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쉬자고???!!!
벼르고 벼르던 *산악박물관과 *자생식물원을 다녀왔다. 왜 별렀는지는 모르겠다. [가볼 만한 곳]에 분류해 놓았으나, 가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나 보다. 마침 비 예보가 되어 있던 8월의 수요일 아침 9시 20분, 아이와 나는 채비를 마친 후 길을 나섰다.
도착한 산악박물관에는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본 것과 또옥-같은 유아용 클라이밍과 어린이용 클라이밍 등이 있었다. 별렀던 이유가 생각났다. 그래, 산악박물관은 이 클라이밍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도전감이나 호승심 따위의 단어와는 거리가 먼, 우리 아이는 남들이 하는 클라이밍을 집중하며 즐겁게 바라만 보았다.
일단은 나의 욕심을 내리눌러 놓고 박물관 내부를 구경했다. 예열의 과정이었다. 잠시 후 약간의 미끼(간식)와 함께 클라이밍으로 아이의 발걸음을 이끄는 데 성공했으나, 겨우 매달려 한 발 떼기 힘든 아이와 다르게 어느새 발 뒤꿈치까지 날아와 소리 없는 압박의 발길을 보내는 초등학생들을 버티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속상한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 그 어딘가를 헤매는 마음으로 아이를 달래는 듯, 달래지 않는 듯 의무감만 남은 토닥임을 계속하다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산악박물관 입출구로 향했다.
산악박물관의 1층 한가운데에는 2층까지 뚫린 천장에 거대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꽤 그럴듯해 보이는 산악인 2명이 암벽에 매달려 있었는데, 아이는 그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동경 어린 시선으로(엄마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단순하게 멋있다,라고 생각했을 수도.) 발걸음을 멈춰가며 바라보았다.
"...... 클라이밍 한 번 더 도전?"
아직 미성숙한 엄마의 말을 들은 척도 안 하며 쿨하게 넘긴 아이는 알아서 출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장소로 가기 전, 의미 없는 점심 메뉴 고민을 하다가 늘 그렇듯이 배가 고프지 않아 먹고 싶은 것이 없다는 아이와 커피가 필요한 엄마의 니즈가 맞아떨어지는 카페로 갔다. 그리고는 비로 인해 스산해진 몸과 산악박물관으로 인해 초라해진 마음을 녹이는 핫초코와 카페라떼를 시켰다. 통창으로 보이는 바깥의 풍경과 고소한 라떼, 풍요로운 핫초코의 향에 마음이 스르르 풀렸는지 아이가 말했다.
"산악박물관은 복덩이 스타일이 아니었어."
"그런 거 같아. 엄마 스타일이었나 봐."
"...... 그렇지만, 절벽 올라가는 사람은 멋있더라."
엄마를 조금 더 사랑하는 아이는 그래도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며 엄마를 위로해 줬다.
"우리 이제 어디가?"
"자생식물원이라는 곳 가려고 했는데...... 뭔가 우리 오늘 분위기가 좀 그렇네, 그냥 집(속초)에 갈까?"
"거기는 뭐가 있는데? 뭐 봤어?"
"어, 미로 같은 거 재밌다고 하더라고."
"그럼 가자. 한 번 해보고 재미없으면 다음에는 안 가면 되지."
가벼운 대화로 우린 자생식물원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문제는, 우리의 가벼운 대화는 고소하고 달콤한 음료를 마시며, 앉아서 한 대화였다는 거다. 무거운 우리의 몸은 자생식물원을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엄마, 미로원 언제 나와?"
"우리 방금 주차하고 왔어. 5분은 더 걸어야 해."
"그럼 그냥 집(속초)에 가자."
"...... 안돼, 여기까지 왔으면 한 번은 해야지."
이러려고 속초 왔나, 자괴감이 드는 엉망진창의 하루는 결국 미로원을 종착지로 하여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집(속초)에 들어와 고된 몸을 뉘이며 데굴데굴 침대 위를 굴러다녔다. 고단한 몸과 마음이 좀 풀리는 거 같았다. 아이도 같은 마음이 들었는지, 침대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하루 중 제일 밝은 미소를 보였다.
뭐 하나 제대로 먹은 게 없는 하루였으나 저녁을 준비할 마음이 없었기에 집(속초)에서 제일 가깝고, 아이랑 함께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서둘러 검색했다. 마침 근처에 *뚝배기 섭국이라는 곳이 있었다. 섭미역국에 감자전, 보너스로 막걸리를 시키면 세상 그 무엇도 부러울 게 없을 듯했다. 이번엔 침대를 박차고 나왔다.
마음속에 이미 정한 메뉴를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시켰다. 차례대로 나오는 음식을 한 술 뜨니, 마음이 푸근해진다. 허겁지겁 먹었다. 아이도 나도. 음식이 정말 맛있기도 했으나, 사실 우린 너무 배가 고픈 상태였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명언을 상기하며 부른 배를 두드리며 가게를 나오니 해는 이미 저 바다 너머로 쏙 들어간 시간이다.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데, 문득 건너편 골목 사이로 등대해수욕장이 얼핏 보였다.
"와, 예쁘네. 여기 골목이 이렇게 생겼었구나."
"그러게? 우리가 여길로 안 와서 몰랐나 봐."
소화를 시킬 겸, 횡단보도를 끼고 주변 골목길을 쭉- 따라 걷다가 등대해수욕장으로 나갔다. 눅진해진 바람이 짭쪼름하게 흘러왔다.
"내일은 뭐 하지?"
"그만해, 엄마. 그냥 쉬자."
그냥 쉬자고??? 그냥 쉬자니??? 아이의 말에 잠시 멍해지다 아이를 바라보니 아이는 평온한 얼굴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 이 아이는 아직 K-관광에 길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니 쉬는 시간이 주어지면 큰일 나는 줄 아는 K-관광의 세계, 무슨 뽕인지도 모르면서 뽕을 뽑겠다고 말하는 K-관광의 실태를 벗어나는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글로 쓰는 지금에야 K-관광을 빗대어 표현하지만, 아이가 저 말을 던졌을 때 굉장히 뻘쭘했었다. 아이의 답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다를 보다가 집(속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파도 소리에 귀 기울이며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다가 겨우 말했다.
"그래, 내일은 좀 쉬자."
[속초 2주 살기]를 계획했을 때, 제일 크게 중점을 두었던 부분은 단 하나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유치원 혹은 출근하기 전까지의 해야 하는 루틴과 저녁부터 자기 전까지 해야 하는 루틴에서 벗어나 여유롭게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
"긴 바늘 0자 갈 때까지 밥 다 먹어야 해."
"오늘은 책 읽어줄 시간이 없어. 그냥 자자."
"너가 놀고 싶은 게 있다면 저녁, 목욕, 양치까지 다 끝내고 해야 해."
이 말들에서 나도 벗어나고 싶었다. 아이도 그 말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싶었다. 방학이니까. 방학은 그럴 수 있는 때이니까. 그런데, 벗어나질 못했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다른' 스케줄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라니, 참.
(그렇다고 즐겁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뭐랄까. 현타가 왔을 뿐.)
내일은 그냥 쉴 거다. 뭐 할 건지 미리 안 물어봐야지.
잘 자, 사랑해, 좋은 꿈 꿔. 쏘마치 알라뷰, 지켜줄게, 자다가 쉬 마려우면 도와줄게, 다리 아프면 주물러 줄게.(잠들기 전에 하는 긴 인사)
*산악박물관: 글에서는 좋은 거 하나 없는 것처럼 보이겠으나, 유치원~초등학생 정도의 자녀가 있다면 자생식물원 혹은 근처 다른 관광지(예-속초시립박물관 등)와 함께 방문하기 좋은 곳이다. 고산 체험도 예약 후 진행할 수 있다고 하니 (가능한 연령 확인 필수)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자생식물원: 비가 오는 날은 뭐랄까, 식물원을 가야 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지......? 비가 오는 평일이라 사람이 적었으나 이런 날 느낄 수 있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마음에 쏙 들었었다! 쉼터용 정자에 앉아 연못에 토독 토도독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아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던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 참고로 미로원은 정말 좋아했다. 아직도 종종 얘기한다. 거봐, 내가 재밌을 거라고 했지.
*뚝배기 섭국: 등대해수욕장에 위치한 식당이다. 뚝배기 섭국은 얼큰-한 버전이라 해장에 좋다고 하는데 아이랑 먹기에 어려움이 있어 포기하고 섭미역국과 감자전을 시켰다. 막걸리는 메뉴에 없었으나 사장님이 옆 가게에서 사 오면 된다고 말씀해 주셔서 과감히 시켰다. (가격은 일반 식당 막걸리 가격과 똑같았다.) 감탄에 감탄을 하며 먹다가 결국 얼큰한 뚝배기 섭국을 포장해서 가져왔는데, 포장보다는 식당에서 바로 먹는 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