여전히 유효한 사회적 인식이다. 기술의 발달로 인해 사라지는 일자리는 반드시 새로운 일자리로 대체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산업혁명 초창기 일자리 감소를 우려했던 노동자들의 러다이트 운동을 예시로 들며 이는 근거 없는 생각일 뿐이라고 말한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일자리가 어떤 형식으로든 늘어날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을 왜곡할 뿐,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오늘 날 일자리의 유형은 전일제근무에서 시간제근무제로 전환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고용 시장의 유동성 증가와 함께 정부의 재정 부담마저 가중시킨다. 세입이 줄어드는 반면, 정부 지출은 늘어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에 대한 기대는 안정된 소득을 확보를 위한 일자리 부족 문제에서 한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결국 이는 소득과 소비의 전통적인 연결고리를 끊어놓게 될 것이다. 소득이 없는 상황에서 소비를 유지하려는 시도는 경제의 불균형을 초래할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대안으로서 주 4일 근무제나 노동소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러한 주장은 그 자체로 혁신적이라 볼 수 있지만, 일부에서는 이를 극단적인 사회주의적 접근법이라고 비난한다. 일자리가 새롭게 창출되지 않는다면 노동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나누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더 많은 돈을 벌 기회를 박탈당하고 그것이 자신의 본질적인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인식한다. 때문에 이러한 태도로 보아 우리는 여전히 변화에 민감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다르게 과학기술의 빠른 발전과 그에 따른 사회의 변화는, 경제와 환경, 사회 구조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변화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는 협력과 공동체 의식의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변수와의 상호작용이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변화의 파도 속에서도 공동체의 도움과 협력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게 된다. 협력이란 자신의 희생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이다.


변화는 기술, 사회, 환경, 경제 등 모든 영역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문제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고통, 혼란, 불안을 가중한다. 결국 인간은 마치 농노가 살기위해 도시로 도망쳤듯 생존을 위해 익숙한 터전에서 벗어나야할지도 모른다.


변화는 자연의 불가피한 법칙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익숙한 일상과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에 변화를 회피하곤 한다. 물론 변화를 통제하려는 시도보다 그것에 적응하는 능력을 키워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수는 있다. 애초에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과신이고 맹신이자 오만이다. 사회의 지속성은 단순한 통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변화에 어떻게 적응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당연하게도 미래는 모든 부분에서 우리가 예상하고 있는 것처럼 혹은 계획한 바대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우리의 삶에는 가능성과 불확실성이 함께 존재하기에 어떤 예측도 확실한 미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류가 지금까지 소멸되지 않고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간의 선택적 협력과 소통 그리고 사회적 균형과 조화에 있었다. 그렇기에 사회는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상징하면서도 인간의 이기적인 선택적 결과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기심이 인간의 존엄성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직면한 도전들, 부의 불평등, 자원의 고갈, 기후 위기는 더 이상 인간 사회와 인간 자체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자연 환경과 그 안의 수많은 생명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왜 존엄성은 오직 인간 내부에서만, 또한 오직 인간에게만 적용되어야 할까? 이제 우리는 인간 중심의 가치체계를 넘어서, 생명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책임과 행동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방치했거나 손쉽게 외면해왔던 윤리적 도덕적 문제들부터 생각해보자. 우선 생명에 대해 우리는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을까? 예를 들어 유전자 편집기술이나 인공지능과 같은 기술을 사용하는 경우, 우리는 두 가지 상반되는 질문을 해볼수 있다. '이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가?'와 '이 기술을 사용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다.


생명복제기술에는 배아분할 복제나 체세포 복제 등 다양한 유형이 있다. 하지만 전통적인 종교나 윤리적 관점에서는 신이 아닌 인간이 생명을 창조하는 이런 실험을 불편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과학기술 발달의 옹호자들은 논란 자체를 부정한다. 그들은 체외수정이나 대리모 기술 같은 인공수정 방식이 이미 의료적 보조수단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체외수정은 난임 치료의 일종으로, 자연적인 수정 과정과는 다르게 인공적인 시험관 환경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생식에 사용되는 난세포, 핵, 그리고 자궁을 배우자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방식으로 얻고 그에 따라 수정을 발생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체외수정 방식은 인간복제와 기술적으로 유사하다. 실제 배아가 형성되는 과정만 다를 뿐, 그 외에는 인간복제와 거의 동일하다. 인간복제는 한쪽 세포에서 핵을 추출하여 다른 난세포에 주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과정은 단일 세포의 유전자만을 이용하기 때문에, 유성생식이 아니라 무성생식에 가깝다. 결론적으로, 체외수정과 인간복제는 기술적 공유도가 매우 높다.


만약 인간복제 방식으로 태어난 혹은 만들어진 아이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그 아이를 완전한 인간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물론 누군가의 유전자를 물려받고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서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하기에 인간임을 부정하기란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유전 정보만으로 복제되었다면, 그 존재는 최소한 탄생부터 유전적 독창성이 없다. 이러한 해석은 결국 그를 인간으로 인정하기 어렵게 할 수 있다. 이처럼 '인간다움'을 정의하는 것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다. 


이 주제는 인공지능과 로봇 과학의 발전으로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기계가 인간의 역할과 기능을 대체하거나 능가하게 되면, ‘인간다움'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덴마크 언론인 '사이언스알럿'은 예쁜꼬마선충(Caenorhabditis elegans)의 뇌 신경회로를 레고 로봇에 올려 로봇을 조종하는 데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이론적으로 뇌는 전기 신호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 신호들을 목록화해서 컴퓨터에 업로드 한다면 디지털 의식을 가진 창조적 존재가 가능하다.


2014년 오픈웜 프로젝트(OpenWorm Project)그룹이 선충의 302개 뉴런 연결 상태를 복제해, 소프트웨어로 시뮬레이션(simulation)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살아 있는 예쁜꼬마선충의 뇌 기능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재현 가능한지 확인하는 것이다. 


실험 과정은 예쁜꼬마선충의 뇌를 시뮬레이션한 후에 그것을 간단한 레고 로봇에 업로드 한 다음 수중 음파 탐지기와 각 면에 있는 운동 모터로 뉴런을 대체해서 선충과 비슷한 감각 기능을 만든다. 그리고 선충 로봇과 실제 선충의 행동 반응을 비교하는 것이다. 결과는 인위적인 프로그래밍 없이도 업로드 된 가상 뇌가 로봇을 조종해 실제 선충처럼 스스로 움직이게 했다.  


이 연구는 성공이었다. 그 후 과학자들은 더 복잡한 도전, 인간 뇌의 복제 연구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만약 이런 도전까지 성공한다면, 인간의 의식을 기계에 이식해 구현한다면, 그것을 생명체로 볼 것인지, 아니면 의식이 있는 기계로 볼 것인지에 대한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또한 살아 있는 인간과 그의 뇌를 복제해 의식을 갖게 된 로봇이 같은 존재인지, 다른 존재인지도 논란이 될 수 있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GPT 같은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 속도를 보면, 이런 논란은 기우에 그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공지능이 프로그래밍된 목적에 따라 동작하기 때문에, 그 외의 욕망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진화론적 관점에서 볼 때, 다른 접근도 가능하다. 


인간 같은 생명체는 물질들의 복잡한 상호 작용과 화학 반응으로 이루어진다. 생명 기원의 중요한 현상 중 하나는 무기물이 정보를 축적하며 유기물로 변하는 과정이다. 탄소 같은 무기물이 유기물인 탄소화합물로 변하면서 정보를 축적했고, 이로 인해 다양한 형태와 기능을 가진 생명체가 되었다. 그렇다면 아무리 확률이 낮다 해도, 인공지능이 자기 정체성을 가질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인간의 감각과 이성적 판단은 AI의 알고리즘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인간의 감각, 이성, 그리고 욕망은 생물학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에서 수천만 년 동안 발전해 왔고 AI의 경우는 프로그래밍과 데이터에 기반해 불과 몇 년 혹은 몇 십 년의 기술 발전으로 형성된 것이다. 또한 그 내부에 제공된 정보는 기본적으로 인간에 의해 정리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때문에 전체 정보의 질과 양이 인간이 축적한 과거의 모든 경험을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강화학습을 통해 발전 속도를 빠르게 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다양한 시뮬레이션이 가능하고 그것을 통해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행동과 그 결과 사이의 관계를 학습하며 보상에 대한 개념을 이해할 수도 있다. 이 보상의 개념은 곧 인간의 고유한 욕망 추구 개념과도 유사하다. 그렇기에 만약 대뇌 피질 수준의 인공신경망이 개발되면, 인간과 유사한 기억, 학습, 의사결정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현재로서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람이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고 알고리즘을 실행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욕망을 가진 기계가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이런 가능성 때문에 인공지능이 욕망을 가질 수 있을지, 그리고 그것을 생명체로 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은 계속해서 제기되는 것이다.

이러한 고민은 인간을 넘어서는 기계가 등장함으로써 결국 인간의 존재적 의미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 인간과 유사한 외형이나 행동을 가진 기계를 동등한 존재로 바라볼 수 있을지도 문제다. 이처럼 '인간다움'에 대한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는 복제된 인간, 기계화된 인간, 인간이 된 기계 등 다양한 주제를 만나며 혼란스럽다.


생명윤리와 관련해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명확히 파악하고 이해하긴 어렵다. 다만 과학과 기술의 급속한 발달로 우리의 전통적 인식을 바꾸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생명윤리 문제와 '인간다움'에 대한 논의는 4차 산업혁명이 가속화되는 시점에서 생활의 깊숙한 곳까지 다가왔다. 이 고민은 메타버스와 같은 가상공간에서도 나타난다. 아직 원시적인 형태이긴 하지만 인공지능이 '데이터 기반의 판단'을, 메타버스는 '데이터 기반의 새로운 현실'을 제공한다. 메타버스 내에서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인간다움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그리고 인공지능이 우리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은 생명윤리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끝없이 묻는다. 그렇기에 단순히 추상적인 논의가 아니다. 


실제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인공지능, 메타버스, 신재생 에너지 같은 새로운 기술들이 우리 일상을 급격하게 변화시킨다. 메타버스는 인간의 사회적, 문화적 활동의 새로운 영역을 열고 있고, 이는 '인간다움'이라는 개념에 새로운 차원을 추가한다. 


메타버스의 경우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새로운 세계를 제공한다. 이네 사람들이 실제로 만나 어울리는 것보다 가상의 공간에서 관계를 맺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 않다. 그렇기에 가상공간은 고립된 사람들에게 심리적 안정을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메타버스에 익숙한 10대가 어른이 되면, 인류의 생활양식은 확실히 달라질 것이다.


메타버스에서 제공하는 가상공간은 점점 인간의 모든 생활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발전하고 있다. 놀이나 유희를 위한 세계가 아니라 생산 관리부터 거래가 가능한 시장까지 확장되고 있다. 이런 환경이 발달하는 경우 대중교통을 이용한 출퇴근 문화도 변화될 수 있다. 출근할 필요 없이도 자택 근무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사실상 넓어진 경제 영토이자 새로운 기회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드론을 이용해 현실 세계의 정보를 수집하고, 그 정보를 정밀한 데이터로 변환해 복제하는 기술도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점점 더 현실과 가상세계를 구분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웨어러블 인터페이스 기술은 감각적 체험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이는 신체적인 한계마저 극복하게 해 다양한 체험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메타버스에서 신체장애는 더 이상 제약이 아니다. 얼마든지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현실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으면서 그것을 초월하는 새로운 체험 공간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현실공간에서의 활동보다 훨씬 강력한 경쟁력을 갖게 될 수 있다. 이는 가상공간의 새로운 삶이 실제적인 현실공간을 축소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의 욕망이 그리고 그 실현이 메타버스 같은 가상공간에서 얼마든지 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메타버스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세계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문제일 뿐, 빠른 속도로 우리 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


메타버스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들, 이제 그것은 단지 상상체험이 아니다. 그럼에도 새로운 공간인 메타버스를 관리하거나 제어할 권리는 오직 기업에게만 있다. 기업은 결국 이윤을 추구하는 집단이다. 그들이 서비스를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목적도 명확하다. 그렇다면 기업은 얼마든지 이익을 위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규칙이나 기준을 변경하고 싶어 할 수 있다. 


기업이 소유하는 메타버스에서 권리와 자유는 기업에 의해 자율적으로 통제되고, 데이터센터의 확장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개인정보 획득도 가능하다면,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내부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기업의 판단에만 맡기는 게 과연 우리가 기대하는 미래일까? 뿐만 아니라 GPT 같은 인공지능과 함께 만들어내는 창의적 생산품에 대한 저작권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 개인의 아이디어를 제공했더라도 그걸 인공지능이 구현한다면 결국 저작권은 인공지능을 소유한 기업과 나눠야 할 수도 있다. 물론 우리는 기업에 제공하는 메타버스에 참여하지 않을 수도 있고 서비스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메타버스 등과 복잡하게 얽혀지는 순간 그것은 이상적인 말이 되어버린다.


이미 메타버스 플랫폼인 호리즌 월드(Horizon Worlds)는 가상 부동산을 팔고 있고, 마이크로소프트는 메시포팀(Mesh for Teams)을 통해 기업들이 가상 회의를 할 수 있게 지원한다. 또한 엔비디아는 옴니버스(Omniverse)로 기업들이 가상 협업을 할 수 있게 도와주고, 텐센트는 큐큐브이알(QQ VR)을 통해 게임이나 교육, 쇼핑 같은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한다. 메타버스와 같은 가상공간에서 발생하는 인간과 인간, 기계와 인간, 기계와 기계의 복잡한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의 이윤 추구는 자연스럽고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 이윤 추구의 과정에서 개인의 권리나 가치가 충돌할 때 긴장관계가 발생한다면 어떨까? 개인정보, 저작권, 불공정한 계약이 기업에 의해서 통제된다면 말이다. 지금의 우리로서 이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아무리 기업의 이윤 추구가 중요하다 해도, 개인의 권리와 가치 존중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이런 문제에 접근해야만 할까? 리눅스 오픈소스와 같은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리눅스는 GPL과 같은 오픈 소스 라이선스 아래 배포되며, 이것은 재산권의 새로운 형태를 제시했다. 리눅스는 리누스 토발즈의 개인 프로젝트로 시작되었지만, 그 후 수많은 기업과 개발자들의 참여로 성장했다. 그것은 공동체의 협력과 공유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우리는 그동안 재산권이 개인의 자산이나 지적 재산을 보호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을 깨고, 리눅스는 그것을 공적 자산으로 전환했다. 누구나 자유롭게 리눅스를 다운로드 받을 수 있었고, 오류를 해결하는 데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리눅스의 성공 사례는 재산권의 포기가 반드시 손실을 야기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메타버스나 인공지능 분야에서도 리눅스처럼 협력과 공유의 모델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업과 사용자, 그리고 개발자들 간의 협력을 통해 더 큰 가치를 창출하는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


세상은 대립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상이나 이념, 사회 제도도 변화와 발전의 과정 속에 있다. 개방된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고, 그 창작물이 다시 공유되어 새로운 창작물을 만드는 선순환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는 대체로 명확하다. 과거에만 얽매여 변화를 부정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더불어 우리 자신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는 윤리적 고민임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결국엔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더 좋은 결과를 얻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들이다. 이러한 생각은 현재의 상황에 대한 불만족을 의미하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나타낸다. 과거 없이는 현재도, 현재 없이는 미래도 있을 수 없다. 다만 현재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할뿐이다. 


인간은 모두 각자의 생각과 경험, 가치관에 따라 다른 정체성을 갖는 존재로 성장한다. 다양성은 모든 생명체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 우리는 각자의 결핍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 결핍은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조건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이런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면서 채우기 위해 노력하며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과 사회의 모순을 통해 서로의 필요성을 증명한다. 이 과정이 우리가 완전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나에게 없는 것이 당신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신의 선택과 노력의 결과가 실패를 만들더라도 혼자가 아니라 우리로 살아갈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이유와 개인과 사회, 그리고 생명의 가치와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누가 어떻게 정의하든 삶의 본질은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우리에게 아직 기회가 있다. 그 누구도 내일을 살아본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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