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개인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 앞에 무릎을 꿇었다. 패전국에게 가해진 굴욕적인 조항들, 막대한 배상금과 군사적 제한은 단순한 외교 문서가 아니라 한 국가의 자존심을 짓밟는 선언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모든 것을 잃었다.
독일은 무너지고 있었다. 가난은 일상이 되었고, 불안은 일종의 인내심처럼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다. 실직은 예고 없이 찾아왔고, 배급 줄은 점점 길어졌다. 생계는 숫자들의 기분에 따라 좌우됐고, 물가와 통화는 장난감처럼 흔들렸다. 그러나 이 모든 혼란 속에서 가장 무서웠던 건,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아무도 분명히 말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정확한 설명보다 명확한 방향을 원했다. 이해보다는 감정을 먼저 해결하고 싶어 했다. 그런 마음을 가장 먼저 간파한 이가 있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 그는 대중이 진심으로 원하는 일들 보다 그들이 견디지 못하는 감정에 귀를 기울였다. 그 결과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다.”
이 문장은 선동의 선언이 아니라, 진단이었다. 희망이 아닌 적을 제공함으로써 내일보다 복수를 택하게 할 수 있는 힘. 무언가를 이해하려 노력하기보다는, 무엇을 미워해야 할지가 더 절실했던 시대였다. 괴벨스는 그 열망에 해답을 제시했다. 적을 만들어내고, 반복했다. 그는 조언했다. “대중에게 결코 두 가지 이상의 적을 제시하지 말라.” 감정은 분산되면 약해지기 때문이다.
전략은 교묘했다. 괴벨스는 감정을 구조화하고, 메시지를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했다. 불편한 사실은 덮고, 감정만을 남겼다. “가장 단순하게 가공하고 반복할 수 있는 자만이 여론을 휘어잡을 수 있다.” 이것은 구호가 아니라 설계도였다. 그는 대중을 설득하지 않았다. 감정이 향할 수 있도록 단순한 방향을 마련해주었을 뿐이다.
이 모든 과정은 설명이 아닌 명령으로 작동했다. 사람들은 따랐고, 안도했다. 누구를 미워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를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안락함이 있었다. 질문은 불안을 낳지만, 복종은 그 불안을 잊게 했다. 생각할 여유가 사라진 시대,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 일은 도리어 실용적 선택처럼 보였다.
모두가 속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 침묵은 진실보다 더 크게 작동했다. 반복되는 구호 속에서 감각은 무뎌졌고, 생각은 낯선 일이 되었다. 다양한 의견은 혼란으로 간주됐고, 복잡한 감정은 허용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문장을 만들기보다, 누군가가 만든 말에 목소리를 얹었다. 그렇게 타인의 언어가 곧 자신의 신념이 되었다.
괴벨스는 방향을 제시했을 뿐이고, 그 길을 선택한 것은 결국 독일 국민이었다. 그는 무대를 만든 사람이지, 배우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자유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자유의 번거로움을 외면했다. 스스로 판단을 유예했고, 사유를 미뤘다. 그는 군중을 이용했지만, 군중 또한 그를 필요로 했다. 증오를 정리해줄 사람, 두려움을 타인에게 넘겨줄 사람. 사람들은 그런 존재를 원했다.
뚜렷한 미래를 상상하기 어려웠던 그 시절,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율성은 오히려 불편한 것으로 치부되었고, 남들과 다른 주장은 곧 위험으로 인식되었다. 맹목적인 복종이 능력처럼 칭송받았으며, 사람들의 감정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이용되었다.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충성심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기준이었다. 자유는 외부의 억압에 의해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스스로 소리 없이 조용히 사라져갔다.
역사는 종종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 세우며 책임을 돌리지만, 그 인물이 만든 파동은 결국 그것을 받아들인 선택들과 함께 일어난다. 괴벨스의 목소리가 울렸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낡은 진실인지보다, 얼마나 듣기 쉬운 말인지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사람들은 점점 자신이 아닌 방향으로 걸어갔다.
괴벨스는 1897년, 독일 서부 공업지대의 작은 도시에서 가난한 노동자 집안의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삶은 시작부터 평탄치 않았다. 가난도 가난이었지만 유년기에 골수염을 앓아 왼쪽 다리를 심각하게 다쳤다. 그 이후 장애가 생겨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는 글쓰기와 같은 공부였다. 세상과 소통하고 관계를 맺기보다 관찰과 상상, 해석을 통해 자신만의 생각 틀을 만들었다. 현실에서는 걷는 일이 어려웠지만 머릿속에서는 그 누구보다 멀리 움직였다.
괴벨스는 이른 시기부터 자신의 약점을 자각하고 있었고, 그 결핍을 학업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보완하려 했다. 엄청난 노력 끝에 그는 김나지움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진학했으며, 이후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학위 까지 받는 등 문학과 철학에 높은 지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이나 실력과는 별개로 그가 꿈꾸던 언론사에 취업하지 못했다. 독일이 처한 상황이 녹녹하지 않았다. 어려운 경제적 환경으로 일자리는 부족했고 장애를 가진 가난한 사람에게 취업기회는 제공되지 않았다. 거듭되는 실패가 쌓일수록 괴벨스는 독일사회가 실력보다 출신과 인맥을 중시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능력 부족이 아니라 출신 배경 때문이라는 해석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각인되었다.
이 시기 괴벨스는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을 접했다. 문명을 하나의 생명체처럼 보고, 쇠퇴를 피할 수 없는 흐름으로 설명한 이 책은 그에게 단순한 철학서가 아니었다. 그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자신과 패전국 독일을 같은 궤도 위에 올려놓으며, 몰락이라는 개념을 하나의 정당화 도식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사회를 논리보다 감정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실패의 원인을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찾았다. 그랬더니 복잡한 현실을 설명하는 방식은 점차 단순한 적개심이라는 서사로 바뀌어갔다. 딱 맞는 대상도 존재했다. 유대인이었다. 독일의 경제 불안과 정치 혼란을 부치기는 외부 세력의 조직적 개입으로 해석하며, 유대인을 비난하는 명분을 구축했다. 서로 다른 체계를 하나의 기획된 위협으로 묶는 이 방식은 논리적으로는 취약했지만, 감정적으로는 강한 설득력을 가졌다.
당시 유럽에서는 유대인을 ‘국가 없는 민족’으로 보는 시선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 인식은 독일 내에서도 유효했다. 유대인은 오랜 시간 민족 정체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낙인찍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사회에 퍼진 ‘등에 칼을 맞았다’는 신화는 유대인을 내부의 배신자로 지목하고 있었다. 그만큼 패전의 원인을 그들에게 돌리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괴벨스는 이 감정적 흐름을 자신의 해석세계로 끌어들였고, 유대인을 단순한 정치적 반대 세력이 아니라 독일 쇠퇴의 상징으로 만들어 갔다.
그가 경험했던 실패나 좌절은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다. 괴벨스는 사람들의 실패를 닫힌 사회의 증거로 읽었고, 이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언어를 선택했다. 그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정보 전달보다 감정 유도에 초점을 맞춘 그의 언어는, 설득보다는 확신을 앞세웠다. 그는 문장을 통해 사실을 교란하고, 해석을 무기화했으며, 타자를 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외부에 투사했다.
1920년대 초 독일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었고, 전쟁배상금을 지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프랑스와 벨기에군이 루르 산업지대를 점령했다. 독일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총파업뿐이었다. 그것은 마치 독일에는 국민을 지키는 정부가 없는 것만 같았다. 이일은 꺾이지 않던 독일인의 자존심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낡은 체제에 대한 믿음이 땅에 떨어진 시대, 사람들은 혼란스러운 현실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줄 새로운 해답을 갈망했다.
바로 그 공백을 파고든 인물이 아돌프 히틀러였다. 괴벨스는 그의 격정적인 연설에서 기존 정치 언어와는 전혀 다른 날카로운 감각을 포착했다. 1923년의 맥주홀 쿠데타는 결국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괴벨스는 그 사건의 표면적인 무모함 뒤에 숨겨진 정치적 잠재력을 꿰뚫어 보았다. 그는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새로운 전략의 단초를 그 실패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괴벨스가 히틀러에게 끌린 이유는 그의 개인사와 맞물려 있다. 어린 시절부터 소외되고 배제된 기억은 히틀러의 급진성과 기묘하게 호응했고, 괴벨스는 그 안에서 자신이 붙들 수 있는 확신을 발견한다. 마치 강력한 최면에 걸린 듯, 히틀러의 단호한 어조의 연설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결국 나치당 입당이라는 결정을 내리게 했다. 이는 그가 히틀러의 메시지를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괴벨스는 일찍이 선전의 파괴적인 힘을 간파했다. 그는 인간이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강렬한 감정에 쉽게 휘둘린다는 점을 정확히 꿰뚫고, 대중에게 진실을 설득하기보다 특정한 감정을 강렬하게 '체험'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 선전 메시지를 정교하게 구성했다. 그의 핵심 전략은 히틀러라는 한 개인을 넘어, 하나의 절대적인 신념이자 강력한 감정 덩어리로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접근은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을 일상적인 감각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놀라운 효과를 발휘했다.
새롭게 대중화되던 라디오는 괴벨스의 선전 전략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는 저렴한 수신기를 대량으로 보급하여, 전국 어디에서나 나치 선전을 들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딱딱하고 지루한 정치적 메시지 대신, 그는 오락, 유용한 정보, 그리고 흥미를 유발하는 콘텐츠를 교묘하게 혼합하여 나치즘을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으로 은밀하게 스며들게 만들었다.
이러한 방식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대중의 감각 자체를 특정한 방향으로 길들이는 일종의 '감각 훈련'과 같았다. 반복적인 메시지와 익숙한 선전 형식은 서서히 대중의 비판적 사고 능력을 마비시켰고, 결국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멈추게 되었다. 히틀러는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아닌,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할 하나의 '습관'처럼 자리 잡았고, 독일 사회 전체는 단 하나의 목소리만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거대한 집단으로 변해갔다.
괴벨스의 조작은 외부적인 메시지 전달에 그치지 않고, 개인의 내면 깊숙한 감정의 영역까지 파고들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마저 철저하게 나치 이데올로기에 맞춰 통제하고 조율하며, 선전을 단순한 말이 아닌 삶의 방식 그 자체로 만들어냈다. 의심의 여지는 점차 사라지고, 나치의 논리는 그 어떤 비판도 허용하지 않는 유일한 진실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함께 마침내 걷잡을 수 없는 전쟁의 불길이 타올랐다. 이 파국적인 과정에서도 선전은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독일계 주민들이 폴란드에서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다는 허위 정보는 침략 행위를 정당화하는 강력한 명분으로 작용했고, 침략 전쟁은 '민족 방어'라는 그럴듯한 가면을 쓴 채 포장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 끔찍한 학살과 파괴는 인간 존엄성의 완전한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600만 명이 넘는 유대인이 무참히 학살당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참화 속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독일 내부에서 이에 대한 의미 있는 저항은 극히 드물었다. 이는 단지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괴벨스의 치밀하고 교묘한 선전은 사람들의 사고 능력 자체를 억압하고 가두어 버렸고, 비판적인 판단력은 서서히 무력화되어 갔다. 사람들은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감정을 믿도록 훈련 받았던 것이다.
언론, 예술, 교육을 포함한 사회 전반이 하나의 목소리만을 반복했다. 반대 의견은 용납되지 않았고, 이견을 내는 시도는 즉시 배제되었다. 사람들은 점점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게 되었고, 의문을 갖는 일조차 위험하다는 인식이 퍼졌다. 결국 순응만이 살아남는 방식이 되었고, 독일 사회는 점차 단일한 사고에 갇혀갔다.
괴벨스가 구축한 이 거대한 선전 구조는 단순한 대중 선동의 수준을 넘어섰다. 그는 사람들의 감정, 신념, 그리고 세상을 판단하는 능력 그 자체를 장악하려 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허황된 우월감은 타인을 배척하고 증오하는 감정을 당연하게 만들었고, 그 부정적인 감정은 결국 걷잡을 수 없는 집단 폭력의 끔찍한 연료가 되었다.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폐허만이 남은 자리에서, 독일 사회는 자신들이 그토록 맹목적으로 따라왔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동안 억눌리고 외면당했던 수많은 질문들과 외면했던 불편한 진실들이 뒤늦게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괴벨스의 선전은 감정과 사고를 동시에 장악했을 때, 한 사회가 얼마나 끔찍한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자유로운 능력은 건강한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이 소중한 능력이 사라질 때, 사회는 외부의 그 어떤 위협보다 내부의 무감각과 침묵 속에서 먼저 무너져 내린다. 괴벨스의 섬뜩한 작업은 바로 그 무감각이 어떻게 교묘하게 만들어지고,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나갈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증명하는 역사적 기록이다.
어떤 사회가 진짜 위험해지는 순간은, 사람들이 더 이상 묻지 않게 될 때다. 생각을 멈춘다는 건 말이 줄어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말은 넘치고, 의견은 날을 세우지만, 정작 그 말들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누구의 감정에서 출발했는지는 사라져버린다. 그런 사회에선 감정이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통제의 대상이 되고, 생각은 질문이 아니라 명령으로 주어진다. 이건 검열이다. 말의 검열이 아니라 감정의 검열, 사유의 출입국을 차단하는 은밀한 형태의 억압이다.
생각은 말보다 먼저 고갈된다.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보다 무엇을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는가에 따라, 공동체의 가능성은 갈라진다. 새로운 생각을 떠올릴 용기조차 사라진 사회의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표현의 자유가 중요한 건 단지 말할 권리 때문이 아니다. 그건 상상하고, 의심하고, 전혀 다른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내면의 힘이다. 그 근육이 수축하면, 사회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다. 익숙한 말만 허락되고, 불편한 감정은 틀린 것으로 분류된다. 그 순간, 비극의 씨앗이 뿌려진다.
인간은 자신의 취약성을 직시하고 고통을 타인과 공유하기보다는, 외부의 대상을 비난함으로써 일시적인 안도감을 얻는 경향이 있다. 괴벨스는 이러한 인간 심리의 어두운 측면을 정확히 포착했다. 그가 주력한 것은 객관적 사실의 제시가 아닌, 대중의 감정적 흐름을 능숙하게 통제하고 이용하는 것이었다. ‘우리’라는 닫힌 집단을 내세워 외부인을 고립시키고, 불안과 공포라는 원초적인 감정에 증오라는 불길을 지피는 그의 전략은 소름 끼칠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감정은 정치적 목적을 위한 원료였고, 정치는 숙련된 조련사처럼 감정을 길들이고 무기화했다. 그 과정에서 ‘타자’는 본래 존재하던 다양성을 잃고, 제거되어야 할 악으로 재구성되었다. 아무도 그들의 진정한 모습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 격렬한 감정이 먼저 움직였고, 이성적인 사고는 그 뒤를 쫓아가지 못했다. 정치는 감정의 격랑을 타고 위험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괴벨스는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말로 표현하기보다, 남의 탓으로 돌릴 때 안도감을 느낀다는 걸 정확히 알았다. 그가 조직한 건 정보가 아니라 감정의 방향이었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고립시키는 법, ‘공포’라는 연료로 증오를 태우는 법. 감정은 곧 정치였다. 그 과정에서 타자는 만들어졌다. 존재하는 타자가 아니라, 제거되어야 할 적으로 새롭게 창조된 타자. 누구도 그들이 실제로 어떤 존재인지를 묻지 않았다. 감정이 생각을 압도하고, 정치는 감정을 무기 삼아 움직였다.
표현의 자유는 그래서 사회가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기 위한 마지막 장치다. 누구도 타인의 고통을 대신해줄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이 왜 아픈지 어디가 고통스러운지 말할 수 있다면, 고통은 적이 되지 않는다. 질문할 수 있다면, 감정은 증오로 굳어지지 않는다. 사유는 말의 시작이 아니라 감정의 종착지를 바꾸는 힘이다. 표현의 자유란, 우리가 갖는 불편한 감정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열어두는 마지막 문과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