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nome Nov 04. 2023

낭만의 길

경계를 넘는 크로스오버

낭만이란 마음속에 그리는 아름다운 꿈과 같은 것이다. 때때로 이는 일상에서 구현할 수도 있지만 현실적은 삶은 그것을 방해한다. 따라서 우리는 직접적인 체험이 아닌 간적접인 음악, 문학, 미술, 영화와 같은 재현을 통해서도 경험한다. 자신이 처해진 현실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낭만적인 이상향의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다. 물론 낭만은 그 자체로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하지 못하는 새로움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 무한한 상상력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실질적 체험이어야만 한다. 그러한 생각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현실과 낭만의 추구에 있어 어떤 균형을 찾을 수 있는가에 있다. 또한 우리가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음악, 문학, 미술, 영화와 같은 체험들도 그것을 생산하는 사람들에게는 현실적인 삶의 연장이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고민이 있는 사람들이다. 다만 예술가로서 창작하는 과정은 우리보다 더욱 개인적이며, 각자의 세계관과 감정 그리고 현실적인 맥락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렇기에 이는 결국 현실 세계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예술가들이 어떤 과정에서 영감을 느끼고, 또한 어떻게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지, 그리고 새로운 기술과 스타일은 어떻게 창조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낭만이 실현성 없는 이상이라는 막연한 생각에서 조금은 자유로워 질 것이다.


모든 예술에는 장르라고 하는 완성된 형식적 구조가 있다. 예컨대, 음악의 경우 지역의 고유하고 특수한 문화적 형식에 따라 서양음악, 한국음악 등으로 분류하기도 하며, 공연하는 장소가 개방된 마당인지 아니면 공연장인지를 반영하는 공간적인 기준으로도 나뉜다. 클래식, 발라드, 록, 트로트, 재즈, 창, 판소리 등과 같이 특정 양식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특정 장르로 완성된 예술은 변화와 발전이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 장르가 갖고 있는 문화적, 역사적, 사회적인 이유 때문이다. 각 장르는 시간이 흐르면서 발전해 왔고, 특정한 규칙과 관습, 형식과 형태를 확립해 왔다. 모든 예술은 엄격한 형식과 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고, 전통을 형성하며 세밀하게 다듬어진 결과다. 이런 장르들은 자기만의 스타일, 테크닉, 표현 방법을 갖고 있고, 가끔은 공동체의 정체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장르를 바꾸거나 새로운 요소를 도입하는 건 단순한 변화를 넘어서 문화적 정체성과 전통의 무시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는 종종 보수적인 현상을 반영한다. 장르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경향과 혁신에 대한 저항인 것이다. 그렇기에 변화를 추구하는 예술가에게는 새로운 실험과 시도에는 전통을 무시하는 용기가 필요할 수 있다. 


18세기 말, 산업혁명이 불어온 경제적 풍요와 기술적 혁신의 파도는 사회 각 층의 생활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문화 예술의 영역에서 그 변화는 새로운 예술 형식의 탐색과 전통의 경계를 넘어서는 도전적 시도로 나타났다. 당시 경제적 풍요는 중산층의 증대를 불러왔고, 여가 활동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는 사회현상으로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문화의 소비 수요가 증가했다. 


산업 혁명 이전에는 이러한 소비가 제한적인 계층의 전유물이었다. 그들은 주로 왕족이나 귀족이었다. 그들이 좋아하는 문화는 대체로 고전적이고 엄격한 형식을 갖춘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음악에서는 바로크, 클래식, 로맨틱과 같은 전통적인 장르가 중심이었고, 미술에서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유행했다. 이러한 예술 형태들은 귀족의 취향과 가치관을 반영하며, 예술적 표현은 대부분 정해진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겪으며 기술적 발전이 삶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였고, 중산층이 등장하여 그들의 예술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예술의 소비자 기반이 넓어졌다. 이에 따라 예술의 형태와 내용에도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인쇄술의 발달 덕분에 책과 음악이 보다 쉽게 복제되고 대중화될 수 있었고, 이는 대중문화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또한 사진술의 발명은 미술에서 현실을 재현하는 방식을 크게 바꾸었다.


중산층의 성장은 단순히 문화 소비의 양적 증가에 그치지 않았다. 새로운 사회 계층의 등장은 그들의 취향과 가치관이 반영된 문화 상품에 대한 수요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수요는 예술가들에게 전통적인 규범과 형식을 넘어서는 새로운 창작물을 모색하게 하는 동기를 제공했다. 이는 기존의 예술 형식을 재정의하는 도전적인 시도로 이어졌고, 곧 현대 예술의 다양한 새로운 장르와 스타일의 등장으로 연결되었다.


문화 예술의 새로운 형태로 인상주의, 표현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같은 다양한 예술 운동이 등장했다. 이 운동들은 기존의 예술 형식과 규범을 파괴하고자 하는 실험적 시도를 담고 있었다. 이런 변화의 바람은 음악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 클래식 음악 안에서 작곡가들은 전통적인 음악의 구조를 넘어서려 노력했고, 재즈 같은 새로운 장르도 만들었다. 재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문화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독창적인 음악 형식으로서, 다른 장르들에게도 영향을 주며 대중음악의 발전에 기여했다.


물론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산업혁명 직후에는 여전히 소비의 장벽이 존재했다. 중산층이 소비할 만한 대중 지향적인 문화상품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새롭고 창의적인 문화상품의 생산을 촉진했다. 이러한 요구가 크로스오버의 등장을 불러왔다. 하지만 전통적 생활양식에 익숙한 일부 소비 계층은 이러한 요구를 저급한 것으로 치부했다. 사회의 전 분야에서 변화가 발생하고 있었지만 전통적 문화와 새로운 문화가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20세기가 되면서 왕족이나 귀족은 더 이상 중요한 소비자가 아니었다. 예술가들은 보다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곧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장르의 융합을 시도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예술가는 더 이상 전통을 고수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소비자의 선택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두려움과 그로인한 사회적 지위의 추락을 걱정해야 했다. 예술가의 이런 우려는 장르가 갖는 한계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술 시장의 변동성과 상업적 가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따라서 예술가가 추구한 크로스오버는 장르의 형식적 진화나 동일성에 근거한 발전이 아니었다. 과거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새로운 감각의 공간이었다.


예술창작에서는 이제 경계를 허무는 일은 어느덧 당연시되었다. 본격적인 크로스오버의 시대였다. 새로운 시장의 생성과 확대는 예술가에게 창작 의욕을 고취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개인적 성공이나 성취를 포함한 자유를 실현하는 계기였다. 하지만 이 경로는 간단치 않았다. 


예술가들은 자주 이러한 시도에 참여한다는 사실만으로 비난 받아야 했다. 그것은 전통을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예술가 자신에게 있어서도 이는 매우 혼란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자신의 예술세계를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의 반복 훈련과 노력, 즉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과정을 겪어야만 한다. 그러나 크로스오버는 그 자체로 장르의 경계를 넘는 시도였기에 전통을 무시하는 일이었고, 또한 자신의 노력마저 저평가 받게 만들 위험도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예술가에게 장르의 순수성은 때론 매우 중요한 문제였고, 치열한 과정을 겪어 성장한 만큼 완고함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결국 예술가 자신의 규칙이 변화를 부정할 만큼 확고해진 것을 의미했다. 다양한 영역의 장르를 혼합하려는 시도는 더욱 도전적이었다. 그러나 크로스오버에 도전하는 예술가는 자신이 기능적으로 익숙한 장르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유연성과 다른 문화를 수용하는 개방적 태도는 필수적이다. 자신이 그동안 갖고 있었던 믿음을 해체하고 완고함을 버려야만 새로운 형태의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서 이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언뜻 보면 예술에는 위계도 계급도 없어 평등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대중이 어떤 작품을 더 좋아하느냐에 따라 그 예술가의 대우가 달라진다. 사람들이 많이 소비하는 장르의 예술가는 사회적인 위치나 지위를 얻는다. 이처럼 예술은 대중의 사랑과 관심에 따라 얻게 되는 사회적 지위가 달라지고, 이는 곧 예술가의 부와 명예와도 직결된다. 대중의 관심을 얻지 못하는 예술가는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나 좀 봐 달라”고 아무리 외쳐 봤자 소용이 없다. 이렇게 예술가가 느끼는 현실적 괴리감은 매우 크다. 순수한 열정으로만은 자신의 예술을 구현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 때문이다. 대중과 멀어지는 경험을 하는 예술가에게는 작품의 권위마저 부정되기 십상이다. 대중의 인정을 받지 못한 예술가라니 그건 고통 그자체일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의무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전통을 지키고자했던 억압된 주체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살기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는 것이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인간의 지적 창조성은 어떤 강제된 개념 틀의 제약 안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정확히 그런 제약 속에서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제약과 틀은 결국 필연적으로 참을 수 없는 결여와 부담으로 다가오는데, 그러나 이는 그가 느끼는 모든 경험적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지 고심하도록 강제하게 된다. 그래서 해방되기 시작한다.


크로스오버는 획일화되고 규범화된 완성된 전통적 틀을 부수는 것이다. 예술가의 새로운 시도는 과거의 전통적 규범의 범주 안으로 되돌아가거나 답습하는 것, 혹은 반복하는 습관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지향이며 자유이고 나아가는 행위 그 자체이다. 전통적인 질서와 획일화는 분명 효율성이라는 이익을 제공한다. 그렇기에 이익이 보장되는 한 완고한 형태로 고착된다. 이러한 강고함은 예술가가 추구하는 새로운 가치를 결국 형태적 틀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만 표현하게 한다. 그것은 두터운 외피를 갖는 완고함의 유지라 할 수 있다. 마치 우물 안의 개구리와 다를 바 없다. 예술가를 가두고 있었던 틀이 부시고 깨야만 그를 억압해왔던 완고함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날 수 있다. 이럴 때 크로스오버에 도전하는 예술가는 시대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전통을 해체했다는 점에서 예술가는 자유이며, 그가 만들어낸 새로운 작품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크로스오버는 오지 않는 과거이며, 지나가는 현재이고, 다가오는 미래가 된다. 그래서 그것은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낭만은 이와 같다. 과거의 전통이나 형식에 얽매이기보다 개인의 주관적 감정과 창조성을 중시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낭만적 삶이란 예술가들이 살아왔던 방식처럼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열정의 표출이다. 그것은 때론 사회적 기준이나 일반적인 성공의 척도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정말 중요하다고 믿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낭만 어디까지 갈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