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노, 긴자 in 도쿄

그러니까 2006년 11월 20일경이라고 추정함

by inome

짠 라멘과 레드 애로우 특급열차


아침부터 비가 내려서, 나는 이불 속에서 조금 더 머물렀다. 일본 기상청 예보에 따르면 오늘은 폭우가 쏟아질 거라고 했다. 그런데 어차피 세상은 예보만큼 깔끔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비는 얇게 억지로 흩날렸고, 공기는 축축했지만 말끔하게 눅진하진 않았다. 여행 중이라면, 이런 변덕쯤은 받아들이는 쪽이 낫다. 오히려 이 어중간함이 오늘의 일부가 된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일본의 일기예보는 좀 엉망이다. 몇번이나 한국 기상청이 낫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벌써 정오를 넘어가고 있었다. 12시 10분. 천천히 일어나, 근처의 체인 라멘집 FUFU에 갔다. 돈코츠 라멘을 시켰다. 국물은 진했지만 내겐 조금 짰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면을 후후 불며 먹는 동안, 창밖으로 비가 아주 약하게 떨어졌다. 이런 날엔 따뜻한 국물이 뜻밖의 위안이 된다.


일본의 은행인 **리소나 은행(りそな銀行)의 '퀵 로비(クイックロビー)'**가 있습니다. 이는 ATM과 간단한 은행 업무를 볼 수 있는 무인 지점 형태의 시설.png 일본의 은행인 리소나 은행(りそな銀行)의 ATM

일본의 전형적인 길거리 풍경으로, 리소나 은행(りそな銀行)의 퀵 로비(クイックロビー) 즉, 자동화기기(ATM) 코너 입구다. 건물 간판에는 "ローン申込"(론 신청)이라는 문구도 희미하게 보인다. 정장 차림의 남성이 한참동안을 서있는 분위기가 너무 묘했다. 누군가 일본은 자전거 천국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과장은 아니었다. 그 앞뒤로 여러 대의 자전거가 주차되어 있다.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혼잡하고 실용적인 일상의 단면이다.


돈꼬츠라멘.png FuFu에서 먹었던 돈코츠 라멘


일본의 라멘 전문점인 후후 라멘(Fufu Ramen, 風風ラーメン)의 돈코츠 라멘. 국물이 유백색이고 걸쭉한 질감이다. 돼지뼈를 오랜 시간 우려낸 라멘. 주요 토핑으로는 얇게 썬 차슈 조각들, 반숙 달걀 반 개, 잘게 썬 파, 그리고 구운 김 한 장이 포함된다.


아사쿠사 센소지 매년 12월에 열리는 하네쓰키 시장의 실제 현장 .jpg 도쿄 아사쿠사 센소지(浅草寺)에서 매년 열리는 연말 행사 광고물


라멘을 먹고 난 후 전철을 타고 도쿄로 향했다. 목적지는 아메요코 시장이었다. 가는 길 시선을 사로잡은 광고물이 있었다. 풍성한 장식의 복을 긁어모으는 갈퀴(熊手, 구마데)였다. 짚으로 엮은 손잡이 위에 칠복신(七福神)과 금은보화가 가득한 장식들은 그 자체로 작은 행복을 가득 담은 미니어처. 옆에는 일본 전통 배드민턴 채인 하네츠키 채(羽子板, 하고이타)가 화려한 가부키 배우 얼굴로 장식되어 걸려 있는데, 이 화려한 채들을 사며 한 해의 액운을 막고 새해 복을 기원하는 에도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화려함 속에서도 전통의 소박한 염원이 느껴지는, 이 모든 풍경이 바로 도쿄의 세이보(歲暮, 연말)를 알리는 한 폭의 풍속화였다.


일본 도쿄도 다이토구 우에노에 있는 아메야요코초(アメヤ横丁, Ameya-Yokochō) 상점가.png 일본 도쿄도 다이토구 우에노에 있는 아메야요코초(アメヤ横丁, Ameya-Yokochō) 상점가


일본 도쿄의 유명한 재래시장인 **아메야요코초(アメヤ横丁, Ameya-Yokochō)**의 거리 풍경.jpg 일본 도쿄의 유명한 재래시장인 아메야요코초(アメヤ横丁, Ameya-Yokochō)의 거리 풍경

아메모코 시장에 도착했을때 TV에서 보았던 초콜릿을 덤으로 주는 상인이 거기 있었다. 시무라 상점이었다. 이 가게는 산더미 처럼 쌓아둔 국내외 유명 브랜드 초콜릿과 과자를 1,000엔에 떨이판매(일본어로

타타키우리, たたき売り)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활기 넘치는 점원이 "넣어 넣어 더 넣어!!"같은 구호를 외치며 비닐봉지에 초콜릿을 계속 담아주는 퍼포먼스는 아메요코 시장의 며물중 하나였다.

아메야요코초(アメヤ横丁, Ameya-Yokochō)**에 위치한 **시무라 상점(志村商店, Shimura Shoten)**의 모습.jpg 아메야요코초(アメヤ横丁, Ameya-Yokochō)에 위치한 시무라 상점(志村商店, Shimura Shoten)의 모습

동양이 아닌 다른 인종 상인들도 섞여 있었다. 흑인 아저씨가 앞치마를 두르고 일본어로 손님을 맞이했다. 그 풍경이 묘하게 인상적이었다. 이방인이 현지어로 장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이 빠르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수준 높은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다. 시장 한쪽,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인도에서 사진 한 장 찍었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사실 그냥 인도였다. 하지만 일본은 이런 면이 있다. 과장된 이름을 붙여놓고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가장 중요한 숭고함으로 만드는 재주. 하지만 엄격하게 말해 막상 그 자리는 아무렇지 않은 평범함이다. 어쩌면 그 평범함이 일본의 매력인지도 모른다.

우에노 계단.jpg 우에노 공원의 계단

아메요코를 빠져나와 우에노 공원으로 향했다. 박물관과 전시관은 휴관이었다. 공원은 조용했다. 나무들은 비를 받으며 고요히 서 있었다. 사람은 적었고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고요함이 좋았다. 다만, 여행지로서 우에노 공원은 조금 밋밋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왜인지 ‘다이나믹’이라는 말보단 ‘정교’하고 ‘질서’ 있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그래서인지 여행 중인 내 마음엔 조금 더 느리고 섬세한 장면들이 기억된다.

일본 도쿄의 우에노 공원(Ueno Park) 내에 위치한 키요미즈 관음당(Kiyomizu Kannon-dō Temple)**.png 일본 도쿄의 우에노 공원(Ueno Park) 내에 위치한 키요미즈 관음당(Kiyomizu Kannon-dō Temple)

우에노 공원은 원래 도쿠가와 가문의 사찰인 간에이지(寛永寺)가 있던 부지에 조성된 일본 최초의 공원 중 하나다. 이 키요미즈 관음당은 1631년 교토의 유명한 사찰인 키요미즈데라(청수사)를 본떠서 작은 규모로 만들어졌으며, 현재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우에노 공원 내에도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매화 시가 적힌 팻말.jpg 우에노 공원 내에도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매화 시가 적힌 팻말

안내판의 내용은 일본 헤이안 시대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 스가와라 공)가 지은 유명한 와카(和歌, 일본 전통 시)다. 정적에 의해 규슈의 다자이후(太宰府)로 좌천될 때, 교토에 있던 자신의 집 매화나무를 보며 읊은 이별시다. 그는 매화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원문

菅公詠梅 (간공영매: 스가와라 공이 매화를 읊다)
東風吹かば (히가시카제 후카바)
においおこせよ (니오이 오코세요)
梅の花 (우메노 하나)
あるじなしとて (아루지 나시토테)
春な忘れそ (하루나 와스레소)


해석(직역)

동풍이 불거든(그 바람에) 향기를 보내다오 매화꽃이여 주인이 없다고 해서 봄을 잊지 말아라.


이 팻말이 여기에 있는 이유는 공원내에 위치한 고죠텐 신사(五條天神社)에 그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는 헤이안 시대의 뛰어난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사후에 신으로 추앙받아 학문의 신(天神)이 되었으며, 일본 전역의 수많은 덴만구(天満宮) 계열 신사에 모셔졌다.


공원을 나와 긴자로 갔다. 우에노에서 5Km 떨어져 가까운 곳이다.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반짝이는 유리 건물들, 정제된 공기, 정장 차림의 사람들. 이곳엔 부가 있었다. 백화점 한 층에선 마일리지가 일정 수준 이상 돼야 입장이 허락된다고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듣고 나니 웃음이 났다. 세상은 이상한 규칙들로 채워지고 있다. 옷값도 말할 것도 없었다. 하늘하늘한 블라우스 한 벌이 수백만 원이라니. 그 옷을 입는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아마 생각은 없을 거다. 그게 진짜 부자들의 여유니까.


긴자를 걷다가 신주쿠로 향했다. 신주쿠는 늘 혼잡했고, 어딘가 위험한 냄새가 났다. 호스트바의 네온사인이 반짝였고, 거리엔 웃음과 피로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호스트바 전단지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나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여행 중의 연인은 가끔 이상한 것에 매료된다. 저녁은 한인타운 근처의 식당 고려에서 부대찌개를 먹었다. 맛은 꽤 괜찮았다. 국물의 매운맛이 오랜만에 위장을 깨웠다. 식사를 마치고 서점을 들렀다. 책값이 한국보다 두 배쯤 비쌌다. 직수입된 책도 두 배였다. 그래도 책 냄새는 같았다. 그래서 그냥 구경만 했다. 그게 나았다.

도쿄 긴자(Ginza)**에 위치한 세이코 하우스 긴자(SEIKO HOUSE GINZA) 건물.png 도쿄 긴자(Ginza)에 위치한 세이코 하우스 긴자(SEIKO HOUSE GINZA) 건물

도쿄 긴자(銀座)의 상징적인 랜드마크인 와코 빌딩(Wako Building)이다. 이 건물과 그 주변 지역인 긴자는 일본을 대표하는 최고급 상업 지구로 명성이 높다. 긴자 4초메 교차로에 위치한 와코 빌딩은 1932년에 완공된 유서 깊은 건축물이다. 클래식한 서양식 디자인과 꼭대기의 시계탑이 특징이며, 원래 핫토리(현 세이코 그룹) 시계탑 건물로 지어졌다. 이 건물은 현재 고급 백화점 와코의 본점으로 사용되며, 긴자 지역의 역사와 품격을 대변한다.


긴자는 일본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지역 중 하나로,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와 고급 백화점,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럭셔리 부티크 등이 밀집해 있다. 이곳은 최고급 쇼핑과 미식 경험을 제공하는 초고가 지역이며, 사진 속 와코 빌딩은 이러한 긴자의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밤이 돼서 세이부 신주쿠역에서 특급 전철 '레드 애로우'(レッドアロー, Red Arrow)를 타고 숙소 근처 역으로 돌아왔다. 일본의 전철은 복잡하다. JR(Japan Railways, 일본 철도), 사철(私鉄, Private Railway) 등 회사도 많고 요금도 비싸다. 숙소 근처까지 조금 저렴한 일반 전철도 있었지만, 피곤해서 특급을 탔다. 레드 애로우는 좌석이 지정되어 있고 (특급권이 필요하며), 차 안에서 승무원이 특급권을 검사한다. 어쩌면 일본다운 모습이다. 형식적이고, 동시에 불필요해 보이는 느낌. 비싼만큼, 빠르고 조용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자정이 넘어 있었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창밖엔 여전히 비가 흩날렸다.


오늘 하루는 그렇게 흘렀다. 예보는 빗나갔고, 라멘은 조금 짰다. 그래도 이상하게 나쁘지 않았다. 이런 날이 계속되어도 괜찮겠다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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