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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Nov 03. 2023

낭만 어디까지 갈래?

금지된 쾌락의 그림자

산업화 및 계몽의 물결이 넘실대는 가운데, 합리주의와 기계화는 지배적인 흐름으로 부상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 사고와 이성에 의지하여, 기계와 산업 발전이 인류에게 풍족한 삶을 가져다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이러한 급격한 변화와 그로 인해 발생한 부담감은 종종 사회적인 불안을 유발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낭만주의라는 새로운 사조가 탄생했다. 


낭만주의자들은 정서적 순결과 창의적 상상력, 그리고 자연과의 깊은 유대를 강조했다. 사회적 압박에 대한 일종의 대항으로, 이들은 개인적 꿈과 환상을 통해,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하려 했다. 하지만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낭만주의가 추구하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일정한 괴리가 존재했다. 낭만은 현실의 어려움과 사회적 제약들은 해결할 수 없는 이상향이었다. 결국 낭만주의를 추종했던 일부 사람들은 좌절감과 회의감을 느껴야 했다. 


이 후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고, 이는 곧 퇴폐주의라는 새로운 사조를 탄생시켰다. 이들 역시 낭만주의자처럼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지적하고, 사회적 규범과 도덕적 제약을 거부했다. 그러나 낭만주의가 추구하는 가치와 세계관에서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낭만주의가 이상을 추구하며 삶의 아름다움을 찾았다면, 퇴폐주의는 사회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그리고 인간의 본성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인간의 죽음과 쾌락, 성적 욕망 등 금기시되는 주제들에 적극적이었다. 불륜, 마약, 도박과 같은 활동마저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쾌락과 향락의 추구는 삶의 어두운 면과 허무함을 받아들임으로써 내면의 진실을 찾는 강렬한 방법이었다. 당연히 이러한 인식과 태도는 보수적인 사회 구조와 충돌하며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자극적인 매력은 대중의 호기심과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퇴폐주의자들은 이러한 쾌락의 추구야 말로 인간의 본능을 가장 정직하게 실현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정말로 퇴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쾌락의 추구가 인간의 본능에 의한 것일까?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쾌락은 분명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음식을 먹거나 성적인 활동을 통해 얻는 쾌감은 쾌락적 행동을 장려한다. 그런 면에서 쾌락은 인간이 추구하는 본능적 기능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를 인정한다면, 쾌락을 추구하는 모든 행동을 본능에 의한 것으로 볼 위험이 있다.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이는 결국 극단적인 충동이나 도착을 정당화한다. 쾌락의 관점에서 충동이나 도착은 빠른 실현과 무한한 대상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쾌락을 추구하는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충동은 즉각적이고 단기적인 만족을 이성적 판단 없이 추구하는 경향이다. 이는 감정의 조절을 할 수 없는 상태다. 갑자기 화를 내거나, 경제적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쇼핑을 하는 등의 행동으로 나타난다. 도착은 성이나 음식 등 특정 대상이나 상황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증상을 말한다. 이러한 집착은 강박적인 행동이나 비정상적 관심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특정 음식을 먹지 않으면 불안해하거나 특정 성적 상황에서 만족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 대상이나 상황에 집착한다. 


인간 본능의 관점에서 충동과 도착을 고려할 때, 이러한 특성들이 모든 사람에게 일관되게 나타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마다 충동적이거나 도착적인 경향이 다양하게 나타나며, 이는 개인의 경험과 성격에 따라 달라진다. 충동과 도착에 대한 인식은 문화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했다. 어떤 문화에서는 특정한 형태의 성적 행동을 도착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다른 문화에서는 이러한 행동이 금기시되곤 했다. 이는 충동과 도착적 경향이 개인의 독특한 경험과 형성된 정체성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충동과 도착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상태 자체를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개인의 특정한 형태의 반응이나 행동양식을 지칭한다. 이는 충동과 도착이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본능적 욕구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그 자체로는 본능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충동이나 도착이 항상 인간의 본능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쾌락의 추구도 본능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고, 그것은 논란의 여지없는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욕구는 인간의 독립성과 자기 결정권에 의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구체적인 방식이나 형식은 개인의 경험, 성격, 가치관, 그 사람이 속한 사회적, 문화적 조건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이런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감정들이 만들어지는데, 충동과 도착 혹은 쾌락의 추구도 그 중 하나다. 


물론 이러한 감정도 해소되어야한다. 그러나 이렇게 생산된 욕망은 현실세계에서 직접적인 방식으로 실현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현실 세계는 개인의 욕망이나 충동을 실현하기에 여러 가지 제약이 존재하고 그것은 법적인 규제, 도덕적 기준, 경제적 한계, 사회적 관계와 같은 요소들이다. 때문에 보다 창의적이고 낭만적인 방법을 통해 내면의 욕망과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예술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은 예술과 같은 방법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때론 사회적 활동에 협력함으로써 이러한 욕구를 충족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떤 형태와 형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표현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본능의 실체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주 자신의 사회적 규범과 도덕적 가치에 대한 반발심으로 그와 대치되는 행동을 상상하곤 한다. 그것은 금지에 대한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다. 따라서 예술작품은 자주 도착적으로 보이는 성적욕망, 폭력적 충동, 사회에 대한 반항 등을 소재로 다룬다. 


이는 예술이 욕망의 배설임을 반영한다. 인간이 내면에 축적된 욕망과 갈등을 외부로 배출하고 정화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개인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제조정하고 심리적 안정을 찾는다. 그렇기에 예술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공하고 변화와 혁신을 촉구하는 역할로 승화된다.


그렇기에 예술로서 퇴폐주의는 쾌락과 향락을 추구하지만, 반드시 충동이나 도착적 경향을 현실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쾌락과 향락의 추구는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본능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그 표현방식은 결코 본능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퇴폐주의는 분명 낭만주의의 어두운 요소를 반영한다. 이는 종종 자해적 행위나 부도덕한 행동으로 발전할 위험이 있다. 쾌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과도하게 강조하기 때문이다. 때론 그러한 이유로 인간의 본성마저 왜곡되게 전달된다. 하지만 퇴폐주의가 예술로서 표현될 때, 그것은 오로지 쾌락과 향락의 추구만이 아니라 더 복잡하고 다층적인 의미와 감정이 전달된다. 예술가들은 퇴폐주의를 실현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사회의 어두운 면과 인간의 내면에 있는 감정의 깊이를 드러내며, 존재와 삶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들은 종종 퇴폐주의적 경향을 담고 있다. 그의 그림에서는 황홀한 색채와 섬세한 선들로 표현된 성적 욕망과 여성의 아름다움이 도드라진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과 그것이 창조하는 아름다움, 그리고 그것이 가져오는 복잡한 감정의 세계를 살핀다. 특히 그는 여성의 역할, 성과 사랑의 본질 등에 대한 그 시대의 가치관에 도전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은 수동적이고 순결한 존재가 아니었다. 대신 독립적이고 성적주체로서의 여성이었다. 이는 여성이 스스로의 성적 갈망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었다


에곤 실레의 작품들도 퇴폐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그의 그림들은 인간의 외로움, 절망, 성적 욕망 등을 솔직하고도 강렬하게 표현한다. 실레는 사회적 금기와 타부에 도전하며, 인간의 가장 어두운 면과 본능적인 욕망을 그림으로 담아낸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단순히 충격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감정, 존재에 대한 깊이 있게 접근한다. 실레는 인간의 몸을 과도하게 연장하거나 변형시켜 해부학적 정확성을 벗어나려 했다. 이러한 과장과 왜곡은 감정의 강도를 강조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종종 고통, 외로움, 절망의  감정을 분출하는 듯한 자세와 표정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들도 퇴폐주의적 요소로 유명하다. 특히 그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외적 아름다움과 내면의 부패 사이의 간극을 다루면서, 외면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사회의 집착과 내면의 도덕적 타락을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대가로 자신의 내면에 있었던 선함을 희생한다. 이는 외모에 대한 사회적 가치와 도덕성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또한, 샤를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도 퇴폐주의의 중요한 예다. 그의 시에서는 도시적인 삶과 그 안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사랑과 증오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보들레르는 이러한 모순을 탐구하면서 인간 존재의 이중성을 드러내고, 삶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배척되는 것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인지, 도덕에서 벗어난 쾌락의 추구가 개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인지, 사랑과 증오라는 두 감정이 어떻게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지와 같은 복잡한 문제들이었다.


이처럼 예술을 통한 퇴폐주의적 표현은 다층적이다. 또한 단순히 쾌락과 향락을 추구하는 표면적인 욕망을 넘어서서, 깊이 있는 사회적, 심리적, 그리고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때문에 그것은 때때로 충격적이거나 불편할 수 있지만 그러한 강렬한 감정의 표현만으로 인간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한다. 그것은 비단 타인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다양성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내면의 욕구가 어떻게 반응하고 균형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예술은 현실에 대한 도피처가 될 수도 있고 비판하고 성찰하는 도구로 활용될 수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삶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상호작용들 그리고 그로인해 만들어지는 인식들은 자신이 어떻게 삶을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혼란스럽게 만들지만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삶이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행복이 진실한 욕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된다. 모든 복잡한 예술적 사조들은 대체로 이러한 고민들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나는 그러한 도전을 낭만이라고 말하고 싶다. 불편할 수 있는 진실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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