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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Oct 26. 2023

낭만에 대하여

최백호 선생의 노래를 듣다가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자주 우연히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를 듣게 된다. 1988년 처음 발표된 이후 지속적으로 새롭게 업데이트되어왔다. 가수의 목소리는 지나가는 시간만큼 구슬프고 애절하다. 가사에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궂은비 내리는 날 다방에서 한 잔의 위스키”, “밤늦은 항구에서의 뱃고동 소리”와 같은 이미지들은 일상적이면서도 동시에 허무한 삶을 은유한다. 기운을 다 잃어 비틀거릴 것만 같은 저녁, 번화한 항구 거리에서조차 쓸쓸함과 공허함을 느껴야하는 사람의 인생을 떠올리게 한다.


중년의 남성에게 들려오는 색소폰 소리와 다방 마담과의 실없는 농담이 기어이 그를 허무한 감정으로 이끌었다. 나이가 무의미하리만큼 욕망을 잃어버린 그는, 분명 과거에는 소중히 여겼지만 어느새 잃어버린 것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 잃어버린 것이 지금 이 순간 중년의 남성이 살아온 삶의 모든 과정을 후회의 감정으로 적셨다. 하지만 그 원인이 과거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현재의 처지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아쉬움은 로맨틱하기보다는 짙은 그리움과 담담함으로 다가온다. 그는 그것이 낭만이라 했다.


최백호 선생의 목소리는 격정적이지 않아서 이러한 복잡한 인간의 감정을 더욱 잘 살리는 듯하다. 낭만이 단순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때로는 아픔과 그리움 회한이 섞인 복잡한 감정의 향연임을 그의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다. 이 노래를 통해 우리 모두는 인생의 무게와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무심코 지나쳐버린 삶의 순간들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노래를 듣고 있는 순간 과거의 아름다웠던 순간들과 현실사이의 괴리가 삶의 모든 순간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때때로 우리가 가볍게 여겼던 한 순간의 기억이 얼마나 중요할 수 있는지를 강조해 준다. 그러나 이러한 회한은 지나간 세월에 대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빈공간이다. 그래서 소리 내지 못하고 울음을 토하는 남성의 뒷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인생은 리셋이 되지 않는다. 우리 각자의 삶은 과거의 선택과 경험, 그리고 주변 사람들 및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며 변화해 간다. 삶은 연속적이며 유기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어, 하나의 행동이나 선택이 반드시 다른 많은 요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인생의 리셋은 단순히 개인의 현실적 문제를 회복하는 차원을 넘는다. 자신에게 보장된 자유로 지금까지 살아왔기에 책임을 회피할 수단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후회하며,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그 가능성을 상상하곤 한다. 특히 무엇인가를 잃게 되었을 때는 이런 마음이 간절해진다. 그래서 낭만은 현실을 초월하는 것 혹은 현실에서 요구하는 선택을 외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마치 붙잡아서는 안 되는 것이나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는 무모함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낭만이란 무엇일까? 낭만은 사랑과 정열, 애정과 감정의 교류, 로맨틱한 제스처와 행동까지 포함하는 매우 넓은 범위의 의미를 갖는다. 때로는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경험에 중점을 둔 문화적, 예술적, 지적인 운동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딱히 한 개념으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과 경험에 대한 가치판단은 자유와 진정성에 의해 규정된다. 따라서 낭만은 결국 다차원적인 내용을 갖지만 인류의 전 역사과정에서의 공통점은 개인주의를 반영한 것이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유럽에서 낭만주의가 유행했다. 이시기 낭만주의는 특별한 특징이 있었다. 당시는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사회와 문화가 급격히 변화를 시작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휩쓸려야 했던 시절이었다. 이는 개인에게 극복하기 어려운 사회적, 문화적 억압을 가져왔다. 과학과 이성이 본격화되고 법과 규범이 강력하게 힘을 발휘했기에 인간은 선택의 여지없이 계몽되어야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무지한 삶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을 추구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개인의 열정과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었기에, 이에 대한 반발로 낭만주의가 대두되었다. 여기서의 낭만주의는 일상적인 로맨틱함과는 다른 차원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 존재에 대한 이유를 묻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는 성찰적인 측면이 강조되었다. 이는 곧 사회의 기대나 변화에 대한 요구에 맞서 개인의 감성과 꿈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지키려는 저항이었다.


당시 발표되었던 대표적인 문학작품인 프랑켄슈타인, 파우스트, 노틀담의 곱추 등에서 시대에 대한 인간의 욕구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의 한계와 인간의 창조물에 대한 책임을 탐구하며, 파우스트는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내적 갈등을 고민하게 만들었고, 노틀담의 곱추는 사회계층을 넘나들며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과 질투, 희생과 구원을 성찰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이성보다는 감정과 직관을 집단보다는 개인을 사회보다는 자연을 현실보다는 이상을 그리고 억압으로부터의 반항을 통해 인식적 초월을 추구했다. 따라서 이 작품들은 낭만주의 문학으로 분류된다.


뿐만 아니라 미술작품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당시 프랑스의 미술계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예술에 영감을 받아 엄격한 형식, 균형 잡힌 구성, 냉정하고 차분한 색채 등을 사용하는 신고전주의(Neoclassicism)의 영향이 강했다. 주류의 이러한 인식은 미술계에서 성공의 열쇠로 여겨졌다. 그러나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라는 화가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작품을 통해 미술계가 추구하는 사조와는 다르게 강력하고 대담한 색채를 사용해 혁명의 열정과 혼란을 표현했다. 이 작품은 또한 혁명과 자유를 주제로 삼아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아냈다. 개인이 갖는 영웅에 대한 이미지를 강조하면서 사실적 묘사보다는 혁명의 의미를 재해석한 것이다. 이는 예술을 통해 사회참여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때문에 자유의 여신은 프랑스의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존재가 되고 혁명군은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는 영웅이 되었다. 현실이 아닌 개인의 가치추구를 통해 감동을 선사한다는 점은 충분히 낭만적이다. 이 시기의 낭만주의는 개인의 감정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중요시했다. 따라서 전통적 규범과 권에 대해서 부정적이었고 계몽주의에 대해 반발이 강하게 작동했다. 그런 면에서 충분히 성찰적이었다.


20세기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시대였다. 특히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급속한 산업화 및 도시화는 사회와 개인의 삶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대량생산과 소비문화는 개인을 고립시키고 표준화된 삶의 방식에 저항하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때문에 19세기 낭만주의가 강조했던 개인의 감정과 자유에 대한 추구와 맞닿아 있으며, 이러한 정신은 20세기를 통해 변형되고 재해석되었다.


여전히 낭만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사조와 방향성을 모색하는 전환기였다. 모더니즘 문학, 예를 들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같은 작품들은 비선형적인 시간 구조와 내면의식의 흐름을 통해 현실의 파편화된 모습을 반영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전통적 형식인 시간의 순차성을 따르는 서술 방식을 탈피하며 모호함을 유지하면서 개인의 내면세계와 감정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변화한 것이다. 


미술계에서도 이러한 변화는 뚜렷했다. 추상표현주의가 등장하여 전통적인 미술 형식을 벗어난 새로운 표현 방법을 제시했다. 잭슨 폴락과 같은 예술가들은 캔버스 위에 물감을 튀기는 방법으로 강렬하고 원초적인 감정을 표현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개인의 내면세계를 깊이 있게 탐구하며, 동시에 관람자에게 강렬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감정과 개인적인 경험을 솔직하게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아티스트들은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며, 동시에 사회적, 문화적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나타냈다. 이들은 모두 낭만주의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새롭게 재구성된 대표적인 사조들이다. 개인의 감정과 자유에 대한 추구는 계속되었고 이러한 요소들이 현실과 맞물려 변형되고 새로운 방향을 보여준 결과였다. 


20세기 말 디지털 시대의 등장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인터넷은 정보의 홍수를 가져왔고, 이는 개인의 정체성과 자기 인식에 혼란을 야기했다. 온라인상의 인격과 현실 세계에서의 인격은 분명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개인은 스스로조차 자신의 진정한 인격이 무엇인지 구분하기 어려워하고 있다.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할 수밖에 없다. 


낭만은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따라서 낭만이 어떤 사조에서 어떻게 작용되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건 여전히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감정에 정직하려는 노력에 있다. 각 시대마다 갖는 낭만의 특성은 조금씩 변화했고 그때마다 새로운 사조를 탄생시켜냈다. 하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있었다. 그렇기에 낭만은 후회나 회한의 감정에 의존하는 것만이 아니다. 설렘이나 흥분 열정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에도 깊게 연관되어 있다.


자신에 삶에 의미를 찾는 일은 결코 후회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또한 그것이 반드시 과거에서 구현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기대가 지나온 과정보다 살아갈 일들에 대한 걱정이 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낭만은 개인의 성장을 촉진한다. 자아를 개선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낭만적인 감정과 행동은 그것이 무모해보일지라도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고 강한 유대를 형성할 수 있다. 이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 상대를 가장 중요하게 인식하고 우선시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만들어 낸다. 어찌 흥분되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만을 사랑하는 그 집중력은 단단한 관계를 기필코 만들어낸다. 그래서 낭만은 생물학적으로 프로그래밍 된 전략이 될 수 있고 인류가 존재한 이래 지속적으로 진화한 결과라 할 수도 있다.


이런 인간의 본능이 외부로 표출되고 그것이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면서 자연스럽게 이러한 감정과 태도는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지나친 경쟁에 갖는 피로감과 위험으로부터 때론 휴식을 제공한다. 따라서 개인이 갖는 내면의 세계는 사회적 상호작용에 의해 문화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인 현상에도 불구하고 현실과는 다른 괴리감이 있다. 이는 적극적 신뢰가 전제되어야 하고 그 신뢰는 담보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신뢰하는 사람은 모든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자연재해인 지진이나 인도네시아 코모도 도마뱀에게 낭만을 기대하는 것은 충분히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이 될 수 있다. 자연 뿐 아니라 사회도 마찬가지다. 사회는 개인이 갖는 이상이나 기대가 모두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욕망과 욕구가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이러한 맞물림으로 사회는 체계적인 규칙과 질서를 유지하며 예측 가능한 연속성을 갖는다. 때문에 사회는 개인에게 행위의 책임감과 성숙을 요구하고 이러한 틀을 유지하기 위해 압박을 가한다. 


그래서 최백호 선생의 ‘낭만에 대하여’는 개인의 내밀한 감정과 경험뿐 아니라 현실을 반영한다. 과거에서 비롯되는 후회의 감정에는 주체의 늙음이 녹아 있다. 그에게 남아있는 시간이 적다는 것은 나이를 직접 언급하거나 하는 방법으로 곡 곳곳에서 표현된다. 물론 노래의 주인공이 젊은 청춘이었다면 이러한 회한의 감정을 공감하기 어려웠을 터이다. 그래서 남아있는 시간이 없다는 것은 긴장을 높이는데 탁월한 설정이었다. 또한 그러한 절박함은 미래가 없는 인생을 상상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낭만에 대하여'라는 곡은 그렇기에 더욱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낭만적인 요소를 넘어서서 직면해야 하는 현실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판타지에서 리얼리티로 급격하게 전환되어버린다. 물론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낭만적인 이야기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남은 시간이 없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고민임을 부정하기란 어렵다.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현실에서 구속되어있는 낭만이 과연 가치가 있는 것일까? 개인적인 진정성만으로 낭만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 노래가사보다는 좀 더 근사한 환상이 내포될 수는 없었을까? 가슴에 빈 공간을 꿈과 기대로 채우는 것이 정말로 어려웠을까? 곡을 반복해서 듣고 또 듣게 되었지만 이런 고민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초라하고 늙은 그래서 공허해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재생될 뿐이었다. 그러나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문득 깨닫게 된 것이지만, 낭만이 현실을 부정하거나 도피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물론 누구나 낭만을 생각하면서 좀 더 환상적이고 이상적인 것들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최백호 선생의 이 곡은 최소한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솔직하고 그 자체로서 현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충분히 낭만적이기도 한 것이다. 낭만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무엇을 쫒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어쩌면 낭만이란 비현실적인 상상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의 긴장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내면의 진실한 목소리 일 수 있다. 그것에 따라 선택할 자유는 여전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낭만적인 일들이 대체로 이렇다. 돈 대신 친구나 가족을 선택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위해 직장을 포기하는 이들, 혹은 꿈을 향해 끊임없이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하는 이들이 그렇다. 현실과 타협을 거부하면서도 부정하지 않으며 자신의 진정한 감정과 가치관을 따르면 살아간다. 이런 삶의 태도를 낭만이라는 말 외에 부를 말이 무엇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잃어버렸던 건 과거의 감정이 아니었다. 우리가 정말로 잃어버리고 있었던 건 낭만이었다. 낭만 그것은 자유와 꿈에 관한 인생의 한 길이다. 그것을 깨닫는데 너무나 오랜 세월을 보낸 것이다. 그래서 남겨진 시간은 언제나 자신에게 주어진 최대치의 시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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