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적 전투
자본주의가 개인, 주체를 포섭하는 2가지 방식은 초월적 환상과 표면적 심연이야. 우선적으로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표면적 심연의 영향을 받아. 태어나서부터 온갖 자극에 노출되고 그 자극을 통해서 성장하거든. 어려서부터 자본주의를 내면화할 조건이 잘 갖추어진 거야. 표면적 심연은 우리의 감각, 감성, 쾌락, 쾌감에 작동해! 모든 감각을 자본주의가 원하는 방향으로 길들이고 익숙하게 만들거든. 그런데 감각은 역치가 있기 때문에 익숙한 자극에 더 이상 반응하지 않거든. 사람들은 여기서 도약을 모색한단 말이야. 도약은 또 다른 재미있는 게임, TV, 스포츠로 가는 것과 같은 수평적 이동을 하는 것이 하나 있고, 전혀 다른 범주와 차원으로 넘어서는 수직적 이동이 있어. 게임을 하다 지루하면 TV를 보잖아. 이러한 이동은 수평적 이동이야. 게임을 하고, TV를 봐도 재미가 없어서 전혀 다른 차원의 재미를 찾는 것, 예를 들면 운동을 한다거나, 공부를 한다거나 하는 것은 수직적 이동이야.
그 도약 중 하나가 초월적 환상으로 나타나. 초월적 환상은 더 발전하는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취를 이루는 것으로 나타나. 여기에서 이성이 작동하거든. 현실을 파악하고, 분석해서, 종합한 다음 자기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거잖아. 그러니 초월적 환상은 인간 이성의 실현이야. 매일 게임만 하던 아이가, 정신을 차리고 갑자기 갑자기 공부를 시작하고, 대학에 가고, 자신의 꿈을 이루려고 노력해. 바로 초월적 이성이 작동하는 거지. 그런데 인간이 현실을 초월하려는 욕구가 자본의 논리에 포섭되면서 초월적 이성이 초월적 환상이 되는 거야. 그러니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자본주의가 개인을 통제하는 '초월적 환상과 표면적 심연' 두 가지 방식을 초월할 수 있는가라는 거야.
'철학하기'는 의심을 통해서 현실을 초월하는 용기 있는 실천을 하는 거야.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표면적 심연과 초월적 환상을 넘어설 가능성을 탐구하고 실천해야 하거든. 그래서 이 시스템에 대해서 의심을 해봐야 하는 거야. 첫째, 두 가지 장치에 포획되지 않고 욕구 욕망의 실현이 가능한가? 둘째, 포획되었다고 하면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는가? 셋째, 빠져나왔을 때 우리는 삶의 모습은 어떤 방향,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
첫 번째 질문은 인간에 대한 물음이야. 자본주의에서 포획되지 않는 인간의 본질적 지점이 어딘지 탐구해볼 거야. 존재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어. 두 번째 질문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구조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의 문제야. 실천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어. 세 번째 질문은 자본주의 구조가 아닌 다른 구조를 우리는 상상해 낼 수 있는가의 문제야. 정치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어. 어떻게 세계를 구성하고, 그 세계는 지금과는 어떤 점에서 다르고, 어떤 다른 형식으로 구성되어야 하는 가에 대해 탐구해 볼 거야.
도시상인, 유통업자들로 촉발된 자본주의는 세계를 자신들의 지식 체계로 촘촘하게 채워 두었어. 이들이 만든 세계는 합리성, 효율성, 과학의 이름으로 도처에 퍼져나갔거든. 그리고 이들의 지식은 현실을 변혁하는 구체적 힘으로 다가왔거든. 그래서 자본주의는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하게 매력적이야. 이들은 절대군주처럼 강력한 힘으로 통치하지 않아. 미시적인 권력, 합리적 지식을 작동시켜서 통제하거든. 이들이 통제하고자 하는 대상은 우리의 감각이야. 새로운 맛, 새로운 느낌, 새로운 시각적 자극을 통해서 우리의 감각을 자신들이 제공한 감각으로 채우려고 하거든.
그들이 우리를 대상화하는 방법은 우리를 소비의 주체로 만드는 거야. 소비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상품의 소비를 통해서 우리의 감각이 요구하는 것을 모두 채우도록 하는 것. 더 이상 자본이 제공해주는 감각 이외의 것을 욕구, 욕망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이들의 전략이거든. 우리는 이들 앞에 던져진 존재야. 자본의 질서에서 우리는 소비하는 주체가 되어야 해. 그것이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본질이거든. 서양 근대철학은 본질, 진리에 대한 탐구야. 본질을 알면 그 본질에 맞게 살아가면 되거든. 인간의 문제는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생긴다는 거야.
여하튼 학생이면 학생이 해야 할 본질, 부모면 부모가 해야 할 본질을 잘 알아야 한다는 거지. 본질을 잘 알면 그 방향에 따라 열심히 노력하면 되잖아. 그래서 서양은 인간 본질에 대해서 자꾸 묻는 거야. 생각하는 인간, 도구적 인간, 언어적 인간, 놀이하는 인간을 설명하며, 유적 존재로서 인간을 규정하려고 하거든. 하지만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구체적인 인간을 추상적 인간, 보편적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거든. 개개의 고유한 인간의 삶이 탈색되어 하나의 표준화된 인간으로 환원되어버리는 거지.
사르트르가 말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어려운 말이 아니야.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든, 본질로 규정된 인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내 앞에 있는 구체적인 인간, 구체적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거야. 그래서 실존은 어려운 말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인간'이라는 뜻이야. '실존적 문제'는 '현실을 살아가는 구체적 인간이 부딪친 구체적 문제'라는 뜻이야. 고3 학생에게 실존적 문제는 어떻게 하면 수능을 잘 볼까이고, 변비 환자에게 실존적 문제는 지금 당장 똥을 시원하게 싸는 거야. 그러니 아무리 인간의 본질을 이야기해봤자. 본질을 알고 이해하고 실천한다고 해서 지금 당장의 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닌 거야. 즉 인간의 본질을 '이성적 존재'라고 규정한다고 해서 나에거 어떤 도움이 돼냐는 거지. 그래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이야기한 거야.
다른 이야기를 해볼게. 의자의 본질은 앉기 위한 것이고, 컵의 본질은 물, 술, 음료수 등을 마시기 위한 거야. 그러나 집에 강도가 들어서 나에게 위협을 가할 때, 마침 옆에 의자가 있어서 의자를 집어던지고, 컵을 던져서 강도를 내쫓을 때, 그 의자, 컵의 본질이 중요할까! 우리는 본질을 탐구하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지금 이 순간에 어떤 의미, 용도, 쓰임 인가야.
본질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야. 본질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실존도 중요하다는 거야. 사르트르는 전쟁을 경험하면서 본질에 대한 논의가 허무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 인간 본질을 아무리 이야기해봐야. 전쟁의 공포, 빈곤의 아픔 속에서 무의미하다는 거지.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실존적 주체로서 우리를 다시 재규정하는 것이 필요한 거지. 구체적인 내 문제를 보다 면밀하게 관찰해야 한다는 거야. 이제 구체적인 우리의 문제를 생각해보자고, 우리는 성적을 올리고 싶고, 행복하게 살고, 멋진 자동차를 사고 싶고, 더 큰 아파트를 사고 싶어 해! 우리가 지금 부딪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학원을 다니고, 여행을 다니고, 일을 더 많이 하거든. 성적을 올리고, 행복하게 살고, 멋진 자동차를 몰고 싶은 욕구 욕망을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니야.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아쉬운 것을 하고자 하는 욕구, 욕망을 나쁘다고 한다면 세상에 좋은 사람 아무도 없을 거야. 테레사 수녀, 이태석 신부, 스티브 잡스 등 모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한 거야. 그러니 우리는 자신의 욕구나 욕망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절대 나쁘지 않고, 그 자체는 순수한 거야. 물론 자신의 욕구,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타인에 해를 가하거나. 부도덕한 방법을 사용하는 등 사회가 요구하는 수준 이상을 넘어서면 문제가 되겠지. 하지만 사자가 정글에서 사냥을 통해 배를 채우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어떤 상황, 조건에서든 자신의 욕구,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부도덕한 것이 아니야. 그것은 자연스러운 거야.
그러니 이제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해!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의 욕구, 욕망이 어디에서 문제를 야기하는지, 그 구체적 지점을 찾아야 하거든. 그러면 우리가 욕구,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①배가 고프다(결핍, 감각) ②어떻게 해결할까(사고, 사유, 선택) ③이렇게 하자(실천, 구체적 행동) ④배부르다(만족, 결핍의 해소, 욕구의 충족)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에서 보듯이 인간의 욕구는 필요를 충족시키는 영역이 가장 기본이야. 생리적 욕구야. 배고픔, 잠, 성욕 등이 생리적 욕구에 해당되지. 이 생리적 욕구는 동물로서의 욕구야. 물론 인간은 이것 또한 스스로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어. 생리적 욕구는 필요에 대한 충족의 욕구야. 나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우리는, 요구하거든. 욕구를 사회 속에서 언어화하는 과정이야. '엄마 밥 줘. 치킨 시켜먹자'와 같은 언어로 표현되는 거야. 이렇게 요구를 하고, 요구를 달성시키거든. 하지만 우리가 요구한 것이 모두 해소되지 않아. 이것은 나의 욕구를 정확하게 만족시키는 요구가 근원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야. 우리의 욕구를 명확하게 언어화할 수 없거든. 따라서 우리는 요구를 통해서 욕구가 항상 충족되지 않는 데 그 나머지가 욕망이야. 즉 욕구-요구=욕망이 되는 거야. 예를 들어 야식을 먹고 싶어서 치킨, 족발, 피자 중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하나를 시켜 먹어도 아쉬운 느낌이 날 때, 막상 무엇인가를 이루었지만 여전히 아쉬운 느낌이 날 때 우리의 욕망은 결핍감을 느끼거든.
하지만 인간에게는 생리적 욕구만 있는 것이 아니거든. 사회적 욕구가 있단 말이야.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 사회에서 자기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거든. 생리적 욕구는 나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형성되고 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일을 하고, 돈을 벌지만 사회적 욕구는 나 자신의 필요를 넘어서거든. 즉 당장 필요하지 않지만 우리는 사회적 욕구를 가지게 되는 거야. 따라서 사회적 욕구의 경우는 결핍의 근원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욕망을 매개해주는 것에 있거든.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시물라시옹은 욕망의 매개자로 작동하는 거야.
이제 욕망은 교환가치-사용가치=욕망으로 바뀌는 거지. 명품백의 사용가치는 모조품과 같지만, 명품백의 교환가치는 훨씬 크거든. 모조품보다 진품이 훨씬 비싸다는 거야. 현대인의 욕망은 결핍의 크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교환가치의 크기 결정되는 거야. 하지만 이 교환가치의 크기는 시대, 문화, 사회적 조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누가 어떻게 이 교환가치를 결정하느냐에 따라 나의 욕망의 크기가 결정되는 거야. 이제 경제학은 필요, 희소성의 문제가 아니야. 오히려 경제학이 '필요와 희소성'을 논하는 것은 하나의 신화인데 자본주의는 자신의 경제학을 위해서 이 '필요와 희소성'을 요청하거든. 그들의 경제학은 마치 필요와 희소성을 해결해주는 장치로 자본주의를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동한다는 뜻이야.
하지만 우리는 필요와 희소성이 없어도 욕망하거든. 욕망은 인간의 사회적인 욕구 그리고 자본주의를 설계한 사람들로 인해 끊임없이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야. 자본주의 사회의 시물라시옹은 우리의 욕구가 필요를 충족했음에도 끊임없이 결핍감, 희소성을 느끼도록 만들거든. 끊임없이 소비하도록 부추긴다는 뜻이야. 소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만든다는 거지. 이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욕망을 부추기는 거야. 욕망을 부추기는 바로 그 지점, 매개된 욕망이 향하는 바로 그곳은 우리의 몸, 우리의 감각이야.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우리의 신체와 감각을 속이는 것으로 작동하는 그 최종적인 지점은 우리의 몸, 감각이야.
이들은 나 자신의 감각이 필요가 모두 충족되었음에도 결핍감을 느끼도록 만들 거든. 이것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 구조화되어 있거든. 어마어마한 상품의 덩어리에서, 자동차, 화장품, 명품가방에서 우리는 결핍감을 느끼도록 구조화된 시물라시옹에서 살아가는 거야. 내 감각의 실재로부터 분열되어 충분함에도 결핍감을 느끼도록 하는 자본주의적 습관, 아비투스를 만든단 말이야. 그들은 광고로, 교육으로, 과학으로 우리의 감각을 끊임없이 길들이고 자극하거든. 그래서 지름신을 영접하게 하는 거지.
1,2차 세계대전에서 사람들이 부딪치는 실존적 문제는 생존, 안전이야. 이제 사람들은 생존, 안전에 대한 욕구, 욕망을 채웠거든. 시대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면서 사람들의 욕구, 욕망도 변하는 거야. 이제 폭력이 지배하는 시대가 아니고, 합리성이 지배하는 시대인 거야.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해.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결핍감을 느끼거든. 그러니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존적 문제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는 거야. 현대인의 실존적 문제는 결핍이야. 이것은 환상통과 같은 거야. 팔이 잘려나가 팔이 없음에도 팔의 아픈 감각이 나를 지배하는 거지. 없음에도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들의 전략은 과거를 끊임없이 결핍으로 채우는 거야. 이들의 전략은 과거형이야.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결핍감을 느끼게 하고, 내가 살아왔던 과거를 끊임없이 형편없게 만드는 것. 지금 나 자신이 풍요롭고 충만한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가 결핍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느끼도록 만들지. 그래서 지금 욕구를 충족시키고,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거든. 하지만 우리가 달성해야 할 미래는 이미 자본주의가 만든 시물라시옹의 구조 속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거든. 이미 예측 가능한 구조 속에서 특정한 테크를 타는 거야. 초등에는 무엇을 하고, 중등, 고등은 어디에 진학해서 대학에서는 무엇을 선택하고, 직업은 무엇을 선택하는 등에 인간에 대한 테크트리가 구조화되어 있지. 이것을 내면화하지 못하면 우리 아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러한 테크트리가 마치 사회의 주류에 편입되는 길이라고 여기고 자신의 자율적 선택, 내 욕구, 욕망의 자율적 실현이라고 생각하거든. 하지만 특목고, 자사고를 가고, sky를 가고, 대기업에 취직을 하는 표준화된 삶에 들어가든 아니든 이 구조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어.
그 불안이 우리에게 가면을 쓰게 하거든. 사회가 요구하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거지. 자기기만을 하는 거야. 가면으로 살아가는 나, 연기하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나, 바로 여기에서 현대적 질병인 정신분열증이 탄생하는 거야. 연기하는 나와 실재의 나 사이에서 오는 불일치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바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야. 따라서 이 불일치로 인한 결핍을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소비로 메우도록 하고, 주체의 항구적 분열을 일시적 분열로 착각하도록 하는 '연기하는 나'로 만들거든. 소비를 통해서 주체는 잠깐 동안 분열이 아니라 통일적 주체가 되는 거야. 지름신을 영접하는 그 순간, 일시적인 주인공이 되는 거지.
짜여 있는 구조 속에서 나의 좌표는, 결핍되고 완성되지 못한 어딘가에 위치한 것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것. '초월적 환상'은 나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부족한 존재로 이성적으로 '인지'하게 만들고, '표면적 심연'은 이 구조를 확실한 것, 벗어날 수 없는 것, 당연한 것으로 '감각'하게 만들거든. 그러니 최초의 저항은 이 모든 것을 '무화(無化)'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야! '초월적 환상'과 '표면적 심연'이 만들어 놓은 욕구, 욕망이 아니라 진짜 나는 결핍된 존재인가? 진짜 나의 욕망은 달성될 수 없는가? 인간의 결핍은 진짜 문제인가? 자원의 희소성이 진짜 문제인가? 명품을 사지 않으면, 넓은 아파트에 살지 않으면, 값비싼 자동차를 사지 않으면,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나의 욕구,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는지 물어야 하는 거야.
단언컨대 우리 인간은 절대 결핍된 존재가 아니야. 세계의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풍요로운 존재야. 이들의 전략이 먹히려면 우선 인간을 결핍된 존재, 부족한 존재로 설정하고 자신들이 만든 상품을 소비할 때, 결핍을 채울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거든. 인간을 항구적 결핍의 상태로 놓아야지만, 자신들이 의도한 소비가 일어나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것은 '시물라시옹'에 불과해! 인간의 역사에서 결핍은 예외적인 현상이고, 극단적 상황일 뿐이야. 자본주의를 촉발했던 유태인, 유통업자, 도시상인의 절망적 상황, 결핍에 대한 예민함을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우리가 받아들인 거야.
살린스에 의하면 수렵-채집자들은 절대적 '빈곤함'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풍부함을 알고 있어다. 미개인들은 어떠한 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그것들을 차차 버리면서 더 좋은 곳으로 이동해간다. 생산장치도 '노동'도 없다. 그들은 말하자면 '여유가 있을 때' 수렵하고 채집하며, 손에 넣은 모든 것을 서로 나누어가진다. 그들의 낭비는 완전하다. 그들은 경제적 계산도 저장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단번에 소비한다. 수렵-채취 생활자는 부르주아가 발명한 호모 에코노미쿠스와는 완전히 무관하며, 경제학의 기초도 전혀 모른다. 그는 항상 인간의 에너지, 자연자원 그리고 효과적인 절약 가능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잠을 많이 자며, 자연자원의 풍부함을 믿는다. 이것이 미개인의 경제체계의 특징이다. 미개 사회의 특징인 집단 전체로서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음'과 '낭비성'은 진정한 풍부함의 표시이다. 우리는 풍부함의 기호만 가지고 있다. 우리는 거대한 생산기구를 통해, 빈곤과 희소성의 기호를 쫓아낸다. 그러나 살린스도 말한 바와 같이 빈곤은 재화의 양이 적은 데 있지 않으며, 또 단순히 목적과 수단의 관계에도 있지 않다. 빈곤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인간의 관계이다.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맬서스의 인구론, 희소성의 경제이론, 에너지 위기와 같은 결핍에 기반한 이론들은 인간에게 공포감을 심어주면서 인간을 항구적 결핍의 상태로 만들거든. 하지만 원시인들은 수렵하고 채집을 통해서 사냥을 하면 부족이 모두 골고루 나누거든. 에스키모인들이 고래를 사냥하고 나면, 하나도 남김없이 공평하게 나누는 것처럼 말이야. 이들의 경제는 공유경제라고 생각하면 돼. 누군가 사냥을 통해서 사슴을 잡으면 우리에게 '사슴'이 있다야. 누군가 컴퓨터를 발견해서 주우면, 이들은 우리에게 컴퓨터가 있다를 떠올려. 하지만 자본주의 문화에 사는 우리들은 쟤는 사슴이 있지만 나는 없다, 쟤는 컴퓨터가 있지만 나는 없다를 떠올리거든. 그러니 이들의 사회구조는 소유에 대한 관념이 완전히 다른 거야.
인간 사회의 기원이 되는 원형적 모습의 대부분은 거의 대부분 공유경제의 형태를 띠는 데, 그 이유는 사회의 풍요와 낭비스러운 삶을 가능하게 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야. 과거에 옆집 숟가락 숫자까지 알았던 것처럼 이들 사회가 빈곤에도 불구하고 풍요로울 수 있는 이유는 관계의 투명성, 사회의 투명성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거든. 원시사회와 자본주의의 비교를 통해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진짜 결핍되어 있냐는 거지?
우리의 일상에서 결핍은 항상 일시적이야. 우리가 하루에 배가 고픈 시간이 얼마나 되니? 기껏해야 2~3 시간, 아이들은 배고프면 울잖아. 이들은 말을 하지 못해. 이들의 울음을 밥을 달라거나, 똥을 치워달라거나, 잠이 온다는 신호, 놀아달라는 기호이거든. 아기가 울더라도 기껏해야 1~2시간이야. 이것저것 해주다 보면 지치고 힘들지 하지만 이들의 결핍은 한두 시간이면 채워진단다. 우리의 삶의 수많은 시간 중에서 이 결핍된 상태와 결핍이 해소된 상태 중에서 어떤 시간이 더 많을까? 극단적인 상황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에겐 결핍이 해소된 상태가 더 길거든. 아이들 밥만 먹여놓으면 얼마나 잘 노니? 전쟁 중에도 아이들은 태어나고, 웃고 떠들고 즐기거든.
자본주의는 '결핍이 해소된 시간'을 '불안의 시간, 공포의 시간'으로 채우는 거야. 이 시간에 공부해야, 일을 해야, 다가올 결핍을 향해서 내 모든 '풍요로운 시간'을 쏟아붓게 만들 거든. 인간을 항구적 불안에 떨도록 만드는 것. 나에게 주어진 풍요로운 시간을 마음껏 '낭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이들의 전략에 이기기 위해서는 내 몸에서 벌어지는 미시적 전투에서 승리해야 하는 거야. 그래서 철학하기는 내가 처한 불안, 결핍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해! 나의 불안, 공포가 어디에서 기원하는지 실존적 마주섬이 필요한거야.
우리는 삶에는 항상 '풍요로운 시간’이 있거든. 그것을 지금은 없는 것으로 만드는 전략, 혹은 과거에만 있었거나, 앞으로 미래에만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모든 철학과 이론에 저항해야 해! 풍요로움은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야. 다만 그것을 끊임없이 유예하고 독점하려는 세력들이 있는 거지. 그들은 권력, 법, 지식을 활용해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만들어. 너무나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어서 저항하기 힘들고, 또 너무나 어려서부터 익숙해져 왔기 때문에 마치 진실인 것처럼 여겨지는 거야.
그래서 철학하기는 내 삶의 풍요로운 시간을 긍정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