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책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 한 권이나, 비 오는 날 길가에서 마주친 감성적인 문장 하나는 가끔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품게 한다. 세상을 이해하려 애쓰며 찾아낸 방식 중 하나. 아마도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누군가 그릇에 담는 일을 해왔을 것이다. 처음엔 그것이 별것 아닌 것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일이다. 사람들은 실체를 직접 느낄 수 없어도, 보이지 않아도 그것들을 담아내는 그릇을 만들었다. 그 그릇 속에는 세상이 담겨져 있다.
세상과 생각 사이에는 늘 약간의 간격이 있었다. 아주 좁지도, 완전히 붙어 있지도 않은 거리. 감각은 감각대로 흘러가고, 생각은 생각대로 고여 있었다. 어쩌면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기록한다는 건, 그 사이에 조용히 무언가를 내려놓는 일이었다. 바로 그 자리, 말과 말 사이, 느낌과 설명 사이. 시간이 흐르면, 그 기록은 조금씩 모습을 바꾼다. 어떤 날은 그 위에 조용히 무언가를 덧붙이고, 또 어떤 날은 천천히 덜어낸다. 그렇게 해서 조금씩 확장된 것들이 있었다. 말이나 지식 같은 것들. 그리고 사람들은 어느 순간, 서로 다른 장소에서 그것들을 나눈다. 꼭 약속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런 일을 반복한다. 전부 다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중요한 것들은, 이상하게도 남겨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것처럼.
과거, 사람들은 벽에 그림을 그렸다. 석기시대 사람들도 무언가를 남기고 싶었나 보다. 사슴이나 들소와 같은 짐승들을 세심히 그려 넣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그림들은 점차 이상해졌다. 짐승의 다리가 과장되었고, 어떤 것들은 실제보다 훨씬 작게 묘사되었다.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던 그림들이 점차 상징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건 그들이 그림을 못 그려서가 아니라, 그들의 경험 속에 존재하는 남과 다른 의미를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억 너머에 있는 감정 같은 것들.
점차 기록의 방식도 변해갔다. 단순히 본 것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말 없는 대화의 형식을 갖추기 시작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벽화는 여전히 그 자체로 말을 하고 있었다.
어떤 날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인간은 왜 이토록 가리키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사람들은 경험한 것을 그대로 두지 못하고, 반드시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형체를 만들어내고, 경계를 세운다. 마치 누군가에게 반드시 알아보라는 듯이. 그런 방식으로 언어도 생겨났다. 세상엔 너무 많은 것들이 있었고, 그걸 다 외울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일까? 공통된 특징을 추려 하나의 단어로 묶었다.
예컨대 ‘주머니’라는 말처럼. 누군가는 천 조각을 꿰맨 것이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가죽을 접어 만든 것이었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묘하게도 거기엔 어떤 안도감이 있었다. 다르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대신, 닮은 점만 남기고 나머지를 지운다는 건, 어쩌면 인간이 세상을 견디는 방식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언어는 언제나 뭔가를 놓친다.
'주머니'라는 말 안에는 들어 있는 물건의 무게나, 주인의 손에서 느껴지는 체온 같은 건 포함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빈 틀을 들고 다니며 세상을 이야기한다. 가능한 한 정교하게 퍼즐인 듯. 하지만 우리가 가진 조각이 전체의 몇 퍼센트쯤 되는지조차 모른다. 다만 가진 만큼, 다시 말하자면 아는 만큼 그것이 전체라는 착각, 혹은 희망에 기댄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게 어설픈 것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계속 그러한 감각을 유지한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생물의 본능이라면, 그 본능은 꽤나 쓸쓸하고도, 근성 있다.
“뭣이 중한디?”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가령 "닭이 먼저일까, 알이 먼저일까?" 같은 질문. 이질문은 단순히 순서를 묻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세계를 이해하려는 방식의 이야기다. 닭은 알을 낳는다. 누구나 아는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알이라는 존재는 닭보다 훨씬 오래전에 등장했다. 파충류, 곤충, 양서류, 그런 존재들도 모두 알에서 태어난다. 닭은 그 계보 속에서 등장한 한 갈래에 불과하다. 진화라는 긴 흐름 속에서 보면, 알이 닭을 낳았고, 또 그 닭이 알을 낳는다. 인과가 순환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이 둘을 나란히 두고 보기 때문이다. 이때 ‘주머니’를 만들면 꽤 멋들어진 이야기로 정리된다.
닭이 낳은 알, 지금부터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 알은 단순한 생명의 시작점이 아니라, 특정한 유전 정보를 지닌 구조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따로 부른다. '계란'이라고. 이 새로운 이름은 하나의 구분이고, 이해의 시도다. 그렇게 인간은 대상을 나누고, 구별하고, 이름 붙이기를 시도한다. 이름을 붙여지는 순간부터, 그건 전통에서 벗어난다. 새로운 개념이 되고, 정의가 된다. 물론 그것은 구별을 위한 상징일 뿐, 본질을 담아내는 것은 아니다. 마치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는 “주머니”처럼. 알 속의 노른자가 얼마나 묽은지, 껍질이 얼마나 얇은지는 새롭게 정해진 이름이 말해주지 않는다.
생명의 기원으로 시선을 옮기면, 이야기는 더 깊어진다. 모든 생명체는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그 안엔 유전 정보가 있다. DNA는 단백질을 만들고, 단백질은 형태를 결정한다. 들여다보면, 삶은 그저 분자의 조합이다. 하지만 그 단순한 조합 속에서 생명은 자라고, 움직이고, 스스로를 복제하며 시간이라는 강을 건넌다. 그러니 생명이란 건, 이따금 기적처럼 느껴진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모여 무언가가 되는 순간. 그걸 설명하는 데는 이론보다 감각이 먼저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보면,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 질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정의는 명확할 수 있지만, 판단은 상대적이다.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세계의 질서, 시간의 흐름, 본질의 위치. 하지만 알고 보니, 우리가 붙잡고 있는 건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전부가 아니라, 조각. 퍼즐의 모서리 한 쪽을 들고 전체를 상상하는 일. 그 불완전함을 견디는 것이 지식의 조건이라면, 우리가 진리라고 부르는 것도 사실은 잠정적인 무언가일 뿐이다.
종-속-과-목-강-문-계. 이건 생물을 분류하려는 인간의 집요한 시도에서 나온 결과다. 우리는 체계를 만들었고, 그 안에 자연을 집어넣었다. 생명은 그렇게 정리되었다. 그러나 정리된다는 것은 종종 단순화되는 일이다. 생물학, 유전학, 해부학, 생태학, 모두가 그 단순화를 보완하려 애쓰지만, 모든 시도는 완전하지 못한 이해만을 남긴 채 끝난다. 그래서 지식이란 건 언제나 불완전하다. 그 불완전함을 제거하지 않고도 작동하는 구조. 그것을 우리는 '과학'이라 부르기도 한다.
객관성이란 건 믿음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다. 이 구조는 언제나 어떤 결핍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허술함이 인간을 멈추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허술함 덕분에 인간은 계속 탐색하고, 질문하고, 다음 퍼즐 조각을 찾는다. 그리고 그런 끈질김 속에서, 아주 가끔, 진리에 가까운 조각 하나가 손에 잡힐지도 모른다.
알고 있는 것이라 믿는 것들이 있다. 그건 어쩌면, 나름의 확신이 아니라 반복된 익숙함일지도 모른다. 익숙해진 단어, 자주 들은 문장, 여러 사람에게서 확인한 정보들. 그런 것들은 어느새 신뢰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신뢰는 고정된 게 아니다. 가끔은 서서히, 또 어떤 날은 아주 느닷없이 바뀐다. 마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친구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질 때처럼. 세상은 조금씩 틀을 바꾼다. 사람도 그러하고, 개념도 그렇다. 새로운 관계들이 생기고, 오래된 정의들이 스르륵 바닥을 드러낸다. 그래야만 어떤 착오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빠르게 바뀌는 것들 속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다.
거울을 보는 일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다. 그러나 들여다볼 때마다 그 안의 얼굴은 조금씩 다르다. 조명이 바뀌었거나 표정이 달라졌을 수도 있고, 그날의 기분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거울 속 얼굴은 분명 나인데, 매번 약간 낯설게 느껴진다. 좌우가 바뀌고 미세하게 비틀린 상은 현실의 나와 정확히 겹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그 모습은 마치 나를 흉내 낸 또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직접 겪은 것보다 간접적인 정보로 세계를 이해한다. 누군가의 말, 책에서 본 문장, 다큐멘터리 속 장면들이 흩어진 조각처럼 쌓인다. 그렇게 만들어진 전체는 어느 순간 ‘진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거울을 오래 들여다보면 단순한 좌우 반전 이상의 왜곡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인간의 시선은 언제나 특정한 방향을 갖고 있고, 그 방향이 곧 관점이 된다. 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위치와 시간, 심리 상태에 따라 그것은 다르게 보인다. 경험은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고, 나 자신의 기억조차도 시간이 지나면서 의미를 달리한다.
무엇이 진짜였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은 때로 혼란스럽다. 하지만 그것이 곧 가능성이기도 하다. 진실이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건, 언제든 다시 바라보고 다시 생각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세상과 계속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어떤 일들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한 하루에, 무언가 괴리가 시작된다. 가령 아주 짧은 한 마디, 전혀 의도하지 않은 말이 관계의 온도를 바꿔놓기도 한다. 그런 건 대개, 눈에 보이지 않는 변수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편차가 발생했는지는 정확히 짚을 수는 없다. 단지 통제할 수 없고, 그렇기에 예측도 어렵다는 사실만 알뿐이다.
그런데 사람은,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더 그렇다. 그래서 사실들을 모은다. 데이터를 나열하고, 이리저리 정리하면서 뭔가 확실한 걸 붙잡고 싶어 한다. 그렇게 하면 불확실한 것들이 잠잠해질 거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확실해지지 않는다.
사실이라는 건 언제나 일부만 보여준다. 말하자면 흐릿한 윤곽선 같은 것이다. 그 안을 어떻게 채울지는 상상에 달려 있다. 그래서 '진실'이란 말이 등장한다. 그것은 수많은 사실의 합이 아니라, 사실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나온 어떤 중심이다. 하지만 그 중심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 다른 누군가에겐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러 요소들이 묘하게 균형을 이루는 상태다. 경험, 믿음, 관찰, 해석—그 모든 것이 한 개인의 내부에서 조심스럽게 만들어낸 축 같은 것.
사람은 그 축을 중심으로 세상을 견딘다. 세상을 정확히 아는 일보다, 세상을 견디는 방식이 더 중요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선택은, 때로는 거울 앞에 선 자신을 겨우 버티게 하고, 때로는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방향을 잃지 않도록 돕는다. 우리는 모든 걸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계속 바라본다. 어쩌면 그것이, 세상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불교의 경전인 열반경(涅槃經)에 맹인모상(盲人模像)이라는 말이 있다. 코끼리를 처음 만지게 된 맹인들에게 그들이 만진 것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그들의 대답은 각자의 경험이 반영된 '진실'을 말한다. 배를 만진 맹인은 코끼리를 벽이라 했고, 다리를 만진 다른 맹인은 코끼리를 기둥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거짓이 아니다. 그들이 만진 부분은 실제로 그들이 묘사한 그 대로였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코끼리의 일부에 불과했을 뿐, 코끼리 전체를 대표하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 코끼리는 벽이나 기둥의 모양이 아니다. 그 형태는 매우 복잡한 조형성을 가진 하나의 독립된, 구체적인 존재다. 이것이 코끼리를 지시하는 '사실'이다. 변화하지 않는, 오직 하나의 실체를 나타내는 객관적인 상태. 그리고 결코 변할 수 없는 완전한 전체. 따라서 우리가 전체라는 실체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실에 접근하는 방법은 모든 진실을 모으는 방법이 유일하다.
주관적 진실과 객관적 사실은 서로 얽혀 있다. 우리가살아가는 동안, 두 요소는 끊임없이 충돌하고, 때로는 서로를 위협하며 복잡한 상황을 만들 것이다. 사실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 경험이라는 시간의 자취다. 그것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진실은 다르다. 진실은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우리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물과도 같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깊이와 복잡함을 지니며,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믿는지를 드러낸다. 사실에 진정성을 더하면 진실이 만들어진다.
돈을 빌린 사람이 상환일에 돈이 충분히 있음에도 '돈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논란이 없는 순수한 거짓말이다. 그러나 앞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예상으로 상환일을 연기하였으나 그 꿈이 무산된 것, 이것이라면 어떨까? 이것은 진실을 바탕으로 한 거짓, 즉 '진정성이 있었지만 결과적인 거짓'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진정성 있는 거짓'을 실제로 거짓말로 치부하지는 않는다.
반면, 어떤 이는 참된 사실을 거짓의 이유로 삼는 경우도 존재한다. 출근을 하지 못한 이가 '어머니가 아파 출근하지 못했다'는 이의 주장은 어머니의 병으로 인해 그의 출근이 불가능했다는 진실을 전달한다. 그러나 그 병이 출근일 이전에 일어났다면 이 진실은 인과적 관계가 없는 거짓이 된다. 여기서 그의 '진실'은 거짓의 베일에 숨겨진 '거짓말'이 된다.
또한 진정성이 있어 보이지만 거짓으로 판명되는 경우도 있다. 코끼리 다리를 만져보고 기둥 같다고 느꼈으면서도 '벽 같았다'고 이야기한다면, 그는 자신의 감각을 조작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진술을 판별할 때는 말하는 사람의 의도나 진정성을 검토해야 한다. 그렇기에 사회적으로 인정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을 갖추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다만 어떤 진술의 판별을 위해서는 그 진술에 이르는 과정이 합리성이 있는지에 대한 기준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개개인의 판단과 인식 수준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비교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사실을 규명하는 일이란 의도나 주관적 해석을 모두 모아 객관적 현실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다. 그래서 '진실'의 반대는 '거짓'이며, '사실'의 반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관점을 기억하자. 인간은 사실을 말할 수 없다. 사실을 반영한 자신의 해석을 말할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어떤 정보를 판단을 할 때 진정성, 맥락, 상황, 관계, 그리고 이것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고려해야만 실체와 실제를 파악하고, 더 넓은 세계인 실재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과도하게 중요시하곤 한다. 관성에 빠지는 것이다. 관성이란 외부의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이다. 경험을 통해 얻은 확신은 우리에게 편안함과 안정감을 제공하기도 한다. 때문에 그 경험이 확신을 만들고 이를 근거로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반대로 실패한 경험을 했다면 그 경험은 미래의 실패를 예측하게 한다. 하지만 이 때문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과거의 경험에 갇혀 새로운 가능성을 놓치거나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은 세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이겠지만 그것에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실재에 도달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굳은 믿음과 확신이 영원함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당연해 보이는 그 어떤 정보라도 의심해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