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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렇게 어른이 된다

by inome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은 누구나 어른이 된다. 하지만 단지 나이를 먹는 일만은 아니다. 어느 날 문득,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매일 아침 세상이 조금씩 무거워지고, 그 무게를 안고도 일어나야 한다는 것.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말들을 가슴 깊이 묻어둔 채로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

어릴 적엔, 자라서 어른이 되면 거창한 무언가가 될 줄 알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모든 것이 놓여 있다고 믿었다. 마음이 향하는 쪽으로 몸도 함께 움직여주던 날들. 자유는 손 안에 있었고, 두려움은 그림자처럼 작았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 자유는 책임의 또 다른 이름이었고, 무한해 보였던 가능성은 수많은 선택의 문을 지나야 겨우 닿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조금씩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이유 없이 웃던 표정, 겁이 없던 심장,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었던 내일의 풍경. 하지만 그 상실만으로 어른이 되어가는 건 아니다. 잃는 만큼 얻어야 비로소 한 발을 옮길 수 있다. 기다림의 모양, 타인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태도, 상처 위에 덧칠된 말 없는 애씀 같은 것들. 어른이 된다는 건 자신이 만든 울타리를 조금씩 열고, 더 넓고 낯선 풍경 앞에 서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방향을 묻는 마음이 잦아들었다. 이 길이 옳은지, 지금의 내가 틀리지 않았는지, 대답 없는 질문들이 하루를 메웠다. 완벽이란 여전히 멀기만 하고, 모든 걸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 흠이 있어도 괜찮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루를 버텼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은 이미 충분히 값지다는 것을.

처음은 언제나 낯설고 서툴다. 세상은 너무 크고, 말들은 숨 가쁘게 앞질러 가며, 마음은 아직 제 이름을 알지 못한 채로 흔들린다. 그래서 자주 멈추고, 때로는 눈물에 잠기고, 무엇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순간에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게 된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조용한 몸짓 하나가 다시 시작된다. 넘어진 자리, 무릎에 남은 흉터 위에서 천천히 일어서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아마도 그건, 마음 안쪽 깊은 곳에서 스스로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는 작은 신호일지 모른다. 그렇게 아주 조금씩, 아주 천천히 자란다.

살아간다는 건 단숨에 단단해지는 일이 아니다. 누구는 말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는 방식으로 세상을 배우고, 누구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으려다 길을 잃는다. 삶은 계절처럼 흐르고, 스쳐간 마음들의 기척 속에서 서서히 형태를 갖춘다.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들, 아직 방향을 정하지 못한 마음, 완전히 다가서지 못한 자신. 그것들은 오랜 시간 속에서 조용히 틀을 만들고, 언젠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그 흐름 속엔, 나 아닌 사람이 있다. 때로 따뜻한 눈빛 하나로 괜찮다고 말해주는 이들. 말 대신 시선으로, 설명 대신 온기로 건네는 다정함. 그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여전히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무너졌던 마음 한가운데, 다시 걸을 수 있는 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이유. 그것은 언제나 곁에 머물러 있던 이들 덕분인지도 모른다. 이름 없이, 말 없이. 삶을 견디게 해주는 건 그런 존재들.

어떤 시기에는 방향을 알려주는 말보다, 그냥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 더 마음 깊숙이 다가온다. 가끔은 눈빛 하나, 침묵의 여운 하나가 말보다 훨씬 많은 것을 전한다. 아직 말로 다 닿지 않은 마음이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 그 앞에 선 사람은 조용한 거울이 된다.

물론 거울이 언제나 맑고 투명한 것은 아니다. 관계는 아주 작은 떨림에도 흔들리고, 알지 못하는 사이 엇갈린다. 어쩌면 그건, 잠시 걸음을 멈추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깨닫는 일은 쉽지 않다. 멈춰 서는 일보다, 흐려진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살아간다는 건 익숙한 자리를 벗어나는 일의 반복인지도 모른다. 처음 도착한 풍경은 낯설고 차가워서, 그동안의 규칙은 아무 힘도 갖지 못한다. 하지만 그 낯섦이야말로 우리를 깨어 있도록 만든다. 무릎을 꿇은 뒤 다시 일어설 때, 몸은 이전과는 다른 감각을 품는다. 불확실한 시간 속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그 발걸음은, 어제를 지나 오늘에 닿는 동안 조금씩 새로운 결을 형성한다. 그렇게 사람은 하루하루 조금씩 달라진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건 지나온 것을 흘려보낸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모든 흔들림과 머뭇거림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일에 가깝다. 어른이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완전함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미완의 상태로 자신을 들여다보며 살아가는 것. 시간의 흐름에 밀려가면서도, 그 안에서 조심스레 눈을 뜨고 자신과 세계 사이의 거리감을 가늠하며 시야를 넓혀나간다.

가까이 다가서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말보다 오래 남는 건 눈길이고, 말하지 않는 시간이다. 오래 바라보다 보면, 마음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감정들도, 어느새 손에 익는다. 가끔은 멈춰 서는 일이 필요하고, 때로는 한 걸음 물러나는 게 맞다. 그렇게 사람은 자기만의 속도로 움직인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숨이 차지 않을 만큼, 멈추고 싶을 때 잠시 멈출 수 있을 만큼. 살아가는 법이란 아마 그런 거다.

익숙해진 것들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늘 곁에 있을 것 같던 것들이 멀어질 때, 사람은 문득 안에서 무너지는 소리를 듣는다. 말없이 스러지는 관계들, 돌아보면 이미 사라져 있던 기억들. 그 앞에서 마음은 조용히 갈라지고, 남겨진 자리는 텅 빈 채로 남는다. 이별은 때로 그렇게 온다. 설명도 없이,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흔적은 남지만, 온기는 사라진다.

남겨진 자리에는 말 없는 기운만이 남는다. 그리움은 형태가 없는데도, 하루의 틈마다 불쑥 끼어든다. 세상은 멈추지 말라고 한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혼자서도 괜찮아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마음은 늘 몇 걸음 뒤에 머문다. 사라진 얼굴을 떠올리고, 지나간 말을 되짚는다. 한참을 그렇게 머물다가, 결국에는 일상을 다시 잡는다. 비어 있는 마음을 안은 채로, 흘러가는 흐름에 몸을 맡긴다. 완전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씩 익숙해지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알게 된다. 변한다는 것이 무언가를 잃는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마음속을 차분히 들여다볼수록, 타인의 마음도 조금씩 감지된다. 관계는 규칙으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서로의 속도를 존중하고, 함께 있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말보다 더 많은 서로의 방향을 이해하는 일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타인의 세계를 내 삶에 조금 들여놓는 법을 배운다.

감정은 처음엔 형태가 없다. 하지만 천천히 윤곽을 갖춘다. 익숙해질수록, 사람은 그것을 바깥으로 꺼내는 법을 익힌다. 처음엔 말이 자꾸 어긋나고 뜻은 흐릿하지만, 반복되는 시도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정확하게 전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건넨 말이 누군가에게 닿고, 다시 돌아오는 순간이 있다. 그제야 우리는 깨닫는다.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마음을 열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마음의 방향에는 늘 누군가가 서 있고, 그것은 서로를 잇는 다리가 있었다는 것을. 그 다리를 건너며 사람은 자각하게 된다. 나는 내가 분명하지만, 동시에 당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 연결은 이름 붙이기 어려운 중심이 되어, 삶의 흔들림 속에서 우리를 지탱해주는 힘이 된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배우는 사람으로, 함께 살아가는 이로, 누군가의 딸로서, 친구로서. 우리는 주어진 이름에 어울리는 몸짓을 익혀간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책임을 가진다는 뜻이고, 자리를 지킨다는 건 때로는 고단하지만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 타인의 자리를 함께 품어야 한다.

나 아닌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쪽에 가깝다.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조심스럽게 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서는 것. 누구나 처음이 있었고,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자라났다. 그렇게 삶은 이어진다. 앞서 걸어가는 이가 있고, 그 뒤를 따르는 이가 있다. 그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자리가 생긴다. 그것은 억압이 아니라 건네줌의 형태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조용히 건네주고, 다른 이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이어받는다. 그렇게 사람은 사람에게서 태어난다. 그리고 삶은 그다음으로 흘러간다.

살다 보면 한 번쯤 “버르장머리가 없다”거나 “싸가지 없다”는 말은 흔히 감정이 격해진 순간에 튀어나오지만, 그 속에는 단순한 화이상의 무언가가 담겨 있다. 익숙한 판단의 말투로, 듣는 이의 삶 전체를 무겁게 덮는다. 미숙하다는 평가처럼, 어른다움의 기준을 재단하려는 오래된 관습이 그 안에 숨어 있다.

그 한마디는 우리가 어떤 눈빛으로 세상을 마주해왔는지, 어떤 몸짓으로 관계를 이어왔는지를 되묻게 만든다. 익숙한 질서를 빌린 단정은 때때로 타인을 움찔하게 만들고, 그 순간 사람은 자신의 걸음을 되짚는다. 누군가를 향한 표현은 단순한 소리를 넘어선다. 감정의 껍질이고, 기억의 그늘이며, 사람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는 투명한 선이 된다. 균열 속에서 드러나는 경고이자, 문턱 앞에 선 이들을 향한 보이지 않는 심문. 그리고 그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삶은 어쩌면, 누군가의 마음에 조심스레 닿기 위한 과정인지도 모른다. 충고처럼, 혹은 지친 마음 끝에서 무심히 흘러나온 말처럼. 아이가 실수했을 때, 젊은 이가 기대에서 비껴났을 때, 우리는 너무도 쉽게 그 낱말들을 꺼내며 누군가를 가르치려 든다. “싸가지 없다.” 그 말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왔다는 것은, 우리 역시 오래전 누군가의 혀끝에서 길들여져 왔다는 증거다.

문제는 그 표현이 사람을 움츠리게 하고, 점점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게 만든다는 데 있다. 감정보다 앞서 나간 목소리는 사람의 표정을 닫고, 웃음 뒤에 경계를 세운다. 표현이 두려움으로 인해 줄어드는 순간, 사람은 점점 자신을 잃어간다.

선 넘는 친밀감은 관계를 위태롭게 만든다. 자기 확신만으로는 연결을 지킬 수 없다. 이해 없는 말투는 벽이 되고, 우리는 그 경계에서 갈등을 겪는다. 나를 잃지 않으면서도 타인과 어울리기 위해, 우리는 마음을 더듬는다. 그 감정이 관계의 방향을 정한다.

“싸가지 없다”는 말은 어쩌면 그 사람에게 던져진 질문의 가장자리를 스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 그렇게 말하니, 왜 그런 눈빛을 하니, 왜 아직 그렇게 미성숙하니—그런 말들 속에 감춰진 판단과 기대. 아직 덜 자랐다는 평가는 종종, 더 어른스러워지라는 요청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그 말이 충고인지 상처인지 가늠할 수 없는 순간, 마음은 조용히 문을 닫는다. 닫힌 마음 앞에서 필요한 것은 정확한 지적이 아니라 곁이다. 말보다 느린 눈빛, 비난보다 따뜻한 숨결. 자람이란 어쩌면 그런 다정한 기척에서 시작되는 건 아닐까. 말하지 않아도 머무는 마음, 그 침묵의 무늬에서 비로소 누군가는 조금씩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을 길러낸다는 것은 말 몇 마디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시작과 끝을 함께 견디는 일, 한 자리에 오래 머무는 일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사람은 여전히 관계 속에서 자란다. 삶의 방향도 그 안에서만 배운다. 감정의 온도와 거리의 틈을 조율하며, 우리는 사회라는 흐름에 천천히 몸을 실어간다.

진심을 전하는 일은 종종 기다림의 다른 이름이다. 물러서고, 참으며, 입을 다문 채 다시 손을 내미는 일.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잊지 않도록 돕는다. 그것이 사람을 키우는 방식이 된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렇게 다정하지 않다. 표정 하나, 눈빛 하나로 사람을 재단하는 일이 너무 익숙해졌다. 제대로 자라지 못한 언어는 쉽게 타인을 단정하고, 그 판단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조용히 닫아버린다.

우리는 오랫동안 조용하고 단단한 사람을 '잘 자란 사람'이라 불러왔다. 그 안에는 타인을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눌러온 시간이 있다. 기쁨보다 침묵을 먼저 배운 시간, 목소리보다 눈치를 더 자주 살핀 나날. 그것을 성장이라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누구를 위해 그렇게 자라온 것일까. 그 자람은 나의 것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정해둔 방식에 나를 맞춰온 결과였을까.

좋은 대학, 안정된 직장, 높은 연봉. 세상은 그런 것들을 먼저 삶의 이름으로 불러주고, 그 이름을 향해 걸으라고 배웠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걷다 보면, 어느새 질문은 멀어지고, 속도와 성과만이 삶의 전부가 된다. 앞서고, 증명하고, 살아남는 일. 그것이 성숙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된다. 우리는 이겨내야만 어른이 된다. 하지만 이긴다는 것은 언제나 누군가의 패배가 함께 따라온다. 경쟁의 궤도 속에서 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를 잃고, 때로는 자신조차 부정하곤 한다. 그렇게 도달한 자리에 과연 우리가 원했던 어른다움이 있는 걸까.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지나쳐 도달한 그 끝에, 기대했던 진짜 성숙이 놓여 있을까.

사람은 혼자 크지 않는다. 누군가의 무심한 말 한마디에 움츠러들고, 다른 누군가의 조용한 손끝에 다시 피어나기도 한다. 삶은 그런 방식으로 이어지고, 관계는 그 안에서 조심스럽게 길을 만든다. 누군가를 밀어내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서, 서로를 지켜보며 머무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놓치고 있던 어른다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말보다 마음을 먼저 건네야 한다. 단정하기보다 다가서고, 가르치기보다 곁에 있어주는 것. 스스로 다다랐다는 확신을 잠시 멈추고, 타인의 속도에 귀 기울이는 일. 그 느린 이해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남는 진짜 흔적이 된다.

더 이상 타인을 작게 만들지 않는 선택. 누구도 덜 자라지 않았고, 누구도 완전히 다다르지 않는다는 사실. 다만 서로 다른 시간을 견디고, 각자의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 그 너그러움의 시간이 우리를 어른답게, 그리고 조금은 사람답게 만든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정해진 목표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수많은 길 사이에서 멈춰 서서, 무엇이 진짜 나의 삶인지 조용히 되묻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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