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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들

by inome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참 큰 축복이다. 우리는 말을 통해 사실을 전하고, 마음을 나누며, 관계를 이어간다. 하지만 말이라는 건 언제나 믿음 위에 놓여 있다. 내가 한 말이 그대로 전해질 것이다. 그런 믿음 말이다. 문제는 마음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다. 말은 입을 떠나는 순간 살짝 비껴나고, 전하려던 진심은 종종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 버린다.

사람 사이의 감정은 더더욱 그렇다. 어떤 것은 말로 쉽게 담기지만, 또 어떤 것은 아무리 애써도 표현되지 않는다. 글로도 다 옮기지 못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한마디도 하지 않아도 분명히 전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말한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고, 또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 우리를 그렇게 움직인다.

하지만 말은 늘 두 얼굴을 가진다. 따뜻한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무심한 상처로 남기도 한다. 표현은 빠르지만 이해는 늘 더디고, 작은 어긋남이 쌓이면 관계에는 보이지 않는 거리가 생긴다. 그래서일까. 하지 못한 말이나 제대로 닿지 못한 마음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는다. 특별히 다툰 것도 아닌데 이유 없이 멀어지는 사람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그래서 어떤 마음은 차라리 말이 아닌 방식으로 더 정확히 전해진다. 무심한 손짓 하나, 오래 머문 눈빛, 아무 말 없이 나란히 걷는 시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린다.

관계가 깊어진다는 건 어쩌면 덜 말하게 된다는 뜻일지 모른다. 처음에는 조심스레 단어를 고르며 마음을 설명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커피잔을 건네는 손끝이나, 사소한 눈짓, 함께하는 침묵이 그 자리를 채운다. 말이 줄어드는 대신, 마음은 더 선명해지는 것이다.

말이 줄어드는 게 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말이 너무 많아질까 봐 두려워서일지도 모른다. 넘치면 쏟아지고, 쏟아지면 흘러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새, 말과 말 아닌 것들 사이의 그 어중간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관계,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가까워지는 이상한 거리.

그건 일종의 이해다. 명확하지 않지만 분명한, 서로의 울타리를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닿는 감각 같은 것. 말로 하는 모든 표현이 마음의 가장자리를 넘어서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징후라면, 어쩌면 진짜 말은, 바로 그 말이 없는 순간에 깃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단어의 정교함이 아니라, 그 단어가 흘러갈 수 있는 마음의 상태다. 잘 가꾸어진 정원처럼, 혹은 아무도 걷지 않는 골목처럼. 우리는 말을 고르기보다는, 말을 둘러싼 공기를 느끼며 서로를 더듬는다. 말은 도구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서로를 어설프게, 그러나 꾸준히, 이해하려는 과정 그 자체일 것이다.

세계를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는 늘 무언가를 ‘말함’으로부터 시작된다. 묻고, 대답하고, 또는 침묵하면서, 어디까지가 그을 수 있는 경계인지를 알아보는 것.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장자리에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와 겹쳐 있다. 표현할 수 없으면,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어쩌면 아직 탐험하지 못한 세계의 바깥이다.

생각은 말이 된다. 말은 구조를 가진다. 구조는 모양을 만든다. 모양은 생각을 만든다. 하지만 어떤 진술은 사실이고, 어떤 진술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진술이 당장 참인지 거짓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특히 삶의 깊은 경험들, 감정이나 신념 같은 것들은 더 그렇다. 사람들은 종종 꿈에서 어떤 존재와 마주하고, 그것이 자신에게 무엇을 말했는지를 전한다. 인자하고 아름다웠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그 말을 믿고, 누군가는 웃으며 넘긴다. 말이 도달하는 방식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표현된 말이 가진 구조와 그것을 수용하는 마음의 구조가 서로 어긋난다면, 말은 공중에 흩어진다. 그러면 어떤 의미도, 어떤 사실성도 전달되지 않는다. 말이 미끄러질 때, 수많은 ‘신’들이 생겨난다. 하나하나의 신은 다르지만,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설명된다. 인자하고, 아름답고, 멀다.

우리가 이름붙인 사물의 이름들. 나무, 별, 바람, 공기, 불 같은 것들. 그렇게 부르는 순간, 그것들은 모호함을 벗는다. 하나의 이미지가, 하나의 기호가 된다. 기호들이 서로 얽혀 상황이 되고, 상황들이 겹쳐 하나의 세계가 된다. 마치 그림을 그리듯, 말도 그렇게 세계를 그린다. 하지만 아무리 그려도, 늘 바깥이 남는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 묘사할 수 없는 순간. 그곳은 말이 닿지 않는 곳이다. 어쩌면 세계란, 말로 닿는 곳과 닿지 않는 곳 사이의 어떤 진동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노란색 컵. 누군가 그렇게 부르기로 한 순간부터 더 이상 단순히 컵이 아니라, 노란색이라는 속성과 결합된 하나의 장면이다. 더 나아가, 그 컵을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모습으로 상상할 수도 있다. 그렇게 장면이 연결되고, 상황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상황들은 구체적인 사실로 만들어진다.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은 아마 그런 식이다. 이미지와 이미지가 맞닿고, 그 사이에 이름이 붙고, 이름들이 엮여 만들어진 하나의 흐름.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사실이 되는 것일까?

살다보면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신의 인자한 얼굴이라든가, 어떤 사람의 진심 어린 고백 같은 것들. "사랑", "자유", "정의" 같은 말.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그런 감정의 무늬들. 이것들의 앞에는 모두 사실이 따라 붙는다. 그러나 그 사실이라는 낱말은 어디에도 정확히 붙지 못하고 부유한다. 한 사람의 마음 안에서는 맑고 선명하지만, 형태가 없고, 다른 사람에겐 너무나 모호하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진심이 내가 아는 사실이 정말 전해졌을까를 의심하고, 다시 설명하고, 때론 또 가만히 입을 닫는다.

가끔은, 언어가 실패하는 지점이 너무 명확해서, 그 앞에서 무력하게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다. 예컨대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아무리 정제된 문장도, 어떤 수사도, 그 부재를 가려주지 못한다. 그럴 땐 어떤 말도 부질없어진다. ‘괜찮아질 거야’, ‘시간이 해결해줄 거야’ 같은 말들이 오히려 잔인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오히려 말이 자신을 배신한다. 그건 더 이상 위로가 아니고, 그저 공허한 소리다. 말은 무너진다. 그리고 그 무너짐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언어가 담지 못하는 것을 알아차린다. 말의 바깥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말 이전의 감정들. 그것은 거의 비명에 가깝다.

우리가 가진 어떤 틀, 그러니까 이성과 감정과 감각이 맞물려 만들어내는 일종의 체계 같은 것들. 분명 세상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하지만 설명된 사실도, 반영된 현실도 아니다. 그래서 문학이나 예술이 그 자리를 메운다. 종종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중심에 놓이는 세계다. 뉘앙스, 어떤 기분, 혹은 눈빛. 단정할 수 없으나 확실히 느껴지는 것들이 펼쳐지는 세계. 그런 것들을 붙잡기 위해 사람들은 픽션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든다.

피카소가 그려낸 왜곡된 인간, 혹은 누군가의 마음이 담겨 세상으로 나온 흔들리는 선들. 우리는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그 안에도 세계가 꿈틀댄다.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 사람만의 규칙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익숙하지 않은 시선, 낯선 구조. 그리고 발견되는 질서. 그 안에는 현실을 흉내 낸 것 같은 장면도, 때로는 현실과 전혀 닿지 않는 이야기들도 담겨있다.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마음의 구조는 언제나 말의 구조보다 넓고, 느리며, 더 오래 흔들린다. 우리가 어떤 단어를 쓰고, 문장을 고르는 일은 단순히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방식,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다. 말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씩 만들어지고, 또 변한다. 그래서 말은 살아 있다. 그 말이 닿는 방식도, 쓰이는 장소도 모두 유동적이다. 세상은 언제나 흐르고, 말도 그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자리를 찾는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말하려 할 때, 사실 그 말은 언제나 세계의 모서리에서 시작된다. 말은 구체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대체로 그렇지 않다. 눈앞의 사물이나 손에 잡히는 감정들조차, 이름을 붙이는 순간 낯설어진다. ‘슬픔’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말한 슬픔, 듣는 이의 기억 속에서 조립된 또 다른 감정이 되어, 조용히 고개를 돌린다.

사람들은 말로 세상을 설명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말은 때때로 너무 정확해서, 오히려 아무것도 담아내지 못한다. 누군가 “나는 슬퍼”라고 말할 때, 그것은 고백이 아니라, 그저 슬픔의 가장자리를 어루만지는 손짓에 가깝다. 듣는 사람은 그 말의 진심을 파악하기 위해 자신의 슬픔을 가져와 견줘본다. 그러다 문득, 이 감정은 같은 단어로 묶일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말이 늘 우리를 구원하지는 않는다.

어떤 감정은 말보다 빠르게 지나간다. 때로는 말이 늦게 도착하고, 때로는 아예 도착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말이 아니라 행동이나 눈빛으로,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식으로 감정을 전한다. 그것이 오해를 낳기도 하지만, 어쩌면 오해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진실한 한 형태인지도 모른다. 정확히 이해한다는 것보다, 서로를 조금씩 다르게 이해하면서도 계속 머무르는 일이 훨씬 더 어렵고, 중요하다.

누군가는 그것을 불완전함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분명 언어의 가능성이다. 우리가 느끼는 어떤 감정은 아직 말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색이 있고, 아직 말해지지 않은 방식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번은 점집에서 본 미래를 믿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그 이야기들을 진심으로 믿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생각했다. 어떤 것들은 설명을 요구하지만, 믿음은 그렇지 않다고. 그래서 사람은 종종, 말이 아니라, 마음이 기댈 수 있는 무언가에 몸을 맡긴다. ‘기도’라는 건 아마 그런 자리에서 태어난 말일 것이다. 어떤 문장은 옳고 그름보다, 얼마나 간절한가로 남는다.

예술가들은 그 간절함을 알고 있다. 그들은 말보다 먼저 도착하는 세계를 향해 손을 뻗는다. 피카소가 그린 얼굴은 현실의 얼굴과 닮지 않았지만, 묘하게 진실에 가까웠다. 칸딘스키의 색은 어떤 사물도 담고 있지 않았지만, 분명히 누군가의 마음을 닮아 있었다. 우리가 아직 설명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마음을 놓이게 한다.

그리고 가끔은 그런 세계가 있다는 걸 느끼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아주 조금 더 괜찮아진다.
말로는 다 전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될 때, 사람은 비로소 더 깊은 쪽으로 걸어간다.
전할 수 없음의 자리에 다다를 때, 우리는 어쩌면 처음으로 귀를 기울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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