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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Oct 31. 2023

낭만이 사라진 시대 PART- 1

무너진 개인들

20세기 초 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독일에서는 낭만적 가치들이 왜곡되고 억압되기 시작했다. 권력을 쥔 선동가들은 대중을 통제하고 조작하면서 개인의 감정과 상상력을 억제하고 획일화된 의식을 강요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독일 사회가 극심한 불안정과 혼란 속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패전 국가로서 겪어야 했던 베르샤유 조약의 무거운 배상금 부담, 경제적 불황, 실업률의 급증 등은 국민들의 불만과 불신을 키웠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은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사상을 급격하게 확산하는 토대를 제공했다. 때문에 개인의 내면을 중시했던 낭만주의적 가치들도 왜곡되고 억압받게 되었다.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다.”


“대중에게 결코 두 가지 이상의 적을 제시하지 말라.”


“가장 단순하게 가공하고 반복할 수 있는 자만이 여론을 휘어잡을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악마의 선동가로 유명한 독일의 괴벨스의 주장으로 알려진 말들이다. 이는 목적을 위해 어떻게 대중의 의식을 조작하고 왜곡하는지를 반영한다. 개인의 감정과 상상력을 어떻게 억제하며, 획일화된 의식과 그로 인한 동일한 사회 구조를 형성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방법론인 셈이다.


사람들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위기에 처했을 때 내면적 경험과 감정보다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개인의 독립적 사고와 비판적 판단력이 악화되기 쉬운 조건을 활용하기 때문에 괴벨스의 선동은 특히 효과적이다. 괴벨스의 주장처럼 증오는 때로는 강력한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이를 이용하여 특정 집단이나 사상을 적으로 몰아세우고 단순하고 반복적인 메시지를 제공한다면 사람들은 무비판적으로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결국 선동가의 통제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낭만주의적 가치들은 자주 개인의 일탈을 촉진하고 주체성과 능동성을 강조한다. 때문에 이는 선동가의 입장에서 심각한 도덕적 결함을 의미했다. 개인의 자유로운 감정과 창조적 상상력은 당연히 억제되어야만 목적지향적인 인간을 만들 수 있었다. 따라서 개인의 삶은 오로지 선동가가 설정한 목표에 맞추어 재조정되어야 했다. 그것은 개인을 기계화된 도구로 전락시켜, 그들로 하여금 선동가의 목표 달성을 위한 역할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통일성과 획일성을 완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이 자신의 내면세계와 진정한 감정을 상실하는 것은 정체성과 자유로운 정신을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괴벨스가 이러한 선동을 감행한 이유는 그의 개인적인 경험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는 1897년 독일의 라인란트 지방의 라이트 시(현 묀헨글라트바흐 시)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골수염 때문에 다리가 굽는 병에 걸렸고, 발육부진으로 오른쪽다리가 왼쪽다리보다 덜 자라게 되어 장애와 함께 살아가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장애를 지적인 능력을 높이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 괴벨스는 중등교육기관인 김나지움(Gymnasium)에서 탁월한 성적을 기록했고, 졸업식에서는 졸업생 대표로 졸업사를 낭독할 만큼 우수한 학생으로 인정받았다.


그 무렵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을 치루고 있었다. 그러나 괴벨스는 장애로 인해 전선에 파견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일은 괴벨스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군대에 복무하는 것을 도덕적 의무처럼 인식했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미필자는 자주 취업의 기회조차 제공받기조차 어려웠다. 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패전으로 끝났다. 하지만 경제 상황은 매우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다. 일자리는 부족했고 실업자가 거리에 넘쳐났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군복무를 하지 않았던 괴벨스는 실업자중 하나가 되었다. 


이 시기, 그는 오스발트 슈펭글러의(Oswald Spengler) 《서구의 몰락》이라는 작품을 접했다. 슈펭글러는 모든 역사는 유기체로서 생성과 소멸을 영원히 반복하는 법칙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주장하는 독일의 역사가이자 문화 철학자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한 문화에서 물질주의가 지배한다면 그것은 문화의 종말인 동시에 새로운 문명의 시작이었다. 물질주의가 팽배한 서구는 곧 몰락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된다는 주장이었다. 슈펭글러의 주장에 동조한 괴벨스는 독일도 곧 몰락할 것이며, 그 자리에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고 믿었다.


괴벨스의 입장에서 독일국민들은 자신들의 인격과 개성을 유독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물질주의를 추구하고 공동체적 가치를 상실한 상태를 반영한다. 때문에 이기적이며 타락한 상태로 간주했다. 괴벨스는 물질주의의 확산을 유대인의 문화에서 찾았다. 당시 유대인들은 독일의 미디어, 예술, 금융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력을 미쳤다. 또한 유럽에서 유행했던 자본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개인주의가 독일에도 유행했다. 때문에 이러한 문화가 독일의 전통적인 가치와 정체성을 훼손하고 사회를 타락하게 만들고 결국 공동체적 가치와 민족의 순수성을 해쳤다고 생각했다.


괴벨스는 바이마르 공화국(현재의 독일)의 몰락을 예견하면서 새로운 시대에서는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유대주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민족혼을 살릴 수 있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괴벨스의 현실은 암담했다. 여전히 실업자에 불과했고 이러한 생각을 쉽게 표현하기도 어려웠다. 취업이 어려워진 괴벨스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진학해 박사학위를 취득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의 현실은 여전히 어두웠다. 언론사에 기고문을 작성해주며 작은 돈을 받는 소일거리가 고작이었다. 물론 언론사에 취업하려는 시도는 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유대인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당시 언론사의 사주가 유대인이었다. 이 경험은 괴벨스의 인식에 확신을 갖게 했고 유대인에 대한 분노도 커져갔다.


실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경제적 상황은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등 최악의 상황이었다. 독일정부는 전쟁배상금으로 발생한 대외채무를 해결하기가 어려웠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외채상환기일에 공매도를 활용하며 마르크화의 가치를 폭락시켜 환율을 폭등시켰다. 실질적인 채무를 줄이는 효과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수입재화의 가격이 증가하게 되었고 국내 물가의 상승을 초래했다. 정부의 재정지출도 예상 밖으로 팽창되었다. 물론 인플레이션의 원인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었다. 하나는 정부의 복지지출로 인한 재정적자가 문제가 되었다는 주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금융 부분에서 시작된 공매도로 인한 자산 인플레, 즉 환율 상승으로 수입 물가상승을 불러와 국내 물가상승이 재정적자의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유가 어디에 있든 전쟁배상금을 지불할 수 없는 현실적인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국민의 인내심은 점점 바닥이 나고 있었다. 


급기야 승전국이었던 프랑스와 벨기에는 전쟁배상금을 받기위해 실력행사를 감행했다. 군대를 파병해 독일의 라인란트의 루르 공업지대를 점령하고 철도와 광산으로 자체적인 수익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독일국민들은 분노했지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불복종 운동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벨기에정부는 이조차 용인하지 않았다. 사보타주를 명분으로 독일국민들을 자신들의 군사법정에 세워 처형한 것이다. 독일정부는 이 죽음에 항의 한번 제대로 못할 정도로 무능력한 모습을 보였다. 국민들의 분노는 더 이상 억누르기 어려운 상황으로 커져갔다. 


국민의 분노는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현상도 나타났다. 라인란트에서 극우파는 독립을 선포했고, 바이에른 자유주의자들과 나치스를 비롯한 극우 국민주의자들은 독일투쟁동맹을 결성하고 아돌프 히틀러를 지도자로 추대했다. 이 들은 1923년 11월 8일 이른바 맥주홀 쿠데타라고 불리는 뮌헨폭동의 주역이었다. 당시 맥주홀에는 바이에른의 주지사가 주 정부의 실력자들과 함께 독일혁명 5주년 기념집회를 열고 있었다. 히틀러와 독일투쟁동맹은 바이에른 정부의 대표자들을 제압하여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치밀한 준비를 하지 못한 이들의 쿠데타 시도는 실패했고 히틀러는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하지만 독일투쟁동맹의 쿠데타 시도는 국민의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괴벨스도 분노를 가진 지지자 중 한명이었다. 히틀러에게 감동받은 괴벨스는 곧바로 나치스에 가입했고, 히틀러와의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되었다. 괴벨스는 그의 지식과 재능을 활용해 히틀러를 독일국민의 영웅으로 신격화했다. 그는 숙련된 능력자였다. 덕분에 나치스의 당세는 급속도로 확장되는 성과를 거두었고, 1933년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선거에 승리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그 결과로 히틀러는 총리가 되었다. 괴벨스도 국민 계몽 선전부 장관 등의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가 선전부 장관을 역임하며 한일은 언론을 통폐합하고 통제하는 일이었다. 히틀러의 사상과 철학을 더 많은 독일국민에게 전달하는 게 그의 임무였다. 라디오라는 미디어 매체를 활용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당시 라디오는 비싼 가격 때문에 일반국민들은 구매하기 어려운 상품이었다. 그러나 괴벨스는 국가 보조금을 지원하는 방법으로 저렴한 라디오 수신기를 개발하고 보급했다. 성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광범위한 대중들은 히틀러와 나치스의 메시지를 듣게 되었다. 그런 경험을 기반으로 TV까지 활용해 더욱 선전과 선동을 확대해갔다. 


또한 대중의 심리를 활용하는 다양한 시도도 병행했다. 딱딱하고 진지한 내용의 정치적 메시지를 코미디 쇼나 음악 등을 적절하게 조합하여 전달한 것이다. 이 창의적이고 세련된 방식으로 인해 국민들은 쉽고 편안하고 즐겁게 메시지를 수용했다. 그것에 아무런 비판의식은 없었다. 점차 그의 손끝에서 히틀러는 독일의 우상이 되었고 히틀러의 목소리는 독일국민을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진리가 되어갔다. 마침내 국민들은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하나가 된 독일국민은 스스로 우수한 인종이라고 여기기 시작했고 과거의 잘못된 사상을 제공한 유대인을 배척하는데 적극 동참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독일은 약하고 분열되어있는 국가가 아니었다. 위대한 독일의 우수한 국민이 각성한 것이었다. 그러나 개개인의 가치와 생각들은 무시되거나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독일은 하나의 가치를 가진 완전한 공동체를 유지해야했기 때문이었다. 공동체의 힘은 외부로 뻗어나갈 만큼 역동적이었다. 이러한 힘을 기반으로 히틀러는 1939년 폴란드를 침공을 결행했다. 독일정부는 당시 폴란드에 살고 있는 독일인들이 차별을 받는다는 보도를 의도적으로 펼치며 국민의 분노를 촉진했다. 이는 위대한 독일국민을 모욕하는 일이 분명했기에 그 책임을 물어야 했다. 그렇게 독일국민의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로 전쟁의 명분을 얻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1939년 시작하여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고작 6여년의 시간동안, 600만 명이라는 유대인이 학살되었고, 전사자만 2,500만 명이었으며 3,000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그렇게 전쟁은 인류역사상 가장 처참한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왜 독일국민들은 아무런 비판 없었을까? 개인이 스스로에 대한 내적인 성찰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와 비판적인 의식이 억압되고,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이 강요되기 때문이다. 괴벨스와 나치 정권은 선전과 선동을 통해 국민들의 생각과 의식을 통제하고,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조작했다. 그들은 미디어와 예술, 교육 등 사회의 모든 분야를 장악하여 나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반대 의견을 가진 이들을 탄압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거나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위험한 일이었기에 결국에는 나치의 사상에 동조하게 되었다. 또한, 나치 정권은 국민들에게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우월주의를 주입하여 그들의 자긍심을 고취시켰고, 이는 국민들이 나치의 정책과 전쟁을 지지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결과, 많은 독일 국민들은 나치 정권의 잔혹한 정책과 전쟁 범죄에 눈을 감았고, 비판적인 의식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는 결국 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초래하고, 수백만 명의 무고한 목숨을 잃게 만든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개인의 비판적인 의식과 자유로운 사고는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이며, 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과 통제된 여론은 결국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교훈을 우리는 이 역사적 사례를 통해 배울 수 있다. 낭만은 결국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와 창의성을 발현하는 과정에서 발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억압되고 통제될 때 사회는 자기 검열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혁신과 진보가 어려워진다. 낭만은 결국 개인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지키는 것이다. 그게 낭만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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