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작가 Oct 28. 2018

타인의 시선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사랑에 대하여


혁명가로서 사는 것, 저항하고, 선동가로 사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아무런 대가도 없고 아무런 확신도, 전망도 없지만 그러한 아웃사이더들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이유들은 뭘까? 


프로이트는 우리의 정신은 이드-자아-초자아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해. 이드는 생물적, 본능적인 '나'야! 진화의 역사 속에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물리적 존재로서 '나'거든. 초자아는 인간이 만든 상호작용에서의 '나'야. 부모, 국가, 사회가 기대하고 바라는 '나'거든. 생물학적인 나와 부모, 국가 사회가 기대하고 바라는 나의 경계에서 자아가 탄생해. 내 내면에는 이미 자연적, 동물적 시간의 역사와 인간의 사회적 역사가 만나고 있거든. 주체인 자아는 그 사이에서 매 순간 호명되거든. 우리 인간은 주체이지만 이미 생물적, 사회적 조건 속에서 주체야.


1, 2, 3이 있다고 해보자. 2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는 2야라고 아무리 떠들어봤자. 자기 혼자의 독백에 불과하잖아. 2는 1보다 하나 많고, 3보다 하나 적은 관계 속에서 2거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규정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혼자의 독백에 불과할 수 있어. 그러니 유아론적이고, 자아의 정립을 통해서 세계를 포섭하려고 하니, 폭력적으로 변하기 쉬운 거야. 즉 2의 확장이지 1,3이 배제되어 있거든. 그래서 1과 3의 관계없이 그 자체로 2를 규정하려고 하니 관념론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은 거야. 


중심을 거부하는 철학은 모든 것을 관계 속에서 사고하는 것이 필요해! 2는 자기가 2라고 주장해서, 2가 되는 것이 아니야. 첫째, 2는 1, 3의 관계, 구조속에서 2가 되거든. 둘째, 2는 언제든 1,3의 관계를 의식하고, 욕망하고, 지향하는 한에서 2가 되거든. 그러니 우선적으로 인간의 본질은 관계야. 1과 3이 2를 호명하고, 대상화할 때 2는 2가 되는 것이며, 2 또한 1과 3을 욕망할 때 자신을 2로서 대상화하는 거야.


2가 1,3을 욕망하는 것이 사랑이야. 자아가 나의 무의식과 초자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사랑의 출발이야. 사랑이 시공간에서 지속성을 띠며 묶일 때 비로소 나는 하나의 주체가 되는 거야. 이것은 주체가 이질적인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것. 내가 모르는 나의 폭력성을 인지하고, 내가 모르는 타자의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려면 사랑할 수밖에 없거든. 사랑은 그래서 나의 내면과 외면에서 나 아닌 것들을 받아들이고 내 속에서 공존하는 과정이야. 타자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그들 사이에서 지배-복종의 권력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사랑이야. 사랑은 주체적인 지배이며, 주체적인 복종이야. 그래서 사랑은 매력적인 것에 대한 끌림이고 유혹을 통한 끌어당김이야.


나의 탄생은 엄마 아빠의 관계를 통해서야. 주체는 관계를 매개로 탄생되는 거야. 하지만 그 관계는 충동을 요구하는 데, 충동이 없이는 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이야. 그래서 '생각하는 나'는 항상 관계와 충동을 선험적으로 요구하는 거야. '생각하는 나'는 만들어지기도 전에 엄마, 아빠의 어루만짐, 접촉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아이는 자기가 형성되기 전에 엄마, 아빠의 관계에 투여해서 그 속에서 느끼는 일치감, 전일성을 욕망하는 거야. 주체가 형성되기도 전에 아이는 엄마, 아빠라는 타자성, 관계성을 내 몸에 각인시키고, 주체가 형성되기도 전에 아이에게 타자는 기쁨, 즐거움, 풍부함으로 다가오는 거야.


나 아닌 타자를 동일성의 논리, 일자의 논리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시공간 묶임을 통해서 타자와 관계를 맺는 것! 이것은 일자로 향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내 몸에서 함께 묶는 과정인 거지. 즉, 공생의 과정이야. 주체는 자신의 에너지, 욕망으로 타자를 시공간에 묶어 놓으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몸속에 다수성을 포섭하는 거야. 주체는 인풋과 아웃풋으로 연결된 욕망하는 기계이고,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이 기계장치 어디쯤에 작동하는 하나의 기관, 구조로서 타자를 받아들이는 거야. 서로 다르지만 공존하는 거지. 예를 들면 세포질에 있는 미토콘드리아, 몸속의 대장균, 유산균 등은 인간이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다른 생물들과 서로 되먹임 구조를 가진 공생체라는 거야. 그래서 주체는 생물학적 다수성을 띨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자아가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생각, 사고, 욕망의 다수성을 띠거든. 


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546581.html


맛있는 것을 보면 먹고 싶고, 이상형을 만나면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좋은 노래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무서운 것을 보면 공포감이 드는 것은 타자를 통해 다양한 나를 만나는 과정이야. 이렇게 새로운 것이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것은 아주아주 당연한 일이고, 어떤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은 균질화되지 않는 내면을 가지고 있거든. 소설 <1984>에서는 빅브라더는 오세아니아를 지배하는 독재자야. TV에선 항상 빅브라더의 모습이 등장하고 감사하고 통제가 일상화된 사회거든. 자유로운 사랑, 글쓰기도 금지되어 있던 시대에 주인공 윈스턴은 몰래 숨어서 일기를 쓰기 시작하고, 줄리아와 사랑에 빠지거든. 오로지 빅브라더만 사랑해야 하는 시대에 개인 간의 사랑을 시도하는 거지. 사랑에 대한 충동이 그를 빅브라더에 대한 저항으로 이끄는 거야. 하지만 윈스턴은 결국 들켜서 고문을 당하고, 사상교육을 받게 되거든.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어마어마한 충격이야. 잠깐 인용해볼게.


“윈스턴, 자네는 견본에 난 흠과 같군. 한마디로 씻어 버려야 할 오점이지. 우리는 과거의 처형자들과 다르다고 방금 말하지 않았나? 우리는 소극적인 복종이나 비굴한 굴복으로는 만족 못하네. 자네가 우리한테 항복한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자네의 자유의지에 의해서여야만 하네. 이단자들이 우리한테 반항한다고 해서 그들을 처형하는 게 아닐세. 우리는 그들을 전향시켜 속마음을 장악함으로써 새사람으로 만든다네. 그들이 지닌 모든 악과 환상을 불태워 버리고, 외양만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영혼까지 우리 편으로 만드는 거지. 그들을 죽이기 전에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만든단 말일세. 비록 알려지지도 않고 그 영향력 또한 없다 하더라도 그릇된 사상이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니까.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 어떤 탈선도 용납하지 않네. 옛날에는 이단자들이 여전히 이단자인 채 스스로 이단자임을 자처하며 화형장으로 끌려감으로써 모종의 희열을 느끼기도 했지. 소련에서 숙청당한 희생자들도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머릿속에 반항 의식을 갖고 있었네. 그런데 우리는 처치하기 전에 두뇌를 완전히 개조시키지. 옛날 전제군주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이었고, 전체주의자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이었지만, 우리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되어 있다’는 식이네. 우리가 여기에 끌고 온 사람 치고 우리에게 끝까지 맞선 자는 없었네. 모두 완전히 세뇌되었지.

그들은 언젠가 그를 총살하기로 결정할 것이다. 그것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총살되기 몇 초 전이면 직감적으로 예측할 수 있으리라. 그들은 항상 복도를 걷게 하고 등 뒤에서 총을 쏜다. 그 시간은 십 초면 충분하다. 십 초 동안 그의 내면세계는 뒤집힐 것이다. 한마디의 말도, 움직임도 없이 얼굴의 주름살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있다가 별안간 가면이 벗겨지면서 ‘꽝!’하며 그의 증오심이 폭발하리라. 그 증오심은 성난 불길처럼 그를 휩쓸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탕!’하고 총알이 날아오리라. 그리하여 그들은 그의 머리통을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리겠지만, 증오심으로 불타는 그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단적인 사상은 영원히 그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어 벌을 받지도, 회개를 강요당하지도 않으리라. 결국 그들의 완벽성에 하나의 구멍이 뚫리는 셈인데, 마지막까지 그들을 증오하면서 죽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이다.

그는 애정부로 돌아가 모든 것을 용서받았다. 피고석에 앉아 모든 죄를 고백했고,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공범자로 만들었다. 그는 햇빛 속을 걷는 기분으로 하얀 타일이 깔린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때 무장한 간수가 뒤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총알이 그의 머리에 박혔다.

윈스턴은 빅 브라더의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그 검은 콧수염 속에 숨겨진 미소의 의미를 알아내기까지 사십 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오, 잔인하고 불필요한 오해여! 오, 저 사랑이 가득한 품 안을 떠나 스스로 고집을 부리며 택한 유형(流刑)이여! 그의 코 옆으로 진 냄새가 나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잘 되었다. 싸움은 끝났다.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조지 오웰 <1984>


윈스턴은 고문을 당하고, 사상교육을 받고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아. 독재권력이 나를 아무리 고문하고 사상교육을 시켜도, 내 생각만큼은 바뀔 수 없을 것이라고 믿거든. 윈스턴은 빅브라더를 증오하면서 죽을 자유는 아무리 빅브라더가 강하더라고 절대 침범할 수 없을 거라고 믿는 거야. 바로 사상의 자유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가 지킬 수 있다고 믿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윈스턴의 계획은 실패해! 오랫동안 기다렸던 총알이 자신의 머리에 박힐 때, 윈스턴은 빅브라더의 얼굴을 올려보았어. 그는 빅브라더를 증오하면서 죽은 것이 아니라, 두 줄기의 눈물을 흘리며 빅브라더를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며 죽는 거야. 독재권력의 폭압적 장치에 맞서더라도 절대 내줄 수 없을 것 같은 내 의식의 한 부분 마저. 빅브라더의 장치, 일자에 포섭되어 버리고 만 거지.


이 소설이 슬픈 것은 애정부-모든 국민이 오로지 빅브라더만 사랑하도록 만드는 국가기관에서 마지막 최후의 보루인 심리적인 부분까지 모두 통제되었다는 거야. 이렇게 촘촘한 관리, 빈틈 속에서도 빅브라더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줄리아에 대한 사랑을 키워온 윈스턴, 윈스턴을 발견하고 그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쪽지를 보낸 줄리아. 이렇듯 빡빡하고 폭력적으로 쌓인 구조 속에서도 타자에 대한 사랑은 피어오르거든. 윈스턴이 받은 쪽지가 정보기관에서 자기를 시험해보려는 미끼인지, 속임수일지도 모르지만 윈스턴은 위험을 무릅쓰고 타자를 향해 가잖아. 그래서 사랑은 타자를 향해 가는 길이고, 거기에는 나도 모르게 끌려갈 수밖에 없는 강력한 매력이 있으며, 동시에 구조에 포섭되지 않는 인간의 생산하는 욕망, 충동이 있는 거야.


사랑은 인간이 중심, 일자에 저항하는 유일한 길이며, 그 방향은 항상 타자를 향하게 되어 있어. 나에게 없는 혹은 내가 함께하고 싶은 것을 사랑하거든. 하지만 사람들은 절대 내가 될 수 없는 것을 사랑한단 말이야. 그러니 사랑은 둘이 합쳐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둘이 합쳐서 서로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시공간적 묶임을 통해 주체적 권력관계를 형성하는 거야.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연대성이고, 이질성의 조화이며, 서로 다른 것의 모자이크, 브리꼴라주라고 볼 수 있어. 쇠, 장구, 북, 징의 사물의 가락이 각자의 소리 속에서 리듬을 형성하는 것처럼, 오케스트라가 자신의 소리를 잃지 않으면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사랑은 주체의 '생산하는 욕망'을 통해서 '타자성의 시공간 묶임'을 이루도록 하는 거야. 


때로는 우리의 시선이 대상을 사물화 시키고, 폭력적으로 주체가 대상을 규정하기도 해! 하지만 우리의 시선에는 폭력적 시선 외에도 사랑의 시선이 있거든. 우리의 눈은 엿보기 구멍이야. 이 구멍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거야. 엿보기 구멍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훔쳐보는 순간의 '나'를 떠올려봐! 거기에 무엇이 있을까?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무엇인가에 대한 기대를 구멍을 통해서 우리는 엿보는 거야. 내 몸이 세상을 향해 난 구멍, 그것이 바로 눈이야. 



우리가 눈을 통해서 대상을 사물화 할 때, 세계는 우리의 눈에 맺혀 있거든. 주체가 사물화, 대상화하지 못한 것이 우리의 눈에, 무의식에 여전히 남아 있는 거야. 그러니 타자는 무한이야. 우리 주체가 넘으려 해도 넘어설 수 없는 무한. 인간이 세상을 향해서 폭력을 휘두를 때도, 인간의 눈에는 그가 바라본 세상이 맺혀 있거든. 죽은 자의 임종을 보면서도 서로의 눈에는 서로의 모습이 비춰보이거든. 그런 점에서 우리의 몸은 매 순간 타자와 나의 종합이고, 관계와 충동의 특이점이야. 


이 눈은 파놉티콘처럼 폭력의 시선이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매력을 발견하는 시선이 되기도 해! CCTV가 감시의 눈이 되기도 하지만 우리를 보호해주는 눈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우리의 눈은 양가성을 띠고 있거든. 그러니 중요한 것은 '어떤 시선인가'이지. 시선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야. '그래 어떻게 하나 보자'라는 비난의 눈이 있다면, '따뜻한 사랑의 눈'도 있거든. 아이의 잘못을 야단치는 눈이 있다면, 보살피고, 어루만지는 눈도 있는 거야.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선은 '비난의 눈, 경쟁의 눈, 폭력의 눈'으로 가득 차 있거든. 또는 먹고살기 위해서 우리는 타인의 눈을 피하거든. 지금은 돈을 벌어야 되니까, 지금은 취준생이니까, 지금은 고등학생이니까, 자신의 감각을 억누르는 거야.


이 시대에 누가 사랑을 가로막는가? 누가 사랑의 시선을 가로막는가? 누가 사랑의 충동을 억누르는가? 


그러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항은 돈을 위해 감각하고, 돈을 위해 투사하길 요구하고, 돈 만을 사랑하길 요구하는 것에 저항해서, 자신이 진짜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감각하고, 진짜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투사하길 요구하는 거야. 그래서 자본주의 시대의 저항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온몸으로 사랑하는 거야. 





진보에 대하여


구조가 인간을 포섭하는 두 가지 길은 첫째 공포야. 두려움, 폭력을 불러일으켜서 인간의 감각, 이성을 마비시키거든. 두려움에 빠진 인간이 강자, 일자에게 의존하는 것처럼, 권력은 폭력을 통해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복종하길 요구해. 둘째, 쾌감이야. 이것은 쾌락과는 다른 데, 쾌락은 주체성을 잃지 않지만 쾌감은 주체성을 잃기 때문이야. 구조가 공포를 통해서 인간을 지배하는 대표적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 소설이 <1984>라고 볼 수 있어. 반면 구조가 쾌감을 통해서 인간을 지배하는 대표적 방식을 보여주는 소설이 <멋진 신세계>야.


자, 바로 이런 것을 두고 ‘진보’라고 하는 거야. 아무런 부족 없이 노인도 일을 하고 성행위를 한단 말이야. 노인이라고 해서 쓸데없이 죽치고 앉아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게 된 거라고. 게다가 불행하게 있을지라도 항상 소마가 대기하고 있지. 맛있는 소마 말이야. 휴일에는 반 그램, 주말에는 1그램, 화려한 동방을 여행할 때는 2그램, 달나라의 영원한 암흑을 여행할 때는 3그램, 그곳에서 돌아오게 되면 시간이라는 것의 다른 쪽에 와 있게 되는 거지. 매일매일의 노동과 기분 전환이라는 견고한 대지 위에 안전하게 서있게 되는 거라, 이 말씀이야. 기분은 황홀해지고, 풍만한 여러 여자들과 즐기게 되고, 여러 곳의 전자기 골프 코스를 돌게 되며 ····

이보게, 젊은 친구! 문명에는 고상한 것이건 영웅적인 것이건 다 필요 없어. 이런 것들은 정치적 비효율성의 증상들이지. 우리처럼 제대로 조직된 사회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고상하거나 영웅적일 필요가 없어. 전쟁과 배신과 이겨내야만 할 유혹과 보호해야 할 사랑의 대상이 있는 곳에서나‘고상한’, 이라든가 ‘영웅적인’이라는 말이 통하는 거야. 그런데 미안한 말이지만 오늘날에는 전쟁이라는 것이 없어. 우린 누군가를 지나치게 사랑하지 못하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우리에게는 배신이라는 것이 없어. 그렇게 되도록 조건 반사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지. 게다가 우리가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들이란 쾌락적이고도 즐거운 것들이지. 또한 우리에게는 이겨 내야만 하는 유혹이란 것도 없어. 왜냐하면 자연스러운 충동들이 자유롭게 주어지기 때문이야. 그리고 만약 불행하게도 불쾌한 어떤 것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겐 항상 소마가 있지. 현실로부터 마음 편히 도피하게끔 만들어 주고 적과는 화해를 하도록 해주며 참고 인내하도록 만들어 주는 그런 소마가 말이야. 과거에는 힘든 도덕적 훈련을 통해서만 비로소 이런 목적들을 달성할 수 있었지. 그런데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어. 반 그램짜리 소마 정제 두세 알 정도만 먹어 보게. 그러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지. 이젠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가 다 성인군자가 되었어. 소마 덕택에 덕망이라는 것을 반쯤 병 속에 넣어 가지고 다니게 된 거지. 눈물 없는 기독교! 이것이 바로 소마의 본질이야

「저는 불편한 것이 더 좋아요」
「그러나 우린 그렇지 않다네. 우린 편한 것이 좋지」
「하지만 저는 편안하고 안락한 것이 싫어요. 저는 신과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과 죄를 원합니다.」
「그럼 자네는 사실상 불행할 권리를 원하는 셈이군.」
「그래도 좋습니다. 그래요. 전 불행할 권리를 원하는 셈이죠.」
「물론 늙고 추하고 성불능의 권리를 원하는 것도 당연하고 말이야. 어디 그뿐인가? 게다가 매독과 암에 걸리는 권리도 원한단 말이지. 먹을 것은 없어지고 이가 들끓고 미래에 일어나게 될 일을 끊임없이 걱정하고 장티푸스에 걸리고 말할 수 없는 각종 고통으로 고통받게 되는 그런 권리도 원하는 셈이지」
「네, 좋습니다. 전 그런 것들을 원하고 있습니다.」

-토마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무스타파 몬드는 <멋진 신세계>를 통치하는 사람이야. 이 세계는 알파, 베타, 감마, 입실론의 존재들은 유전자 조작을 통해 생산되고, 아이를 낳는 고통도 없고, 모든 균을 멸균하고, 노동으로부터 자유롭고, 스트레스받고 힘들면 국가가 제공해주는 중독성 없고, 후유증 없는 소마라는 마약을 통해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거든. 어떤 성충동도 금기시되지 않고, 내가 추구할 수 있는 육체적 쾌감을 끝까지 밀어붙여 만든 사회가 바로 <멋진 신세계> 대부분은 이 사회에 적응하고, 순응하면서 살아가거든. 


또한 이들에게 포섭되지 않는 사람들을 '야만인 보호구역'에 넣어두고 관리하거든. <멋진 신세계>는 어려서부터 조건반사를 통해 인간을 사회-동일화-안정을 내면화한단 말이야. 하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헬름홀츠, 레니나, 심지어 이 세계의 지배자인 무스타파 몬드조차 조건반사에도 불구하고 터져 나오는 자신의 욕망을 슬쩍 드러내면서 보여주거든. 유일하게 '존'은 무스타파 몬드에게 저항을 실천하거든. 그는 불행할 권리를 요구하는 거야. 멋진 신세계의 주민들은 쾌감에 탐닉하는 타율적 복종에 머물러 있다면 존은 이에 저항해서 고통을 마주하는 주체적 지배를 하고 있거든.


-영화 <월-E>

오늘날 자본주의가 그리는 세계가 바로 <멋진 신세계>야. 고통을 멀리하고, 쾌감을 증대시키는 것을 문명의 진보로 여기는 것. 자본주의가 그리는 미래는 쾌감에 몸을 맞긴 살찐 돼지가 되는 거야. 고통, 죽음, 빈곤을 악으로 쾌감, 삶, 부를 선으로 생각하는 천박함을 극대화시킨 세계가 오늘날 자본주의거든. 그러니 이 세계는 진정으로 진보된 세계가 아니야. 고통의 부재, 의미 없는 생명의 연장, 연속적 쾌감이 진보는 아니잖아.


1953년 몬트리올, Peter Milner와 James Olds는 수면과 각성 주기를 조절한다는 중뇌망상계를 표적으로 쥐의 뇌에 전극을 이식하는 수술 후 외부에서 전기 자극을 주는 실험을 했다. 그러나 이식된 전극이 표적을 벗어나 중격(septum)이란 영역에 닿았고, 예상치 못한 실험 결과를 보여주었다. 이에 흥분한 올즈와 밀러는 "스키너의 방"을 개조해 지렛대를 쥐들이 누르면 이식된 전극을 통해 똑같은 위치의 뇌 부분을 직접 자극할 수 있는 방을 만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눈앞에서 행동 신경과학 역사상 가장 극적인 사건이 펼쳐졌다. 쥐들은 자신의 뇌를 자극하기 위해 시간당 무려 7천 번이나 지렛대를 눌렀다. 그들이 자극하고 있는 것은 '호기심의 중추'가 아니었다. 그것은 쾌감중추이자 보상회로였고, 그 활성화는 자연의 어떤 자극보다 훨씬 더 강했다. 쥐들은 물과 먹이보다 쾌감회로 자극을 더 좋아했다. 수컷들은 발정기의 암컷을 무시하고 지렛대를 눌러댔고, 암컷들은 갓 태어난 젖먹이 새끼를 내팽개치고 잇따라 지렛대를 눌러댔다. 어떤 쥐들은 다른 모든 활동을 제쳐두고 시간당 평균 2천 번씩, 무려 24시간 동안 자기 자극을 가했다. 자발적 기아로 죽는 걸 막기 위해선 쥐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겐 이미 지렛대 누르기가 세상의 전부였다.

- 데이비드 린든, <고삐 풀린 뇌>

자본주의는 소비를 통해서 인간이 끊임없이 쾌감의 중추를 자극하는 시스템이야. 이 시스템에 빠져, 나와 세계의 관계, 세계에 대한 총체성을 생각하지 못하는 거야. 그러니 방향이 잡히지 않고, 방향이 잡히지 않으니 지엽말단적인 것에 집중해서 살아가거든. 문제는 소비의 쾌감, 알코올, 게임의 쾌감에서 빠져나올 때, 나를 돌아보는 자기의식이야. 자기의식은 나의 지질함, 못남, 형편없음을 은연중에 알고 있거든. 그러니 영혼은 불안하고, 그 어떤 방향성도 갖지 못하는 영혼은 불안한 의식을 달래기 위해 또다시 소비, 알코올, 게임의 쾌감에 빠져들거든. 위의 쥐처럼 말이야. 죽기 직전까지 쾌감을 탐닉하는 쥐 말이야!


https://namu.wiki/w/%EC%A5%90%20%EA%B3%B5%EC%9B%90

https://youtu.be/tdJAQZxJ6vY


위의 쥐 실험에서도 보듯이 중독은 타자를 받아들이는 관계가 부족할 때 발생하는 거야. 인간은 낯선 감각, 자극을 끊임없이 경험해야 하거든. 그것도 타자와 함께 말이야. 사회적 관계가 인간 존재의 선험적 조건이라면 사회적 관계의 배제, 단절은 인간성을 말살하는 것이 되는 거야. 자본주의는 이것을 아주 잘 알고 있어. 마케팅, 경영학, 행동경제학 등으로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예민하게 탐구한 단말이야. 그래서 전통적, 사회적 관계를 단절하면서 동시에 소비를 통해서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거야. 모든 관계를 소비를 통해서 이루려고 할 때, 인간의 끊임없는 관계에 대한 욕망과 타자에 대한 욕망이 소비로 대체되는 거야. 자본주의의 원동력은 바로 거기에 있거든. 그러니 소비를 매개하지 않은 관계의 형성. 소비를 매개로 하지 않은 타자와의 대면이 인간관계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고 이것이 저항의 지점이 되는 거야. 


바로 이 지점을 잘 파고든 것이 페이스북이야. 페이스북은 관계를 매개로 하잖아. 관계의 공유를 매개로 하거든. 물론 지금은 많은 부분이 상업화되었고 광고도 많지만, 페이스북이 큰 가치를 가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관계야. 누군가와 관계 맺고 있다는 것. 하지만 페이스북도 거대한 자본의 질서에 편입되어 있잖아. 이러한 사례에서도 보듯이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거야.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창의적인 방법으로 새로운 욕망, 욕구들을 자본을 통해서 포섭하거든. 그래서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혁명가, 전위 세력, 선동가들은 자본주의의 대리인보다 훨씬 더 창의적이어야 하고, 끈질기게 버텨야 하며, 세상의 이것저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거야. 그들은 무엇보다 예술가, 철학자가 되어야 하고, 타자에 대한 사랑과 새로운 방향에 대한 끝없는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해!


사람들은 시대가 발전하면 사회가 막연히 좋아진다고 생각해! 그것은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주류들의 전략이거든. 어떤 식으로든 발전한다는 인식을 심어줘야지 이 시스템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잖아. 그래서 TV를 켜면 뉴스에서도 새로운 과학적 발전에 대한 소식이 매번 전하는 거야. 휴대폰이 2G→3G→4G→5G로 바뀌면 통신 속도가 빨라지고, 영화 한 편을 다운받는데 1분이면 된다고 해서 세상이 좋아진다고 홍보하거든. TV 화면이 커지고, 인공지능 청소기가 등장하면 진보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진정한 진보는 인류 중에서 매력을 뽐내는 주체적 지배-복종을 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진보하는 거야. 타율적 지배-복종이 많으면 사회가 아무리 깔끔하고, 문제가 없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1984>의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사회, 무스타파 몬드가 지배하는 <멋진 신세계>의 다름 아니야. 진보를 물질적 평등으로 설정하는 것이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자본주의적 질서 속의 특정한 위치에 자리 잡게 하는 것으로 환원될 가능성이 높아. 그러니 물질적 요소는 진보의 최소이지, 최대가 아니야. 우리는 더 많이 요구해야 하는 거야. 그래서 한 사회에서 진보는 자율적 지배-복종을 실천할 수 있는 주체가 얼마나 많은가 따라 결정되는 거야. 이것은 '욕망하는 기계'로서 인간이 스스로의 욕망을 발현하는 거야. 구조, 시스템이 시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 자기만의 사건을 만들어 내고, 그 결과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되먹임 구조를 형성하는 거야. 이러한 주체들이 많이 등장하면 할수록 사회는 진보하는 거야.



그래서 우리가 최종적으로 지향해야 할 지점은 중앙이 없는 사회야. 일자로서 중앙을 거부하는 사회가 진정으로 진보한 사회가 될 거야. 위의 그림에서처럼 주체와 타자는 시공간 묶임을 통해서 사회의 필요에 따라 그 형태, 권력관계를 자율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거든. 이러한 사회가 진정으로 진보된 사회야. 위의 그림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사회, 그리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았을 때, 위의 그림들을 모두 찾아볼 수 있는 사회가 우리가 최종적으로 지향해야 할 사회야. 이 사회를 '신이 없는 사회, 국가가 없는 사회'로 상상하면 안 돼! 이 사회는 단언컨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아. 사회의 물적 토대가 획기적으로 변하거나, 어딘가에 도달할 그런 사회로서 도래하는 것이 아니야. 이 사회는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사회이며 매번 바뀌는 사회야. 


그래서 이 사회는 이미 도래해도 도래한 줄 모르고, 나중에 깨닫고, 다양한 신이 있는 사회이며, 다양한 국가가 있는 사회야. 100만 년 전의 지층과 10만 년 1만 년 전의 지층이 차곡차곡 겹쳐져 지각의 운동에 따라 융기, 단층, 침하하면서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누적된 퇴적층이 보이는 것처럼 우리가 도래할 사회는 동일한 공간 안에 고대중세근대현대가 섞여있는 거야. 그것의 농도가 다르고 분포가 다른 것이지 어디에나 있는 거야! 서양에서도 동양적 요소가 있고, 여성에게도 남성적 요소가 있으며, 현대에도 고대 노예적 삶이 존재하는 거야. 하나의 선택이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서 다중성을 띠고 있는 거지. 


우리는 동일한 시공간에 살더라도 원시, 고대, 중세, 근대, 현대가 복합적으로 섞여 있여.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나는 자연인이다'에서 처럼 자연과 함께 원시적 삶의 방식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면, 가내수공업, 공장제 기계공업, 첨단 정보 산업 등 나라에도 지금까지 누적된 인간의 삶이 모두 중층적으로 섞여 있거든. 사람들의 생각 또한 마찬가지야. 똑같이 학교라는 공간에 있더라도 원시적 사고, 근대적 사고, 현대적 사고를 하는 친구들이 모두 섞여 있거든. 그러니 하나의 시공간에는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하고 체험한 모든 삶의 방식, 사고, 경험들이 어떤 식으로 든 누적되어 있어. 그래서 현미경으로 미세하게 관찰하면 그 안에는 인류가 누적해놓은 삶, 경험, 지식들이 중첩되어 보이는 거야. 이것은 주식 그래프와 비슷해! 년, 월, 주, 일, 시간, 분 단위 차트를 계속 분해해보면 어떤 식으로든 같진 않지만 비슷한 유형이 나타나잖아. 또한 장기적인 어떤 추세, 방향성이 있거든. 마찬가지로 이것은 프랙털 구조와도 유사한데 왜냐하면 사회현상은 되먹임 구조이기 때문에 그런 거야. 그래서 역사는 한 번도 반복되지 않은 것의 순환이고, 철학은 그 방향성을 탐색하는 사유야.


그러니 진보는 하나가 없어지고 새로운 것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것을 싹 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다양체 n 중에서 상황과 맥락에 맞는 방향성의 1을 도출해내는 거야. 그 1은 지금의 상황과 조건에 맞는 1이 되는 거지. 이것은 적극적으로 대상화하는 주체의 매력과 이들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거야. 그래서 n+1에서 1은 진보의 방향이 되는 거야. 수많은 다수에 의해서 언제든 바뀔 수 있는 1. 이것은 새로운 방향성이고,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내는 시도들이거든. 1은 새로운 관계, 새로운 윤리, 새로운 시대의 철학, 새로운 시대의 이념이야. 진보는 n을 유혹하는 1을 만들어 내는 거야. 


이 시도들이 하나의 구조로 형성될 때 진보가 이루어지는 거야. 개인이 발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노력과 시도들을 통해서 과거와는 다른 공부방법, 슛을 하는 방법, 공을 차는 방법 등을 익히는 것처럼 사회도 사회체의 상호작용, 노력, 시도들을 통해서 새로운 1을 만들어내고 이것은 새로운 구조로서 하나의 진보를 이끄는 거야. 사실 이것을 가장 잘하는 사람들은 자본에 포섭되는 경우가 많아. 하지만 그것이 자본이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중요한 패러다임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포섭되는 것이지, 사실 자본 자체도 이들을 동력으로 삼아 움직이는 거야. 청춘들을 열정을 잡아먹으며 기업이 크는 것처럼 말이야.  


그래서 진보적 정치질서는 다수성의 적극적 참여와 소통으로 이루어지고, 다수가 만들어 내는 수많은 1들의 충돌로 이루어져. 하나의 일자에 저항하지만 수많은 일자를 향해 경쟁하는 거야. 오늘날 sns는 어떤 점에선 원시사회의 전사들이 일자에 저항하며 끊임없는 전쟁을 치르는 공간이야. 이들은 외모에 대해 평가질 하고, TV 프로그램에 대해 논의하기도 하고, 촌철살인하는 언어로 자신의 논리를 펴기도 하거든. 이들은 모든 사안을 국민투표에 붙여. '좋아요, 싫어요'를 통해서 사안사안의 흐름을 찾아내지. 사람들은 좋아요를 누르며 일상에서부터 정치적 사안까지, 삶의 모든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려. 모든 사안의 국민투표. 다수성의 정치가 실현되는 공간을 열어젖힌 거지. 물적 토대가 구축된 거야. 일자의 정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것은 정치가 아니라, 인기투표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어. 


그러나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일자로 나서려는 다수성의 욕망이야. 때론 강력한 일자가 등장하겠지만 과거처럼 그렇게 강력하지도 오래 지속되지도 않아. 진정한 다수성의 시대가 스마트폰, SNS와 함께 도래했거든.  물론 이것은 조작될 수도 있고, 왜곡될 수도 있어. 그리고 이 시스템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 그리고 여전히 오프라인의 관계가 주는 내밀함, 농밀함이 온라인 세계의 가벼움을 간단히 뛰어넘기도 해. 그런 점에서 스마트폰, SNS는 하나의 방편에 불과한 거야.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이 등장하면 관계의 문제 소통의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 오히려 끼리끼리 더 뭉치고 확증편향이 강해지고, 말은 더 거칠어지거든. 그리고 자본은 누구보다 더 이것을 발견하고, 효과적으로 이용하거든. 그럼에도 중앙에 대한 저항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공간의 확보와 이를 통한 정치적 외연의 확대는 적어도 일자를 거부하는 물적 토대를 확보한 거야. 각종 팟캐스트와 수많은 보수 종편, 언론, 인터넷 언론사 등의 치열한 싸움은 미시적 전쟁이거든. 우리는 이것을 긍정해야 해! 


이제 우리는 국민투표의 시대를 살고 있어. 과거처럼 개인의 감각적 경험을 일기장에 꼭꼭 숨겨두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 공개하고, 그 감각적 경험에 대해 사람들은 투표하고 공유하거든. 이를 통해 경험의 연대성, 감각의 연대성을 그 어느 시대보다 쉽게 이루고 있어. 근대 초기 동서양 모두에서 소설의 등장은 귀족들, 민중들, 대중들을 하나로 묶는 매체로 작용한 것처럼 TV, 인터넷, SNS 등은 과거보다 더 강력히 다수성을 띄는 주체를 쉽게 묶었다가 쉽게 해체해버리는 장치로 작동하거든. 이 디지털 시대의 국민투표는 새로운 시물라시옹의 시대를 열고 있는 실체 없는 전쟁의 시물라크르이며, 삶은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실체와 유리된 하나의 놀이로서 모든 메시지들이 모든 사건들에 출몰하는 의미의 과잉 시대에 살고 있는 거야.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수많은 뉴스, 정보들의 단편이 스쳐가는 클릭 하나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국민투표적 삶의 양식이 될 때, 역설적으로 필요한 것은 초월성이야. 수많은 다수성 n에서 하나의 1자로서 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 그래서 새로운 정치는 초월적 환상이 아니라 '초월적 구조'를 만들어 내는 거야. 이 구조는 우리를 매력적으로 유혹할 거야. 다만 과거와 달리 이 구조의 유통기한 길지 않다는 것. 이 구조는 언제든 전쟁에 놓여 있으며, 이 '초월적 구조'가 자신의 한계를 개선하지 못하고 또 다른 초월적 구조를 요구할 때까지 '초월적 구조'는 능동적으로 작동할 거야. 


우리는 복잡하지만 안정될 수 있는가? 우리는 혼돈스럽지만 질서 정연할 수 있는가? 정치는 불안하지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가? 아프리카 원주민이 서울 강남의 하루를 경험했다고 생각해보자. 수많은 사람들이 아침이면 일 순간 나타나고 버스,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모이고, 흩어지고를 반복하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의 혼란스러움. 밤이 되면 마찬가지로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사람들이 자신의 길을 찾아가며 집으로 돌아오는 일련의 과정을 기적이라고 느낄 거야. 아프리카 원주민이 어디에 물소가 있고, 어디에서 사냥을 해야 하는지 감각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낯선 그들의 일상인 것처럼 진보적 정치질서의 작동방식은 복잡해 보이고, 혼돈스럽고, 불안해보고, 이해되지 않지만 동시에 단순하고, 질서 정연하며, 안정적인 방식들이 내재해 있을 수 있어. 불가능해 보이는 그 어떤 것도 자유롭게 상상해보고 만들어 보는 것이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드는 단초가 되는 거지. 구조는 어떻게든 작동되거든. 


그러니 철학하기는 사유를 통해 진보를 향한 정치적 상상력을 요구하는 거야. 





에필로그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충동이야. 내 속에 들어 있는 충동이야. 세상을 바꾸고 싶은 충동, 에로스적 충동, 파괴적 충동, 새로운 예술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충동, 화성을 탐사하고자 하는 충동, 이성적 충동. 테슬라 자동차를 만들고, 아이폰을 만들고, 혁명적 정치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그 모든 곳에서 인간의 에너지가 발현되는 거야. 우리는 충동을 에너지 삼아 움직이거든. 이러한 수많은 충동들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거든. 


충동은 자본이 매개되기 전에 우리로부터 발생하는 에너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충동을 부정적으로 보거든. 자본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사람들조차 이러한 충동을 억압하거든. 충동은 이성적인 것이 아니니 줄여야 하고, 억제해야 된다고 말하는 거야. 그러다 보니 역설적으로 자본주의가 이 충동을 이용하고, 독점하거든. 인간의 모든 에너지, 충동을 화폐로 전이시키는 거야. 80-90년대 독재정권에 저항한 수많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한 것은 이성이 아니야. 이성은 추후적으로 작동할 뿐 부조리한 폭력에 참을 수 없는 충동이 그들을 움직이고, 독재정권을 무너트렸거든. 그들을 감싼 건 이성이 아니라 충동이었어. 그것이 이성이었다면 이성적인 일을 하지 왜 하릴없이 온 거리마다 돌아다니며 죽자사자 민중가요를 불렀니? 충동이 이성에 포획될 때 이미 혁명은 실패한거야. 이성은 우리의 충동을 언제든 포획하거든. 이제 우리의 이성은 AI로 진화할 거고, AI는 우리의 모든 충동을 포획할 거야. 


현타온다! 


요즘 아이들이 종종 하는 말이야. 나에게 이 말은 충동이 거세된 사회의 무기력이 징후적으로 표현된 것처럼 들리거든. 중고등학생이 내뱉는 이 말에는 충동이 거세된 아이들의 나지막한 저항이 있는 거야. 무기력한 사회, 무기력한 현실의 반영이야. 아무런 충동 없이 공부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게임을 하는 물직적 풍요 속에서 현자타임을 즐기고, 자신의 모든 충동을 무기력으로 바꾸고, 이 무기력을 다시 소비의 충동으로 바꾸는 사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을 넘어서는 충동이 간혹 찾아오거든. <1984>에서 윈스턴과 줄리아가 죽음을 무릅쓴 사랑을 한 것처럼 말이야. 이것은 우정으로, 사랑으로, 혁명으로 나타나는 거야. 에로티즘 죽음까지 초월하는 충동적인 삶! 


그러니 철학하기는 내 충동을 관찰하고, 이것을 세계에 투사하는 거야. 









계속해보겠습니다


인간은 신화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자본주의의 성공신화만 있습니다. 운동을 하든, 책을 읽든 유일하게 남은 신화는 성공신화입니다. 신화는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아빠는 전쟁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른 전사로 보여야 하고,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신이어야 하며, 아이는 영웅이 될 후보자여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신화가 상실된 시대입니다. 신화가 망각된 시대의 인간은 인간 일 수 없습니다. 신화를 망각하고 돈만 남은 시대의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존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신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교육은 생각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교육은 사유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생각과 사유를 극단으로 밀어붙이면 혁명가가 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없는 철학 이야기'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생각하는 나'의 무시무시한 혁명성과 파괴성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유를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멈춥니다. 지속하면 내가 출발한 근원을 부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유를 통해 '철학자 없는 철학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논리 체계를 구성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유일하게 긍정할 수 있는 것은 '세계의 무한성'과 그것과 관계 맺는 '충동하는 나'입니다. 그 충동이 어디까지 갈지 모릅니다. 하지만 계속해보겠습니다. 











이전 14화 모든 관계는 권력관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