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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Oct 30. 2023

늙는다는 것에 대하여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던진 낭만인생

어느 날 아침 거울을 보니, 미간에 희미한 주름이 있었다.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지만, 어쩐지 그 주름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그 순간, 나 역시 세월의 흔적을 피해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발을 맞춰 가려고 노력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낯선 세상이었다. 한 가지에 익숙해질 무렵이면 언제나 새로운 변화가 찾아왔다. 그래서 거울에 비친 세세한 주름을 보기 전까지 나이를 먹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이 불변의 진실은 꽤나 강렬했다. 늙어가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 어디 있을까. 


되돌아보면,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었고, 한 어려움을 넘기면 또 다른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쉬지 않고 달려야 했던 삶이었다. 이제는 세상의 원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왜 그렇게 살아왔는지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하거나 지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늙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사람들은 대체로 늙는다는 것은 생명주기의 필연적인 단계로 말한다. 개인의 능력이나 활력의 저하와 외모가 낡아지는 변화를 거스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단순히 자연의 법칙이나 생명의 단계로 분류되는 하나의 과정으로만 생각하기는 너무 단순하고 그 의미가 제대로 반영되는 것 같지는 않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미래에 대한 기대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이는 인간이 현실을 극복하고 이상을 추구해왔음을 반영한다. 그래서 삶은 언제든 바꿀 수 있는 대상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극복하고 있었던 것일까? 오직 변한 것은 어쩌면 현재의 늙음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죽음에 다가가고 있음을 은연중에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만약 그 결과가 죽음이라면, 지금까지의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회에 첫 발을 디뎠을 때 나는 평가를 받고 비교 당해야하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자주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곤 했다. 그럴 때마다 강도 높은 초콜릿을 먹거나 달콤한 커피를 주저 없이 들이켜야만 안정이 되었다. 어느 날에는 불면의 고통에 시달려, 눈을 뜨지 않고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한 적도 있었다. 자주 비위에 거슬리고 언짢은 기분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불만을 토로하기는 쉽지 않았다. 남들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특별히 불행하다고 느낄 만한 일은 없었지만, 이러한 증상이 자주 나타났다.


타인의 웃는 얼굴이 마치 나를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때마다 내 마음속에는 미묘한 차가움이 감돌았다. 그런 내 모습이 한심스러웠다. 왜 못나게 살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내 탓인지 세상 탓인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원인이 어디에 있든 나는 누구에게도 인정받는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았다. 내 마음은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거칠게 요동치며, 불안과 혼란 속에서 나를 괴롭혔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지?’ ‘어떻게 살아야지?’ 하는 철 지난 고민을 하게 될 뿐이었다. 아무 의지도 없이 시간을 허비하며 하루를 보낸 적도 많았다. 그것은 마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잉여의 모습이었다. 도대체 왜 태어나서 이 고통에서 살아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간혹 여행을 가려 할 때 찾게 되는 집 한편에 놓인 여행 캐리어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내 인생은 그렇게 텅 빈 공간이 되어버렸다. 사회에서 조차 나는 점점 투명인간이 되어갔다. 


타고난 능력이 부족해서인지, 나는 원하는 만큼의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사람들은 쉽게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운이 없었는지 노력은 자주 나를 배신했다. 그럴 때마다 상처를 받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나에게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철들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경쟁에서 뒤처질 것 같은 조바심은 그들의 관심이 아니었다. 인생은 자신의 책임이고 그것을 수용하는 것은 숙명이었다. 노력과 성취는 막연한 기대가 아닌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내 삶은 이런 혹독한 수련을 통해 단련되었다. 밋밋한 삶이 이어졌지만 안정적이었다. 일을 하고, 돈을 벌고 가끔은 여행을 갔다. 여전히 평가받아야 했고, 비교당해야 하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지만 세상은 원래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다. 애쓴 일이 성과를 만들었으면 좋겠고 월급 외에 상여금을 좀 더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때론 불로소득을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이 행복인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가지지 못한 것들로부터 괴로움을 당한다. 새로운 우월감이나 열등감이 생겨났고 그럴 때마다 누군가와 마주하며 살아가는 것이 귀찮고 피곤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 고통을 유발하곤 했다. 그럴수록 나는 현재의 삶을 유지하는 것에 집착했다. 다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요구하는지 살피고 그에 따라 행동하려 노력했다. 어차피 타인은 내 의지와 명령으로 통제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넣는 것과 같았다. 멈출 수도 채울 수도 없는,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은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내 삶의 동기였고 살아야하는 이유였다. 다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으면 더 이상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만이 남아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주어진 시간이 사라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늙음을 실감한 이 순간까지 그랬다.


사람의 삶에는 반드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늙음은 미래에 대한 기대마저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이상을 꿈꾸고 희망을 이야기했던 삶은 점차 현실에 안주한다. 변화를 주도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할 수 있는 일은 시간이 더디 가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조금은 보수적일지라도 세상의 변화를 늦춰 자신의 삶에서 부족해져버린 시간을 지키는 것일 수 있다. 그렇기에 늙는다는 것은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현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동시에 마주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과거를 통해 삶의 지혜를 얻고, 현재에서는 그 지혜를 바탕으로 삶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이는 또한 우리로 하여금 삶의 무게와 시간의 흐름을 더욱 실감하게 만든다. 주름이지고 힘이 빠지는 몸을 마주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변화하는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는 과정일 수 있다. 그래서 긍정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물론 이 시기를 내면의 평화를 찾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손실과 회한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늙음이란 결국 우리에게 유한한 존재임을 일깨워준다. 그것은 최선을 다해 살고자하는 동기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불안과 공포를 야기할 수도 있다. 늙음은 불가피한 삶의 일부임이 분명하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일부는 지혜와 경험의 증가로 보고 삶의 뒷부분을 보다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시간으로 만들고자 할 수 있다. 다른 이들은 젊음을 잃는 것에 대한 슬픔이나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다.


오래전 진모영 감독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다. 영화는 늙은 부부의 삶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행에도 성공했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개봉될 당시 젊은 세대들이 많이 관람했다는 사실이다. 왜 젊은 세대가 이 영화를 보았을까? 또는 영화를 보며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런 의문은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오래지 않아 해결된다. 영화는 사실을 담담하게 보여주지만 마치 각본이 있는 것처럼 시간의 순서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서사 완성한다. 그 과정에서 비약이나 억지가 없다. 때문에 영화의 두 주인공은 지금까지 내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다. 수십 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나는 가끔 영화 속 주인공들을 검색해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손끝이 저려왔다.  


영화는 76년의 생을 함께한 노부부의 평범한 일상, 사랑이나 행복뿐 아니라 갈등까지 보여준다. 특히 중반부에 노부부의 생일잔치 날 자녀들의 싸움은 높은 수위의 긴장이 발생한다. 자녀들은 서로가 부모를 잘 모시지 못한 탓을 하며 격하게 감정을 폭발시킨다. 어찌 보면 평범한 우리의 일상의 한 단면일순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누구를 위해서 당신들은 싸우고 있습니까?"라고 묻게 된다. 즐거운 잔칫날 노부부의 그렇게 슬퍼 보이는 마른 눈물이 기어이 관객인 나조차 울컥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때론 해명만으로도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해 있을 때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때문에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일들을 타인의 책임으로 돌려야만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것은 또한 자신에 대한 책망과 죄책감이 있었으리라. 자녀들의 감정적 대립은 그런 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부부의 행복을 방해하고 슬프게 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자녀의 싸움은 노부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평안을 위한 한풀이가 되어버린다. 인간이란 이처럼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선택을 한다. 타인의 감정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한 행위인 것이다. 겉으로는 이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본질은 이기적인 행위로 귀결된다. 


사람의 행위에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 스스로 규정한 수많은 규범은 허구이며 거짓이 되어버리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다.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냉혹한 현실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두렵게 한다. 내가 당연한 듯 여기는 생각이나 그로인한 행위에는 나 자신만을 위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의문과 의문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한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은 인간이 갖는 본질적 욕망을 억제하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그들의 관계가 마냥 부드럽고 유하지만도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서로 의지하며 지탱하면서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관계적 평등과 윤리가 그리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영화를 보며 아직은 어렵게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사람다움이라는 단어의 참 뜻을 다른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느껴졌다. 두 부부가 평생 살아온 과정이 평등을 넘어 공정의 합의 단계와 수용이 억지스럽지 않았다. 작위적 배려가 아닌 타자의 이해와 관용이 어떻게 구현되는지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영화는 할아버지가 영면에 들어가면서 끝을 향한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할머니가 원치 않는, 영원한 이별의 강을 건너는 것이다. 추운 겨울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따듯한 무덤을 떠나지 못한다. 할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할머니는 이제 춥지는 않은지 걱정한다. 그래서 할머니의 힘없는 생목소리가 더 구슬프게 들린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할아버지가 없는 남겨진 삶이 얼마나 추울까? 그렇게라도 혼자가 되어 버린 자신을 위로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영원한 이별은 그런 의미에서 더욱 슬프다. 왜 탄생하며 왜 소멸하는 것일까? 아직 어떤 사람도 이러한 물음에 명확히 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살아야 하지?"에 대한 물음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은 해결되지 않는 영역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 나를 관통했던 질문의 미약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살아간다는 것은 존재의 본질보다 존재의 내용이 어쩌면 인간의 삶에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부부의 삶에는 거창한 거대담론이 없다. 그것은 그동안 나의 불만들,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비롯된 나의 감정들을 허세로 만들어 버렸다. 한 사람의 인생은 때론 맺었던 관계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정해놓은 끝은 단지 결과로서 나타나는 현상일 뿐 정해진 사실은 아닐 수 있다.


인생은 그리 로맨틱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기대와는 다르게 기복이 많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펼쳐진다. 노부부를 통해 젊은 관객들은 삶이 왜 진정성을 갖아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이 때론 타인이 주는 고통과 외로움일 수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삶을 더욱 깊고 특별하게 만든다. 분명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과 이별은 그들의 존재와 삶을 한층 더 가치 있게 만들었다. 죽음을 향해 가는 늙음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더 높은 수준의 인간적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었다. 


인생은 늘 다시 시작된다. 인생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길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던 누가 뭐라고 규정하던 자체로 실존하는 것이다. 그것에 정답은 없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자신의 두 다리로 서게 될 무렵 엄마의 품을 떠난다. 그 순간 누구나 인생의 길 위해 서게 된다. 그 길에는 자신의 사변이 가득 담긴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 그것이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인지는 그 그림을 본 사람이 평가해 줄 것이다. 지금 당장 꿈꾸는 모든 것 그것이 비루한 욕망이라도 도전만으로도 충분히 낭만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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