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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Oct 21. 2018

모든 관계는 권력관계



두 개의 전쟁터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두 개의 전쟁터에 놓여 있어. 하나는 내 몸에서 벌어지는 전투야. 내 감각을 끊임없이 길들이려고 하거든. 다른 하나는 타자야. 공포스러운 타자는 주체를 끊임없이 왜소하게 만들거든.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거대한 시뮬라시옹의 세계를 펼쳐 보여. 이 안에서 우리 인간은 결핍된 존재로 생산되는 거야. 그래서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주체는 주체의 내면을 결핍으로 채우고, 주체의 외면을 공포로 채우거든. 내 감각을 주체의 결핍을 자각하도록 표면적 심연으로 이끌고, 내 이성을 공포로 둘러싸인 초월적 환상을 펼쳐 보인단 말이야. 이것에 저항하는 혁명가는 주체의 내면이 결핍이 아니라 충만함으로, 주체의 외면이 공포가 아니라 풍성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해! 


자본주의에 저항하기 어려운 이유는, 권력이 너무나 미시적으로 작동하고, 이성과 합리성의 이름으로 작동하고, 수많은 감각의 도취로 작동해서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싸워야 할지 너무 어렵기 때문이야. 즉, 전선을 분명하게 설정할 수 없기 때문에 '욕망하는 기계'로서 주체가 저항을 생산함에도 불구하고, 오래 버티지 못하고 자본주의의 '초월적 환상'과 '표면적 심연'에 포섭되어 버리거든. 자본주의는 자신이 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적극적으로 은폐하거든. 문제의 근원으로서 자본주의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 적이 분명하게 포착되지 않도록 하는 것! 문제가 발생하면 제 빨리 꼬리를 자르는 것! 


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생기'는 죽거든. 시시한 게임을 하지 않거나, 보지 않는 것과 같은 거야. 그래서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면 적으로서의 자본주의를 정확히 인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무기력의 근원은 문제는 있지만 문제를 발생시킨 '적'이 분명하게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야. 혁명의 시도는 끊임없이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장치는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새로운 장치를 개발하면서 혁명가를을 포섭하거든. 적을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면 자신도 모르게 포섭되버리는 거야. 


그러니 자본주의라는 강력한 중앙이 탄생하는 거야. 더군다나 이 중앙은 강력한 매력이 있거든. 시대의 전위를 다른 어떤 것보다 제 빠르게 포섭하고 돈의 가치로 모든 것을 바꾸어버리기 때문에 마치 모든 것이 돈이면 다 된다는 환상을 갖게 한단 말이야. 그러니 자본주의의 중앙에 저항하기는 정말 정말 힘든 거야. 왜냐하면 중앙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거든. 또한 설령 독하게 마음먹은 혁명가들이 자본주의의 시물라시옹에 저항한다고 하더라도, 그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알기 힘들어.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구호가 '임금을 인상하라!', '노동시간을 준수하라!', '비정규직을 철폐하라!'와 같은 형태를 띠거든. 그런데 이것은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구호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질서를 강화하는 구호거든. 만약 이것을 잘 지켜서 노동자의 소득이 올라가고 삶이 안정되고 나면 저항의 열기는 급속도로 식어버리거든. 자본주의는 이미 노동운동을 하나의 상수로, 예측 가능한 어떤 것으로 규정해 두고 있기 때문에 노동운동은 이미 자본의 논리 속에 포섭되어 있거든. 어쨌든 저항하고자 하는 욕구, 욕망이 있더라도, 어떤 방향으로 움직여야할지 그 방향, 목표,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 거야. 그러니 저항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거지. 


결론적으로 자본주의의 첫 번째 전쟁터는 내 몸의 감각이야. 과잉된 감각으로 내 진짜 감각을 마비시키는 바로 그곳이 전선이야. 이것을 뒤집기 위해서는 위해서는 표면적 심연과 초월적 환상에 저항해야 해! 과잉된 감각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고유한 감각이 필요한 거야. 두 번째 전쟁터는 타자야. 세계를 결핍으로 규정하고, 주체와 타자는 극단적으로 경쟁해야 하며, 타자가 나를 풍부하게 만들어 줌에도 불구하고 나를 억압하고, 위협하는 존재라고 느끼도록 하는 것에 저항해야 해! 우리는 전쟁의 두 가지 전선을 확보했고, 첫 번째 저항의 방법으로 자신의 감각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표현하고 공감하는 것을 도출했어. 이제 두 번째 전쟁터,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새롭게 규정할 수 있는지 검토해보자.  





모든 관계는 권력관계


친구관계, 부자관계, 연인관계, 남여관계, 사제관계 세상에는 어마어마한 관계들이 그물처럼 엮여 있거든. 그런 점에서 세계는 관계의 총체야.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의 관계의 총체가 세계야. 그런데 이들 관계는 겉으로보면 자유롭고, 대등하고 평등하게 보이지만 실제로 관계의 미시적인 차원으로 들어가보면 권력관계거든. 이 권력이라는 말을 너무 심각하게 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무슨 뜻이냐면, 우리가 게임을 할 때도 주도적인 사람이 있고, 공부를 할 때도, 술을 먹을 때도 주도적인 사람이 있잖아. 그러니 미시적인 관계에서도, 권력이 매 순간 작용하는 거야. 아이들의 놀이에서도 주도하는 아이들이 있고, 아닌 아이들이 있잖아. 그리고 이 권력 관계는 순식간에 바뀌거든. 


예를 들어볼께. 갓난아이와 엄마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엄마는 아이를 관리, 통제할 수 있는 지배적 위치에 있어. 그렇지만 항상 모든 순간에 엄마가 아이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야. 젖을 달라고 아이가 울 때 아이를 달래고 기저귀를 갈고 젖을 먹여야 하는 엄마는 아이에 대하여 약자가 아닐까? 어떤 순간에는 엄마가 강자가 되지만, 어떤 순간에는 아이가 강자가 되는 거야.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지배-피지배 관계는 매 순간 모든 관계의 미시적 층위에 작동하는 거야. 그러니 세계의 모든 관계는 권력관계야. 매순간 바뀔지라도 일시적으로라도 ①권력을 가진 존재(지배)와 ②권력을 가지지 않은 존재(피지배)로 나누어볼 수 있거든. 이것은 지배-피지배, 강자-약자, 주인-노예 등으로 생각해 볼 수 있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치적 권력 또한 이것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어. 


사물-사물 : 강력한 바람이 불면 돌, 나무, 건물, 먼지는 이것에 영향을 받고 흔들리거든. 바람의 강력한 힘이 배를 밀기도 하고, 태풍을 일으키고, 심지어 바위를 깎기도 하잖아. 하지만 동시에 돌, 건물, 나무는 바람에 저항해서 바람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흐름을 변화시키기도 하잖아. 그러니 강력한 바람은 돌, 건물에 대해서 강자지만 동시에 돌, 건물은 바람에 저항하거든. 그래서 바람의 방향을 조금이라도 바꾸게 한단 말이야. 지배-피지배 관계는 일시적 관계야. 만약 바람이 약하고 건물이 거대하다면 바람은 건물에 막혀 사라질 거야. 그러니 그 관계는 시시 때때로 변하더라도 지배-피지배의 권력관계를 띠고 있어. 


사람-사물 : 배가 고파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음식을 지배하는 강자이고, 음식은 우리에게 약자야. 하지만 우리는 음식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점에서 음식에 대해서 우리는 약자야. 우리는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지만 동시에 거대한 자연재해에 속절없이 피해를 당하거든. 인간이 사물에 대해서 늘 지배적 위치에 놓여 있는 것 같지만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놓은 술, 마약, 담배, 게임과 같은 것에 중독되면 우리는 약자고 이들이 강자가 되는 거야. 멋진 자동차, 값비싼 명품에 내 삶과 시선을 뺏긴다면 이들이 강자고 나는 약자가 되는 거지. 사물은 수동적인 것 같지만 위대한 예술품이 아우라가 있는 것처럼 사물은 우리에게 강력한 힘을 발휘하거든. 그러니 사람-사물도 권력관계야. 


사람-사람 : 부자-빈자, 자본가-노동자, 부모-자식, 친구관계, 연인관계, 부부관계 등의 모든 인간관계도 권력관계야. 부자, 자본가는 자신의 부를 마음껏 부리면서 빈자, 노동자를 통제, 관리하고 도구로 삼는다는 점에서 강자야. 그런 점에서 부자, 자본가는 항구적인 강자로 여길 수 있어. 하지만 혁명의 순간, 파업의 순간은 관계가 역전될 수도 있어. 항구적이고 영속적으로 보이지만 영구적인 것은 아니야. 부모-자식 관계도 일반적으로는 부모가 강자인 것 같지만 부모가 자식 눈치를 보기도 하고, 부모가 돈으로, 잔소리로 회유하기도 하잖아. 친구관계, 연인관계도 마찬가지야 누군가가 관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주도적 순간이 있지만 동시에 뺏기는 순간도 있거든. 이러한 헤게모니의 순환이 비교적 자주 일어나는 관계가 대등한 관계, 평등한 관계라고 볼 수 있어. 남녀관계도 겉으로 보면 남자가 주도하는 것 같지만 속을 보면 여자가 주도하는 경우도 많고, 반대로 여자가 큰소리치지만 모든 결정을 남자가 하는 경우도 있거든. 


사물-사물 관계와 달리 인간-사물, 인간-인간 관계에서 권력관계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관심, 사랑, 우정을 매개로 작동해! 생각해보면 인간-사물, 인간-인간의 권력관계는 상호성을 전제로 형성되는 거야. 친구 사이의 관계가 나빠서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면 그 관계에서 뛰쳐나오면 돼잖아. 우리나라 정치질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데로 이민가면 그만이야. 그러니 권력관계는 이미 관계 맺은 당사자들 사이의 관심, 사랑, 우정, 역사를 매개로 형성는 거야. 학교의 권력관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학교를 그만두면 되고, 회사에서의 권력관계가 마음에 드지 않으면 그만두고 다른 직장을 찾으면 되는 거야. 어렵지만 부모자식 관계도 마음에 안들면 연을 끊기도 하잖아. 그러니 사물-사물의 권력관계와 달리 인간-사물, 인간-인간의 권력관계에서 인간의 주체적 의지가 전제되어 있다고 보아야 해! 



계급, 생태계 피라미드 권력관계의 쌍방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리는 신분제 피라미드, 먹이사슬 피라미드는 마치 이러한 구조가 영원불멸한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도록 만들어. 생태계에서 사자가 가젤을 잡아먹는 것이 사자가 가젤보다 강한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 순간, 상황에서 그러한 관계가 드러난 것일 뿐이야. 80년대 이후 시민사회 운동으로 소비자 운동, 생산자 운동, 협동조합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기업과 소비자의 관계에서 기업은 자본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있지만 소비자는 기업보다 개별적이잖아. 그러니 소비자끼리 똘똘 뭉치면 기업에 대응할 수 있고, 동시에 기업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것이거든. 특히 요즘은 SNS가 발달하면서 고객들의 평가가 구매에 큰 영향을 미치잖아. 더군다나 인터넷의 발달로 물건을 쉽게 비교할 수 있기 때문에 최저가로 구매할 수 있게 되면서 기업과 소비자의 관계가 역전되기도 하거든. 


그래서 모든 관계는 권력관계고 이 권력관계는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 세상의 진리야. 연인 사이에서도 사랑은 움직이는 거잖아. 어떤 때는 너무너무 좋다가, 내가 시큰둥해지만 갑자기 상대가 적극적으로 다가오기도 하잖아. 그러니 모든 관계는 권력관계야. 그리고 이 권력관계가 유지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야. 우리는 고통스럽고 힘들고 아픈데도 이 권력관계에 빠져들고, 유지할까? 


권력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매력이기 때문이야. 





매력과 유혹의 권력관계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권력관계, 지배-피지배 관계를 중심으로 분석해보자. 아래 그림에서 '나'는 '너'를 만나서 반하는 '사건'이 발생해. 우선 '나'의 입장에서 분석해보자!! 욕망하는 주체인 '나'는 자기만의 이상형이 있는 거야. 어느 날 친구랑 길을 가다 그녀를 만나게 되는 거지. '나'는 그녀에게 반해. 내 이상형에 부합하거든. 그래서 나는 그녀를 '나의 이상형'으로 대상화하는 거야. 그녀의 '매력'을 내가 주체적으로 대상화한 거지.


내가 좋아하는 이상형에 대한 욕구/욕망이 그녀와 우연히 만나는 상황에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을 만든다. 


권력관계로 표현해보면 첫눈에 반한 '나'는 '너'에 대해서 약자야. 반대로 '나'에 대해서 '너'는 강자가 되는 거야. 여기에서 '나'는 '너'를 '매력을 가진 존재'로 주체적으로 대상화하면서 동시에 '나'를 '너'의 매력에 주체적으로 '복종하는 나'로 대상화하는 거야. 이제 '나'는 그녀의 은총, 명령을 기다리는 존재가 되는 거야. 내 마음을 받아줄지 말지,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일지. 그녀가 요구하는 것으로 '나'를 사물화, 대상화하는 거야. 그녀에게 잘보이기 위해 온 갖 노력을 할 거잖아. 


이것은 '나'라는 주체의 욕망과 그것의 실천 방향, 즉 노예로서의 대상화가 일치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 내 사랑을 받아주기를 기대하며, 주체적으로 '너'의 노예가 되길 원하는 거야. 그래서 매력적인 '너'에 빠져들 때 우리에게는 두 개의 대상화가 동시에 발생하는 거야. '내'가 '너'를 매력적인 대상(주인)으로 사물화하면서 동시에, '나'를 주인에 끌려가는 대상(노예)으로 사물화하는 거지. '너'에 대한 사물화와 '나'에 대한 사물화가 우리의 내면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거야.  


다시 위의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나'의 반했다는 표현, 애정공세, 고백에 '너'는 아무런 반응도 없고, '나'라는 인간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이상한 변태같은 놈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보자. 그때 '나'의 선택은 포기하거나 도전하거나 해야 하잖아. 포기한다면 '나-너의 권력관계'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고, 도전한다면 '나-너의 권력관계' 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해. '너'의 입장에서는 이상한 놈이 추근대는 것으로 느끼겠지만, '나'의 입장에서는 온 힘을 다해 '너'를 유혹해야 하거든. 욕망하는 주체인 '나'의 매력이 그녀의 마음에 들 때까지 온힘을 다해야 하는 거야. 그래서 유혹은 욕망하는 주체가 상대를 대상화하는 과정이야. 이것은 권력관계의 언어로 바꾸어서 말하면, 상대를 노예로 만들고 동시에 나를 주인으로 만드는 과정이야. 


이제 '너'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매력이 있거든. 그 매력이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엄청나게 멋지게 느껴질 거야. 어쨌든 '너'는 매력을 가진 사람이야. '너'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의 고백에 반응하고 판단해야 해! '너' 또한 '욕망하는 주체'로서 '나'의 매력을 따져보겠지. 매력이 있거나, 혹은 느껴졌다면 '너'와 '나'는 '서로의 매력'이 '서로의 욕망'을 충족하는 연인관계로 발전할 거야. '서로의 매력'을 매개로 되먹임 구조가 되는 거지. 만약 '너'가 '나'에게서 매력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너'는 '나'를 피지배자로 대상화할 것이고, '너'를 지배자로 대상화할 거야. 이 관계가 지속이 되면 서로 연인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관계가 되는 거지. 만약 '내'가 끊임없는 도전으로 '너'와 간혹 대화도 하고 소통도 하는 과정에서 처음 볼 때는 몰랐던 매력을 '너'가 '나'에게서 발견했다면 연인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거야. 그러면 마찬가지로 서로의 매력을 매개로 한 연인관계의 되먹임 구조가 형성되는 거지. 


간단히 말하면 고백했는 데 까이면 나는 노예, 상대는 주인이 된다는 뜻이야. 나를 노예로 대상화하고 상대를 주인으로 대상화한다는 거야. 그리고 자꾸 들이대서 고백이 성공하면 연인관계, 즉 평등한 관계가 된다는 것이고,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서 연인관계로 변환되기 위해서는 매력과 유혹이 작동한다는 거야. 왜 하필이면 '너'가 '내' 눈에 들어오겠니? '내'가 가진 '의식적-무의식적 욕망' '특정한 상황'에서 '타자'와 만나는 '사건'을 통해서 '너'의 매력 '대상화'하는 거야. 


무슨 남녀 관계를 주인과 노예로 설명하느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거야.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아. 말하고자 하는 것은 관계는 모두 권력관계라는 거야.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주체적 지배자와 주체적 피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거지. 매력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노예의 상태를 허용하도록 만들어. 



권력관계는 매력과 유혹을 통해 자신을 지배-피지배의 관계로 대상화하는 과정이다. 


권력관계는 지배-피지배, 명령-복종, 주인-노예의 관계이고, 권력관계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으로 대상화가 전제되어야 해! 지배자, 명령자가 대상을 지배하려면 대상이 나에게 무엇인지 규정되어야 하잖아. 대상이 그 자체로 무엇이든, 또 다른 주체이든, 타자든, 사람이든, 동물이든 그것이 나의 지배를 받아야 하고, 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잖아. 그러면 지배와 명령하는 사람은 그것이 무엇인지 대상화를 해야 하거든. 멍청한 주인이 되지 않으려면 대상이 무엇이 되어야 하고, 사물과 세계 속에 어떻게 배치되어야 하는지 주인은 강력하게 지배하고 명령해야 하거든. 그래야 피지배자가 복종할 것 아니야. 설령 명령자가 피지배자에게 대상을 특징하지 않고, '알아서 잘 해!'라고 말할 때도, 명령자는 명확한 자기의 그림이 있어야 하는거야. 


만약 피지배자가 복종에 저항하면 어떻게 될까? 혁명이 일어나겠지. 복종하지 못할 만한 주인에게 복종하고자 하는 피지배자는 없거든. 회사에 취직해서 사장이 흐리멍덩하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제대로 가르쳐주지도 않고 그냥 멍 때리고 있으면 그 회사를 다니고 싶니? 반대로 좀 힘들고 일은 많더라도 체계가 잡혀있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명확하고, 일을 통해서 배운다는 느낌이 나면 계속 다닐 거 아니야. 학교에서도 아무런 관심 없이 학생들에게 자유를 보장한다는 이유로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담임과, 깐깐하지만 하나하나 챙기는 담임 중 누구를 따르겠니? 복종도 복종할만해야 하는 거야. 부모님의 부당한 잔소리에는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싸우잖아. 하지만 내가 들어도 타당한 이야기에는 복종하거든. 그러니 모든 권력관계는 대상화를 매개로 이루어져. 대상화를 하지 못하는 권력관계는 없단다. 


그래서 '세계는 관계의 총체'라고 할 때의 의미는 관계되지 않은 것은 우리의 세계에 포착되지 않는다는 것이야. 관계의 반대는 무관심, 무관계야. 이것은 바로 옆에 있어도.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면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거야. 무관심 속에서는 권력관계가 형성되지 않아. 그래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권력관계가 형성된 곳에는 주체의 지분이 항상 들어 있는 거야. 


30억광년 떨어진 별이 폭발해서 외계인 1조 명이 죽었다고 한들.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 물론 물리적인 폭발이 영향을 줄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관계에 포착되지 않아. 왜냐하면 우리에게 매력과 유혹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때문이야. 그래서 세계의 관계는 권력관계이고, 권력관계는 대상화를 통해서 '나'와 '대상'을 주인 혹은 노예로 만드는 대상화이고, 이 과정은 나의 매력과 상대의 매력이라는 관계 속에 일어나며,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유혹을 통해서 '나'를 지배자로, 대상을 '피지배자'로 만드는 과정인 거야. 혹은 반대로 '나'를 피지배자로, 대상을 '지배자'로 만드는 과정인 거야. 


그래서 매력은 끌려감이고. 유혹은 끌어당김이야. 매력과 유혹은 모두 주체적 사건이야. 욕망하는 주체는 나를 주인 혹은 노예로 대상화함으로써 권력관계를 형성하는 거야. 이 과정은 반드시 시간을 매개로 사고해야 하는 데, 일상의 대부분 관계에서 지배-피지배 관계는 미분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이야. 그러니 권력관계는 매 순간 변해! 나의 매력도 변하고, 나의 취향도 변하고, 동시에 상대의 매력, 취향도 변하거든. 그래서 권력관계는 매력과 유혹을 매개로 하는 끊임없는 되먹임 구조, 상호작용이야. 그러니 권력관계는 반드시 시간을 매개로 사고해야 하는 거야. 





화폐, 매력의 강력한 환원주의


자본주의의 권력관계도 마찬가지야. 자본주의 또한 매력과 유혹으로 권력관계를 형성하거든. 자본주의의 매력 또한 시시 때때로 변하거든. 만약 자본주의적 권력구조가 항구적인 것이라면, 자본을 가진 사람은 절대 패배하는 일이 없을거야. 그러나 사업을 잘못한 대기업이 망하기도 하고, 시장 상황이 바뀌면 잘 나가는 기업이 하루아침에 망하기도 하거든. 그럼에도 오늘날 자본주의는 점점 더 강화되고, 점점 더 강력하게 작동한단 말이야. 자본주의는 자신의 매력을 항구적인 것으로 만들고 축적이 가능하도록 만들 거든. 바로 화폐를 통해서야. 화폐는 매력의 상대적 가치를 절대적 가치로 바꾸는 강력한 환원주의거든. 그러니 표면적 심연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화폐의 양=매력'으로 환원해서 생각하는 것이 길들여져 있는 거야.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를 들으면 침을 흘리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화폐를 보며 매력을 느끼는 것으로 길들여진 거지. 이것은 일종의 패티쉬인데, '욕망하는 기계'인 인간은 자본주의 사회의 시물라시옹의 구조에서 화폐를 욕망하게 되는 거야. 

자본주의는 매력을 화폐로 환원시키고 그것을 모두 경제학적인 것으로 치환하고, 중앙이 없는 것처럼보이는 강력한 중앙을 만들거든.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국가를 만들고, 더 나아가서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세계경제를 통합하면서 화폐를 매개로 한 강력한 중앙을 형성하는 거야. 물론 화폐는 유통되기 때문에 중앙이 없는 것처럼 착각이 들기도 하거든. 하지만 이 중앙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국가보다 더 강력하기도 하거든. 국가가 하나의 이념인 것처럼, 자본도 하나의 이념이야. 여기에는 주체의 지분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거든.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 시장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시장에서의 여러 가지 경쟁과 협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정부는 시장을 공정하게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동안 (정부가) 중소기업 정책을 하면서 나름대로 기여한 바 있겠지만 지금 정책 현실이 정부 정책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 같다는 판단을 합니다. 

- 노무현 대통령, 2005년 7월 5일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시책 점검회의 


이 세계를 움직이는 시장!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습니다'는 과거 국가 권력이 더 강했지만 시장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서 정치권력을 조금씩 경제권력으로 가지고 온 거야. 이 과정은 어떤 식으로든 국민들의 동의가 있지 않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거야. 그런 점에서 아래 BC카드 광고는 징후적인데, 우리 시대의 퇴행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야. 민주화의 열기, 혁명의 열기가 2000년 초 어떻게 해서 싸그리 말랐는지, 그리고 어떻게 성공한 부자,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는지, 이념이 사라진 시대에 그 자리를 자본의 이념이 자리 잡은 거야. 부자가 시대의 이념이 된 이 퇴행적 사건에 그 시대를 산 어른들은 모두 지분을 가지고 있는거야.   


https://youtu.be/eq8tsa_fGpc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권력은 항구적이지 않다는 거야. 그러나 권력을 영원한 어떤 것으로 표상하도록 만드는 것, 돈이면 모든 것이 다 된다고 표상하도록 만드는 것은 항상 지배자들의 전략이야.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을 항상 노예로 주체적으로 대상화하거든. 유혹하는 거야. 유혹에 낚인 우리들은 스스로를 노예로 대상화하고, 지배자를 주인으로 대상화하는 거지. 지배자의 매력에 스스로 복종하면서 권력관계가 항구적으로 유지되는 거야. 이 과정에서 단언컨대 지배자의 노력이 노예의 노력보다 훨씬 크고, 강력해! 자본가, 기업가의 노력과 열정이 훨씬더 전투적이고, 혁신적이거든. 안탑깝게도.....  그러니 전투는 쉽지 않은 거야. 


그렇다고 저항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야. 방법은 두 가지 밖에 없어. 저항은 이들의 매력에 유혹당하지 않거나, 내가 더 강력한 매력을 가지고 이들을 유혹하는 거야. 갑을 관계에서 갑이 될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는 거야.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갑을병정에서 '정'의 위치를 '병'으로 바꿔주는 것으로 만족하거든. 그것만 돼도 혁명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정'에서 '병'이 되는 철학과 '정'에서 '갑'이 되는 철학은 다를 수밖에 없는 거야. '정'에서 '병'이되는 자기계발서가 인문학, 철학의 이름으로 팔리는 것은 구토가 나는 일이야. 내 삶의 주인을 남에게 미루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선 '정'에서 '갑'이되는 철학이 필요한 거야. 



그러니 '철학하기'는 '매력적인 존재, 유혹하는 존재 되기'야.






타율적 지배와 주체적 노예


세계의 주인으로 서는 것은 욕망하는 주체가 원하는 주인-노예의 방향에 대한 주체적 선택이 현실에서 실천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야. 자신의 선택이 일치한다면 그는 자기 삶에서 욕망하는 주체로서 주인이 되는 거야. 하지만 그 방향성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노예가 되는 거지. 주체가 관계 속에서 자신을 주인으로 위치시키고 싶고 실제로 주인이 된다면 나는 관계의 주인이 되는 거야. 주체가 관계 속에서 자신을 노예로 위치시키고 싶고, 노예가 된다면 나는 세계의 주인으로 서는 거야. 주체가 주인-노예의 관계를 자유롭게 순환시킬 수 있다면 자신은 관계의 주인이 되는 거야. 


우리는 주체적 주인, 주체적 노예가 될 수 있고, 반대로 타율적 주인, 타율적 노예가 될 수도 있어. 한용운의 복종 시에서 보듯이 한용운은 당신에게 복종하는 주체적 노예이지만 그는 주체성을 상실하지 않거든. 부조리는 주체가 원하는 방향과 실제가 일치하지 않을 때 발생해. 겉으로 드러나는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주체가 원하는 방향과 실제 지배-피지배의 방향이 일치하지 않았을 때 부조리가 나타나는 거야. 이 불일치에 대해서 주체는 선택을 해야 하거든 반항하고, 저항할 것인지, 아니면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불안, 분노를 억누르면서 꾸역꾸역 살아갈지, 아니면 부조리에 항복할 것 인지를 선택해야 해! 


그러나 자본주의는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내 의지와 상관없이 구조가 결정해버리거든. 그러니 지배자도 피지배자도 만족하지 못하는 결핍과 공포가 좌우하는 시스템인거야. 그러니 부조리한 거야. 1등 해도 불안하고, 꼴찌해도 불안하거든. 자본주의는 타율적 주인과 타율적 노예가 되는 것을 구조화 한거야. 그 누구도 세계의 주인으로 서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시뮬라시옹이야. 


중앙을 거부하는 것은 중세를 탈출하는 길이야. 이제 우리는 신이 없는 세계를 꿈꿔야 하잖아. 근대의 물신은 중세의 신을 대체한 것에 불과해. 지금은 여전히 중세거든. 진정한 근대, modern은 중앙을 거부할 때 비로소 가능한 거야. 중앙을 거부하는 것은 새로운 정치학을 요구해. 플라톤, 홉스, 루소 등으로부터 이어온 정치학은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단 한 번도 실질적인 민주적 정치를 이야기한 적이 없어. 이들의 정치학은 이론과 현실이 철저히 괴리되어 있거든. 사회 계약설을 이야기하며 권력을 위임해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한 번도 계약서에 사인해본 적이 없거든. 선거는 민주주의가 아니야. 민주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장치거든. 그러니 '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학은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는 거야. 


지금이 중세인 이유는 실제 중세 사회의 신학에 근거한 통치 모델이 근대사회의 통치 모델로 전이되는데, 세속화 과정에서 대부분이 명칭만 바뀐 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거든. 물론 시대, 환경, 문화에 따른 통치 모델의 변화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서구사회의 정치구조는 교황을 필두로 한 신학적 구조와 그 유사성이 상당하다고 볼 수 있어. 중세 교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중적 통치체제에서 교황의 이름만 제거하고, 통치구조를 그대로 남겨 놓은 것이 근대 민주주의 통치구조와 상당히 유사하거든. 이제 우리는 이러한 서구식 중앙집중적 통치구조가 당연한 것인지 물어야 하는 거야. 


그리고 본질적으로 중앙집중적 권력구조를 통해서 민주주의의 실현이 가능한지 물어야 하는 거야. 


우리는 수업시간에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언급한 '인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 놓여 있다'라고 배우거든. 수능 시험에도 홉스, 로크, 루소의 사회계약설이 어떻게 다른지 그 차이를 묻는 문제가 나오기도 하잖아. 홉스는 이 책을 통해 서구 근대 정치철학의 토대를 마련했거든. 자연 상태에서 인간을 이기적 본성을 가진 존재라고 규정하고, 개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지. 이 상황에서 인간의 권리, 즉 자연권 확보를 위하여 사회계약을 통해서 리바이어던과 같은 강력한 국가권력이 발생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거든. 그 이후 나온 거의 모든 정치철학은 이 계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서구의 주류 경제학인 이기적 존재로서의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상정하는 것처럼, 서구의 주류 정치학 또한 인간의 이기심을 하나의 공리로 공유하고 있거든. 이것은 서구를 지배한 도시상인, 유통업자들이 많은 돈과 자본을 축적했기 때문에 자신의 윤리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려면 인간의 이기심을 긍정할 수밖에 없거든. 


또한 이 논리를 뒷받침하는 것 중 하나는 희소성의 논리야. 자원은 희소하기 때문에 관리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강력한 통치자, 권력자가 등장해서 통제해야 한다는 거지. 어떻게 최첨단 21세기에 이렇게 바보 같은 논리가 교과서에 정답이라고 뻔뻔하게 실려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서양철학이 어려워진 이유는 간단해. 초기조건, 즉 전제가 잘 못 세팅되어 있기 때문이야. 그러니 어려운 말을 써서, 논리를 비비 꼬아야 하거든.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전쟁상태에 놓여있니? 물론 싸울 때도 있지만 서로 타협하고, 협력하고, 교환하면서 평화를 유지하잖아. 전쟁을 하지만 극단적인 전쟁상태에 놓여 있지는 않거든. 


https://youtu.be/llQSJ6GLNwM

공평성에 반응하는 동물 실험 - 이익이 아니라 공평함에 반응한다.

https://youtu.be/5yPKyR7mzO0


이러한 사고방식이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당시 주류로 떠오르던 부르주아, 시민계급, 도시상인, 유통업자들이 자신들이 만들어 낸 세계가 당연히 이전보다 더 좋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잖아. 그러니 과도하게 과거를 비난하고, 은폐하고, 나쁜 것으로 설정하고 지금은 과거보다 더 좋으며, 앞으로는 더 좋아질 것이라는 신화를 사람들에게 주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마찬가지로 공부가 힘들 때 주변에서 그러잖아. 대학만 가면 다 해결돼! 학문은 교묘한 논리로 대중을 속이는 데, 자꾸 듣다 보면 그것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느껴지거든.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도 의심하지 않고 꾀꼬리처럼 가르치는 거야. 사회계약설이라며, 한 번도 계약서에 서명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계약을 한 것처럼 착각하고, 천부인권이 마치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하면서 현실은 노예보다 더 노예가 되는 노동자로 살게 되는 거지. 그러면서 과거보다는 좋아졌지라며 자기 위안을 하는 거야. 


이들은 원시사회를 야만으로 규정하고, 항구적 전쟁상태로 설정함으로써, 지금 현실의 지배-피지배 관계를 순순히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공포로 작용하는 거야. 원시사회는 동물과 같은 인간들이 자연의 본능에 따라 야만적으로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설정을 통해서, 항구적인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정당화하고 있는 거지. 그러니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그 자체로 지배와 복종의 항구성이 마치 사회적 진보의 단계, 절차인 것처럼 당연하게 규정하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어. 사회계약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투표로 변형된다고 하더라도 그 최종적인 결과는 지배-피지배 관계의 연속성에 놓이게 되는 거야. 그래서 진보를 단순히 지배 방식의 변화, 인권을 존중하는 지배의 형태의 바뀌기로 위치하게 만들거든. 심지어는 민주주의를 '지배 없는 간섭'이라는 말장난으로 표현하기도 하거든. 


여하튼 홉스의 이론은 항구적인 지배-피지배 관계를 상정하기 때문에 강력한 통치자로서 하나의 단일한 주체를 상정하게 되는 데, 그게 바로 국가야. '짐이 곳 국가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의 절대적 주체로서 신과 같은 것으로 표상되는 것이 국가거든. 그러니 국가의 부름, 민족의 영달을 위해서와 같은 국가주의, 민족주의가 나타나는 거야. 강력한 통치자로서의 국가를 상정하는 것. 고정불변하는 하나의 구조로서 국가를 상정하는 것. 이후 진보는 이 국가를 누가 어떻게 좀 더 합리적으로 통치하느냐가 진보의 유일한 이념이 된 거지. 국가에 의한 지배-피지배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오늘날 정치학의 기본 개념이야. 


사회계약에 따른 국가론은 오늘날 민주주의 이념을 받아들인 거의 모든 국가에서 수용되고 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지배-피지배, 명령-복종의 관계의 구조적 항구성에 있어. 즉, 지배-복종의 구조가 항구적인 장치로 구조화되어 있고, 이 구조를 변경하거나 바꾸는 것이 아주 힘들게 되어 있어. 그 결과 국가의 구조에서 국민은 주체적 지배-피지배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타율적 지배-피지배 관계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지. 


권력관계의 핵심인 매력과 유혹이 원천적으로 배제되어 버리고, 권력의 물리적 강제력만 남았다는 거야. 앞에서 남녀가 매력을 통해서 스스로 지배, 복종을 선택할 수 있잖아. 하지만 국가 시스템이라는 구조 속에서는 타율적 지배와 타율적 복종밖에 존재할 수 없거든. 지배를 하는 존재도 주체적이지 않고, 복종을 하는 존재도 주체적이지 않아. 그러니 각종 페이퍼 워크, 관료제 시스템에서 지배를 하는 자도, 복종을 받는 자도 항구적 불만, 불안에 쌓여 있는 거야. 지배와 복종이 주체적 매력과 유혹을 매개로 하지 않으면 지속성을 가질 수 없거든. 그러니 달콤한 승진을 약속하고,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고, 더 좋은 직업, 더 넓은 아파트를 약속해도.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일시적 매력, 유혹에 기반할 뿐이야. 그러니 하나같이 불안한 거야. 그래서 근대사회는 초기 설계부터 불안을 잉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해. 


그래서 현대인의 불안은 그런 점에서 구조적인 거야. 현대인의 불안은 정신과 치료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야. 구조가 불안을 야기하기 때문이야. 자본주의는 교묘하게 자신이 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감추거든. 괴물이 누군지 모르는 상황, 공포영화에서 괴물이 드러나기 직전의 상황이 바로 현대 자본주의 인거야. 





풍요로운 원시사회


실제로 원시사회의 주민들은 극단적인 전쟁상태, 극단적인 빈곤상태에 빠져 있지 않았어.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원시사회의 구성원들은 우리보다 일을 적게 하고, 심지어 영양상태도 풍부했다는 거야. 그리고 시간의 대부분을 놀고, 먹고, 전쟁을 준비하는 데 보냈다는 거지. 충분히 열심히 일을 해서 잉여를 축적하고, 권력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시사회는 서구사회와 달리 축제, 초대, 선물 등을 통해 과잉 생산된 잉여를 끊임없이 소비하는 방식 사회가 작동되었다는 거야. 


예를 들어 남아메리카의 농경민인 투피-과라니족의 사례를 들어보자. 이들은 게으름에 대해 프랑스인도 포르투갈인도 대단히 짜증을 냈다. 인디언들의 경제생활은 주로 농업에 기초하고, 여기에 사냥과 어로 그리고 채집이 병행되었다. 한 토지는 4~6년 동안 계속 경작된 뒤 폐기되었다. 그 이유는 지력이 고갈되었거나 아마도 개간한 토지에 제거하기 어려운 기생식물이 많이 자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노동이 요구되는 부분은 필요한 면적을 돌도끼와 불을 이용하여 개간하는 작업인데, 이는 남자들이 했다. 우기가 끝날 즈음에 이루어지는 이 작업에는 남자들이 1~2개월 정도 동원되었다. 농사의 나머지 부분, 씨 뿌리기, 제초하기, 추수하기는 거의 대부분 노동의 성별 분업에 따라 여자들이 했다. 그리하여 다음고 같은 행복한 결론이 도출된다. 즉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남자들은 4년마다 2달만을 일했던 것이다! ··(중략)·· 이러한 질적이면서도 인상적인 정보는 현재 진행 중인 연구를 포함한 최근의 연구와 명쾌하게 들어맞는다. 이에 따르면 칼라하리 사막의 수렵 채집민들도, 정착 농경민인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보통 하루의 평균 노동시간이 4시간을 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네수엘라 아마존 유역에 사는 야노마미 인디언들과 여러 해 동안 살아온 리조는 그 사회의 성인이 하루 노동하는 시간을 모든 활동을 포함하여 3시간을 약간 넘는 정도라는 것을 조사를 통해 밝혔다.  ··(중략)·· 그래서 우리는 생계경제가 전혀 비참한 생활 속에 놓여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시사회의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서 언제나 식량을 찾아다녀야만 하는 동물적인 상태에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매우 짧은 시간만 일하고서도 생존, 아니 그 이상을 확보하였다. 이것은 원시사회가, 원하기만 한다면, 물질적 재화의 생산을 늘리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상식적으로 그들 사회에서는 왜 하루 서너 시간의 활동만으로 집단의 필요가 충족되는 데 좀 더 많이 일해서 더 많이 생산하려고 하지 않는가? 

-피에르 끌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홉스가 가정한 원시사회의 이미지는 만들어진 이미지야. 서양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정치질서도 잡혀 있지 않고, 잉여도 없으며, 놀기만 하고, 적극적으로 생산에 참여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전쟁만 준비하는 사회로 보았던 것이 자기 사회를 정상, 진보된 것으로 규정하고 보니, 원시사회는 낙후된 사회, 퇴보된 사회로 이해하게 되는 거야. 서구중심적인 선입견으로 원시사회를 바라본 거야. 이러한 경향을 거의 모든 서구인, 그리고 근대화된 거의 모든 국가가 가지고 있는 데, 마르크스 또한 이러한 사고에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거든. 하지만 홉스의 기대와 달리 실제 원시사회는 극단적 전생의 상태도 아니고, 희소성이 지배하는 사회도 아니야. 그러면 이제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해! 왜 서구사회는 잉여의 축적을 통한 지배-피지배의 계급 관계가 만들어졌고 이와달리 원시사회는 만들어지지 않았는가 그러한 차이가 난 이유, 원인은 무엇인가! 따져봐야 하거든. 


우리는 국가가 막연히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거든. 하지만 도시상인, 시민, 유통업자의 입장에서는 중세적 통치질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있으면 최상의 결론에 도달한단 말이야. 즉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지만, 시민의 재산, 권력은 보호하는 장치를 만든다면 절대왕정이 계속 유지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야. 그것의 이름이 공화제가 되었거, 민주제가 되었건 큰 문제가 아닌 거지. 또한 한 사회에서 강력한 지배자로서 국가가 등장하려면 반드시 사회의 분화가 있어야 해! 


즉, 사회가 균질적인 집단이 아니라 이질적인 집단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거야. 그래야 지배-피지배, 명령-복종의 관계가 형성될 수 있잖아. 비슷한 권력, 부, 성격을 가진 집단은 상호 교류하지 지배-피지배 관계로 편입되지 않거든. 그러니 균질적인 집단에서는 국가가 탄생할 수 없어. 모두가 대등한 데 어떻게 국가가 탄생할 수 있겠니. 그러니 서구사회에서 국가는 이미 지배-복종의 권력관계, 사회적 분화를 전제하고 있는 거야. 국가는 합법적인 폭력을 독점하고 있잖아. 심지어 근대에 들어서면서, 복수(자력구제)가 금지되고 모든 처벌은 국가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거든. 국가를 제외한 시민들의 무장해제가 근대사회의 핵심적 지배질서거든.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근대사회의 정치질서야. 왜냐하면 세계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이기 때문이야. 하지만 원시사회는 충분한 잉여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회적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거든. 원시사회는 왜 강력한 지배자로서 국가가 등장하지 않았을까? 


부족은 어떤 형태로든 추장이 그의 기술적 한계(말솜씨와 사냥꾼으로서의 노하우)를 뛰어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우월한 기술적 능력이 정치적 권위로 전화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추장은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며 사회(권력의 진정한 장)가 그 자체로서 추장에 대해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추장이 이 관계를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뒤바꾸어 자신을 위해 사회를 봉사시키고 권력이라고 명명한 것을 부족에 대해 행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원시사회는 추장이 전제군주로 전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중략)·· 실제로 군사행동의 준비와 지휘는 추장이 최소한의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다. 단 이 권위는 오로지 그의 전사로서의 기술적 능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일단 행동이 끝나면 전투의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전쟁의 추장은 권력을 지니지 못한 추장으로 되돌아가고 어떤 경우에도 승리함으로써 생신 위신이 권위로 전화되지 않는다. 

-피에르 끌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원시사회란 무엇인가? 원시 사회는 모두 동일한 원심적 논에 의해 지배받는 비분화된 공동체들의 다수성이다. 어떤 제도가 그러한 논리의 항성을 표현하고 또 보장해 줄까? 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전쟁은 공동체들 사이의 관계의 진리이고, 통합화의 구심적 힘에 대항하여 분산의 원심적 힘을 발산시키는 주된 사회학적 수단이다. 전쟁 기계는 사회 기계의 동력이고, 원시 사회의 존재는 완전히 전쟁에 기초하고 있으며, 원시 사회는 전쟁 없이 지속될 수 없다. 전쟁이 더 많을수록 통합화는 반대로 적어진다. 국가(강력한 지배자, 일자)의 가장 강력한 적은 전쟁이다. 전쟁을 위한 사회로서의 원시 사회는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이다. 

-피에르 끌라스트르 <폭력의 고고학>


위의 끌라스트르의 분석에서 보듯이 원시사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달라. 이들에게 중심은 없거든. 추장은 중심인 것처럼 보이나 사회를 위해서, 오로지 희생하는 역할만 하거든. 심지어 부족원이 추장에게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마음대로 가져가기도 하고, 부족원끼리의 충돌이 있으면 둘을 화해시키는 중재자의 역할을 해! 이 역할은 힘과 권위로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말을 통해서 둘을 설득시키는 거야. 원시사회 구성원들은 상호 신뢰에 기반해 있고, 또 빈곤의 상태에서도 풍부하게 생활하도록 하는 것은 결국 사회관계의 투명성과 상호부조야. 그것은 자연, 토지, 도구 또는 '노동'의 생산물 등에 대한 그 어떠한 독점도, 자유로운 교환을 저지한다든가, 희소성을 만들어낸다든가,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 전쟁기계인 전사는 이러한 독점적인 권력이 생성되는 것에 저항하는 거야. 이들 사회는 전쟁을 매개로 작동하는 데, 전쟁이 바로 강력한 권력의 출현을 막기 때문이야. 


원시사회에서 전사는 전쟁기계인 데, 이것을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사람으로 떠올려서는 안 돼! 1,2차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을 일으킨 독재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야. 앞에서도 말했지만 기계는 투입과 산출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장치, 구조잖아. 원시사회의 전쟁기계는 사회의 분화, 잉여, 계급, 계층 등이 전쟁기계에 들어가면 잉여의 소비, 다수성 등으로 산출되는 기계야. 전쟁은 내부적으로 잉여를 토대로 자신의 욕망을 공동체 내에서 실현하는 강력한 권력자의 출현을 막고, 동시에 외부세계에 대해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동질성, 균질성,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하는 거야. 원시사회의 전사들은 최소한의 일을 하고, 많은 시간을 여가와 전쟁준비에 몰두하거든. 원시사회가 그들의 질서, 사회를 유지하는 방식이 바로 전쟁이야. 전쟁은 이들의 존재 방식인 거지.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이들에게 전쟁은 부조리에 대한 무조건적 저항인 거야. 





자본주의에 저항하기


원시사회는 신앙도, 법도, 왕도 없는 진화가 덜된 동물 사회가 아니야. 정치 질서도 없고 동물적 본능으로 작동되는 사회가 아니야. 이들의 전쟁은 식량을 얻고 생존을 위한 동물적 본성이 아니야. 원시사회의 전쟁은 모든 지배권력에 저항하는 거야. 그것은 사회를 균질하게 유지함으로써 유지되는 거야. 이들은 충분한 여가시간이 있으며, 자신의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고, 노동은 하루에 3~4시간이면 충분하고, 빈곤과는 거리가 먼 삶을 모든 구성원들이 대등하게 누리는 사회야. 이러한 사회가 유지되는 이유는 다수성을 띤 정치권력, 전쟁기계로서 전사가 경제권력, 잉여의 산출, 과잉생산을 통제하면서 일자(강력한 지배자)로서의 국가를 거부하면서 유지되는 거야. 원시사회의 정치권력은 다수성을 띤 구성원, 전사들이 전쟁을 매개로 부족의 계급 분화, 계층 분화를 막고 다른 부족과 전쟁을 벌이면서 자기 부족의 동일성을 강력하게 유지하면서, 다양한 원시사회가 공존하게 되는 거야. 그래서 원시사회는 국가 없는 사회 혹은 국가에 저항하는 사회가 된 거야. 


반면 국가를 만들어낸 사회는 정치권력이 경제권력에 포섭당한 거야. 사회의 분화를 막지 못했고, 분화의 결과 계층-계급이 생기고 지배-피지배 관계가 형성된 거지. 더군다나 경제권력은 지식, 생명, 안전, 건강 등의 담론을 통해서 미시적으로 세계를 통제하고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만들거든. 이제 세계는 강력한 통제의 국가로 넘어가고 있어.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어마어마한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분석하고 통계를 내서, 내 일상을 나도 모르게 관리하는 영역으로 미시적 권력이 작동하거든. 


끊임없는 불안을 자극하는 사회, 전쟁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회, 뉴스만 보면 세상의 온갖 일들이 실시간으로 방송되는 과잉 공포의 사회가 시물라시옹으로 우리에게 던져져 있거든. 우리는 지배자가 없는 사회에 대한 공포가 너무 큰 거야. 주인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며 낑낑거리는 개마냥, 노예가 해방되어도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노예마냥, 우리는 살아왔거든. '삼성이 망하면, 전쟁이 나면'이라는 말로 매번 공포를 극대화하면서 권력자들은 자신의 지배력을 정당화하거든. 혹은 각종 민주적 절차를 통해서 정당하게 선출된 권력이라고 하지만 이미 다 짜여있는 스토리 데로 흘러가고, 설계된 그들의 계획과 전망 아래 적절히 통제된 상태에서 타율적 복종을 마치 주체적 복종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현대 정치학이야. 


따라서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우리의 첫 번째 방법이 앞에서도 언급한 감각하라!에 따라 우선적으로 개인은 각자의 감각에서 미시적 전투를 벌여야 해!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대상화하는 것은 나의 신체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내 신체의 감각이야. 저항의 구체적 방법은 내 신체와 감각을 내 의지에 따라 재구성하는 거야. 설령 내가 지금 느끼는 감각이 자본주의가 부여하는 감각인지 아니면 실제 내가 느끼는 감각인지 애매하다고 해서 갈등할 필요 없어. 마음 가는 데로, 그냥 내가 느끼는 그 감각을 언어화하고, 개념화하는 연습이 필요해. 


두 번째 방법은 중앙에 저항하라야. 앞에서는 '투사하라!'고 말했거든. 그것은 반드시 새로운 정치 질서, 새로운 정치학으로 나타나야 하는 거야. 지배와 복종의 항구성에 기대는 정치학이 아니라 언제든지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바뀌고 다른 방식으로 구조화될 수 있도록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거든. '투사'는 권력관계의 항구성에 저항해야 해! 권력이 한 곳에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은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거든. 권력이 영원하다고 믿는 순간, 권력이 짜 놓은 질서 안에서 주체는 도구적 이성, 주관적 이성을 발휘해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살아갈 길을 모색한단 말이야. 그러니 권력의 항구성을 믿으면 안 돼! 권력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거야. 사랑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말이야. 


인간이 필요 이상으로 노동하는 것은 언제나 강제에 의해서야! 나머지 시간은 자신의 창의적인 시간으로 쓰고자 하거든. 그런데 그러한 강제는 원시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아. 이러한 외부적인 강제가 없다는 것이 원시사회의 본질이야. 원시사회에서 전쟁은 이러한 외부적 강제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거야. 자본주의 사회는 이러한 외부적 강제를 마치 주체적인 지배, 혹은 주체적인 복종으로 착각하도록 만드는 사회야. '풍요'의 논리로 끊임없는 '결핍'을 만들거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절대적 권력자로서 화폐, 하나의 일자로서 국가를 제거하는 것, 다수성의 사회에서 일자로서의 권력을 제거하는 것이 저항의 기본적인 출발점이야. 

세계의 모든 존재는 하나의 원운동적 존재야. 이들은 매력과 유혹으로 타자를 끌어당기거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원의 중앙은 자본이야. 이 자본은 모든 것을 끌어당기거든. 자본은 획일화, 균질화시키면서 동시에 순위를 매기는 거야. 이 원심력은 자본에 포섭되지 않는 나만의 욕망, 세계에 대한 나의 기획, 사유에 의해서 결정되거든. 이 세계가 유지되는 것은 자본의 매력과 유혹에 대중이 끌려들어간 지점에서 원운동이 일어나거든. 자본의 구심력과 대중의 원심력이 일치하는 지점에서 이 세계가 유지되는 거야. 그러니 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분이 분명히 있는거야. 자본의 논리인 표면적 심연과 초월적 환상에 복종하면 할수록 이 원은 점점 더 커질거야. 이것에 벗어나는 것은 원을 이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원을 더 강하게 만드는 것! 새로운 중심을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해! 다중성!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각자의 매력과 유혹으로, 각자의 끌림과 끌어당김을 산출해야 하는 거야. 


자본주의 사회는 하나의 일자, 최종의 절대적 권력자로서 국가인 1과 균질적 다수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것은 1+1/n의 모양을 띠는 데, 균질성이 커질수록, 즉 n이 커질수록 국가인 1에 수렴하는 구조를 띠고 있어. 그래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국가, 화폐, 자본에 수렴하는 사회야. 그래서 일자의 권력에 저항하는 것은 다른 방법을 띠어야 하는 데, 나 스스로 감각하고 세계에 나 자신을 투사하는 것은 다수성 n에서 절대적 권력으로 상징되는 국가, 일자를 제거하는 방향이 되어야 해. 따라서 저항은 n-1로 모양이 되어야 해! 국가 없는 사회, 국가에 저항하는 사회, 중앙을 배제하는 사회의 이념은 n-1이 되어야 하는 거야. 


하지만 이것은 배제의 논리거든. '일자' 절대적 권력을 제거한 n은 복잡성, 다수성에 불과해. 그것은 아무런 이유 없이 모인 지하철 승객들과 같은 거야. 이들은 그 어떠한 연대성도 없거든. 이들에게는 관계의 단절이 있는 거야. 그러니 이들을 엮는 하나의 이념이 필요해. 그래서 구체적 실천은 n+1의 모습이 되어야 해! 다수성이 그냥 다수성이 아니라 하나의 일자를 산출하는 혹은 하나의 이념에 산출하는 것으로서의 사회야. 이것은 수많은 충돌에서 하나의 이념, 하나의 방향, 하나의 사유를 만들어 내는 거야. 그것은 일자에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성의 세계, 즉 n에 포함되는 1이야. 원시사회가 전쟁을 통해서 내부의 권력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외부의 적과 싸울 때, 사회의 통일성, 독립성, 개체의 자율성이 유지되는 것처럼 n+1에서 1은 n을 묶어주는 구심력으로 작용해. 또한 각자에게 각자의 일자, 중심이 있는 거야. 하지만 1은 n에 더해져 있는 1이지 항상 주도권은 n에 있는 거야. 겉으로 보기에 1이 주도권을 갖는 것처럼 보일 뿐이야. 원시사회에서 추장이 자신의 욕망을 사회에 투사하는 순간 추장이 축출되는 것처럼, 1은 사회의 통일성과 독립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고, 이것은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어. 다중성으로서의 1은 때로는 올림픽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적폐청산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경제가 될 수도 있지만 1이 없는 사회는 정치가 실종된 사회고 다수성이 독립성을 띄지 못하는 파편화된 사회에 불과한 거야. 


우리 개별 인간도 마찬가지야. n-1로 구성된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 방향성이 없어. 1+1/n으로 구성된 사람은 자신의 모든 다양성을 하나의 가치, 하나의 꿈에 모든 것을 투사하는 거야. 예를 들온 돈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은 다양한 경험, 체험, 느낌, 지식 등을 돈으로만 연결시키거든. 이들은 편집증 환자가 되는 거야. 반면 n+1은 수많은 다양성 속에서 방향성에 해당하는 1을, 이념을 가지고 있어. 이들은 1에 환원되지 않지만, 다양한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리지는 않거든. 


이제 우리는 일자의 시대인 중세를 넘어갈 교두보를 마련한 거야. 아직 신이 죽었다는 소릴 듣지 못한 모든 사람에게 신이 죽었구나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 진보적 인간이 더 많이 탄생하는 것, 각자의 삶에서 전사가 되는 것. 이 중세를 탈출하는 길은 바로 전쟁기계가 되는 거지. 전사, 혁명가, 선동가 되는 거야. 수많은 선동가가 영구적 지배체제에 의문을 품고 이것에 저항할 때. 비로소 해방으로서의 근대, 해방을 실현하는 것으로서의 진정한 민주주의가 도래하거든. 구호로서, 말로서의 민주주의는 도래했을 지언정, 진정한 민주주의는 단 한 번도 도래한 적이 없거든. 지금 최첨단을 달리는 21세기에도 말이야. 



그러니 철학하기는 다시 한번 민주주의를 고민해야 돼! 진정한 '민'이 주인이 되는 길은 어떤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진정한 민주주의에 도달할 수 있는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정치구조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가를 사유해야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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