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기간이 긴 A와 B는 가족 모임에서 결혼 충고에 시달렸다. 가족 모임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불편해졌다. 둘은 새로운 가족을 만든다는 의미 외에도 경제 사정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함께 고민해야 했다.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결국 몰리는 상황이 되었다. 주변의 압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A가 용기를 내 먼저 청혼을 했다.
“네 인생 내가 책임질게. 우리 그냥 결혼하자!”
B의 대답은 A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뭐? 네가 뭔데 내 인생을 책임져? 어떻게 내 인생에 대해 책임지겠다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 도대체 책임진다는 게 뭔데? 그리고 왜 책임지겠다는 건데? 내가 약해 보여서? 내 인생이야.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는 거고, 네 인생은 네가 책임지는 거야. 각자 자기 인생을 책임지며 사는 거야. 결혼? 그냥 우리가 함께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거니? 난 네 소유물이 아니야. 네 말에는… 너는 아니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나를 물건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잖아. 난 사람이야. 네가 소유할 물건 같은 게 아니라고. 네가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책임진다는 식의 어설픈 말을 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리고 네 눈에 내가 그 정도로 약하고 부족하게 보여? 그렇다면 최소한 너보다 강한 사람을 만나야 보호라도 받지 않을까?”
A는 혼란스러웠다. 언젠가는 당연히 결혼할 거라고,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B의 예민한 반응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A가 멈칫하며 당황한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B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래, 결혼하자.“
짧지만 묵직한 결심이 담겨져 있었다.
여기서 질문하나. 이 대화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남성과 여성으로 특정되어 있지 않다. 혹시 이 대화에서 등장하는 인물 중 누가 여성이고 남성인지 생각해 보았을까?
분명 대화에 참여한 두 사람이 모두 남성일 수도 있고, 여성일 수도 있으며, 혹은 둘 중 한명이 남성이거나 여성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글을 읽은 당신은 성별을 특정할 어떤 근거가 없음에도 누군가를 남성으로, 누군가를 여성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편견"이라는 단어는 어떨까?
사실 누가 남자이고 누가 여자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 이야기에서 정말 중요한 건, A의 말에 B가 보인 반응이다. 그날 A는 말했다. “내가 네 인생을 책임질게.” 짧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간단하지는 않다.
A의 말에는 아마 자신의 진심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좋든 나쁘든 모든 것을 함께 감당하겠다는 의지다. 이 경우 결혼은 함께하는 삶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동안 혼자만의 방식으로 살아온 삶에서 한 발짝 나아가 상대를 동등하게 존중하며, 인생의 발걸음을 함께 맞추겠다는 선언이었을 것이다. 책임이라는 말 속에는 분명 의무와 다짐이 담겨 있었고, 결국 그것은 ‘네 곁에 있겠다.’는 약속과 다르지 않았다.
B는 A의 의도를 다르게 받아들였다. A에게는 진심 어린 다짐이었을 그 말이, B에게는 일방적인 선언처럼, 때로는 소유하려는 의지로 느껴졌을 수 있다. “네 인생 내가 책임진다”는 말 속에서, B는 보호받는 주체가 되면서 동시에 통제당하는 압박을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배려와 진심이 담긴 말일지라도, 각자는 자신의 맥락 속에서 그것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의도와 전혀 다른 이해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번 경우에는 그 해석의 차이를 단순한 왜곡으로 치부하기도 어렵다. 실제로 ‘책임’이라는 말은 누군가에게는 의지가 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침범처럼 느껴질 수 있다. 결국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인식 차이 때문에 한 사람의 말이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사실뿐이다.
왜 그럴까? B의 생각을 조금 더 들여다본다면, 책임과 의무 사이에는 쉽게 넘어설 수 없는 선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책임을 지는 사람은 자신의 뜻으로 무언가를 선택했기에 결과를 떠안게 되지만,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은 정해진 틀 안에서 움직일 뿐이다.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누군가 정해둔 질서에 맞춰 발걸음을 옮기는 일. 그래서 책임은 행위자의 몫이 되지만, 의무의 결과는 오히려 명령한 자의 것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B가 A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건, 더 이상 자신만의 자유를 온전히 가질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후로 B가 하게 될 모든 일은, B 자신을 위한 것도, B가 선택한 것도 아니게 된다. 그저 누군가의 세계에, 그것도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세계에, 강제로 걸어 들어가는 일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B는 A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어쩌면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 B가 가진 자유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사라져버렸다. 구조적으로 보면, B는 이제 A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독립된 인격을 지닌 성인으로 살아갈 권리를, 어쩌면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내던진 것이다.
A가 건넨 청혼은 분명 두 사람 모두에게 설렘을 주는 고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화 속에서 무심히 흘러나온 ‘책임’이라는 말은, 뜻하지 않게 무거운 족쇄가 되었다. 그 한마디가, 둘 사이에 있던 인간의 본질적 자유를 은연중에 무너뜨렸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B가 느꼈을 불쾌함이나 머뭇거림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다. A와 함께하는 삶은 곧,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없는 삶이 될 것이니까.
B는 아마, 직관적으로 A의 청혼 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뜻을 따라야 하는, 자유를 빼앗긴 삶이라는 것을. 물론, 이 생각이 지나친 것일지도 모른다. 편향에 빠진 해석일 수도 있다. 그래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말 속에는 언제나 경험과 판단이 조용히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같은 말을 건네도, 얼마든지 다른 마음으로 들을 수 있다. 같은 소리, 같은 표정 아래에서도, 마음속 풍경은 저마다 다른 법이다. 말이란 우리가 지나온 시간, 겪어낸 사랑, 버텨낸 슬픔에 따라 얼마든지 결이 달라진다.
세상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온 규칙들이 있다. 아무도 그것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우리는 모르게 그 규칙 속에서 숨 쉬고 자란다. 생각조차도 나 혼자 만든 게 아니다. 내게 말을 가르쳐준 이 세상, 그 오래된 약속들 속에서 나는 내 마음을 조심스레 엮어냈다. 그래서 말을 한다는 것은, 내 안에 쌓인 것들을 내어놓는 동시에, 세상이 먼저 정해놓은 틀에 나를 얹는 일이다. 한국어를 배운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단지 단어를 외우는 게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숨결과 기억을 배우는 일이다.
'사과'라는 소리를 듣고 머릿속에 붉은 과일을 그릴 수 있는 것도, 우리 안에 심어진 오래된 경험 덕분이다. 다른 세상에 사는 이에게는 그저 낯선 바람소리처럼 들릴 뿐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말을 건넬 때, 우리는 단순히 소리를 던지는 게 아니라, 상대의 세상을 부드럽게 두드리는 것이다.
심지어 같은 언어를 쓰는 이들 사이에도, 간극은 쉽게 생긴다. '망고 하다', '수박 하다' 같은 말을 들으면 우리는 달콤한 과일을 먼저 떠올리지만, 그 안에는 전혀 다른 의미가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서로 다른 시간과 세월을 걸어온 사람들이라면, 같은 소리를 듣고도 전혀 다른 풍경을 그리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래서 말이란, 단순히 의미를 옮기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시간, 그 사람의 계절, 잊혀진 눈물까지도 함께 옮겨진다. 그래서 오해는 그저 우리가 서로 다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같은 별을 다르게 불러왔기 때문일 것이다.
‘책임’이라는 단어 하나에도 누군가는 따뜻한 믿음을 떠올리고, 또 누군가는 숨 막히는 짐을 느낀다. A와 B가 같은 말을 나누었지만, 그 말에 담긴 무게는 서로 달랐다. 그 차이는 둘이 지나온 길이 다르기 때문에 생겨났다.
B가 느낀 불편함은 단지 A의 말 때문만이 아니었다. 세상과 부딪히며 배운 경험, 견뎌온 시간, 결혼과 책임이라는 말에 깃든 오래된 기대와 약속들—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B의 마음을 움츠리게 했다. 우리는 세상이 알려준 방식으로 살아가지만, 그 방식이 모두에게 같지 않다. 어떤 사람은 ‘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군가의 따뜻한 손을 떠올리고, 또 다른 사람은 오래된 흉터를 떠올린다. 말은 같아도, 닿는 마음의 결은 저마다 다르다.
이처럼 누군가 ‘책임’이라는 단어를 건넬 때, 그 말이 상대에게 어떻게 닿는가는 발화자의 의지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듣는 이의 경험과 기억 속에서 이미 받아들여지는 방식이 달라진다. 어떤 이는 그 말을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 느낄 수 있고, 또 다른 이는 따뜻한 다짐으로 받아들인다.
때로 누군가는 청혼을 받아들이며 조용히 자신을 내려놓는다. 독립된 숨을 걷어내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규칙에 자신을 맞춘다. 이러한 경험은 단지 말이 가진 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말을 둘러싼 세상이 만들어낸 법칙과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선택이다.
사람은 자기가 지나온 계절만큼 말의 무늬를 바꾼다. 만나고 떠나보낸 얼굴들, 견뎌야 했던 긴 밤들, 그 속에서 새겨진 숨결이 말의 끝에 달라붙는다. 그래서 어떤 말은 벼랑 끝처럼 아슬아슬하고, 어떤 말은 오래된 이불처럼 조용히 우리를 감싼다. 우리는 그렇게 말로 서로를 밀어내기도 하고, 다시 끌어안기도 한다.
이를테면, "라면 먹고 갈래요?" 같은 말. 어떤 날에는 그 말이 정말 라면을 뜻하지 않고, 단지 조금 더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의 다른 표현이 된다. 우리는 그 말의 표면 아래를, 각자의 기억과 체온으로 읽는다. 그래서 한 사람에겐 웃음이 되는 말이, 다른 사람에겐 조심스레 피해야 할 문장이 되기도 한다. 말은 그렇게 균열을 만들고, 또 다리를 놓는다.
말은 그렇게, 다리가 되고, 강이 되고, 때로는 보이지 않는 벽이 된다. 완벽하게 전해지는 말은 없다. 우리가 기대는 것은, 조금씩 어긋나는 감정 속에서도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노력이다. 정확히 이해하려는 대신, 다름을 인정하고 그 곁에 머무르는 것. 말은 그래서 우리를 완성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끝없이 이어주는 방식이 된다. 우리가 쓰는 모든 말에는 닿지 못한 마음이 조금씩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작고 세심한 틈 사이로, 우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서로에게 다가선다.
삶이란 어쩌면 그 거리를 두고 멈춰 서서, 너머를 바라보는 일이다. 서로의 세상을 온전히 건너기 위해, 오래도록 머뭇거리며 마음을 다듬는 일.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작은 손짓부터 시작해 마음을 건네기 시작한다. 서로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나는 일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