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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Sep 18. 2023

이상한 나라의 남과여

오늘의 세계 #4

사람들은 세상의 절반은 여성이고 나머지 절반은 남성이라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남성과 여성의 수적 비율 이상의 의미가 있다. '절반'이라는 단어는 남성과 여성이 각각 세상에서 동등한 비중과 중요성을 차지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중요하거나 우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남성과 여성은 동등하다.


그러함에도 역사적으로 남성과 여성은 그리 동등한 관계가 아니었다. 사회, 정치,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남성이 더 많은 기회를 가졌다. 이런 불공정한 상황은 결국 남성과 여성을 대립적으로 보게 만들었고 일부 사람들은 경쟁 관계로 생각한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이런 불평등한 상태가 오히려 진화적인 현상에 의한 것이며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 남성과 여성의 차별적 인식은 한순간에 발생한 일이 아니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그의 '정치학(Politika)'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본성적으로 지배적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는 여성이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열등하다는 당시 사회적 문화와 구조를 반영하는 것이다. 물론 여성을 노예로 본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남편이 부인을 지배하는 것은 자유로운 시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정치적인 관계와 유사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함에도 남성이 우수하다고 생각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근대철학을 종합했다고 불리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조차 남성이 부인과의 관계에서 “내가 너의 주인이어야 한다. ‘남성은 명령하는 부분이어야 하고 여성은 복종하는 부분이어야 한다.’고 말할 때 이런 지배가 여성에 대한 남성의 능력이 자연적 우위성이라면 부부의 평등에 위배되지 않는다.”라고 말한바있다. 칸트도 남성의 지배와 여성의 복종이 종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전 역사에 걸쳐 ‘남성은 여성을 지배한다.’라는 명제 위에서 관계가 설명되어왔다. 이러한 인식은 남성과 여성이 다른 수준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부여받게 했다. 남성은 전쟁과 같은 큰 위기에서 집단의 보호와 안전을, 여성은 다소 작은 규모의 가정 내에서의 책임을 맡아야한다고 믿게 된 것이다. 그로인해 남성들은 사회 구조적으로 더 높은 지위와 권력을 얻었고, 여성들은 보조적 위치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인간의 해방이 시작된 근대에서는 이러한 인식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이는 여성의 차별적 권리와 지위가 과연 동등한 인간으로서 적절한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여성운동가이자 철학자인 시몽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는 《제2의 성(The Second Sex)》라는 저서를 통해 남성과 여성은 본질적으로 인간으로서 동등하지만, 사회는 여성에게 약하다는 이미지를, 남성에게는 강인하다는 이미지를 부여해 왔다고 비판했다. 보부아르는 성에대한 차별적 인식이 단순히 편견에 불과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편견이 '남성이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형태로 사실처럼 여겨져 오랫동안 지속됐다고 지적했다. 당시에도 여전히 가부장적인 사회구조가 전통적인 문화였기 때문에,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보부아르는 이러한 인식이 남성성이나 여성성 같은 추상적 개념에 기반한 편견일 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런 문제는 계속되고 있다. 예를 들어, 임금 격차나 가사노동의 가치, 그리고 기업 내에서의 여성 임원 비율이나 고위직 공무원에서의 여성 비율 같은 공적 지표를 살펴보면, 여성이 남성보다 낮은 사회적 지위와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통계는 자주 등장한다. 따라서 여성이 차별적 대우를 받는다는 주장은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 강도에 따른 임금격차는 당연한 것이라는 인식도 있다. 이는 분명 업무의 효율성에 의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노동 강도와 생산효율성의 부분만 해도 모순이 존재한다. 만일 그것이 적용되려면 남성사이에서의 능력 차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생산력 높은 남성과 낮은 남성의 임금격차가 실제로 임금체계에서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같은 남성이라도 노동 강도에 따른 업무소화능력은 천차만별이고 모든 개인들은 각각의 능력을 증명해야만 표준 임금을 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이는 남성과 여성을 나누었을 경우 발생하는 시각적인 현상일 뿐 실제 개인의 업무 효율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라 오래된 편견에 의한 인식 그리고 편의적인 분류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오히려 더 합리적인 이유다.


더군다나 비교적 차별이 없다고 하는 공무원의 경우 업무에 따른 월급체계는 대체로 동일하게 적용되는 측면이 있지만, 이상하게도 전체 공무원 중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50%를 넘음에도, 4급 이상의 고위직에서는 그 수가 2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여성이 승진을 못하는 이유를 단순히 능력차이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러한 현상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왜냐하면 전문직에서 활약하는 여성의 수가 빠른 속도로 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직 여성이 늘어난다는 사실은 여성의 객관적 능력이 충분히 검증되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교육기회가 확대된 결과만은 아니다. 그렇기에 반드시 사회적 차별이나 기회 불평등 같은 요인이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제한하고 있을 가능성을 의심해야 한다. 능력 있는 여성들이 불가피하게 비교적 자유로운 업무환경에서 독립적인 경쟁력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은 전문직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범죄와 같은 범죄는 어떤가? 성범죄 통계에서도 잘 나타나듯 대부분의 성폭력은 남성에 의해 일어난다. 이는 남성의 강함과 여성의 온순함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깔려있다. 자신보다 약해보이는 대상을 폭력적으로 지배하려는 태도인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범죄조차 남성의 생물학적 본능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은 몰카 촬영이나 추행, 강간 같은 당연히 범죄로 단죄해야 함에도, 우리 사회의 이면에 숨겨져 하나의 유희처럼 소비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상황은 심각하다. 매년 경찰청에서 발표하는 범죄통계연감을 보면, 강력 범죄로 분류되는 강간, 유사강간, 강제추행의 총 횟수는 매해 만 건을 넘고, 누적된 범죄 수는 수십만 건에 달한다. 이런 사실을 통해 볼 때 여성은 언제 어디서든 성범죄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만일 이러한 범죄가 남성의 본능적인 행위를 억제하지 못한 생물학적 요인이라고 인식하면 여성으로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막막해진다.


통계의 규모에서 나타나듯, 분명해 보이는 사실은 개개인의 본능에 의한 소수의 특별한 일탈이 아니다. 오히려 특정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 다른 정체성을 가진 집단에게 가하는 정체성 관련 차별 범죄로 볼 수 있다. 한번 생각해 보라. 특정 사회에서 종교나 인종을 이유로 법이 금지하는 차별을 하는 경우 우리는 이러한 행위를 정체성 범죄라고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사회 문화적인 인식이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우월성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내부에서도 개개인의 생각은 다양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집단적 린치처럼 인식한다.


그렇기에 성범죄를 남성의 성욕이라는 '본능'과 연결시키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 더군다나 성욕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존재하는 본성이며, 남성만의 특별한 요구가 아니라는 게 과학이 가리키는 진실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본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남는 것은 오직 사회적 문화적 인식이 유일하다.


이에 대해 흥미로운 논문이 하나 있다. 2011년에 출판된 과학저널 'Nature(네이처)'의 2월호에서 실린 뉴욕대학교의 다유린 교수와 캘리포니아대학교 데이비드 앤드슨 교수의 논문이다. 이 논문은 수컷 생쥐의 뇌에서 시상하부(Ventromedial Hypothalamus, VMH)라는 특정 영역의 기능에 관한 연구였다. 이 영역은 생리적 기능인 식욕, 체온 조절, 성 호르몬 분비뿐만 아니라 스트레스 반응과 같은 감정적인 반응을 조절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논문에 따르면 수컷 생쥐가 혼자 있는 경우 VMH의 신경세포가 비활성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다른 수컷 생쥐를 우리에 넣게 되면, 해당 수컷의 VMH 신경세포가 흥분하면서 공격성을 보인다. 그러나 암컷 생쥐를 동일한 우리에 넣는 경우에 VMH가 흥분하기는 하지만 공격성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를 통해 연구진은 VMH 영역이 섹스와 폭력에 둘 다 관여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어서 연구자들은 광유전학이라는 기술을 활용하여 VMH 신경세포가 섹스와 폭력 사이의 직접적인 원인인지를 관찰했다. 이 기술은 강제로 특정 유전자를 빛에 노출시켜 그 반응을 살펴보는 것이다. 실험 결과, 빛에 노출된 수컷 생쥐는 VMH 신경세포가 활성화되면서 강한 공격성을 나타냈다. 이때 공격 대상은 다른 수컷, 암컷, 심지어는 라텍스로 만든 실험용 장갑 등 비생명체 까지도 포함됐다. 


그러나 빛을 끄면 공격성은 사라졌다. 따라서 신경세포의 활성을 억제하면, 생쥐는 수컷생쥐에게조차 공격성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로써 VMH 신경세포가 폭력 행동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이 입증되었다.


이후 연구팀은 빛을 켜기 전에 수컷이 암컷에 접근하도록 했다. 놀랍게도 빛을 켰음에도 생쥐의 공격성이 나타나지 않았다. 단지 수컷들이 섹스를 마친 이후에야 생쥐들의 공격성을 다시 유발시킬 수 있었다.


이로서 암컷에 의해 활성화된 VHM의 신경세포들은 교미를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억제한다는 가설이 가능하다. 이를 테면 섹스와 폭력행위가 맞물려 서로를 통제한다는 것이다. 섹스 신경회로는 폭력 신경회로의 출입문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주위에 섹스를 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 섹스 신경회로는 폭력 신경회로를 적극적으로 억제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연구 결과는 동물 실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있다. 그럼에도 연구팀은 인간 뇌에서 폭력과 섹스에 대한 신호가 혼재되어 구분하기 어려울 경우, 성폭력의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음을 이야기 한다. 이로부터 성폭력 같은 행위가 정상적인 뇌 활동이나 본능이 아니라, 뇌의 오작동이나 이상증상일 수 있다는 가정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성범죄의 경우 압도적인 비율로 남성이 여성보다 높다는 사실 그리고 성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대다수가 사회적으로 평범한 남성들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래서 성범죄의 주된 가해자가 대체로 남성이라는 사실에 더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이 연구가 동물 실험에서 나온 것이어서 확정적이진 않지만, 섹스와 폭력 사이의 상관관계를 볼 때 뇌의 이상증상이 원인일 수도 있고,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요인이나 개인의 성격, 가치관, 환경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성범죄가 단순한 성욕 같은 본능에 의해 발생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뇌의 이상증상이 원인이라면 이는 치료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반면 사회적, 문화적, 관습적인 영역에서 발생하는 문제라면, 우리의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것으로 성범죄를 예방하거나 줄일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면 더 효과적인 대응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해결되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피해자가 될 위험을 피하려고 남성 전체를 의심하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여성의 인식을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여성들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사전조취로 남성일반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여성은 사실상 자신을 지켜낼 방법이 없다. 그렇기에 이런 인식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한 자연스러운 대처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많은 남성들도 자기 주변의 여성들, 예컨대 누나, 여동생, 연인, 아내, 엄마, 여성 친구들이 밤길을 혼자 걷는 상황에서 성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을 걱정한다. 남성들이 택시를 태워 보내고 차번호를 기록하는 등의 행동을 하는 이유가 교통사고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이런 행동 패턴으로 봤을 때, 남성들 자신도 집단적인 남성에 의한 범죄를 우려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갈등을 다시 봐야할 필요가 있다. 요즘 페미니즘 논란이 큰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대체로 페미니즘 논란은 여성들이 지나치게 자기 인권만 주장하고, 오히려 남성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인식이 반영돼 있다.


그런데 논란을 자세히 보면 흥미로운 점이 나온다. 페미니즘을 혐오하거나 싫어한다는 사람들조차도, 사실은 여성의 인권을 옹호하는 보부아르의 입장과 큰 차이가 없다. 대체로 이들은 남성과 여성이 사회적으로 평등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문제는 언어 사용 때문에 오해가 생기는 거지, 실제로 이들이 원하는 건 동등한 사회질서다.


급진적(radical) 페미니즘을 여성우월주의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급진적'이라는 말은 '점진적'의 상대적인 속도일 뿐이고 여성우월주의와는 관련 없다. 따라서 급진적이라는 건 모순된 사회의 근본구조를 빨리 바꾸자는 속도와 범위를 지칭할 뿐이다. 또한 행동하는 여성들 사이에 여성우월주의자와 연대하는 경우가 있고, 특정 개인이 여성우월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 또한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목적과는 관련이 없다. 예컨대 대한민국 국민 중 몇 명이 해외에서 범죄를 저질렀다 해도, 그게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정체성을 의미하지 않는 것과 같다.


물론 보부아르가 살았던 시절에 비해 현재의 사회적 의식과 제도는 많이 발전했고, 페미니즘의 개념도 다양화했다. 젠더 이슈를 포함한 사회적 성의 개념이 확장되는 등, 에코페미니즘 같은 여러 형태의 페미니즘도 등장했다. 이런 모든 조건을 고려해도,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인격의 주체라는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갈등의 원인 중 하나는 남성과 여성이 사회적, 정치적으로는 동등하다고 인식되지만, 생물학적, 발생학적 측면에서는 다르다는 전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사회적 불평등 현상을 진화의 과정에서 태생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 관점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첫 번째로 우리가 가진 성 역할에 대한 인식이 정말 태생적으로 주어진 것인지도 짚어봐야 한다. 남성과 여성이 태생적으로 다르다는 인식은 오래 전부터 있었고,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 문제에 접근할 때 이러한 전제가 자주 따라다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성리학자 임윤지당(1723-1793)은 그녀의 저서 '이기심성설'에서 남녀의 동등을 주장하고 우주와 인간의 원리를 풀이했다. 그녀의 주장은 남과 여가 보편적 인격의 완성에서 어떤 차이를 가질 수 없다는 인식에 기초한다. 따라서 임윤지당은 남성과 여성의 차별적 인식이 아니라 인간의 고귀함에 가치를 둔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남존여비 같은 위계사상이 아니라, 음과 양이 상호보완적으로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지당의 인식은 여성이 주체적으로 자신을 인식한다는 점에서 보부아르의 현대 평등주의 페미니즘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윤지당이 살았던 당시는 영조와 정조의 시대였고, 그런 시대 배경 속에서도 여성의 동등을 주장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윤지당은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이란 그 자체로 동등하다고 봤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녀는 남성의 원리를 씩씩하게, 여성의 원리를 유순하게 보았다는 점에서 성에 따른 사회적 역할이 선천적으로 정해져있음을 인정한 것과 같다.


성역할에 대한 연구는 최근 과학이 발전하면서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인류학자 샐리 맥브리어티(Sally McBrearty)와 마크 모니츠(Marc Monitz)는 이 분야에서 비판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그들은 석기시대에 만들어진 도구들이 단순히 사냥을 위한 것이라고만 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 도구들의 형태나 기능은 고기를 다듬는 것, 식물을 캐는 것, 땅을 파는 것, 나무 도구를 만드는 것 등 다양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설명한다.


그리고 남성이 석기 도구를 만들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고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인류와 유전적으로 유사한 조건을 가진 침팬지 등의 유인원을 관찰하는 것이 있다. 침팬지, 특히 암컷은 나뭇가지를 도구로 이용하여 흰개미를 잡는다. 이러한 행동은 수컷 침팬지보다 암컷 침팬지에서 더 자주 발견되었다. 따라서 인류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여성이 도구를 먼저 만들었거나 더 자주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심지어 남성이 사냥을 담당하였다는 증거조차 없다. 유인원의 경우에서도 암컷이 새끼를 양육하지 않는 동안에는 사냥에 참여하는 비율이 수컷과 비슷하다. 다만 암컷이 임신하였을 때에 한해, 수컷이 먹이를 암컷에게 주는 부조의 역할을 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특수한 경우에 한정하여 남성이 사냥을 좀 더 담당하였을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 암컷이 임신하지 않은 경우에는 남성 못지않게 사냥에 참여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식량 확보를 위해 인류가 사냥을 선택했다면, 그것이 남성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사냥을 통한 고기 섭취가 인류의 일반적인 식단인지도 살펴봐야 한다. 그런데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인류의 식단은 75%가 식물로 구성되어 있다. 식생활에서 고기의 섭취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어서, 남성이 사냥을 통해 식량을 확보했다는 생각은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심지어 고기를 획득하는 방법은 사냥만이 아니다. 따라서 남성이 주로 사냥을 담당했다거나 여성이 채집을 담당했다는 주장에도 충분한 근거가 없다. 


따라서 인류학적으로 본다면, 성역할론은 그럴 것이라고만 믿는 것에 불과하다. 태생적으로 성역할이 정해진다기보다, 사회나 문화, 환경적 요인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성 역할이 상황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역할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윤지당의 주장도 그렇다. 사회적 질서를 먼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평등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생물학적 성에 따른 사회적 성역할에 정당성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회적 동일시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으로 개인의 노력이나 의지가 표현되기 어렵다면, 결코 동등해질 수 없다. 결국 '질서를 잘못 이해한 개인의 탓'이라는 인식만 정당성을 얻게 된다. 그렇기에 조선시대에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 여성은 이질적으로 평가받아 소수에 불과했던 것이다.


간혹 같은 여성 중에도 저항하는 여성을 불편하게 느끼는 경우가 있다. 그 이유는 남성 중심의 사회와 전통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게 사회가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기회를 준다고 믿거나 성역할이 태생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여성을 볼 때, 그것을 그 여성의 능력 부족이나 자연스러운 일을 부정적으로 보는 태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사회에서 개인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그리고 과학적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 인식이다. 


이러한 이유로 후기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성역할론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인간으로써 동등한 여성이 아니라 남성에 대한 보정된 개념으로 여성이 남성화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 과학적 정당성을 얻고 있다. 생물학적이고 발생학적인 성의 분류방식에 의문이 던져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성을 결정하는 과학적인 인식은 발생학적 측면에 근거하고 있다. 남성의 X염색체와 Y염색체가 여성의 X염색체를 가진 난자와 만나면서 남성이나 여성으로 정해진다고 본 것이다. 이로 인해 XX염색체를 가진 사람을 여성, XY염색체를 가진 사람을 남성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XX를 가진 남성, XY를 가진 여성 등 '간성(intersex)'이라고 불리는 사례가 발견되면서, 이런 이분법적 구분에 의문이 생겼다.


이후에 과학계에서는 성염색체만으로 성이 결정되지 않고, 정소결정인자라는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런 형태의 성을 병리적 이상으로만 보려는 경향이 강했기에, 처음에는 치료 대상으로 봤다. 그래서 미성년일 때부터 부모의 요청에 따라 수술을 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서 자신의 성을 결정할 권리가 박탈되는 모순을 발견했다. 실제로 '간성(intersex)'으로 태어나는 비율은 빨간 머리를 가진 사람과 비슷한 0.05%에서 1.7%로 적지 않다.


이런 상황을 계기로 성을 결정하는 권리가 인간의 자유와 권리의 문제로 볼 수 있게 됐다. 간성의 실체를 인정하자는 의견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2016년에는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가 '간성(intersex)'을 인식하기 위한 웹사이트를 만들었고, 몰타나 독일, 호주 같은 나라들도 성별 표기 방식을 제도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제도적 변화가 일어나면서 X와 Y 염색체만으로 남성이나 여성을 분류하는 방식이 비과학적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제 많은 나라에서는 제 3의 성을 법과 제도에 포함해서 표기하고 있다. 이것은 여성과 남성만을 고려하는 이분법적인 분류 방식에서 벗어나 '포함되지 않는 인간'을 인정한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분류는 이제 과학적 명확성을 잃었고, 제 3의 성을 인정하는 사회와 법, 제도적 규범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카테고리에 자신을 동일시하며, 이게 변하지 않는 진리처럼 인식하고 있다. 이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생물학적이나 해부학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심지어 보부아르가 지적했던 '사회적으로 길러지는 성'에 대한 불평등한 전통질서의 전제조차 흔들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인식하는 것이다.


1792년 영국의 여성인권운동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는 《여성의 권리 옹호》라는 저서를 통해 여성도 남성과 같은 이성을 지니고 있으며 평등한 교육과 정치적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당시 18세기는 유럽을 뒤흔든 화려한 해방의 수사가 팽배한 근대의 시대였다. 인치의 시대가 끝나고 법치의 시대가 열리며 국가의 주권이 왕에서 국민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남성만을 위한 것이었고, 여성은 여전히 억압과 속박을 받는 전근대적 세계에서 살아가야 했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주장 이후로 200여 년이 흐른 뒤에야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1920년, 영국은 1928년, 프랑스는 1946년에 이루어졌다. 한국은 1948년, 스위스는 1971년에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었다.


근대 민주주의 국가가 완성되는 관점에서 보편적인 인간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는 매우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오랜 시간 동안 동등한 인격적 존재로 인식되지 않고 소외되어 왔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여성들은 수백 년 동안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형식적으로라도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따라서 여성의 참정권 인정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그럼에도 여성에 대한 편견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이로 인해 남성과 여성의 제도적, 형식적 균형은 사회적 인식, 태도, 그리고 권력관계에서의 불평등 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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