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신화
고양이나 개를 키워보면 아무리 먹을 것을 많이 줘도 남겨, 물론 예외도 있지만 말이야. 사자는 배가 터질 때까지 먹지 않거든. 이들은 배가 부르면 먹지 않아. 하지만 비만환자인 우리는 배고픔이라는 결핍감이 사라졌음에도 왜 더 먹을까? 먹는 것 자체를 욕망하기 때문이야. 생존, 경제활동에 필요한 부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탐욕을 부릴까? 부를 모으는 것 자체를 욕망하기 때문이야. 우리 인간은 필요의 충족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야. 이미 인간은 필요와 상관없이 ‘욕망하는 기계’야. 이것은 비만과 자본가만 보아도 알 수 있거든. 이들은 필요를 충족시켰지만 그것 이상을 욕망하잖아.
우리는 배가 고픈 순간에도 '밥 먹고 뭐할까'를 생각하지. 밥 먹는 것만을 생각하지 않는 단다. 인간은 어느 순간에도 결핍되어 있지 않아. 결핍은 극히 예외적 순간이야. 그럼에도 우리 인간은 불안에 떨거든. 내가 얻은 충만함을 누가 뺏어가지는 않을까? 폭력, 힘, 전쟁으로 뺏어가지는 않을까 걱정하거든. 더군다나 나를 괴롭히는 이들은 나와 말도 통하지 않고, 낯설고 이해도 되지 않아. 어느 순간 갑자기 들이닥친 폭력배,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하는 자연재해, 나의 '풍요로운 시간'을 빼앗아갈지 모르는 존재들이 있기 때문에 '타자의 출현'은 결핍에 대한 공포를 다시 한번 야기하거든.
타자는 이 모든 것을 한순간에 앗아가 버릴 수 있는 거야. 이것은 도시상인, 유통업자가 절대군주를 싫어하는 것과 같아. 열심히 노력한 모든 결과물을 뺏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 공포감이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개인에게 내면화된 논리거든. 타자를 폭력적 존재로 그려두는 것. 우리의 외부에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낯선 타자를 그려두는 것. 자본가들은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이들은 우리에게 항상 낯선 타자를 상기시키도록 연습 훈련시키는 거야.
유럽인들이 느끼는 칭기즈칸의 이미지, 미국인들이 느끼는 인디언의 공포스러운 이미지, 우리가 중국, 일본을 폄훼할 때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바로 타자의 이미지야. 나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낯선 것, 이해도 되지 않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핍은 바로 타자야. 결핍은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고, 불안, 공포에 빠지게 만들거든 그러니 우리는 이 타자를 제거해야 해! 질병 또한 타자야. 박테리아, 곰팡이, 바이러스로부터 우리를 지키려면 항균, 멸균 시스템을 갖추어야 하거든. 게으름, 산만함 또한 타자야 일상적인 삶, 성실한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하거든. 영화를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외계인이 침공해. 이들은 누구인지도,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도 몰라. 우리와 공감하고 소통할 수 없거든. 이러한 외계인이 타자야. 마블 영화를 보면 도시를 파괴하는 악당이 존재하잖아. 이들이 바로 타자야. 타자는 적으로 등장해.
주체는 자기의식을 통해서 이념을 형성하고 그 이념을 세계에 실현하는 존재잖아. 그런데 타자는 거기에 포섭되지 않거든. 그러니 아무리 이성을 발휘하고, 노력하고, 공감해보아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인 거지. 그래서 타자는 주체의 의도에 포섭되지 않는 존재, 대상, 사건이야. 그래서 타자는 단순히 '남'이라고만 말할 수 없고, '적'이라고도 말할 수 없어. 왜냐하면 내 안에도 '타자'가 있거든.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이 있잖아. 그러니 주체의 탄생은 반드시 타자의 탄생과 함께 해!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양면이고 주체를 비추는 거울이야. 시험날 잠깐만 자고 일어나야지라고 다짐하고 침대에 누워 일어나 보니 아침일 때, 거울을 보며 내가 나를 때릴 때, 나라고 여겨지는 '주체로서의 나'와 두들겨 패고 싶은 '타자로서의 나'가 있는 거야.
빈곤, 가난, 실업은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 타자야. 우리는 이들을 제거해야 할 것, 없애야 할 것으로 생각해. 그래서 빈곤, 가난, 실업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노력을 하는 거야. 어려서부터 공부하고, 순종하는 삶을 익히고, 지식을 쌓고, 언제 어디서 돈을 주는 누군가의 부름에 화답하기 위해서 준비를 해두고 있는 거야. 왜냐하면 빈곤, 가난, 실업의 공포가 너무너무 크거든.
그러니 학생들에게 어려서부터 '너 뭐할래? 꿈이 뭐니?'를 자꾸 묻는 거야. 어른들은 이 아이가 어떻게 먹고살지 심히 걱정스럽거든. 그러니 자꾸 묻는 거야. 하지만 아이들은 하나같이 대답하거든. 거의 90%는 뭐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무엇에 관심 있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답해. 9%는 관심 있는 분야는 있는 데 학교생활하면서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답하고. 1% 정도 만이 목표도 뚜렷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스스로 찾아가는 것 같아.
사회는 '너는 학생이야'라고 대상화하면서, 먹고살려면 경영학과를 가야 하고, 의대를 가야 하고, 교사가 되어야 돼!라고 호명하거든. '너는 엄마야' 청소하고, 밥을 하고, 아이들을 보살펴야지. '너는 아빠야' 돈을 벌고, 가정을 지키고, 일을 해야 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타자는 우리의 신체에 각인되어, 우리 몸에서 생산된 욕망을 갉아먹으며, 우리를 결핍된 존재로 만들거든. '욕망을 생산하는 풍부한 인간으로서의 몸'을 끊임없이 갉아먹어 '뼈대만 남은 몸'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야.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결핍을 자본주의의 물질로 채우며 인간의 몸을 자본주의화된 몸으로 탈바꿈시키거든.
그런데 생각해야 할 것이 있어. 자본주의적 호명이 인간을 결핍된 존재로 규정하기 때문에 나쁜 거지 사실 호명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아. 호명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언제든지 있어 왔거든. 엄마가 야 '김○○' 밥 먹어라고 할 때, 멍 때리고 있다가 갑자기 주체로서의 '나'가 튀어나오거든. 자본주의가 우리를 복종하는 존재, 착취당하는 존재, 도구적 존재로 호명할 때 아무 생각 없이 복종하는 것이 나쁜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호명은 존재를 풍성하게 하고,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도록 하기도 하거든. 호명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야. 좋은 선생님이 학생을 이끌며, 너는 충분히 할 수 있어라고 말할 때, 운동선수가 좋은 감독을 만날 때, 훌륭한 통치자가 국민을 이끌 때, 우리는 내가 몰랐던 '주체'를 내 속에서 불러내거든. 그러니 '호명'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야. 오히려 주체는 호명 속에 만들어지거든. 왜냐하면 인간은 태초부터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야. 이것은 인간의 진화과정을 이해하면 더 잘 알 수 있어.
동물은 자신의 특수한 능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하잖아. 날카로운 이빨, 빠른 발, 강력한 팔 등 동물은 자신의 특수한 능력을 극대화하면서 진화하거든. 그것이 그들이 살아남는 방식이야. 누구보다 빨리 달리는 치타, 나무에서 사는 원숭이, 군체를 이루는 개미 등은 자신만의 생존 방식이 있는 거야. 하지만 인간은 생존을 위한 탁월한 도구, 장치가 없어. 그래서 인간의 진화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진 거야.
역설적으로 인간은 오히려 진화를 늦추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으로 보여. 즉 동물과 달리 특수한 자기만의 능력을 개발하지 않는 방식으로 진화한 것으로 보인다는 뜻이야. 거의 모든 동물들은 태어나서 바로 걷거나 할 수 있거든. 하지만 인간은 태어나서 걷는데 만 1년이 걸리고,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최소 10년이 걸리거든. 인간은 아이의 기간을 최대한 늘리도록 진화한 거야. 아이의 상태를 최대한 오랫동안 유지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다방면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한 것이지. 이 과정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보다 훨씬 더 사회화가 생존의 중요한 조건이 된 거야.
10년의 양육 기간 동안 문화, 언어, 도구를 사용하는 법을 익혀야 살아갈 수 있게 되거든. 구체적인 능력이 아니라, 추상적인 능력, 도구를 사용하는 능력을 통해 다른 동물들보다 훨씬 폭넓고 광범위한 통제력을 사용하게 된 거야. 그러니 인간의 사회적 관계는 인간 존재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어. 이를 토대로 인간은 동물과 달리 다양한 방면으로 분화될 수 있거든. 바로 언어와 도구를 사용하기 때문이야. 어떤 점에선 인간은 줄기세포와 유사해. 줄기세포가 특정한 조건에서 다양한 조직으로 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아이의 기간을 길게 함으로써 마치 줄기세포처럼 다양한 가능성을 발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게 된 거지. 이 10년이 바로 인간으로서의 초기 조건인 거야.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무의식으로 남아서 인간임을 자각하도록 하는 사회적 관계가 우리의 무의식에 남아 있거든. 그러니 야생에서 길러져서 인간사회로 돌아온 아이들은 기본적인 무의식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거야.
물론 사회마다 이 사회적 본능이 형성되는 과정, 방식은 다를 거야. 원시부족, 자본주의 사회, 동양, 서양 등 또한 집안의 가풍에 따라서도 이 사회적 본능은 다른 방식으로 형성될 수 있거든. 하지만 공통적으로 인간은 자신이 속한 가정,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의 사회적 관계, 문화를 기본적으로 무의식화 한다는 거야.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엄마를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이잖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전형적인 유태인 가정환경에서 발생하는 문제야. 유태인은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를 별도의 방에서 키우거든. 오늘날 이 방식으로 서구사회에서는 아이를 이렇게 키우는 집이 많아. 심지어 신생아의 경우에도 울면 가서 달래주고 자고 나면 다시 눞이고 나오거든. 부모의 방과 아이의 방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고, 아무리 어려도 잠은 아이 방에서 재운단 말이야. 아이가 울면 엄마는 방에서 나와 아이를 다시 달래고 아빠에게 돌아가 버리거든. 엄마를 차지한 아빠. 아이 입장에서는 아빠를 죽이고, 엄마를 독차지하고 싶은 심리를 가질 것 아니니! 이것이 내면화된 것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야. 그래서 서양의 공포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괴물, 귀신의 모습은 부모와 떨어져 있는 아이들의 불안이 형상화된 경우가 많아.
http://www.82cook.com/entiz/read.php?num=1112295
제가 아는 분이, 외국인이랑 결혼을 했는데....
거의 싸우질 않다가
아기 잠재우는 문제 때문에 싸웠다고 하더라고요.
태어나서 병원 퇴원하고 (산후조리원 개념이 따로 없음)
집에 오자마자
그때부터 따로 재웠다던데요;; (생후 2~3일부터죠;;;)
밤에 아기가 막 울어도
남편이 그 방에 못 가게 했대요;;;;
지금 가서 달래주면, 애 어느 정도 클 때까지
밤에 울 때마다 가서 달래줘야 한다며....
자기가 울다 지치면 도로 잠들 거라고 못 가게 했대요..
그래도 너무하지 않나요..??ㅠㅠ 생후 며칠밖에 안된 아기인데...
그래서 그분이... 너무 힘들고... 잠도 못 자고... 아기 울음소리 들릴 때마다 남편 옆에서 같이 울고.. 그랬다는데;;;
애기가 이제 3 살인가쯤 되니까.... 이제야 밤에 안 울고...
밤에 자다 엄마, 아빠도 찾지 않고
이제야 혼자 잘 잔대요...
그럼, 거의 만 3년을 밤에 애 혼자 울게 놔둔 건데...ㅡㅜ
우리 정서랑은 안 맞는 거겠지만....
지금은 솔직히?? 넘 편하대요...
밤 7~8시만 되면, 애기가 자기 방에 가서 그냥 잔대요. 대신 잘 때 인형을 꼭 안고 잔대요. 그 인형 없음 잠 못 잠..
그리고 아침까지 쭈욱 잘 잔다고 하네요.
그래서, 가끔씩 애 잘 때, 잠깐잠깐 데이트도 하고 온다고 그러는데...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키우면 큰일 나겠죠...??
어른들이 아마 경악할 듯....
우리나라 사람들은, 애착 중시하고... 밤에 우는 아이 그냥 놔두면 정서에 큰일 날 것처럼 말하지만..
외국 사람들은 다 저렇게 자라는데.... 전부 다 정서불안에, 애정결핍은 아닌 걸 보면....
우리나라가 유별나게 애들을 끌어안고 키우는 것 같기도 하고요
뭐가 맞는지 모르겠어요...
외국처럼 키우려니... 맘 약한 제가 그럴 수 있을까 의심되고...
한국식으로 부모랑 애랑 한방에서 다 같이 자는 형식으로 키우자니....
초등학교 고학년 될 때까지 밤에 부모 없음 못 잔다 그래서..
또 고민되고 ㅡㅡ;;
'원죄, 결핍, 불안, 죽음, 무, 나약함, 부조리, 수치심'을 기원으로 삼는 철학의 기원은 서양인들의 삶, 경험에 기반한 거야. 우리가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있는 서양철학은 그들의 경험, 삶에서 우러난 것이지 우리의 정서, 문화, 삶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거든. 그러니 이들의 철학은 수많은 철학 중 하나일 뿐이고, 그것이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하는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야. 왜냐하면 이들의 철학은 언어를 익히고, 기억을 더듬고, 체험하고, 경험하기 전에 만들어진 사회적 본능, 무의식의 뿌리 깊숙이 이미 '원죄, 결핍, 불안, 죽음, 무, 나약함, 부조리, 수치심'으로 채워져 있거든. 그것을 언어화하면서 만들어 낸 철학이 서양철학이야.
그러니 이들에게 타자는 축복이 아니라 낯선 것, 정복해야 할 어떤 것으로 떠오르는 거야. 서양철학의 제1문제가 인식론, 과학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어. 깜깜한 밤, 잠에서 깬 아이는 낯선 바람소리, 커튼의 펄럭임, 달빛이 보여주는 그림자의 모습에 공포감을 느끼거든. 그러니 아이는 저것은 무엇인가? 나를 해칠 것인가 아닌가? 나는 저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배제할 것인가? 깜깜한 밤에 말도 하지 못하는 '갓난아기'는 살기 위해서 공포, 분리, 외로움, 고독을 이겨내야 하거든. 아이의 심리적 두려움, 공포감이 서양철학의 무의식이 된 거야.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식은 서로에게 타자야. 동양과 서양은 서로 타자고, 삶과 죽음은 서로 타자야. 부자와 빈자도 서로 타자야. 원주민과 이방인도 서로 타자고,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도 서로 타자야. '생각하는 나'와 '멍 때리는 나'가 서로 타자야. 수많은 타자들이 공존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야. 남자와 여자에 대한 이야기, 연애에 대한 이야기가 왜 영화, 신문, 드라마, TV, 노래로 끊임없이 반복될까? 서로가 타자거든.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되지 않는 낯선 존재지만 함께 공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거야.
인간을 '욕망하는 기계'라고 했잖아. 인간을 욕망하는 기계라고 말할 때, 그것은 상징적인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야. 그것은 구체적이고,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거야. 밥을 욕망하며 똥을 생산하고, 사랑을 욕망하며 아이를 낳고, 리듬을 욕망하며 음악을 만들고, 재현, 재구성, 상상력을 욕망하며 미술, 소설, 시를 만들 잖아. 그러니 욕망하는 기계는 욕망을 통해 구체적 무엇인가를 생산하고, 산출하는 기계를 의미하거든. 그런데 모든 '기계'는 작동을 통해서 투입과 산출을 만들어 내잖아. '밥이 입으로 들어간다→몸이 작동한다(소화)→똥이 나온다'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거든.
우리가 먹는 세상의 모든 음식은 타자야. 음식은 '나 아닌 것'이거든. 우리 인간이 '나'를 먹지는 않잖아. 식인 문화가 있는 경우도 분석해보면 음식으로서의 인간을 먹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행위이거든. 음식을 먹는 것은 나 아닌 것을 나로 만드는 행위야. 자기 동일성을 위해서는 '나 아닌 것'에 대한 섭취가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하거든. 실제로 인간의 몸은 10년 정도면 물리적으로 완전히 교체된다고 해.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나 아닌 것을 먹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거지. 이미 인간이라는 주체는 타자와 공존할 수밖에 없는 물리적 실체라는 거야.
그런 점에서 세상의 타자는 크게 2가지로 구별해서 생각해볼 수 있어. 첫째, 요소로서의 타자야. 이것은 어떤 식으로든 나의 인식범위에 들어올 수 있어. 나를 위협하는 인간, 불쾌함을 느끼는 예술작품, 틈만 나면 대립하는 학교 친구, 나와 호흡이 잘 맞는 친구 등. 그래서 요소로서의 타자는 주체와 타자가 대등하거나, 적대적이거나, 호의적인 관계로서의 타자야. 친구를 예로 들어볼게. 친구랑 어떤 때는 잘 지내면서 서로를 존중해주다가, 좋아하는 가수가 다를 때는 서로 치열하게 싸우다가, 친구가 잘하는 것이 있으면 열심히 따라 배우곤 하잖아.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인데, 이 요소는 주체에게 있어. 대등함, 호의적, 적대적 관계로서 타자의 관계를 맺고 있어. 요소로서의 타자는 주체에게 있어 어떤 방식으로든 대상화가 가능해!
둘째, 무한으로서의 타자야. 이것은 나의 인식범위를 넘어서는 거야. 자식에 대한 엄마 아빠의 희생이나, 받아들일 수 없는 황당한 죽음, 이유도, 맥락도 없이 벌어지는 테러,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등 예측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지만 문득 내 앞에 마주하게 되는 사건으로서의 타자야. 이것은 전체주의의 폭력성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종교적 환희로, 신화로, 미신으로 나타날 수도 있어. 이것은 주체에게 대상화가 불가능한 사건이야. 무한으로서의 타자는 초월적 경험으로서의 타자야.
우리 수학 시간에 집합을 배우잖아. 타자는 무한 집합이야. 이것은 세계 전체를 묶는 집합이야. 요소는 이것의 부분 집합이야. 정수 집합에서, 짝수는 부분집합이지만 무한하잖아. 마찬가지로, 요소도 각 요소의 부분집합이 있을 수 있고, 그것 또한 무한히 많을 수 있어. 그러니 타자의 무한 집합에서 부분 집합인 요소 중에서 어떤 것은 나를 원소로 포함한 집합일 것이고, 어떤 것은 나를 포함하지 않은 집합일 거야. 어떤 것은 나를 포함한 집합과 교집합을 형성하지만 어떤 것은 여집합을 형성해서 이질 적일 거야. 그러니 요소는 나의 어떤 것을 포함하거나, 배제하거나 하는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거야.
요소로서의 타자든, 무한으로서의 타자든 주체에게 타자는 낯섦으로 다가오거든. 좋건, 나쁘건 우리의 인식을 흔들고, 생각을 흔들고, 몸을 움직이게 만든단 말이야. 그 과정에서 우리는 타자와 융합하거나, 공존하거나, 대치되는 과정을 거치는 거야. 그런 점에서 타자는 '나 이면서 나가 아니 존재'야. 앞에 예로 든 음식을 생각해보면 돼! 음식은 나이면서 내가 아니거든. 그래서 타자는 애매한 존재지! 타자는 우리의 일상 경험을 넘어서는 경험, 체험이거든.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자식이야. 자식은 '나이면서 나가 아닌 존재'거든. 내 신체에서 나와서 나와 성격, 외모, 말투, 행동 등이 비슷하지만 나는 아니거든. 부모는 자기 자식을 보면서 자기 어릴 때 떠올리기도 하고, 힘들어하기도 하고, 기쁨을 느끼기도 하거든. 그러면서 도와주고, 밀어주고, 격려하고, 때로는 화도 내고, 싸우고, 상처 주기도 하잖아. 부모도 어디선가 갑자기 떨어진 이 낯선 존재의 예측할 수 없는 모습은 어떤 부조리로 다가오잖아. 그래서 산후우울증, 부부간의 갈등을 겪기도 하잖아.
그러니 자식은 타자야. 나에게 긍정으로 작용할지, 부정으로 작용할지, 대등할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무한한 어떤 것을 경험하게 할지 전혀 예측이 안되거든. '나'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내가 아닌 낯선 존재가 자식이야. 또 다른 사례가 친구, 연인, 부부야. 친구는 나랑 비슷하면서도 다르거든. 없으면 보고 싶고, 있으면 서먹하고, 막상 만나면 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만나서 얼굴이라도 봐야 하는 친구. 연인은 나와 비슷하지만 다르고, 안고, 만지고, 키스하고 싶지만 '나'는 아니거든.
타자는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고, 낯설게 만들어 '뭥미?' 타자를 대하는 우리의 반응이야. 이것이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고, 우리를 억압할 수도 있고, 승화시킬 수도 있지만 어떤 결말로 귀결될지는 예측이 불가능한 것이 바로 타자야. 타자에 대한 경험이 우리를 성숙한 인간으로 만들거든. 그러니 사실 인간은 끊임없이 타자를 원하는 거야. 맛집을 찾아다니듯이 우리는 타자를 찾아다니는 거야. 결핍이 아니라, 타자를 받아들이고 채우는 가산적 방식으로 인간 존재를 풍성하게 하거든.
그런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기동일성, 자기 정체성의 유지를 위해서 타자를 배척한단 말이야. 나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끊임없이 제거하고 배제하는 거지. 심지어는 자기 안에 있는 능력, 감수성, 느낌, 정서 또한 배제하면서 토대로서 단단한 '자기'를만든단 말이야.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취직을 해야 하기 때문에,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이것과 관련 없는 내 속의 욕망들은 억누르고 제거하려고 하잖아. 그래서 공부 때문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어도 말 한 번 못하고, 취직, 돈 때문에 하고 싶은 운동, 취미생활도 하지 못하잖아. 전체주의의 모습을 띤 사회는 이렇게 존재를 끊임없이 빼기의 방식으로 규정하거든. 돈이 되는 것 외에는 모두 '안돼! 위험해! 하지 마!'의 형식으로 규정되는 감산적 방식의 존재론이 바로 자본주의 시대의 존재론이야.
하지만 욕망하는 기계인 인간은 끊임없이 타자를 욕망하거든. 새로운 것을 만지고 싶고, 먹고 싶고, 경험하고 싶단 말이야. 물론 낯선 것을 두려워하고 익숙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지. 하지만 욕망하는 기계는 어느 순간에도 타자를 욕망하길 멈춘 적이 없어. 사랑에 빠질 때, 내가 사랑하는 그/녀를 향해 우리는 오감이 열리거든. 그/녀를 보고 싶고, 향기를 맡고, 키스하고, 만지고, 목소리를 듣고 싶잖아. 예술가는 자기에게 없는 어떤 것을 떠올리고 받아들여서 작품을 만들잖아. 타자와의 관계는 존재를 풍성하게 만드는 거야. 인간은 존재 그 자체도 결핍이 아닐 뿐만 아니라, 동시에 타자 또한 우리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야. 그러니 나의 내면과 외면은 이미 풍성함으로 가득 차 있는 거야.
다만 자본주의적 제도, 국가, 사회가 이것을 억누를 뿐이야. 그래서 마치 내가 고정된 어떤 것, 혹은 가족, 사회, 국가가 요구하는 것만 해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본질로 생각하거든. 자본주의는 우리를 지금-여기에서 끊임없이 결핍된 존재로 자각하도록 하는 거야. 과거에는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 노력하면 돈으로 채울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인간 존재를 구상하도록 만들거든. 하지만 우리 인간은 이미 풍성한 존재야. 그리고 나와 어울리는 타자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면서 성장하는 존재거든. 과거에도 풍부했고, 지금도 풍부하지만 앞으로 더 풍부하게 살아갈 존재이거든. 그래서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과거의 결핍을 이야기하며 오지 않을 미래에 대해 지금-여기에서 투덜 되는 거야. 반면 철학하기는 과거의 풍성함을 이야기하며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풍성함을 지금-여기에서 향유하는 거야.
그러니 '철학하기'는 내 '욕망'을 관찰하고 타자를 통해 무엇을 '생산'하고 싶은지 고민해야 하는 거야.
감사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본문에 “그래서 타자는 단순히 남이라고만 말할 수 없고, 적이라 고도 말할 수 없어. 왜냐하면 내 안에도 '타자'가 있거든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이 있잖아.”를 보면 주체가 타자로도 인식되는 것 같은데, 부대신문 학술기사 ‘타자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http://m.weekly.pusan.ac.kr/news/articleView.html?idxno=3449)에는 “레비나스에서 타자는 나의 인식 대상이나 소유물이 아니며, ‘또 다른 나'로 전락하는 상대적 타자가 아니다. 타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나에게 통합될 수 없는 절대적 타자성을 지니고 있다. 타자는 이해의 영역을 넘어선다.”고 되어있습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 혹시 설명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는 본문 작성자가 아니지만 댓글을 읽고 호기심이 생겨 그에 따른 제 생각을 남겨 봅니다. 저는 에마뉘엘이라는 사람을 모르고, 김선배님께서 인용하신 문장을 오늘 처음 봐서 그 문장만으로 추측해봅니다만, 왠지 에마뉘엘의 타자는 그야말로 '개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individual. 즉, 개체인 셈이죠. '타자는 절대적 타자성을 지닌다. 타자는 이해의 영역을 넘어선다.' 이 말은 b는 결코 타인 a가 되어볼 수 없고 타인 a도 b가 될 수 없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해한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어중간한 공감일뿐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할 수 없죠. 왜냐하면 우리는 '그 사람'이 되어볼 수 없으니까요.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의 시선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므로, '타인에 대한 이해'라는 말은 비유적인 표현에 그칠 뿐이죠. 나의 인식 상태 안에서, 타자의 절대성을 평가 혹은 인지하는 순간 우리는 착각에 빠지는 겁니다.
반면 본문에서 언급되는 타자는 얼핏 포용적인 의미로 보이는데, 여기서 말하는 타자는 다른 사람, 즉 '주체로서의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난 외부 존재가 아닐까합니다. 내 이상 속에서 나는 1번과 같은 모습인데, 2번과 같이 행동하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난다면 '2번을 욕망하는 나'는 '1번을 욕망하는 나'와는 다른 타자가 되는 셈이죠. 외부 존재들은 나와 다르니 내가 원하는 이상과 똑같이 움직일 수 없고, 그 부분에서 내 이상이 잘못되었을까 의심하는 인간의 마음이 이상적 모습의 외부의 것을 타자로 정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타자가 있음으로써 우리는 더욱 다양한 생각을 하고, 풍요로워집니다. 따라서 타자는 나를 이루는 요소이면서 외부의 것이죠.
하지만 결국 타자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김선배님께서 결정하셔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에마뉘엘이 그랬듯이, 타자는 절대성을 가지니까요. 주체의 이상은 주체만이 정할 수 있으니까 말이죠. 이것저것 떠들었네요. 생각하게 만드는 댓글 덕에 재밌었습니다:>
제가 얼핏 보기에도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은 더 엄밀한 의미에서 사용되는것이고 인용하신 타자개념과는 어느정도 차이를 구분할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구 저는 말씀하신 댓글의 '내 안의 타자'를 흥미롭게 보았는데요
본문에 나타난 결핍과 다가올 미래의 풍요로움으로부터의 자본주의화된 우리는 우리의 끊임없는 욕망이 배격되는 바, 우리안에서도 나자신을 타자화하는데요. 이러한 모습이 현재의 시대상에 비추어 보았을때 자신의 한 모습을 받아들이지않고 타자화함으로 인해 내안의 또다른 나를 만드는데, 이는 융의 이론대로 자기와 자아를 온전히 통합하지 못함으로 인해 정체성에 분열이 오는 자아분열증으로 이어집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결핍을 부추기는 시대모습에서, 과거엔 비교적 비주류에 속하던 정신과 치료가 활발해지고 사람들이 많이 찾게되는것 같아요.
결국 욕망하는 기계를 제동시키는 자본주의의 모습에서 나오는 그림인 셈이죠
@조얼 @하얀솔 @탈퇴한 회원
1.
제가 수업하느라 이제야 답드립니다. 포스팅한 글에 첨부한 동영상을 보면, 레몬을 먹는 아이의 입장에서 레몬은 타자입니다. 엄마 젖만 먹다가 듣도보도 못한 이상한 맛이 나에게 폭력적으로 다가오거든요. 소주를 처음 먹을 때, 에스프레소를 처음 먹을 때, 독한 양주를 처음 먹을 때, 하다못해 김치, 청국장을 처음 먹을 때, 우리는 타자를 경험합니다. 하지만 먹다보면 그 맛을 알게 되거든요.
아이의 입장에서 레몬은 자신의 이해영역을 넘어서는 타자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첫째 젖 땔 때 레몬을 이용했네요... ㅎㅎ 아이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면 레몬은 절대적 타자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엄마가 내 입에 넣어주는 뭔지 모르는 기괴한 것!!! 하지만 인간은 자라고 성장하면서 이 타자성을 자기 몸에 붙이는 것 같습니다. 자기화 하는 거죠. 자기화하기 전까지는 절대적인 타자로 작용합니다. 자기 몸에 붙이는 과정, 가산적 과정이 존재를 풍요롭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타자는 자신의 이해영역을 넘어서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실존적 층위에 따라서 이 타자성은 사람마다 다르게 느껴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조얼 @하얀솔 @탈퇴한 회원
2.
타자는 고통입니다. 타자는 폭력입니다. 아이에게 레몬의 쓴 맛이 고통이고 폭력이듯이요. 하지만 우리 인간은 이 고통을 내 것으로 만들며 술에서 단맛을 느끼고, 에스프레소에서 초콜렛 맛을 느낍니다. 고통과 폭력의 승화를 통해 실존의 두께를 두껍게 만드는 것이 인간입니다. 레비나스가 타자를 무한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의 철학기반이 기본적으로 종교에 근거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래서 포스팅한 글에서 요소로서의 타자와 무한으로서 타자를 나누어서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레비나스가 쓰는 l'autre는 '남'이죠. 다만 레비나스가 풍부한 해석을 하면서 인간의 인식과 경험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으로 무한으로 엮은 듯합니다.
제가 쓴 글의 기본 컨셉은 레비나스의 무한 개념을 칸토어가 사용한 무한집합 개념과 연결해서 사용한 겁니다. 타자가 무한이라면 타자는 무한집합으로 볼 수 있고, 존재, 실존은 그 무한집합의 부분집합이라볼 수 있거든요. 그런 점에서 존재는 무한집합으로 이미 엮여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부분집합인거죠. 따라서 우리는 타인들과 요소를 공유하거나 하지 않거나 합니다. 이 공유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타자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레비나스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 타자, 요소(l’element)라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요소에 좀 더 집중해서 해석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김작가 바쁘실텐데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추가로 더 궁금한 것이 생겼습니다. 타자는 나의 결핍으로, 낯선 타자의 공포를 자본주의가 이용한다고 하셨는데, 낯선 타자가 주는 공포는 자본주의가 자리잡기 전부터 있지 않았나요? 예를 들면 옛날에 약탈을 일삼던 왜적이나, 도둑들은 낯선 타자이면서 공포를 주는 존재에 해당할 것 같은데, 왜 자본주의가 낯선 타자를 이용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어떤 사회라도 이용할 수 있는, 예를 들면 인간의 본능을 이용하는 것 아닌가요? ‘우는 아이 호랑이가 잡아간다’ 하면서 아이에게 겁을 주는 호랑이도 낯선 타자의 공포를 이용하는 것 아닌가요? 왜 자본주의에게 잘못을 물으시는지 궁금해졌습니다.
@탈퇴한 회원 '낯선 타자가 주는 공포를 자본주의가 이용한다'는 '자본주의도 이용한다'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왜 자본주의에게 잘못을 물으시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이 질문을 '어차피 모든 정치체계는 공포를 이용하는 데 왜 자본주의만 문제 삼느냐?'라고 이해해도 되는지요??
이런 방식의 질문은 살인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는데 왜 지금 시대에 문제 삼느냐와 유사한 질문이네요. 사실의 문제와 가치의 문제는 정확히 구분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자본주의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업가들의 삶에 대한 열정을 존중합니다. 어설픈 운동가보다 제대로된 기업가들이 세상을 더 많이 변혁시킨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과는 별개로 자본주의가 우리 인간에게 가치있는 시스템인가는 고민해볼 수 있을 듯합니다. 모든 시스템은 공포와 쾌락을 이용해서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시스템이 산출하는 결과에 관심이 있습니다. '우는 아이에게 호랑이가 잡아간다'는 공포의 시스템이 산출하는 것과 자본주의 시스템이 산출하는 결핍, 공포, 쾌락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공포가 칼이라면 이것을 이용해서 요리를 만들어 주는 어머니의 칼과 강도의 칼이 추구하는 것은 다릅니다. 저에게 자본주의의 칼은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는 강도의 칼처럼 느껴집니다.
@김작가 바쁘실텐데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궁금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자본주의에 의해서 요구되어지는(?) 타자와 나의 필요에 의해서 요구하는 타자를 개인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나요? 순수한 아이라면 구분이 쉬울 것 같은데, 이미 자본주의에서 살아온 저 같은 사람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탈퇴한 회원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어쩌면 추상적일수있겠지만, 그렇기에 더욱 철학함의 필요성이 대두되는것 같습니다.
요구되거나 강제된 타자와 내가 원하는 모습의 타자를 구분짓고 판별하는것은 결국 자신의 모습을 자기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볼수있는, 실존적(existentia) 측면이 필요한데요.
인간은 레몬이나 에스프레소의 맛을 모르던 '나'에서 이젠 그러한 맛을 자기화한 내가 되죠. 그로인해 학습이나 사회화가 이루어지는데요. 이는 결국 다양한 타자와의 만남으로 인해 현재의 우리가되었고, 또한 다양한 타자의 자기화로인해 '새로운' 내가되어가는데요. 이과정에서 받아들인 타자는 과연 자본주의가 요구한 것인지 자기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요청한것인지를 구분하기란 쉽지 않죠. 말씀하신대로 이미 자본주의화된 시대에 내가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요. 그래서 정말 깊이들어가보면 과연 누군가가 생각한 꿈이나 목표, 좋아하는것등 어느 하나도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수는 없을겁니다. 삶의 다양한 경험과 학습에서 우리는 배우고 자라기 때문이죠. 아프리카라는 나라른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꿈이 아프리카에가서 의료봉사를 하는것이라고 말할수, 생각할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엄밀하고 근본적인 의미에서 사회의 요구와 자신의 요청을 판별할순 없더라도 깊은 사유와 통찰을 통한 철학의 눈으로부터 말씀하신 구분의 출발점이 될것같습니다.
@조얼 감사합니다
@조얼 @탈퇴한 회원 자본주의에서 요구되는 인간과 그것에 저항하는 인간의 모습은 남은 회차에서 논의할 예정입니다. 14회차에서 권력관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지점을 탐구해볼 생각이고요. 15회차에서 인간에게서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는 에너지로서의 충동, 에로티즘, 사랑 등에 대해서 살펴볼 예정입니다. 브런치에서 허락된 분량이 15회차라 15회차에서 마무리할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