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는 크지 않고 조용한, 나무 바닥에는 시간의 얼룩이 얼기설기 스며있는 그런 카페가 하나있다. 오후 햇살과 온화한 조명이 고즈넉이 내려앉아 따듯함을 느끼게 하는 공간. 특별할 것은 없는 장소지만 문이 열리면 어김없이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씩 모이는 공간. 대화를 나누는 이도 있고, 아무 말 없이 커피만 마시는 이도 있다. 무심한 바리스타는 그저 커피를 내릴 뿐 사람들의 구구절절한 사정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카페에서는 그 누구도 주목받지 않는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카페 안은 평소보다 짙은 커피 향으로 가득 차고, 드르륵거리는 원두 가는 소리도 이상할 만큼 선명하게 들린다. 마치 그동안 참고 있었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듯, 한껏 과장된 분위기가 연출된다. 이날만큼은 보이거나 들리거나 냄새나는 모든 것들이 자신을 과시한다. 소심한 사람들만 커피 한 잔을 주문하는 순간에도, 미세한 불안에 눌려 손짓 하나 말투 하나까지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래서일까 궂은날엔 카페의 안과 밖 모두를 살필 수 있는 창가자리는 인기가 많다. 어느 쪽에도 속하고 싶지 않는 이들이 그 얇은 경계에 모이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재빠르게 안으로든 밖으로든 섞일 수 있는 유리한 자리다.
유리창에 부딪친 빗방울이 기하학적인 수많은 모양을 만들어낸다. 마치 분화되었던 현재를 부정하듯 끊임없이 형태를 재구성하며 연결된 전체가 되고자 한다. 기어이 하나가 되려는 강한 의지가 담겨있다. 비는 카페의 사소한 모든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상징으로 만든다. 하지만 하나의 완전한 세계는 새로움으로 재구성되는 변화하는 노스탤지어에 불과할 것이다. 늘 그렇듯 현재의 묘사는 현실의 반영인 동시에 반드시 지나버린 과거가 되니까 말이다.
단단해 보이는 세상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흩어져 있다. 부서진 것 같은 세상은 보이지 않는 힘이, 서로를 끌어당긴다. 조각은 서로 얽히고, 이어지고, 모여들어 실은 단단한 하나다. 세계는 끊임없이 부서지고, 다시 연결된다. 그것이 삶이고 세계다. 완전하지 않지만 무너지지 않는, 균열 속에서 다시 응집하는 존재들의 시간. 그 안에서 우리는 서성이고, 걸으며, 균형을 찾는다.
사람은 누구나 중심에 서고 싶어 한다. 수많은 삶의 흐름 한가운데 그것도 주인공이라는 감각은 자신의 삶이 단단하다는 착각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실은 이 세계에 중심이라 부를 만한 자리가 없다. 모든 것은 조금씩 기울어져 있고, 그 기울어짐은 너무 느려 종종 눈에 보이지 않는다. 세계는 흘러가고 있다. 완전히 흩어지지도, 완전히 모이지도 않은 채로. 그것을 깨닫는데 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사람들이 사는 공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조각들이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때론 서로를 밀치거나 스치면서 조금씩 어긋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것들은 서로를 무너뜨리지는 않는다. 마치 조용한 방 안, 가라앉은 공기 속에 떠 있는 먼지처럼. 정지한 것처럼 보이지만, 끊임없이 흔들릴 뿐이다. 멀리서 보면 하나같아 보이고, 가까이 다가서면 각기 다른 형상. 그 미세한 낯섦이 곧 삶이고 인생이고 현실이 아닐까.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과도 언젠가는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게 된다. 처음엔 발끝의 움직임이 닮아 있고, 숨소리가 나란히 놓이지만, 어느 순간 말의 맥락이 엇갈리고, 체온의 농도도 달라진다. 놀랍지 않다. 오히려 익숙하다. 어쩌면 그런 어긋남이 이 순간을 유지시키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균형이란 언제나 정면에서 부딪히는 두 힘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아주 조용하고, 아주 작은 흔들림 속에서도 완성된다.
세상은 완벽하진 않지만, 어긋남을 받아들이는 지점에서, 혹은 한 걸음쯤 물러서 있는 자리에서 안정이 생긴다. 그걸 타협이라 불러도, 혹은 지혜라고 불러도 좋다. 마음과 마음이 부딪힐 때, 한쪽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거의 없다. 누군가는 반 발짝 뒤로 물러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조용히 앞으로 나선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외면하기도 하면서 이 삶을 어딘가에서 그럭저럭 견뎌낸다.
하루가 저물고, 세계는 또 한 번 균형을 맞춘다. 흐름은 여전히 조용하고, 너무 느려서 어쩌면 우리만 모르는 중일지도 모른다. 변화란 대체로 무언가를 잃는 일이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닐 지라도 대게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가능성은 사라진다. 내가 얻는 무게만큼 누군가의 삶은 가벼워지고, 내가 누리는 안정만큼 누군가는 불편을 감내한다. 완전한 만족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가 포기한 것들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 대가로 얻은 것이 진정 우리가 원하던 것인지, 가끔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의 편리를 미루고, 또 누군가는 조금 더 나누기 위해 자기 몫을 덜어낸다. 그런 손해는, 때로 조용한 의미가 된다.
현실의 방향을 가늠하는 일은 낯선 도시에 처음 발을 딛는 감각과 닮았다. 누구는 빠르게 걷고, 누구는 멈춰 선다. 누군가는 뒤를 돌아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앞만 본다. 그리고 그 틈새 어딘가에 조용히 머무는 이도 있다. 그렇게 흐름은 만들어진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도 모두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변화는 누구도 완전히 주도할 수 없고, 누구도 완전히 저항할 수 없다. 과거에 자연스러웠던 것들이 낯설어지고, 낯설었던 것들이 당연해진다. 옷의 실루엣이 바뀌고, 언어의 속도가 느슨해지고, ‘가족’이라는 단어의 풍경조차 달라진다. 어쩌면 이 세계는 점점 더 단단해지기 위해 조금씩 유연해지는 중인지도 모른다.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은 날마다 달라지고, 나와 너 사이의 경계도 점차 흐려진다. 절대적이라 믿었던 것들이 물처럼 흐르며 모양을 바꾼다. 우리가 서 있는 이 현실은, 그렇게 스스로의 서사를 다시 쓰고 또 변하는 중이다. 이 세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단순하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 그리고 그 모든 선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가끔씩 묻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세상은 그렇게 조금씩, 천천히, 우리 안에서 다시 조립된다.
어떤 날은 흐름이 거의 멈춘 듯 느려지고, 또 어떤 날은 숨이 차도록 빨라진다. 그래도 세계는 멈추지 않는다. 오늘이라는 무대는 어제보다 조금 다른 장면으로 바뀌고, 그 안에서 어떤 것들은 지워지고, 또 다른 것들은 남는다.
아주 오래 전, 사람들은 쇠로 기차를 만들어 세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들은 그것이 미래를 열어줄 열쇠라고 믿었다. 기차는 도시와 도시를 빠르게 잇고, 사람을 실어 날랐다. 속도와 효율, 노동의 최소화. 그것은 어떤 이에게는 꿈의 실현이었고, 또 다른 이에게는 삶의 일부를 내어준 대가였다. 모두가 그 속도에 환호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차는 검은 연기를 하늘로 퍼뜨렸고, 그 흔적은 쉽게 씻기지 않았다.
속도는 언제나 무언가를 앗아간다. 더 빠르게 달릴수록, 뒤에 있던 것들은 시간의 겹 속에 묻히고, 말 없는 그늘로 사라진다. 그 사이에도 도시는 끊임없이 연결되었고, 사람들은 더 멀리, 더 빠르게 닿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경로 위에서 무엇이 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더 나은 미래였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문득 그리움과 후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원했던 것이 과연 속도였는지, 아니면 그저 가능성이 존재함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누군가는 과거를 붙잡고, 누군가는 앞을 향해 걷는다. 그리고 또 어떤 이는 그 중간 어딘가에 조용히 주저앉는다. 방향은 달라도,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삶을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빛, 더 높은 열, 더 빠른 속도를 향한 손길은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그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찬란한 미래가 아닐 수도 있다. 더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 모든 움직임이 멎고 숨소리마저 잦아드는 지점.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품어온 수많은 욕망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스위치를 누르고, 장비를 켜고, 세상을 연결한다. 하지만 그 작동의 이면, 땅속 깊은 곳에서 캐낸 자원들이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를 떠올리는 일은 드물다. 전선이 지나간 숲에서는 새들이 날아갔고, 기계가 들어선 마을에서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사라졌다. 더 이상 벌레는 울지 않고, 아이들은 떠났다. 빠르고 강한 것들이 많아질수록, 그 반대편에 있던 것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춘다. 소리는 줄어들고, 기억은 옅어진다.
모든 것이 완전히 멈추는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우주는 여전히 팽창하고, 뜨거운 열기는 차가운 곳으로 끊임없이 흐른다. 그 거대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일중 하나가 우리의 삶이다. 그러나 작다고 해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작은 것들이 모여 운동하며 흐름을 만들고 있다. 흐름은 하나의 우주를 만든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석탄은 한때 숨 쉬던 생명이었다. 빛을 받으며 흔들리던 나뭇잎이었고, 피어나던 꽃이었다. 오랜 시간을 거쳐 그 생명은 제 모습을 잃고, 지금은 타오르는 재가 되었다. 더 이상 흔들리지 못하고, 다만 에너지라는 이름으로 몸을 불태운다. 그러니 끝이 곧 소멸은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타버린 자리에도 검은 재가 남는다. 바스러진 조각들은 다시 길이 되고, 땅의 골격이 되기도 한다. 생명이었던 것이 또 다른 생명의 바탕이 되는 일. 죽음 이후에도 무언가가 다시 시작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생각해온 ‘끝’의 의미를 낯설게 만든다.
2016년에 노르웨이 하르당에르비다 국립공원(Hardangervidda National Park)에서 벼락에 맞아 순록 323마리가 한꺼번에 쓰러졌다. 순록은 이 지역 생태계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초식동물로, 식물을 먹어 식생을 조절하고, 배설물로 토양에 영양분을 공급해왔다. 또한 늑대나 여우같은 포식자들의 중요한 먹잇감이었다. 순록이 갑자기 사라지면 식물 분포가 달라지거나 포식자들이 먹이를 찾을 수 없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등의 변화가 예상되었다. 게다가 수백 마리의 사체가 한꺼번에 남으면서 질병이나 오염에 대한 위험도 큰 부담이었다.
그러나 공원 관리자들은 사체를 치우지 않았다. 벼락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자연현상이며, 그 결과 역시 생태계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인위적인 개입보다 자연 스스로의 회복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옳다고 본 것이다. 그 선택은 우려와는 달리 생태계에 새로운 균형을 불러왔다. 갑작스러운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른 생명들에게 이어지는 시작이 되었다. 독수리와 여우는 오랜 겨울을 견딜 먹이를 얻었고, 곤충과 미생물은 몸을 분해하며 토양을 살렸으며, 그 자리에 다시 풀과 이끼가 피어났다. 자연이 보여준 회복의 방식이었다.
태양은 매일 같은 자리에 떠오른다. 그 반복은 마치 완벽한 질서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끊임없는 불안정한 운동이 일고 무질서한 에너지가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그 격렬한 흐름은 우주의 먼 길을 돌아 이곳, 풀잎 하나의 끝자락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식물은 그 뜨거운 떨림을 주저 없이 받아들이고, 생명은 그렇게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무리 어지럽고 불완전한 에너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재가 있다면 그 안에서 새로운 질서가 시작된다. 자연은 불안정함 속에서 스스로의 규칙을 만들어낸다. 식물이 빛을 품듯, 세계 또한 혼란의 한가운데서 자신만의 방향을 찾아간다. 변화는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정상이라 부르는 것도 실은 잠시 머무는 하나의 형태일 뿐이다. 모든 것은 언젠가 무너지거나 바뀌고, 다시 다른 무언가를 품는다. 우리는 언제나 되어가는 중에 있다.
세상에 고정된 질서는 없다. 우리가 믿는 규칙들조차 영원하지 않다. 모든 것은 흐름 속에 있다. 그리고 그 흐름 안에는 늘 우연이 개입한다. 한 줄기 빛, 한 번의 바람, 하나의 선택이 모든 것을 바꾸기도 한다. 그 변화는 예고 없이,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작된다. 질서는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겨나는 흐름이기 때문이다. 닫힌 방 안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문을 열면 바깥 공기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자라난다. 태양이 식물을 비추듯, 죽은 생명조차 다시 숲을 살리는 것처럼 그것은 혼란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다. 삶이 불완전하고 어지럽게 보이겠지만, 그 안에서는 언제나 작고 조용한 기적들이 일어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물질은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고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 움직임은 누구도 완전히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 따라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수용하면서 살아가야만 한다.
어떤 생명도 혼자서는 지속될 수 없다. 살아 있는 존재는 언제나 환경과 연결되어 있으며, 변화에 맞서기보다는 반응하며 적응한다. 미생물은 낯선 자극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자신을 조율해 나간다. 멈추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시 쓰는 방식으로 생존을 이어간다.
살아 있다는 건, 닫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포는 분열을 반복하며 ‘시간’을 조금씩 잃는다. 그 끝에서 죽음이 찾아온다. 그러나 어떤 생물은, 이를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예컨대 바닷가재는 텔로머라아제라는 효소로 자신을 복구한다. 그래서 바닷가제는 늙지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곧 죽음을 피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닷가재는 살아 있는 동안 껍질을 주기적으로 탈피하며 성장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껍질은 점점 두꺼워지고 무거워진다. 어떤 시점에서는 껍질을 벗지 못하고, 죽음에 이른다.
열은 흐르고, 질서는 흩어진다. 모든 것은 점점 분산된다. 생명은 그 흐름에 저항하며 조금 더 오래 머물기 위해 애쓴다. 우리는 우리를 보호하는 단단한 구조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구조는 우리가 만든 것이다. 억압은 견딘 자 안에서 자라고, 자유는 흔들리는 자의 틈에서 피어난다. 우리는 구조에 통합되면서도, 끊임없이 그것을 해체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바로 생존이고, 변화다. 하지만 두꺼워진 껍질은 스스로를 가두게 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껍질을 깨야만 한다. 위험은 그 틈으로 들어오지만, 그 위험 없이는 삶의 연장은 없다.
더 많이 가지게 될수록, 차지하는 자리도 함께 넓어진다. 삶은 점점 더 많은 공간을 필요로 하고, 우리는 그만큼 더 많이 차지해왔다. 그것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손이 닿는 범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앞이 아니라 벽이 보였고, 새로운 곳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확장이 멈춘 삶은 안으로 수축한다. 그것이 어쩌면 ‘끝’의 또 다른 이름 ‘시작’일지도 모른다.
개인과 집단, 인간과 자연, 현재와 미래. 우리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선택을 반복한다. 흘러가는 동시에, 스스로를 다시 짓는 방식으로. 생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끝없이 ‘되어가는’ 움직임이다. 그 움직임 속에서, 삶은 어김없이 이어진다.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