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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Sep 30. 2018

자본주의의 신화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두 가지 방식



자유로운 노예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도시상인, 시민들은 왜 이렇게 부를 축적하려고 했을까? 간단히 생각해도 먹고사는 데 필요한 재화가 충족되면 그 이상을 과도하게 추구할 이유가 없거든. 유독 근대 자본주의만 특이하게 물질적 탐욕을 편집증 환자처럼 과도하게 추구한단 말이야. 그리고 그것을 지극히 정상이라고 생각하거든.  난 지금의 자본주의가 이런 모습을 띤 것은 초기 조건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해! 


칼뱅이즘, 금욕주의를 통한 부의 축적이 신으로부터의 구원받는 길이라고 여긴 믿음이 물질적 탐욕으로 이어진 거야. 유럽에서 인정받지 못했고 멸시받았던 유대인, 도시상인, 유통업자, 청교도 등은 자신들의 불안한 지위를 만회하기 위해 어디서든 먹고살 수 있도록 부를 축적하는 습관, 자신의 부를 이동하기 편하도록 귀금속, 고가품을 활용해 부를 축적한 거야. 끊임없이 부를 축적하는 것, 그 자체가 자신의 구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믿음, 자원은 희소하다는 것을 믿는 이들의 믿음, 신념, 이데올로기, 패러다임이 세계적인 표준이 된 것이지. 만약 다른 유형의 자본가가 출현했다면 전혀 다른 모습의 사회가 되었을지도 몰라. 


이들의 이념은 자유주의야. 자유주의는 겉으로는 인간의 자유, 평등, 행복, 생명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지만 실상은 '자본의 자유'야. 이들은 소유권의 자유, 어느 누구도 간섭하지 못하는 소유권의 자유를 주장하는 거야. 내가 만든 재산을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도록 하는 자유주의를 만들지. 



우리 사회의 경우 IMF 이전에는 기업이 회사를 위해 직원들 공부도 시키고, 교육도 시키고 했거든. 하지만 IMF를 거치면서 시장권력이 점점 커지게 되었고 기업들은 끊임없이 자기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거든. 과거에 자신의 비용으로 했던 것을 효율성, 합리성의 이름으로 개인에게, 국가에게 떠넘기기 시작한 거야. 이러한 경향은 근대사회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데, 서양의 경우도 사적영역과 공적영역 사이에 사회적인 영역이 경제를 매개로 등장하면서 경제가 인간 문제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공론화되면서 본격적인 근대가 시작되거든. 과거에는 경제적인 문제는 사적인 영역이었어. 먹고사는 문제는 개인들이 알아서 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경제적인 것을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 즉 공적영역으로 들어오게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부르주아, 도시시민, 유통업자의 전략이 성공한 것이라고 보아야 해! 


이제 도시상인, 기업인, 유통업자들은 아주 효율적 세계를 만들어 낸 거야. 국가는 아이들을 알아서 교육시키고, 대학교는 학생들이 스스로 비싼 돈 들여 가며 취업준비를 하고, 심지어 건강도 스스로 열심히 챙기거든.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려고 하거든. 주식회사는 이것의 결정판이야. 발행된 주식의 가격을 모두 합치면 기업의 가치, 기업의 가격이 되는 데, 주식은 기업의 가격을 잘개 쪼개 놓은 거야. 소유주는 51%만 가지고 회사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면서 49%의 주식을 팔아, 수익을 얻는 거지. 기업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51%를 가지고 있든. 100%를 가지고 있든 아무런 차이가 없거든. 그럼에도 51%로만 가져도 100%와 똑같은 힘을 행사하잖아. 심지어 삼성전자 총수일가는 1% 내외의 지분으로 배타적 권리를 행사하거든. 상식적으로 어떤 소유물에 대한 권리는 소유권을 배타적을 가질 때 유지되잖아. 그런데 주식회사는 소유권을 조금만 가지고 있어도 소유권을 가진 것처럼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거든.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것. 당당하게 자기 돈이 아니라 남의 돈을 자기 돈처럼 쓰는 뻔뻔함이 효율성과 합리성의 이름으로 진행되도록 만들었거든. 그러니 이들은 대단한 거야.  


이제 이들의 고민거리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효율적으로 돈이 벌리는 세계의 토대가 만들어진 거야. 이들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통제 아래 놓이기를 기대해! 자기들이 월급을 주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했으면 하거든. 그래야 자기들이 만든 구조, 시스템에 기꺼이 복종할 거잖아. 우리는 가끔 이 시스템을 벗어나고 싶어도, 아니지 엄마 아빠가 나한테 투자한 것이 얼만데, 아니지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지라며 '근대적 양심'의 소리를 듣거든. 


이제 이들은 개별 국가에 머물지 않아. 다국적 기업은 국가를 넘어서는 자기만의 영역을 만들고 싶어 하거든. 미래에 국가보다 더 강력한 기업이 등장한다면 사람들은 국가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에 복종할 거야. 국가가 아니라 기업이 국가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될 날도 얼마 남지 않을 거야. 사람들은 국가의 국민이 되는 것보다. 유망한 기업의 직원이 되길 기대할 거야. 기업은 모든 사람들이 국가가 아니라 자신들에 의존해서 살아가길 기대할 거야. 그래야 자신의 독점적 권리가 유지되잖아. 이들이 복지를 반대하는 이유는 간단해 인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기 때문이야. 내가 준 돈으로만 살아야 하는 데, 국가가 준 돈으로 산다면 노동자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잖아.  잘 나가는 대기업들 보면 삼성맨, 엘지맨이라 칭하면 자부심 절어하잖아. 국가에 소속되는 것보다 삼성 직원이 되는 것, 구글의 직원이 되는 것, 애플 직원이 되는 것이 더 매력적이거든. 


그러니 이러한 기업이 지배하는 시스템에서 소득 상승률과 물가상승률은 항상 연동이 되어 있고, 내가 열심히 일하면 내가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잘 살게 되는 이상한 시스템에 놓이게 되는 거야. 자신이 만든 시스템에 균열이 가도록 하는 것은 절대 반대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대하지. 그리고 극단으로 충돌할 때, 조금 양보하는 거야. 그러면서 많이 양보하는 척을 하지. 복지를 강화하면 무임승차, 비효율성, 복지병이라며 온갖 매도를 해. 심지어 어마어마한 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편집증처럼 더 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편집증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들이야. 


이들의 생존, 구원은 자본의 축적과 관련되어 있거든. 이들은 심지어 노동자들도 여기에 동의하도록 만드는 탁월한 전략을 펴거든.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은 싸게 팔고, 기업이 만들어낸 물건은 비싸게 사면서 사회가 진보하고 발전했다고 믿도록 만들고, 오늘날이 과거보다 훨씬 좋아졌다고 믿도록 만들거든. 



근대인들은 파블로프의 개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이상한 상황에 놓여 있어. 더군다나 우리나라 사람의 노동시간은 중세 농노, 고대 피라미드를 만든 노예들 보다 더 많은 노동을 하거든. 아침에 8~9시까지 학교 가고, 학원을 가거나 야자를 하고 오면 10시잖아. 한석봉이 아무리 밤늦게 까지 공부해도 기껏해야 9~10시야. 과거에는 전등이 없어서 인간의 생활리듬은 자연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거든. 그러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름달 날 밝은 밤이 축제의 시간이 된 거야. 


2014년 기준 연간 노동시간은 2057시간으로 OECD 회원국 중 최상위. 영국 경제학자 그레고리 클라크는 중세 농노의 노동시간을 1620시간으로 추정했는데 한국인의 평균 노동시간이 1000년 전의 농노보다 훨씬 많은 셈.(이원재<이상한 나라의 정치학>)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85944.html


고대 노예들 또한 우리보다 일을 많이 하지 않았단다. 전쟁 노예를 제외하면 대부분 자유롭게 지냈거든.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njstyle&logNo=220415961013&parentCategoryNo=&categoryNo=18&viewDate=&isShowPopularPosts=true&from=search


이제 이들은 자신이 만든 세계를 계속 지속시키고 싶을 거야. 끊임없이 생산하고, 끊임없이 소비하도록 만들어서 인간이 만들어낸 창조적 가치를 자본으로 환원하고, 그들의 금고에 차곡차곡 모이도록 하는 이 과정이 끊임없이 이어지도록 할 거야. 


이러한 장치들이 현대에는 미디어에서 잘 나타나.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한 스포츠 스타, 해마다 시작되는 프로야구, 프로농구, 프로배구, 4년마다 돌아오는 올림픽 메달리스트, 맨몸으로 성공한 맛집 사장님, 셀러리맨 신화를 이룬 이명박, 슈퍼스타 k에 나와서 성공한 평범한 가수들. 이들은 성공담을 하나의 실제적 사례로 느끼도록 끊임없이 주입하거든. 학교의 조례에서, sky이에 합격한 선배의 성공담에서, 스포츠 스타의 인터뷰에서 그래서 우리는 파블로프의 개임에도, 노예보다 더 노예적인 삶을 살면서도 주체적이고 자유롭다는 이상한 판타지를 가지도록 만들거든. 이들의 전략이 성공한 거야. 



완벽하게!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미디어야. 미디어는 미디어의 내용이 무엇이든 매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거든. 언어, 게임, 인터넷, tv, 영화, 스마트폰, 페이스북, 트위터 모두 미디어야.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서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하지. 이들의 전략은 인간이 경험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끊임없이 미디어를 통해서 경험하도록 만들거든. 이들은 미디어를 통해서 '생각하는 주체'가 소비를 하도록 끊임없이 부추기는 거야. 우리는 자유롭게 소비하지만, 소비할 수 있는 매력적인 상품은 오로지, 기업이 만들어 놓은 것밖에는 없거든. 


이제 어떤 상품을 소비하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인가가 결정되는 시대에 도달한 거야. 드디어 '생각하는 주체'는 '소비하는 주체'로 변신한 거지.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깨닫게 된 거야. 소비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성을 자각할 수 없는 시대. 물건을 사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시대. 지름신을 영접할 때 비로소 성취감을 얻게 되는 시대에 도달한 거지. 이들의 전략은 완벽히 성공했어. 


바바라 크루거


이들이 어떻게 자신의 거대한 세계를 만드는지 쫓아가 보자. 이들은 지식을 통해 경제, 생산력, 소비 수준, 삶의 수준이 점점 진보해왔다고 논리적으로 설명해, 그리고 조선시대, 선사시대 박물관을 짓고, 과거의 사람들은 전기도, 옷도 없이 힘들게 살았는 데, 우리는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어를 보여줘. 각종 박물관, 민속촌, 고고학, 인류학 등은 현대적 인간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장치로 작동하는 거야. TV에서 유명한 거리, 맛집이 나오면 사람들은 거기서 인증샷을 찍지. 나도 여기에 가봤다. 내가 가서 좋은 것이 아니라 TV에서 본 것을 확인하면서 좋아해. TV에서 광고하는 음료수를 먹고, TV에서 광고하는 교복을 입고, 어디선가 본듯한 게임을 하는 것. 우리 시대가 얼마나 진보했는지 끊임없이 확인하고, 느끼고, 이해하는 방식. 과학의 발전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 그러면서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막연히 더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실제로 믿게 하는 것. 이것이 이들이 가진 전략이야. 


놀이공원에서 각종 놀이기구, 캐릭터들의 퍼레이드를 보면서, 치열한 야구, 농구, 축구 경기를 보면서 드라마, 게임을 보면서 우리는 현실과 다른 가상의 세계를 경험하고, 그 가상의 세계를 열심히 경험하게 체험하고 즐기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때. 주말여행을 가고, 맛집을 탐방하고, 영화를 보며 연인과 데이트를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때. 교회나 절에 가서 열심히 기도드리고 한 주를 시작할 때. 


우리의 일상이 시물라시옹(가상)이 아니라 객관적 현실인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거든. 놀이공원, 영화관, 박물관, 여행은 우리의 일상을 객관적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시물라시옹의 장치들이야. 이들이 만든 탁월한 장치지. 이 장치는 우리가 가상의 현실에 살고 있으면서도 마치 객관적 현실에 살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장치야. 이 장치도 마찬가지로 인풋과 아웃풋이 있거든. 이 장치에 우리가 들어가면 우리의 진짜 삶을 망각하고 미디어가 제공하는 삶을 진짜 삶이라고 믿게 되는 거야. 이를 통해 우리의 현대적 일상이 마치 객관적 실재인 것처럼 믿게 되는 거야. 가상으로서의 현실을 실재처럼 느끼도록 하는 시물라시옹의 장치가 작동하는 거야. 


현대는 그런 점에서 시뮬라시옹(가상)의 세계야. 실질적인 경험과 체험으로 세계를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시대거든. 이웃, 동료, 친구와 함께 내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밤 있었던 야구, 축구, 게임 이야기를 하는 것. 가수와 연예인의 뒷담화를 하는 것. 야동을 보고 흥분하고, 먹방을 보고 먹는 것. 내 욕구, 욕망을 모두 TV-스마트폰에 투사하는 거야. 내 삶과 1도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것을 99%로 연관되도록 만드는 TV-스마트폰은 현대가 그만큼 시물라시옹의 세계임을 증명해주는 거야. 


이제 내 삶이 진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 TV-스마트폰이 진실인 시대에 살고 있어. TV-스마트폰에서 언급되면 그 자체로 진실이 되어버리는 사회. 실재가 아니라 매체에 의해 매개된 실재, 파생실재가 진실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거든. TV-스마트폰이 보여주는 전쟁의 참혹함, TV-스마트폰이 보여주는 정부의 무능함, TV-스마트폰이 보여주는 국회의 갈등은 아주 디테일하고 꼼꼼하며 치밀하지. 그런 점에서 TV-스마트폰의 실재는 과잉실재야. 자기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을 과잉해서 보여주는 거야. 


이제 사람들은 TV-스마트폰에 용해되어 있고, TV-스마트폰 또한 사람들에 용해되어 있어. 이들은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파생실재를 만들어내고 하나의 거대한 시물라시옹을 만드는 거야. 이제 내가 TV-스마트폰을 보는 것이 아니라, TV-스마트폰이 나를 봐! 꺼져 있으면 켜게 되고, 나도 모르게 만지게 되지. 손 안에서 세상 모든 일에 간섭하지만 정작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은 못하게 만드는 거야. 이제 내가 TV-스마트폰을 보는 시대가 아니야. 그들이 우리를 보고, 우리를 기획하고, 우리를 대상화하거든. 


자. 이제 본격적으로 획일화된 대중이 만들어 진거야. 서로는 함께 하지 않지만, 동시에 웃고, 동시에 슬퍼하는 균질한 덩어리로서의 대중. 출근길 지하철에서 만난 낯선 타인들이지만 모두 스마트폰을 쳐다보며 연대성이라곤 전혀 없는 균질화된 대중. 세계를 거대한 지하철 속 낯선 타인들로 만들어 버린 이들은 대중을 통제하기가 훨씬 쉬워진 시대에 살게 된 거야. 이들은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멀쩡한 가방, 옷, 화장품을 버리게 만들지. 충분히 쓸 수 있는 핸드폰, 컴퓨터임에도 더 획기적인 신상이 나왔다고 광고를 하거든. 


이들의 전략은 상품을 과잉생산하거나, 소량생산하는 거지. 마트에 쌓여있는 거대한 상품 덩어리들. 이 곳을 돌면서 사람들은 자본주의 시대의 풍요로움을 느끼지 않아. 장난감 앞에서 때 쓰는 아이를 볼 때, 쇼윈도를 기웃거리는 오드리 헵번을 볼 때. 이들이 생산하는 것은 상품이 아니라 결핍이야. 널리고 널린 장난감 중에서 내가 살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느낄 때. 한정판 명품을 보려고 쇼윈도 앞에서 기웃거릴 때. 이들은 끊임없이 대중들이 결핍감을 느끼도록 만들거든. 그러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고, 그러지 않으면 자기들이 부를 축적할 수 없기 때문이야. 그런 점에서 도시상인, 유통업자가 만든 자본주의는 절대 풍요를 생산하지 않아. '끊임없는 결핍, 신상을 사고 나면 또 새로운 상품이 나오면서 좀 더 있다 지를걸!'과 같은 '후회와 절망'을 생산하는 거야. 그러면서 동시에 신상을 구매하면 '결핍'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은 '초월적 환상'을 생산하는 거야. 


이들의 경제학은 소비의 경제학이고 소비가 미덕이 되는 경제학을 만드는 거야. 자원이 희소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전 세계 인류가 먹고 살기에는 자원이 희소하다는 관념을 가지게 만드는 경제학을 만들지. 인구폭발론을 들먹이면서 공포감을 심고. 당장 구매하지 않으면 큰 일 날 것처럼 말하는 거야. 이들의 정치학은 지금의 정치 시스템이 마치 사람들의 자유로운 합의인 것처럼 교묘하게 속이지. 태어나서 한 번도 계약해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마치 계약을 한 것과 같은 착각을 가지도록 사회계약설을 설파하고 이것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믿게 만들고, 인간은 만인대 만인의 투쟁 상태에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권리를 위임해야 하고, 그러한 정치가 마치 진리인 것처럼 설파하거든. 이들의 과학은 돈 될 것이 무엇인가? 어떤 연구가 부가가치가 높을까를 생각하거든.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적정기술보다, 이윤을 극대화할 기술을 개발하지. 어떻게 하면 이익을 극대화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최소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누릴 기술에 집중되지. 이들의 사회학은 모두를 비슷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모두와 달라지는 미세한 구별짓기를 시도하고, 새끼손톱만큼 달라지지 않았지만 명품 가방을 메고, 강남에 살면 자신의 삶이 명품이 된다고 착각을 하도록 하지. 


그래서 시뮬라시옹의 시대에 주체는 근대적 '생각하는 주체'에서 현대적 '소비하는 주체'로 변신을 하는 거야. '소비의 주체'는 확률 nCk로 구성돼. n=소비할 수 있는 품목, k=내가 선택할 수 있는 품목. 즉, 지금-여기에 내가 선택하고 소비할 수 있는 상품의 조합이 '소비하는 주체', 현대적 주체를 결정하거든. nCk는 '소비하는 주체'의 함수야. n은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더 커지고, 미세해지고, 품목이 많아질 거야. 과거에는 상품이 아니었던 것이 상품이 되는 것과 같아. k는 내가 가진 소비의 능력이야. 우리는 능력을 키워서 자신이 가진 소비의 능력을 키울 태지 만, 우리는 이들이 만든 함수 nCk의 어디쯤에 있는 예측 가능한 존재일 뿐이라는 거지. 여하튼 근대적 주체가 이성을 통해 자기실현을 이룬 '생각하는 주체'라면 현대의 주체는 시물라시옹의 세계에서 소비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소비의 주체'가 되는 거야. 이들이 만든 대상화에 정확하게 낚인 거야. 



너도 나도!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두 가지 방식 


자본주의는 매력적이야. 사람들을 끌어당기거든. TV, 인터넷, 자동차, 길거리 어디를 보더라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광고야. 광고는 짧은 시간에 우리에게 각인되도록 하거든. 아니면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보이면서 파블로프의 개처럼 무의식적으로 상품이 각인되도록 만들어. 때로는 광고는 위협하기도 하고, 다그치기도 하고 멋진 내 모습을 만들고,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하거든. 



에센스 한 병으로 젊은 피부를 유지하고, 차를 바꾸면서 럭셔리한 삶을 살게 되고, 사랑하는 딸을 위해 미래를 준비하고, 포용과 자유를 여행에서 느끼도록 광고를 하거든. 내가 이루지 못한 모든 욕구와 욕망을 혹은 현실의 불만을 소비를 통해 이룰 수 있도록 광고는 끊임없이 우리를 부추기는 거야. 매력적인 문구와 매력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광고는 우리의 삶에 침투하는 거야. 우리가 광고를 보는 것이 아니라, 광고가 우리를 보는 거야. 광고가 우리를 만들지. 우리가 광고를 보는 것이 아니라, 광고가 우리를 보는 거야. 그러면서 광고는 너는 왜 이렇게 뒤처져 있니? 미래를 어떻게 살아갈 거니? 다른 사람은 다 즐기면서 사는 데 너는 왜 이렇게 찌질하니?와 같은 말을 건네거든. 그러니 우리가 광고를 보는 것이 아니라, 광고가 우리를 보는 거야. 


그리고 사람들은 소비를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하거든. 그리고 내가 즐겼던 여행에 대한 이야기와 명품에 대한 이야기와 차에 대한 이야기와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삶을 가득 채우는 거야. 시물라시옹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거지. 공유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공통점은 소비야.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가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거야. 비슷한 아파트에 사는 사람끼리, 비슷한 제품을 좋아하는 사람끼리 뭉쳐 다니거든. 광고의 정확한 반대가 정치야. 정치는 광고와 작동방식이 비슷하지만 반대로 작동하거든. 광고는 사람들을 획일화시키면서 동시에 파편화시키지만, 정치는 이념을 만들며 동시에 주체화시키기 때문이야. 


자본주의는 매력적이야. 소비를 통해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에 도달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극을 주거든. 이 자본주의의 매력은 크게 두 가지야. 첫째, 자본주의는 초월적 환상을 제공해줘. 저것만 지르면 무엇이든 해결될 것 같거든. 둘째, 표면적 심연이야.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화폐가치로 동등한 표면 위에서 무한한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도록 하거든. 초월적 환상이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수직적 논리라면 표면적 심연은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수평적 논리야. 이 두 개의 논리가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 재생산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매력이거든. 





자본주의의 신화


점을 보러 가거나 미신을 믿으면 사람들은 덜 떨어진 사람이라고 해. 하지만 인간은 미신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단다. 아무리 합리성이 지배하는 이성중심의 사회가 도래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절대 미신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야.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신화, 종교라고 할 수 있어. 신화와 종교는 기본적으로 초월의 문제를 다루거든. 객관적인 토대와 상관없이 믿는 거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사고에도 신화가 들어 있어. '나는 생각한다고 믿는다, 고로 존재한다고 믿는다.'가 전제되어 있는 거야. 그러니 인간의 모든 활동에는 신화, 즉 믿음이 들어 있는 거야. 다만 태어나서 자신의 경험의 틀 안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을 하나의 진리로 믿는 거야. 기독교 문화에서 태어나면 하느님을 믿고, 불교문화권에 태어나면 윤회를 믿고, 유교문화권에서 태어나면 조상을 믿는 거지.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자신이 믿는 진리가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개별적 경험을 보편적, 객관적 진리로 이해하는 거야. 구체적인 실체로 경험하는 것뿐이거든.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야. 사고를 치거나 문제를 일으킨, 아들을 보고 엄마가 이렇게 말하지. '우리 애가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엄마는 자신의 아이가 선하고 착한 아이로 믿고 싶은 거야. 온갖 학원을 돌리고, 과외를 시키고, 빚까지 내가며 아이의 교육에 투자할 때, 부모는 아이가 좋은 대학에 갈 거라는 믿음이 있는 거야. 자본의 논리로 보면 투자 대비 효과가 뛰어나거나, 명확한 것도 아닌 데 왜 그렇게 투자하니? 바로 자식에 대한 믿음 때문이야.  


돈도 마찬가지야. 사람들이 왜 그렇게 돈돈 거릴까? 돈이면 다 될 거라는 믿음이 돈을 더 강력하게 만들어 주는 거야. 내 주머니에 있는 오천 원짜리 지폐 하나로 도시락 하나를 살 수 있다는 믿음. 자동차를 사고, 집을 사고 땅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이 돈을 추구하도록 만들거든. 만 원짜리 지폐 하나를 들고, 아마존 정글의 원시 부족에게 내밀면 그들은 이것이 뭔지도 뭐를 거야. 화폐는 아주 강력한 신화야. 돈으로 상품을 교환할 수 있다는 강력한 신화. 그리고 이 신화를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이야. 


중세사회 사람들은 교황의 말에 왜 복종했을까? 그들의 믿음은 오늘날 우리가 믿는 돈의 믿음 하고 아주 유사한 거야. 면죄부를 사면 진짜 죄가 없어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구매가 일어나는 거라고, 명품을 사면 내 삶이 명품이 될 것 같은 믿음, 비싼 자동차를 사면 내 삶이 가치 있어진다는 믿음, 비싼 아파트에서 살면 나의 품격, 계층이 올라간다는 믿음. 이 믿음들이 자본주의를 떠받들고 있는 기둥이거든. 그러니 아직 중세가 끝나지 않았어. 우리는 '신' 대신, '물신(物神)'을 모신 것뿐이야. 아직 우리 인간은 '신 없는 세계에 대한 모습'을 그리지 못했거든. 



그러니 여전히 중세인 거야!





초월적 환상


종교에서 일상에 대한 초월은 기도로 이루어지거든. 주여! 아멘! 기도는 일상의 초월이며 신과 직접적 대화를 하는 방법이야. 신을 받아들이는 행위이지. 이건 아침에 깨끗한 정화수를 받아두고 기도하는 것, 제사상에 절하는 것도 모두 같은 원리야. 그래서 교회, 성당, 절과 같은 종교적 건축물은 일상의 건물과 명확히 구별되도록 되어 있어. 들어서는 순간 신성성이 느껴지도록 배치돼 있거든. 성당의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예배당까지의 거리, 절 입구에 있는 사천왕은 이 공간이 일상의 공간과는 구별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야. 제사를 지낼 때, 향을 피우고, 초를 켜는 것도 일련의 조상을 부르는 신성한 의식인 거야. 특별한 장치를 통해서 일상의 공간을 신성한 공간으로 바꾸는 의식이 모든 종교에 작동하거든. 이것은 영화관에 들어가는 것과도 비슷해. 현실의 공간과 단절된 컴컴한 환상, 가상의 공간에 들어가는 것. TV가 발명되어도 영화가 없어지지 않은 이유는 영화가 보여주는 가상의 세계에 대한 신성성, 현실과는 단절된 이질적 공간으로 초대. 일상과 다른 특별한 공간, 상황이 주는 효과 때문이야. 


신성한 공간으로서의 성당 내부 


신성한 공간으로 들어감을 알리는 사천왕


종교적 의식은 놀이적 요소를 아주 강하게 담고 있는 데, 어린아이들이 놀이를 할 때 아주 고도로 집중해서 그 역할을 하잖아. 엄마-아빠 놀이에서, 동물되기, 술래잡기 등에서 마치 없어도 있는 것과 같은 경험이 종교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거든. 그것도 아이들이 아주 진중하고, 심각하게 집중하면서 하잖아. 없어도 있는 것처럼 신이 '임臨'하도록 하고, 조상이 '임'하도록 한단 말이야. 그리고 놀이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바로 놀이의 신성함이 깨지 거든. 


종교는 초월에 대한 경험이야. 이 경험이 일상에서 아주 강력하게 작동하거든. 내 삶의 방향성, 목표, 동기가 끊임없이 종교를 통해서 확인되고 그래서 확신이 된단 말이야. 그래서 종교적 초월은 환상이 아니야. 그것은 '실재'로 작동해! 구체적 지침으로, 신이 온 세상에 '임'해 있는 것으로 작동하거든. 그러니 그것은 내 삶과 분리가 되지 않아. 내 삶이 신과 함께 충만해 있고, 파편화된 삶에 일관성과 풍요로움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거든. 


소비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도야. 물신을 영접하고, 그를 임하게 하는 행위지. 하지만 그 기도는 끊임없이 유예될 수밖에 없어. '신상'이 나오거든. 새로 나온 스마트폰만 지르면 뭐든지 해결될 것 같은데, 막상 지르고 나서 일주일이면 무덤덤해지거든. 그리고 조금만 지나도 더 멋진 폰이 광고에 나오는 거야. 내 눈에 꼭 들어오는 저 한정판 명품백만 지르면 어디 가서도 뽀대 날 수 있을 것 같은데, 1억짜리 자동차를 사면 어깨 펴고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한 달만 지나도 밋밋해지거든. 


현대인 소비를 통해 지름신의 영접을 받는다


그래서 초월적 환상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해 하나는 끊임없는 신상이야. 질러도, 질러도 새로운 것이 나오고 더 뛰어난 것이 나오고, 더 좋은 것이 나오지. 다른 하나는 가능성이야. 나도 언젠가는 벤츠s클래스를 탈 수 있겠지. 나도 언젠 가는 에르메스 한정판 백을 살 수 있을 거야라는 가능성. 열심히 노력해서 돈을 모으면 내가 원하는 신상을 언제든 구매할 수 있다는 가능성. 내가 놓인 현실을 소비를 통해 초월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지만 그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 거야. 현실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초월적'이지만 끝까지 도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환상'인 거야. 그런 점에서 지옥인 거지. 


초월적 환상으로서 자본주의


사람들은 소비를 통해서 자본주의의 물신을 영접하려고 하지만 이 신은 항상 나와 분리되어 있거든. 중세의 신이 내 삶에 충만해 있고, 내 일관성을 유지시켜준다면, 자본주의의 물신은 풍요를 약속하지만  자본주의적 기도, 소비는 항상 일시적 충만감에 머물 뿐이야. 자본주의가 생산하는 것은 끊임없는 결핍이기 때문이야. 자본주의는 그런 점에서 인간을 분열시키는 장치야. 분열을 시켜야지만 통합의 욕구가 발생하거든. 


분열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데 첫째, 내 욕구/욕망을 대상에 직접적으로 투사,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을 매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내 욕구/욕망으로부터 분열될 수밖에 없어. 내가 원하는 책상이 있다면 과거에는 시간을 들이고 노동을 통해서 직접 만들면 되지만 지금은 만들어진 책상 중에 골라야 하거든. 물론 돈이 많다면 내가 원하는 데로 만들어 달라고 하면 될 거야. 하지만 내 노동을 통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만드는 것과 소비를 통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 사이에는 욕구/욕망의 불일치가 클 수밖에 없어.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을 노력을 통해서 성취했을 때의 충만감을 생각해보면 될 거야. 둘째, 집, 가정, 학교, 회사, 고객, 친구, 부모님 등 각각의 사회적 관계로부터 분열될 수밖에 없어.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가정에서의 나, 아들-딸로서의 나, 친구로서의 나, 엄마로서의 나, 직장인으로서 나, 고객을 대할 때의 나'가 사회적 관계가 일관성을 띠지 않기 때문이야. 그러니 나의 정체성은 분열되어 있어. 서로 다른 인격이 마치 당연한 것인 양 되어 있단 말이야. 그러니 자본주의는 분열증을 부추기는 시스템이야. 자본주의의 기계에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면 분열된 존재가 된다는 뜻이야. 학교가 성적을 산출하는 기계라면 자본주의는 분열증을 일으키는 기계인 거야. 그럼에도 특이하게도 자본주의는 분열된 자아 모두를 '동일한 나'로 환원시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독특한 시스템이거든. 



이것은 인간을 끊임없이 분열시키고 파편화시켜야 자본주의가 작동하기 때문이야. 이 분열을 통일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은 성공의 신화를 이루는 거야.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와 같은 성공한 기업가가 등장하고, 박찬호, 박세리와 같은 스포츠 스타가 등장하고, 어려움을 딛고 성공한 가수가 등장하는 거지. TV에는 노력으로 일군 대박 맛집이 등장하고, 주식-부동산으로 수백억을 번 투자자가 등장하는 거야. 이들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분열적 자아를 통일시킬 수 있는 신화적 존재로 등장하거든. 때로는 직장 상사일 수 있고, SKY에 합격한 선배이기도 하고, 억대 연봉의 대기업 직장이기도 한 거야. 그러니 자본주의의 신화는 손에 닿을 듯 생생하게 앞에 그려지는 데, 도무지 닿지 않는 신화인 거야. 그리고 그 신화는 돈을 매개로 무한한 수직적 단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백억을 모아도, 천억을 모아도, 일조를 모아도 내 앞에는 또 다른 신화가 있거든. 그러니 '초월적 환상'인 거야. nCk에서 k를 늘리면 무엇이든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 정규분포의 어느 한 지점에 위치한 것에 불과한 존재인 거지. 그러니 까놓고 이야기할게. 



인간의 내면에 있어 자본주의는 하나의 데카당스야. 진보가 아니라 퇴보거든. 





표면적 심연 


자본주의의 초월적 환상은 인간 개개인에게 자기만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도록 하는 거야. 기존의 역사가 아니라 자기만의 개별적 역사를 그리도록 하거든. 인간이 자기의식을 통해서 자기실현을 하고, 세계를 꿈꾸도록 만드는 거야. 그래서 꿈이 아니라 돈을 버는 직업을 갖게 만들지. 직업은 이루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초월적 환상이야.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명사'를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꿈은 언제나 '동사'로 나타나거든. 무엇인지 모르지만 멋지게 살고 싶고, 평생 책 읽고 생각하고 사유하는 것이 꿈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먹고살 수 없으니 직업을 가지라고 조언하며, 동사로서의 꿈을 명사로서의 직업으로 바꾸게 만들거든. 그러니 직업은 실현할 수 있어도 꿈의 실현은 불가능하도록 하는 거야. 초월적 환상은 결국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구조 속에서 한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거지. 자본주의가 만든 주체를 포섭하는 첫 번째 장치야. 


표면적 심연은 자본주의가 만든 두 번째 포섭 장치야. 이것은 탈역사화를 의미해. 사람들이 '초월적 환상'을 신화로서 받아들이려면 기존의 신화를 해체해야 하잖아. 그러니 탈역사화, 탈맥락화하는 과정이 필요하거든. 바로 표면적 심연이 기존의 신화를 해체하고, '초월적 환상'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장치야. 표면적 심연은 자본주의가 만든 각종 미디어를 통해서 모든 의미를 탈색시키고, 재구성화하도록 하는 거야. 이 과정에서 시간과 공간은 모두 해체되고 표면만 남는 거야. 모든 것이 표면에 병렬적으로 나열되는 것. 세월호 사건과 보험광고가 나열되고,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뮤직뱅크가 나열되고, 빈곤과 개그가 나열되고, 각종 사건, 그림, 이미지, 광고, 소리가 모니터의 화면에서, 지하철의 광고판에서, 버스에서 끊임없이 나열되고 또 나열되는 것. 길거리 광고판에서, 부조리한 정치질서를 이야기하는 팟캐스트와 그 사이에 낀 보쌈 광고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을 넘치는 시청각 정보 속에 끊임없이 촘촘하게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그 많은 시간을 꼭꼭 채워서 텅 빈 표면을 하나의 빈틈도 없이 꼭꼭 채우는 것이 '표면적 심연'이야. 


이 표면은 쾌락과 공포로 채워져 있어. 모든 것이 탈색되어 있고, 클릭을 통해 여기서 저기로 순식간에 넘어가! 심각한 것과 웃기는 것, 기쁨과 즐거움, 아픔과 쾌락이 미친 듯이 뒤섞여 있지. 인터넷의 심각한 사건사고를 보면서 우연히 클릭한 짤을 보면 키득거리고, 정부의 부조리에 신랄하게 욕을 하면서, 동시에 맛집을 검색하는 거야. 귀에는 음악이 들리고, 카톡은 깜박거리면서, 동시에 옆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거든. 모든 것이 표면에 응집되어 있고, 그 표면의 깊이가 너무너무 깊어서 이것은 심연인 거야. 이것은 꼴라주고 동시에 브리꼴라주가 되는 거야. 


이 표면은 너무 거대해서 우리 같은 평범한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거든. 이 표면을 지배하는 자가, 바로 시대를 지배하는 자가 된 거야. 이 표면을 지배하는 것 중 가장 강력한 것은 광고야. 이 표면은 우리의 감각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지배하지. 표면은 자유로운 것 같지만 구조에 의해서, 관리되고 통제되고, 생성되고, 소멸하는 거야. 우리의 감각이 표면에 중첩되면 될수록, 기존의 감각은 해체되고, 표면이 제공하는 감각을 받아들이게 되거든. 하지만 이 표면은 조그만 스마트폰 창에서 구현될 수도 있고, 거대한 전광판에서 구현될 수 있고, 깜깜한 극장 안에서 구현될 수도 있어. 이 표면은 이제 감각을 통제하기 때문에 중독을 불러일으키지. TV를 보고, 유튜브를 보고, 각종 들을 봐야 하는 거야. 아무 생각 없이 TV를 보는 것처럼 말이야. 그래서 이 표면은 깊이가 있어. 사람을 깊숙하게 빠져 들게 하거든. 이 심연에 빠져들면 헤어 나오질 못하는 거야. 이 표면은 너무나 거대해서 모든 것을 빨아들여. 


표면에 갇혀 사는 현대인


그런 점에서 인터넷은 인류의 '뇌'라고 볼 수 있어. 인터넷에는 인류의 의식과 무의식이 있지. 초자아-자아-이드가 있어. 인류가 느끼는 의식과 무의식의 총체가 바로 인터넷이야. 신경이 인간의 몸 곳곳에 연결되어 있듯이. 이제 인류는 인터넷을 매개로 모두 연결되어 있는 거야. 밤에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쳐다보며 잠자기를 기다리는 우리는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뇌의 신경 말단인 거지. 뇌의 표면에 신경이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인터넷에 인류의 감각이 집중되어 있거든. 


이 표면은 인간을 사물로 만드는 힘이 있어. 표면은 인간을 상수로 만들지. f(x)=a, 사물은 의식이 없어. 클릭하는 손가락은 있을지언정 이 손가락은 하나의 사물에 불과하거든. 인터넷 화면에 뿌려진 정보를 무의식적으로 클릭하는 인간, 그것이 제공해준 정보에 따라 웃고, 울고, 분노하는 사물화 된 인간. 표면이 모든 사건을 탈역사화시킬 때,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 또한 탈역사화되는 거야. 맥락을 잃고, 표면이 뿌려주는 정보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사물화 된 인간이 되는 거야. 아니면 인간은 동물이 되는 거야. 표면이 주는 자극에 매몰되어 대상이 주어질 때만 의식하는 인간이 되는 거지. 표면 위에서 인간은 자기의식을 망각하게 되거든. 거기에서 잃어버리는 것은 바로 인간의 초월성이야. 생각-사고-사유를 모두 망각해 버리지. 그 결과 인간은 상상할 수 없는 존재. 상상력을 망각한 존재가 되거든. 


더 나아가서 AI는 인간이 상상하는 모든 것을 인간 앞에 내어 보이거든. 이제 상상력도 AI에게 침범한 시대가 된 거야. 물건을 사고 추가 구매할 제품을 AI가 미리 제공해주고, 운전도 AI가 해줄 거야. 노래도 추천해줄 것이며, 보고자 하는 영상도 알아서 추천해줘. 우리는 손가락으로 클릭만 하면 되거든. 촘촘하게 짜인 표면 위에서 이제 우리는 '클릭하는 존재'가 되는 거야. 



이 표면은 너무나 깊어서 때로는 현기증을 불러일으켜. 계속 그 표면을 쳐다보며 현기증에 빠지는 거야. 검푸른 바다의 보이지 않는 깊이, 옥상에서 아래를 보며 느끼는 일렁거림, 깊이는 사람을 유혹하거든. 그래서 표면 또한 사람을 유혹하는 힘이 있는 거야. 이 표면은 시물라시옹이 되고, 컴퓨터 그래픽이 되고,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세계를 우리에게 펼쳐주거든. 



그러니 '생각하는 주체'는 표면적 심연에 빠져 허우적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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