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시리즈로, '아이는 원래 주말에(밤에) 아프잖아요?'가 있음.
2024 '강릉 2주 살기'를 시작하고 이틀 뒤, 아이가 고열이 났다. 고열 트라우마가 있어(열경련) 39도가 넘어가면 내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터라, 며칠 잠을 잘 못 자고 고생한 기억이 아주 생생하다. 다행히 여행 기간은 2주였기에 2-3일 아픈 걸로 가고 싶은 곳을 못 가봤다고 느끼거나 아쉽다고 느끼진 않았으나 어쨌든 아프려고 여행을 간 건 아니었고 아픈 아이랑 할 수 있는 건 제한되어 있기에 숙소(여긴 집이라고 부를 수 없다. 집을 떠나 잠시 머무르는 '숙소'에 충실한 곳이었다.)에서 고난의 시간을 보냈다.
그렇다, 이번에도 아팠다. 원래 아이들은 여행 가면 아프지 않은가? 꼭 금요일 밤부터 열이 나지 않는가? 특히 부모가 맞벌이라면 더 그렇게 느낄 수 있다.(아이들도 누울 자리 보고 뻗으니까.)
작년 '강릉'에서는 여행 초반에 아팠다. 선풍기가 없었기에 다행히 챙겨갔던 미니 선풍기로 침대 위에 올려두고 잘 때 주로 사용을 했다. 심지어 에어컨은 침대 머리맡에 있었다. 에어컨에 취약한 '유아'인지라 직빵으로 때리는 찬 바람에 결국 탈이 났던 게다. 큰 깨달음을 얻고 이번 속초 여행에서는 선풍기가 있는 '집'을 골랐다.(에어컨도 침대 머리맡에 있지 않는 곳이었다.) 나의 깨달음의 결과인지 아니면 아이가 커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다행히 일주일 넘게 아이는 잘 안 먹고, 계속 놀면서 여행을 즐겼다.
그러나, 한계는 있는 법인지라 결국 여행 8일에서 9일 차로 넘어가는 새벽, 열이 났다. 38. 6도로 마무리된 열이었으나 나는 고열 트라우마가 있기에 새벽 내내 아이를 지켜보며 다음 날 갈 수 있는 병원을 찾았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었다. 그래도 어디 한 군데는 응급으로 열어주겠지-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있긴 있었다. 강릉에.(*아이앤맘소아청소년과의원)
우린 일요일 아침, 강릉으로 향했다. 마침 동생과 엄마가 여행을 끝내고 돌아가는 날이라 강릉역으로(엄마는 멀미가 심한 편이라 보통 기차로 이동한다.)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어쩜 이렇게 찰떡같은 타이밍이 있을까.
일요일 오전 소아과에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좀 늦게 도착한 탓에 10시 40분쯤 접수를 했는데 오후 1시 직전에야 겨우 진료를 마칠 수 있었다. 기다리는 중간에(약 11시 40분쯤) 병원을 슬쩍 둘러보니 이미 오전 진료가 마감되어 줄을 서서 대기를 시작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진료를 마치니 점심시간이 되었고,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하는 아이를 끌고 마침 근처에 *고래책방&카페가 있어 걸어갔다. 조용한 곳에서 나름 입맛에 맞는 빵과 달달한 주스라도 몇 모금 먹으며 집중해서 색칠을 하는 모습을 보니 살 것 같았다.(이렇게 또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 한 시간 반 정도 먹고 쉬고, 책도 보고 색칠도 하다가 나왔다. 강릉에서 속초로 오는 길에 마트에 잠깐 들러 대기업 미역국을 사고 후다닥 집(속초)으로 왔다. 기운이 없는 아이가 안쓰러워 옥토넛을 틀어줬는데 갑자기 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엄마, 나 진짜 이상하다?"
"(냉장고를 정리하며) 뭐가?"
"아니, 옥토넛 보는데 자꾸 눈물이 나와. 이상하지? 하하"
싸-한 느낌이 들어 귀체온계로 열을 재니 39.8도. 미쳤다. 미쳤어. 미쳤지 내가.
아무 말 없이 아이의 옷을 벗기고 물을 조금 끓여 차가운 물과 섞어 미지근하게 만들어 미온수 마사지를 시작했다. 아이는 연신 눈물을 닦아내며 "진짜 이상하지?"를 계속 말했고 고열 트라우마에 사로 잡힌 나는 100m를 10초에 뛴 사람처럼 쿵쾅거리는 심장으로 벌어지지도 않는 입을 뗄 생각도 못 한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밥이고 나발이고 약 먹이고 tv를 끄고 아이를 뉘었다. 아이는 "괜찮아, 어차피 눈물 때문에 옥토넛이 안 보여."라는 말로 애미의 가슴을 찢어지게 만들더니, 가쁘게 숨을 쉰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 건 엄마뿐만이 아니라 아이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나 보다. 마라톤을 뛴 새벽이 지났고, 다행히 아이 열은 잡혔다.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여행 올 때 준비해 왔으나 한 번도 꺼내지 못했던 보드게임으로 시간을 보내다 느지막이 *속초 중앙시장을 갔다. *아바이 갯배를 타고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공터에 앉아 좀 쉬다가 집(속초)으로 왔다.
그리고 여행에서 처음으로 낮잠을 잤다. 아이도 나도 단 잠에 빠져있다 나오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복덩아, 우리 산책할까?"
"지금??? 그러다 밤이 되면???"
밤에 나가면 무슨 일이 생기는 줄 아는 아이를 데리고 밤바다를 구경 갔다.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들과, 검게 빛나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오징어별, 해변을 따라 이어지는 불빛들. 처음 보는 속초의 밤 풍경에 마음이 술렁술렁했다.
"복덩아, 내일은 뭐 할래?"
"복덩이 아픈데 어디 가도 될까?"
"내일은 안 아플 수도 있잖아, 아니면 이렇게 또 쉬다가 밤에 산책해도 되고. 이것도 재밌지?"
"응, 반짝거리고 예뻐서 좋아. 내일 뭐 할 거 있어?"
"음, 원래는 설악케이블카라는 걸 타보려고 했어. 그거 타고 산에 올라갈 수 있다고 하더라."
"좋아, 내일 안 아프면 거기 가자!...... 아프면 카페 가지 뭐."
술렁술렁한 마음이 잔잔해질 무렵, 긴 산책을 끝내고 집(속초)으로 돌아왔다. 아이가 잠들고 오늘 하루를 기록하려고 노트북을 켰다. 타임라인으로 정리를 하니, 아픈 아이를 데리고 싸돌아 다닌 것(우리 엄마가 한 말이다.) 아닌가 하는 생각이 살짝 스치려는 찰나 아이가 잠들기 직전까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 우리 좀 더 놀다가 잘까?"
아파도 아이는 논다. 어차피 놀 거면 그래도 여행하면서 놀아야지......
고로, 내일은 설악 케이블카 탑승예정이다!
아이는 원래 여행 가면 아프고 일요일에 아프고, 밤에 아프다. 아플 땐, 봐가면서 놀면 된다. 그것은 산책이 될 수도 있고, 공연 관람이 될 수도 있고, 관광지에 방문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여행 때 아프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기를, 그 속에서도 추억은 생기니 말이다.
*아이앤맘소아청소년과의원: 강릉에 위치해 있다. 산부인과도 같이 있는 제법 큰 병원이라 응급상황시 이용하기 좋았다. 속초에는 일요일에 여는 소아과가 없어 강릉으로 가야 하는데, 강릉도 인기 여행지이므로 사람이 매우 많을 수 있으니 일찍 가서 접수를 하는 것을 권장한다.
*속초 중앙시장: 속초에서 빠질 수 없는 관광지다. 먹을 것이 널려 있으므로 취향껏 사면된다. 개인적으로 먹었던 것은 막걸리술빵, 감바스, 이성수 제빵소의 케이크, 오징어순대, 아이스크림, 슬러시 등등이 있으나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슬러시다. 진짜 기가 막히게 시원하고 맛있었다.
*아바이 마을 갯배: 속초 중앙시장과 아바이 순대마을을 연결하는 갯배가 있다. 아직 운영 중이며 저렴한 가격(편도 성인 500원, 어린이 300원)이라 속초 중앙시장을 간 김에 체험해 보기 좋다. 뙤약볕에 갯배의 줄을 굳이 당기려는 성인은 없겠으나 아이들은 널렸다. 내가 갯배의 줄을 끌 수 있는 도구를 집어 들자 주변에 있던 아주머니들이 "어머, 저걸 왜 해?"라고 웅성웅성했으나 곧 그 도구를 아이에게 쥐여주자 다들 수긍했다. "아~ 아이들은 저거 재밌어하지." 그렇다. 굳이 돈 주고 갯배를 끌어보는 경험은 아이들에게 꽤 신선한 경험으로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