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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피셜엔 한계가 없다

프롤로그

by inome

어둠 속의 신화
시칠리아의 밤거리를 가로지르는 불안한 그림자. 말 한 마디 없이 스쳐 지나가는 그것은, 시칠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비밀, 마피아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을 보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과 마주한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마피아는, 사라진 자들의 침묵 속에서, 남겨진 자들의 공포 속에서,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 없이 존재해왔다. 이 땅에서 마피아는 신화처럼 머물러 있다.

증명할 수 없는 어둠, 삶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무게. 그 실체를 확인하려면 눈을 들어 마주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 순간은 생사의 경계가 된다. 그 문턱을 넘지 않는 한, 마피아는 여전히 어둠 속에 머물 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다. 대신 밤이면 창문을 걸어 잠그고, 어둠 속을 스치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마피아를 믿는 것은 그들을 초대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배워온, 오래된 생활양식이다.

누군가는 시칠리아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두려워하고, 드러나지 않은 힘 앞에 침묵하는 그들의 삶을, 미신과 타협한 태도라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누가 미신을 비겁하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오히려,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견디기 위한 오래된 방식이다.

시칠리아의 사람들은 믿는다. 자신이 목격하지 않은 것을, 아무도 증명하지 않은 힘을. 그것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믿음이지만, 동시에 생존을 위한 확신이기도 하다. 살아남기 위해 배워온 삶의 기술, 침묵으로 이어진 지혜다.

마피아는 실제로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것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삶의 구조를 만든다는 점이다. 그 믿음 속에서 사람들은 조용히 질서를 유지하고, 균형을 지키며 하루를 살아낸다.

무엇을 경험하든, 어떻게 정의하든, 그것이 완전하거나 절대적일 수 없다. 그래서 그 무엇도 사실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세상은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과 설명되지 않는 원인들로 엉켜 있고 그것을 풀어낸적이 없다. 우리의 인식은, 그 자체로 미완이다. 완전함을 기대할 수 없는 이유—진실이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늘 새로운 해석과 변화 속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짙은 안개가 낀 들판을 걷는 사람은 발밑만 보일뿐이다. 고작 두 걸음 앞도 확인하기 어렵다. 물론 생각은 안개 너머를 향해 계속 뻗어가지만, 확인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마음이 더 단단해진다. 하지만 저 멀리 안개 너머에 뭐가 있을지 궁금함이 여전히 우리를 흔든다. 길을 찾으려는 갈망이 이해와 혼란을 끊임없이 불러온다.

사람들은 세상 어딘가에 누구나 똑같이 받아들일 수 있는 단단한 실체가 있다고 믿는다. 그걸 찾기만 하면 세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의미가 단단히 고정되고,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무언가가 과연 존재할까.

있다면, 현재로선 가장 가까운 건 아마 수학일 것이다. 명확하고, 보편적이며, 스스로 완벽한 체계를 갖추고 있어 논란을 거의 허락하지 않는 언어. 거기에는 거짓말이 끼어들 틈이 없다. 수많은 현상을 가장 단순하고 명확하게 설명해내는 힘은 대단하다. 하지만 현실의 복잡함을 끝내 다 담아내지 못한다. 아무리 정교해도, 부드럽게 흘러가는 구름의 움직임이나, 마음속에 스며드는 어떤 기묘한 기분 같은 건 설명할 수 없다.

세상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흐름들이 있고, 그것은 숫자로 규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해설이라는 범위가 요구한다. 하지만 그 역시 예측과 해석의 산물. 원래의 진실은 점점 오염되고, 자신만의 진실로 바뀌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하지만 아마도 그 불완전함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게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본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가슴으로 느끼면서, 결국은 자기만의 해석을 덧입힌다. 세상은 거기, 우리 밖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건 언제나 변형된 모습이다. 진짜 본질 같은 건 좀처럼 잡히지 않고, 늘 표면 근처를 맴돌 뿐이다. 그래서 생각은 자주 빗나가고, 해석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어쩔 수 없이 틈이 생긴다.

사람들은 이런 주관적인 해석을 가볍게 '뇌피셜'이라고 부른다. 틀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우리가 어떻게든 세계와 연결되려는, 조금은 어설픈 몸짓이 숨어 있다. 그렇다.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사실은 우리를 살아 있게 만드는 일종의 습관 같은 것이다.

인식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그래서 본질에 닿을 수 없다. 이를테면, 하나의 컵을 흑백과 컬러로 촬영한 사진을 떠올려 보자. 두 장의 사진은 사진을 찍은 자가 아니라면, 같은 컵을 찍은 것인지 쉽게 구별하기 어렵다. 사진기는 대상을 재현했지만, 기계적 성능과 조건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객관적 기준이 사라진 상황에서 우리는 결과만으로 사실을 판별하려 한다. 그러나 무엇이 진짜인지를 결정하는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더 나아가, 컵을 어떻게 인식했든 그것이 컵의 본질을 온전히 말해주진 않는다. 컬러 사진이 실재에 가깝다고 느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컬러라는 것도 빛의 산란으로 인한 착시일 뿐이다. 실재의 컵이 흑백일 가능성 역시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완전한 실재를 꿰뚫은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식 조각들을 상상으로 메운 가상의 이미지를 신뢰하는 것에 가깝다.

다양한 해석은 감성의 차이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은 감각 기관을 통해 외부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수집된 정보는 곧바로 개인 고유의 경험과 감성적 기능에 의해 특정한 이미지로 변환된다. 이 과정에서 정보는 강조되기도, 왜곡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특정한 방식으로 지각하고, 이해하고, 세계를 구성해간다. 우리의 감성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유전, 경험, 문화적 배경, 심리 상태 등 복합적인 요소가 섞여 만들어낸 유동적인 결과물이다.

감성은 사람마다 다르게 흐른다. 기쁨, 슬픔, 분노 같은 감정은 각각 독특하게 형성된다. 어떤 감정을 가졌다는 것은 단순히 사물이나 상황을 아는 것을 넘어, 더 복잡한 정서적 반응을 가졌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비슷한 사건을 접해도 대체로 비슷한 긍정이나 부정의 느낌을 공유하지만, 끝내는 서로 다른 감정으로 이어진다. 감성의 차이는 감정의 차이를 불러오고, 감정의 차이는 인식의 차이를 낳는다. 인간이 무언가를 '안다'는 말은, 사실 하나의 사실을 두고 저마다 다른 해석을 갖게 되었다는 말에 가깝다.

비가 오는 날, 누군가 창가에 앉아 잔잔한 음악을 듣고 있다. 비와 음악이라는 자극은 누구에게나 비슷하게 다가가지만, 그 자극이 만들어내는 표상은 사람마다 다르다. 경험의 차이, 감각과 감성의 발달 정도에 따라 반응의 강도 또한 달라진다. 어떤 이는 우울해지고, 어떤 이는 미묘한 기쁨을 느낀다. 고유한 유전적 성향과 개인의 문화적 경험이 얽히면서 특수한 감정적 판단이 형성된다. 감정은 자신과의 관련성, 경험에 따른 긴급성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감정은 내면의 고유한 능력만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시간과 거리 정보의 단편성에의해서도 감정의 강도가 만들어진다.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아프리카의 작은 마을을 본다. 굶주리는 어린아이가 나온다. 방송을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아이가 불쌍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수만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만큼이나, 그 감정은 희미하다. 현재 일어난 일인지, 오래전 기록인지에 따라서도 마음의 동요는 달라진다. 사건이 주는 자극은 거리와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아이의 가족이나 이웃은 지금 이 순간, 아이의 고통을 직접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멀리 떨어진 채로, 한 조각 이미지 속에서 아이를 바라본다. 보편적 정서에 대한 감수성이 높은 사람이라면, 멀리서도 아이의 처지를 걱정하고 돕기 위해 나설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거리는 감정의 진폭을 약하게 만든다. 시간 또한, 긴급성을 흐린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건의 강도를 조율한다. 방송을 통해 굶주리는 아이를 인식할 때, 아이의 구체적인 삶의 흐름이나 변화의 과정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연민이 즉각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무관심해서도, 냉정해서도 아니다.

첫 느낌과 단편적인 정보만으로는 사건의 복잡성이나 연속성을 파악할 수 없다. 단순화된 정보가 제공하는 빠른 인식은 때로 유익하지만, 동시에 편견과 오해를 낳는다. 아이가 왜 그런 상황에 처했는지, 상황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으며, 그 변화가 우리 사회와 개인에게 어떤 의미를 남길 것인지까지 헤아리지 않으면, 우리의 인식은 사건의 표면에 머물 수밖에 없다.

정보가 풍부해지고 인식이 깊어진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실재에서 미끄러지는 경험.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익이나 선호, 가치관에 따라 정보를 선택하고 해석한다. 마피아를 본 적 없이도 그 존재를 믿는 시칠리아 사람들처럼, 그런 태도는 낯설지 않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의 잘못조차 감싸게 된다. 그런 경험은 흔히 일어난다. 그의 말이 다 맞는 건 아니었지만, 믿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의 성공은 기쁨으로 변하고, 그의 실수는 별일 아닌 것이 된다. 그렇게 관계는 단단해지고, 객관성은 흐려진다. 두 사람 사이에는 설명할 수 없는 유대가 생긴다. 세상은 의외로 그런 방식으로 연결되곤 한다. 감정보다 더 빠른 것은 없다.

사람들은 이익이 될 만한 것을 택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에 기댄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자주 그런 경향을 보인다. 판단은 때때로 정당함보다는 익숙함에 끌린다. 익숙함은 더 안정적이고, 그 안에서 믿음이 생긴다. 하지만 그 믿음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진실은 멀리 있다. 닿는다고 해도, 그건 잠깐일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며 그 안에서 살아간다.

경험이 만들어낸 확신 위에 믿을 만한 지식이 쌓인다. 하지만 그 모든 판단은 주관적인 결과에 불과하다. 아무리 과학이라 부르고, 아무리 합리성이나 이성이라 주장한들, 우리가 사유하는 사상과 이념, 따르고 믿는 제도와 문화는 인식의 틀 안에 갇혀 있다. 사실은 언제나 왜곡되기 마련이고, 진리는 맥락 속에서만 유효하다. 물론 그런 것들은 오랜 시간 동안 인류가 검증하고 정제한 성과들이기에 쉽게 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이념이나 문화는 존재하지 않으며, 변화는 언제나 그 가능성을 탐색하는 이들에게 먼저 말을 건넨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한다.

선택의 문제다. 믿음은 언제든 비틀어질 수 있다. 신념과 가치, 삶의 방향은 '무엇을 믿을 것인가'보다는 '믿음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달려 있다. 지식은 경험을 해석하는 반복의 끝에서 비로소 확신이 되고, 그렇게 구체적인 것이 전체를 향해 확장된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말은, 하나의 사실보다 그것이 놓인 흐름을 이해하라는 뜻일 것이다. 관점을 넓히라는 조언이다. 하지만 전체와 부분은 우열을 나눌 수 없는 판단의 축이다. 둘 모두가 있어야 비로소 어떤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숲은 수많은 나무로 이루어진다. 종류도, 크기도, 기능도 제각각이다. 곤충이 있고 동물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도 있다. 숲은 나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모든 개체들은 서로 얽히고 기대며, 독립적이면서도 상호 의존적으로 존재한다. 그 결과로 우리는 하나의 ‘숲’을 인식한다. 그러나 자신이 선 나무 한 그루에 집중할수록, 우리는 다른 나무들이 보내는 신호를 듣지 못한다.

전체를 보려면 멀리 떨어져야 한다. 그러나 멀어진 만큼 개별의 움직임은 흐려진다. 인간은 감각을 통해 세상을 이해한다. 보고, 듣고, 만진다. 그렇게 우리는 구체를 통해 전체를 유추한다. 하지만 어느 쪽에 서 있든, 우리는 완전한 통찰에 닿지 못한다. 한 방향의 이해는 또 다른 방향의 무지가 된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숲’이라는 이름 하나로 그 복잡한 생태를 대체한다. 구체적인 개체를 생략한 전체에 안도하고, 그렇게 구성된 전체가 현실을 충분히 설명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안에서 어떤 생명이 소외되고, 어떤 연결이 끊어지는지는 외면하게 된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언제나 어떤 결핍의 상태다. 보지 못한 것, 놓친 것, 지워진 것이 있다. 객관적인 사건이 우리의 인식과 완벽히 겹치는 일은 없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다고 여기는 그것조차, 사실이라는 이름 아래 놓인 잠정적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뇌피셜에는 한계가 없다. 그것은 불완전한 현실의 틈에서 자라난다. 흩어진 단서들, 메워지지 않은 인과의 공백, 말과 말 사이의 고요한 침묵. 그 사이를 파고들며, 사람은 상상을 덧대어 이야기를 만든다. 검증보다 빠르고, 논리보다 부드러운 그 이야기는 한 번 흐르기 시작하면 멈출 이유를 잃는다.

세상은 불확실하다. 숫자와 말로는 닿을 수 없는 층이 있고, 그 틈 사이에는 감정과 맥락이 존재한다. 어떤 설명도 그것을 온전히 품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은 설명이 닿지 못한 바깥을 메우기 위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통계가 스쳐 지나간 자리, 해석이 미처 닿지 못한 여백에서 뇌피셜이 자란다.

믿음은 언제나 사실보다 먼저 태어난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세계를 먼저 본다. 뇌피셜은 그 믿음을 지지하는 작은 손짓이다. 빠진 조각들을 채워 넣으며, 세상이 원래 그런 것처럼 그럴듯한 질서를 세운다. 그 질서가 진실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것이 틀렸다고 확신할 수 없을 때, 더욱 강해진다.

그 이야기는 반박하기 어려운 구조 속에 자리 잡는다. ‘만약’이라는 가정과 ‘혹시’라는 여운을 품은 채 흘러간다. 어떤 해석은 애초에 반증이 불가능해 그럴듯하게 퍼져 나간다. 그래서 뇌피셜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 남는다. 진실을 흉내 낸 오류일 수도 있고, 오류를 딛고 진실에 다가가려는 몸짓일 수도 있다. 그 이야기만큼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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