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생각을 요구하는가!
자기의식이 정신에 도달하면서 그 실체를 <법, 국가, 시대정신>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날 때, 어떤 사람들은 궁극의 자유, 자기실현으로 느낄 테지만 어떤 사람들은 불안 폭력으로 느낄 수 있어. 적극적으로 자기의식을 세상에 투사한 사람은 자기의식이 현실에서 실현되는 과정을 느끼겠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쟤는 왜 저렇게 나대?'라고 말할 수 있는 거야. 자기의식을 가진 주체적인 사람들은 지금의 역사, 현실을 스스로 만들었다고 생각하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법, 국가, 시대정신>은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거든.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해! 세상은 자기의식의 실현이지만 대다수의 사람에게 법, 국가, 정신은 강제로 다가오거든. 또한 태어나보니 대한민국, 입시지옥, 극단적 경쟁인 상황인 거잖아. 그러니 자기의식의 실현을 통해 법, 국가, 정신을 만드는 것이 모든 사람의 자유, 행복, 기쁨, 쾌락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거든. 그러니 자기의식을 통해 이념, 정신을 실현하는 것과 실제로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것은 크게 관계없을 수도 있는 거야. 그러니 문제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아.
그것은 인간이 먼저가 아니라 가정, 사회, 국가가 먼저이기 때문이야. 어떤 사람도 가정, 사회, 국가를 태어나면서부터 먼저 선택하고 고르지 못한다는 거야. 따라서 자유로워지려면 내가 자기의식을 통해 어떻게 정신을 만들어갈 것인가가 먼저 인 것이 아니라,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날 규정하는 이 사회, 구조, 시스템, 체계, 법, 국가, 민주주의, 자본주의 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먼저인 거야. 그렇지 않으면 이 구조 속에서 인간은 자기실현을 한 것 같지만 사실은 이 구조 안에서 국가,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포섭되는 결과에 도달하거든. 즉, 적극적으로 자기실현을 통해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는 데, 알고 보니 더 큰 구조의 일부분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는 거지.
따라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 '주체'의 문제보다 더 앞선 '구조'의 문제를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열심히 노력해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려고 하는 데, 기존의 세계가 너무나 단단하게 우리 앞에 우뚝 서있는 거지. 그러니 사람들은 그 앞에서 절망하거나, 아니면 '가짜 자기실현'의 도취에 빠진 게 되는 거야. 자기실현을 위해서는 '자기의식'을 통해서 세상을 만드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우리를 힘들게 하고, 억압하는 구조를 깨는 것이 먼저거든. 새로운 것을 건설하려면 어쨌든 기존의 것을 부숴야 하잖아. 아니면 고쳐서라도 써야 하거든. 그러려면 어디가 문제인지, 고쳐서 쓸 수 있는지, 아니면 모두 부수고 새롭게 건설해야 하는지 검토하고 따져보아야 하잖아.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바로 이 과정인 거야.
서양의 근대철학은 자신이 이루어놓은 성과에 도취되어 인간을 찬양하고 세상을 자기의 뜻대로 지배하기에 급급했다면, 현대철학은 근대철학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똥을 어떻게 하면 치울까 고민하면서 시작되거든. 인간이 만들어놓은 구조의 폭력성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지가 현대철학의 주요 문제, 쟁점이 되는 거야. 그래서 구조, 시스템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이 현대철학에서 시작되는 거야.
단순화시키면 문제가 있지만 고쳐쓰자는 쪽이 하나 있고, 이제는 새롭게 설계해야 된다, 즉 고쳐서 쓰기 너무 어려우니 부수고, 새롭게 설계하자는 쪽이 하나 있어. 고쳐 쓰는 것은 자기의식이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고 정신이로 진화하는 것처럼, 자기의식의 진화 과정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논의의 구조는 복잡하지는 않아. 이렇게 극단적 전쟁, 구조의 폭력이 이루어진 이유는 이성을 가진 인간이 자기의 이익, 자기 집단의 이익을 너무 중요시 여긴 나머지 타인, 타 집단에 대한 배려, 공존이 부족했다는 거야. 그래서 자기 이익을 챙기는 도구적 이성, 주관적 이성이 아니라, 자기 이익과 공공의 이익을 함께 고려하는 실천적 이성, 보편적 이성을 적극적으로 발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야. 이러한 입장에서 '과도한 국가권력'에 대한 비판, 시민의 견제가 필요하고 그 결과 시민사회운동이나 언론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면서 국가나 권력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거지. 그래서 언론, 시민운동이 전후 유럽과 미국에서 적극적으로 나타나게 된 거야.
특히 언론의 경우, 고발을 통해서 정치권력에 대해 견제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언론은 태생부터 정치권력을 까기 위해서 등장했다고 보면 돼. 하지만 이것은 서구의 역사에서 그런 것이고, 우리의 역사에서 언론은 지배권력에 빌붙어서 성장해왔거든. 그러니 우리나라의 경우 보수언론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민감하게 반영해서 글을 쓰지. 권력에 대한 견제가 아니라 자로 작동하진 않거든. 또한 언론 자체가 이제 거대한 권력, 지배구조의 일부를 담당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권력의 견제로서 언론의 기능은 거의 없어졌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 같아. 오히려 유럽에서 전후 언론의 역할과 비슷한 것이 요즘 많이 듣는 팟캐스트라고 보면 될 것 같아. 이들의 대안 언론이 오히려 주류 권력에 맞서 고발로서 부도덕한 권력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으니 말이야.
어떠한 사회구조가 작동한다는 것은 이미 그 속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야. 그 구조에 혜택을 받는 사람도 있고, 그 구조가 태어나면서부터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할 거란 말이야. 또한 이미 그 구조를 만들고 기획했던 사람들은 기득권이 되어 자기의 구조를 더 강화하려고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할 거야. 따라서 구조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야.
신학기 학급의 보이지 않는 질서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누구 하나 명확하게 서열관계나, 친구관계를 분명하게 규정한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면 적당한 균형점이 잡히면서 구조가 작동하거든. 이 구조를 바꾸려면 첫째, 학교 시스템이 근원적으로 바뀌거나(외재적 강제력) 둘째, 구조를 관리 통제하는 선생님이 강하게 새로운 질서나 규칙을 잡거나(내재적-강력한지도자) 셋째, 구성원인 학생들이 새로운 질서(내재적-자율적)를 만들거나 해야 되거든. 혹시 잘 떠오르지 않으면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내용을 생각해도 괜찮아.
구조는 다른 말로 하면 시스템이야. 구조는 항상 인풋과 아웃풋이 있고, 그 안에서 일정한 균형을 이루거든. 인간도 하나의 시스템이야. 밥을 먹고(인풋), 똥을 싸고(아웃풋). 마찬가지로 자동차도 하나의 시스템이야 기름을 먹고 매연을 배출하고. 국가도 하나의 시스템이야. 입법, 사법, 행정으로 나누어져서 국가라는 시스템을 작동시키잖아. 그리기 위해서 세금을 걷고, 지출을 하잖아. 기업도 하나의 시스템이야. 생산요소를 모아서 물건을 만들고 그 결과 수입을 올리잖아. 그 어떤 시스템이라도 시스템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장치야.
세상의 모든 것은 시스템이야.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은 중첩되어 있거든. 예를 들어볼게! 심장은 혈액을 순환시키는 시스템이야. 허파는 산소를 피에 공급하는 시스템이야. 소화기관은 먹을 것을 소화시키는 시스템이고. 그러니 시스템의 결합이 더 큰 시스템을 만드는 거야. 하나의 시스템은 수직적으로 수평적으로 결합된 여러 시스템의 종합으로 이루어져 있어. 대표적인 사례가 각종 컴퓨터프로그램이야. 프로그램들은 각종 함수의 수직, 수평적으로 결합되어 있거든. 인풋은 반드시 다른 시스템의 아웃풋에서 온 것이고, 아웃풋은 반드시 다른 시스템의 인풋에 사용돼! 그런 점에서 시스템은 여러 시스템 사이에 대등, 교환, 중첩, 포함 등의 관계를 이루고 있어. 그래서 구조는 절대 단순하게 규정할 수 없어. 하나의 구조, 시스템을 변형, 변경, 개혁하는 것이 변경된 시스템에서는 큰 변화이지만, 더 큰 시스템에서는 변화가 아닐 수 있거든.
학급의 질서가 전학생 하나로 바뀐다고 해서. 내가 다니는 학교 시스템이 바뀌지는 않잖아. 물론 미시적인 내 생활이 변할 수는 있지만 거시적인 학교생활은 바뀌지 않거든. 그러니 시스템을 바꾼다고 할 때, 그 시스템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가는 정말 복잡한 문제야. 따라서 우리는 시스템을 바꾸려면 시스템 전체를 설계한 '아키텍트Architect'를 찾아야 하는 거야.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기계와 저항해서 싸우고싸우고싸워서 도달한 것이 아키텍트야. 즉, 시스템 전체의 작동방식을 이해하지 않고는 시스템을 새롭게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지. 열심히 싸워서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었는 데, 사실 그것은 전체 시스템의 일부분일 수 있잖아.
그러니 이제 철학은 '자기의식'에서 탈출해서 자기의식이 만들어 놓은 '구조'에 도달할 수밖에 없어. 따라서 구조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두 가지 접근을 해야 해!
구조를 만든 사람 - 인풋과 아웃풋을 통해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구조에 살아가야 하는 사람 - 구조의 외부가 있는가? 구조를 벗어날 수 있는가?
어떤 시스템이 작동하면 그 시스템은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단다. 예외로 보이는 것도 사실 시스템의 일부인 거야. 어떤 시스템에 예외란 없어. 학교는 등수를 만들어 내는 시스템이야. 일등에서 꼴등까지 등급을 매기는 시스템이거든. 어떤 학생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학생이 예외적인 학생이 아니야. 이미 학교는 모든 학생이 열심하던 말던, 등급은 정해져 있거든. 수능도 마찬가지가 공부를 열심히 하고 말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야. 어떤 식으로든 작동해서 등급을 산출해서 사회가 요구하는 아웃풋, 즉 등급을 매기는 것이 목적이거든. 그러니 시스템을 만든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시스템 속에 들어가는 순간, 그 시스템에 종속될 수밖에 없어. 그래서 시스템은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기계와 같은 거야.
이제 '철학하기'는 주체의 문제에서 구조의 문제로 전환할 수밖에 없는 거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어떤 구조에서 인간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질문은 던지는가? 어떤 구조에서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해야만 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를 묻는지 따져야 한다는 거야. 어떤 구조가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어떤 구조가 자본주의를 요구하고, 어떤 구조가 우리를 입시에 매몰하게 만드는 지를 따져야 한다는 거야. 이 구조를 만든 사람은 어떤 인풋과 아웃풋을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으며, 이 구조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구조의 외부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거야.
철학하기가 구조의 문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은 주체이기 이전에 이미 구조에 의해서 규정되는 존재이기 때문이야. 태어나니 대한민국 국민으로 규정하고, 남자/여자로 규정하고, 학생이라고 규정하는 거야. 이것은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생각하는 문제와 관련이 없거든. 우리는 이미 구조가 제공해주는 것을 선택하고, 구조가 짜여진 대로 살아갈 뿐이라는 거야. 따라서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구조가 먼저 있고, 구조의 요구에 따라 주체가 만들어지는 거야.
그러니 철학하기는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해!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를?
지금까지 '철학하기'가 인간은 누구이고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인간의 자유는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궁금해했다면, 이제 도대체 '누가' 어떻게, 어떤 이유로, 왜 인간은 자유롭다고 규정하는 것인가를 물어야 해! 근대철학이 보편적 인간을 물었다면, 현대철학은 이 시스템을 만든 구체적 인간을 묻는 거야. 예를 들어볼게. 열심히 노력해서 자수성가를 통해 이룬 경영자가 만든 기업과 사기 치고, 위법을 저지르면서 성공한 기업은 돈을 쓰는 방법이 같을까? 동일한 자본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본이 누가,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축적했느냐에 따라 기업의 성격은 달라지거든. 상업자본, 금융자본, 산업자본, 사회적 자본, 민족자본 등 동일하게 자본이라고 불리지만 누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다르게 작동하는 거야. 엄마가 돈 쓰는 방법, 아빠가 돈 쓰는 방법이 다른 것처럼 말이야.
애플의 자본과 삼성의 자본이 똑같은 방식으로 움직일까? 물론 자본을 증식하려는 것은 같겠지만 그들이 작동하는 방식은 다르거든. 둘은 비슷한 시스템이지만 시스템을 만들고 작동시킨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비슷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작동해! 자본주의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자본 자체를 부정적으로 인식해서 무조건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는 데, 내가 볼 땐 타당하지 않아.
모든 시스템은 시스템이 형성되는 초기조건에 상당히 큰 영향을 받는단다. 이것은 f(x)=a+f'(x)에서 a의 값, 즉 초기조건에 함수의 값이 큰 영향을 많이 받는 것과 같아. a는 출발점이야. 1원으로 시작하는지, 1억으로 시작하는지에 따라 엄청나게 차이가 나잖아. 자본이 형성되던 초기에 어떻게 형성되었는가가 기업의 색깔, 특징을 결정하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거야. 그래서 되먹임 구조의 형식을 띄는 사회현상에서 초기조건은 아주 중요해. 초기조건이 최종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야.
농구를 하다가, 우연히도 내가 했던 방법이 잘 된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 방법을 갈고닦을 거야. 수학 문제를 풀다가 잘 풀리는 방법이 있으면 그 방법을 적극 활용할 거야. 영어로 말하는 것을 연습하다가, 이렇게 하면 잘되더라 하면 그 방법에 살을 붙이면서 영어실력을 늘릴 거야. 사람들은 확증편향이 있어서, 자신의 경험과 체험을 강화하려고 하거든. 그래서 초기조건은 모든 시스템에서 아주 중요해! 그리고 이 초기조건은 우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아.
우리의 역사에서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은 모두 권세를 잃고 <꺼삐단 리>처럼 친일, 친미, 친소 하던 놈들이 살아남았잖아. 우리 역사에서 근대 초기를 만든 사람들은 기회주의자들이야. 이들이 대기업을 만들고 군사정권에 빌어먹는 과정에서 우리의 문화, 역사가 형성된 것이거든. 그러니 '양심, 도덕'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사회의 주류로 성장하기 어려운 거야. 그래서 무엇을 시작하든 처음에 제대로 세팅하는 것이 아주 중요해. 나중에 고치려면 정말 힘들거든. 공부도 마찬가지야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처음 공부가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한 정리 안되어 있는 학생은 제대로 된 공부를 시키기가 정말 어렵거든.
예를 하나 더 들어볼게. 미국은 왜 민주주의 시스템이 자리 잡게 되었을까?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민 간 사람이 무려 6천만 명이 넘어. 그중 60%가 미국에 정착했다고 해. 평생 유럽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박 터지게 싸우던 사람들이 자기의 터전을 모두 버리고 최소 한 달 이상을 배를 타고 가야지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아메리카 대륙이야. 이들에게 미국 이민은 '목숨을 건 도약'이거든. 어떤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주했겠니?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는 사람, 유럽에서 박해받는 사람, 더 큰 기회를 바라는 사람들이 미국행 배에 몸을 실은 거야. 이들에게 신대륙은 하나의 이념이야. 새로운 도전이고, 도약이거든. 그러니 이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잔인하게 인디언들을 1억 명 넘게 죽일 수 있었던 거야. 아무런 죄의식 없이 말이야.
19세기 후반은 유럽에서 신대륙으로 대량 이민이 발생한 시대였다. 1820년 이후 100년간 약 6천만 명이 이동했으며, 이 중 60%는 미국에 정착하였다. 19세기 중반까지 ‘구이민’의 출발지는 아일랜드, 독일, 북유럽 순이었고, 이후 이탈리아, 스페인, 폴란드, 러시아 출신의 ‘신이민’이 뒤따랐다. 대량 이민을 초래한 가장 결정적 요인은 이민의 출발-도착지 간의 경제적 격차다. 이것은 좁은 의미로 볼 때 임금격차로 표출되지만 더 넓게 본다면 저렴한 토지, 사회적 평등성, 종교적 자유 등‘광의의 경제적 기회’를 의미한다.
-이철희, 『세계화와 국제 노동 이동: 대량 이민 시대의 미국 이민』
이들은 모두 이주민이고, 모두 이주했다는 점에서 동일한 거야. 그래서 이들은 유럽에서 무엇을 했건 배를 타고 넘어오는 과정에서 서로 동일한 경험을 이미 공유하고 있고, 이것이 이들을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도록 하는 토대를 만들어. 출발부터, 대등한 인간, 평등한 인간의 조건이 갖추어지는 거야. 그러니 대화, 소통, 커뮤니티, 자치회가 발전하는 거야. 이주 초기 미국은 직접민주주의가 잘 실현되었다고, 지역마다 커뮤니티가 자율적으로 형성된 거야. 노동은 노예가 하고, 외부의 적인 인디언이 있었으니까! 유럽에서 이주한 이주민은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민주주의를 실현한 거야. 애초에 역사가 없으니 서로 합의하고 대화하면서 '합리적으로 사회'를 설계할 수 있거든. 그러니 미국식 민주주의는 오랫동안 하나의 땅에서 끊임없는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정치질서와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거야.
따라서 미국식 민주주의는 단언컨대 절대 보편적인 것이 아니야. 미국이라는 특수한 환경에만 가능한 거야. 전 세계에 미국식 민주주의가 실현된 나라는 거의 없어. 그나마 우리가 미국식 민주주의와 유사하거든. 그리고 우리가 미국식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했다고 해서 뒤쳐졌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야. 미국식 민주주의는 미국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타당한 것이 아니거든. 미국이라는 사회의 초기조건이 미국식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한 조건으로 이해해야 해!
따라서 자본주의의 구조를 이해하려면 자본주의가 형성되는 초기조건을 이해해야 해! 강고한 중세적 신분질서, 왕과 교황의 강력한 권력이 어떻게 해서 시민으로 넘어갔는 지를 따져야 하거든. 근대의 출발은 종교개혁, 시민혁명이잖아. 이때의 시민은 부르주아, 상업, 무역 등을 통해서 자본을 축적한 부르주아가 바로 시민이거든. 이들은 도시에서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야. 시민의 뜻은 '도시에 사는 사람'이야.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국민과 이때의 시민은 약간 다르다고 볼 수 있어. 시민혁명을 일으킨 시민은 당시 자본권력을 가진 부르주아라고 보면 돼!
잠깐 다른 이야기하면 사실 국민이라는 말은 바람직한 용어가 아니야. 어원상 '민'은 노예를 가리키거든. '국'이 특정한 영역, 지역을 가리킨다면 '국민'은 나라의 노예라는 뜻이야. 논어에서도 사람인人과 백성민民은 그 의미가 달라. '인'은 양반, 귀족 등 신분이 높은 사람을 가리키고 '민'은 일을 하는 하층민, 노예 등을 가리키는 거야. 그래서 우리나라의 경우 초기에는 '인민'이라는 말을 많이 썼거든. 그런데 이승만이 집권하면서 공산주의자와 대척점에서 서기 위해서 '국민'이라는 말을 썼고 그들이 정권을 잡으니 오늘날 시민적 권리를 가진 사람으로 '국민'의 의미가 확대된 거야.
여하튼,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 권력을 달라고 하면 그냥 주니? 아무리 중세 절대군주가 문제가 있다고 해서 쉽게 시민에게 권력을 넘어가지는 않을 거야. 한 사회의 정치질서는 그 사회의 총체적 이념의 꼼꼼함 결합으로 되어 있거든. 그러니 절대 쉽게 바뀌지 않아.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 중세 봉건제에서 민주주의 자본주의 시대로 넘어왔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지금의 구조를 이해할 수 없거든. 따라서 과거의 절대군주가 휘두르는 권력의 양상과 오늘날 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휘두르는 권력의 양상을 면밀하게 비교해볼 필요가 있어.
절대군주는 강력한 힘, 군사력을 토대로 개인의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있어. 그에게 있어 힘의 근원은 물리력이야. 평상시에 군대를 유지하려면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겠니. 일반적으로 군대를 유지시킬 수 있는 왕이 강력한 힘을 발휘해, 군인들은 전쟁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일도 많지 않단다. 그러니 군인으로 있으면 기본적인 생활이 보장되는 거야. 밖에서 농노로 뼈 빠지게 일하는 것보다 군인이 더 낫거든. 그러니 사람들은 절대군주에게 복종하는 거야. 절대군주는 자신의 힘을 끊임없이 과시해야 해! 자신의 생살여탈권을 민중들에게 보여주어야 하거든. 그러니 절대군주에게 있어 처형은 하나의 공개적, 정치적 쇼가 되는 거야. 강력한 힘을 가진 군주가 공개처형을 통해서 자신의 권력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거지. 웃긴 것은 이 당시에는 군주에게 개기면 그냥 죽였단다. 그래서 당시에는 감옥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어. 감옥은 죽기 직전 잠시 머무르는 공간이었고, 군주는 '죽거나 살리거나'를 선택해서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거지.
중세 봉건제 구조가 작동하는 방식은 강력한 힘을 가진 절대군주에 복종하는 것이 내가 먹고사는 길이 되거든. 그런데 어떻게 이 구조가 근대에 이르러 바뀌게 된 것일까? 시민사회의 성장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당시 부르주아, 시민에게 가장 위험한 리스크는 자신이 모은 재산, 부를 절대군주에게 빼앗기는 거야. <태평천하>에서 '윤직원'이 화적때에게 당하고, 수령에게 당하면서 선대의 재산, 자신의 재산을 잃었잖아. 그런데 지금은 거리마다 순사가 있고, 일제가 우리를 보호해주니 얼마나 좋은 세상이냐고 하면서 바로 일제시대를 '태평천하'라고 말하잖아. 바로 이 윤직원과 같은 사고를 한 사람들이 봉건제를 혁파한 시민혁명의 주역들이야.
셰익스피어의 소설 <베니스 상인>에 등장하는 샤일록을 생각해봐! 안토니오는 귀족 출신이고, 샤일록은 유대인에 악덕 사채업자로 나오잖아. 베니스의 전통, 문화를 지키는 귀족과 자신의 이해관계를 이성과 합리성의 이름으로 관철시키는 샤일록의 대결이거든. 샤일록과 같은 인물이 바로 유럽에서 발생한 시민혁명의 주체야. 이들이 자신이 쌓은 재산을 어떤 식으로든 보호하고 싶었거든. 하지만 과거에는 이들의 힘이 강하지 않았어. 도시의 규모라고 해봤자. 얼마 되지 않았단 말이야. 하지만 지리상의 발견 이후, 교역이 증대되면서 도시 상인들, 유통업자들의 부가 어마어마하게 증가한 거야. 과거에는 절대군주에 저항할 힘조차 없었고 상인이라고 멸시받는 사람이었다면 이제 그들은 경제권력을 토대로 그들의 구조, 세계를 만들기 시작한 거야.
결국 자본주의 초기 도시 상인들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이들이 어떤 생각,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를 잘 이해하는 중요한 지점이 되는 거야. 절대군주에게 있어 선은 국가, 공동체를 잘 운영하는 것에 있어. 그 운영으니 정점에 절대군주나, 교황이 있는 거야. 이와 달리 도시상인인 시민들에게 있어 선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는 것, 어떻게 하면 부를 증대시킬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야. 그래서 이들은 절대군주가 개인의 고유한 권리를 제한하지 않도록 하는 것에 온 힘을 기울여. 또한 이들에게 있어 부는 생존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구원의 길이거든. 생존의 확실성이 보장되어도 이들이 부를 축적하는 이유는 부의 축적이 종교적 구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야. 오늘날 사람들이 먹고살만한데도 왜 돈돈돈 거리니?? 거기에는 돈이 단순히 경제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내 삶에 대한 노력의 징표로서 종교적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야.
여하튼 생살여탈권을 가진 절대군주는 공개처형을 통해 자신의 권력이 실재함을 보여주거든. 하지만 도시가 발전하면서 도시민들은 이 처형을 더 이상 축제로 즐기지 못해. 내가 저기에서 처형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거든. 또한 과거의 범죄는 군주에 대한 저항, 반란의 성격이 많았다면, 도시의 발달과 인구의 증가는 작은 범죄들이 폭증하는 시기란 말이야. 노동력이 필요한 시대에 이제 죽이는 것이 아니라 교화를 통해서 재생산에 기여하는 존재로 만들 필요성이 있었던 거지. 생산력의 증대, 산업의 발달, 교역의 증가, 과학기술의 발달은 더 많은 교류와 소통으로 도시가 중심이 된 사회를 형성하게 된 거야. 도시의 발달, 생산력의 증대는 이제 백성들이 더 이상 절대군주에 의존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거야. 이제 절대군주가 아니라, 도시상인에게 자신의 생존을 의존하는 거야. 그러면서 자본주의는 본격적으로 발전할 토대를 갖추게 된 거야.
오늘날 자본주의는 그것이 진보이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야. 도시상인, 유대인, 유통업자들의 삶의 방식이 절대군주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사람들은 그들의 삶의 방식에 직간접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거든. 그러고 보면 도시민, 시민, 상인의 자기의식이 세계에 자신을 투사하면서 만들어 낸 것이 오늘날 자본주의인 거야. 오늘날 우리가 입는 옷, 양복, 우리가 배우는 학문 모두 어디에서 왔니 서양에서 왔잖아. 바로 이 시기 도시민들의 문화를 전 세계가 받아들인 거야. 전통을 그렇게 강조하면서 왜 격식을 차릴 때는 양복을 입니? 전통을 그렇게 강조하면서 온갖 학문은 서양의 체계를 아무런 생각 없이 받아들이잖아. 이들의 자기의식을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따르기 때문이야.
자본주의는 도시민이 절대군주, 교황에 저항해서 승리를 얻고 그것이 세계화되는 과정인 거야. 이들은 무역, 거래, 계약을 통해서 자신의 부를 축적하기 때문에 이성을 중심으로 한 과학, 기술, 수학과 같은 학문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고, 사회적으로 낯선 개인들의 상호작용에 따른 규칙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법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거야. 근대의 주체철학은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한 거야. 따라서 진보의 결과 자본주의, 과학, 경제가 발전한 것이 아니라 도시상인, 시민, 유대인, 유통업자들이 승리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의 방식인 자본주의가 전 세계로 퍼진 거야.
자본주의의 함수 f(x) = 도시상인 a(초기조건) + 도시상인의 에너지, 강도, 속도 f'(x)
초기 도시상인, 시민, 유대인 등의 생활방식, 문화, 삶의 자세, 태도 등이 자신들의 에너지를 어떤 방향, 구도, 속도로 표출했는지에 따라서 자본주의의 발전방향, 구도, 흐름을 알 수 있거든.
가장 큰 원은 지구야. 작은 원은 집단, 사회, 인간이라고 보면 되거든. 여기서 원들은 하나의 초기조건이야. 이 원들은 자기들만의 에너지, 강도로 확장, 축소, 유지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어. 비슷비슷한 원들 중에서 좀 더 큰 원이 만들어진 것을 중세라고 보면 돼! 중세의 변방에 있던 조그만 원이 커져서 다른 원들을 포섭, 제거, 배제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근현대라고 보면 될 거야. 주의해야 할 것은 화살표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우리의 관점에서 바라본 특정한 상태일 뿐이야. 이것은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은 거야.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 보니 이렇게 보이는 것이지. 고대-중세-근현대의 단계로 변한다거나 특정한 어떤 규칙이나 진리가 있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야. 즉, 어떤 계기로 인해 이 모습은 다른 형태로 쉽게 바뀔 수 있거든. 첫째, 외부적 충격으로 이 질서가 완벽히 없어질 수도 있고, 둘째 내부의 큰 원이 파괴될 수도 있고, 셋째, 작은 원들이 큰 원을 와해시킬 수도 있거든. 앞에서 언급한 학급의 구조를 떠올려보면 될 것 같아.
이것은 지층을 떠올려보면 돼! 지층은 시대순서로 차곡차곡 쌓이면서 암석이 되잖아. 우리가 역사를 떠올릴 때 시대순으로 차곡차곡 쌓인 퇴적층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아. 하지만 차곡차곡 퇴적되다가, 외부의 힘에 의해서 단층이 생겨 그 배열이 흐트러지거든. 따라서 시간의 역순으로 배열되기도 하고, 순서가 바뀌기도 한단 말이야. 어떤 사회건 인간의 모든 성향들이 누적되어 있고, 중첩되어 있고, 생략되어 있다가 특정한 계기로 지층 위로 나타나는 거지. 원래 없던 것이 아니야. 또한 액체-고체-기체와 같은 물질의 상태라고 생각해도 좋아. 물질은 상조건에 따라 특정한 임계점을 넘으면 변하는 거잖아. 고체가 액체가 되고, 기체가 되었다고 해서 진보, 발전했다고 하지 않잖아. 따라서 위의 그림은 특정한 상태, 사건으로 보아야지 진보의 절대적 단계나 법칙으로 보아서는 안 돼! 정확하게 보는 것이 아니야. 또한 이 원들은 프렉탈 구조를 띠고 있고 있는데, 사회현상은 기본적으로 되먹임구조이기 때문이야. 원들을 현미경으로 미세하게 들여다보면 그 원 안에는 고대, 중세, 근현대의 모양이 모두 동시에 들어 있어. 마찬가지로 동양적 문화가 서양에는 없고, 서양적 문화가 동양에는 없는 것이 아니야. 다만 주류, 헤게모니를 장악한 집단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지 모든 사회는 이미 풍성한 다양성을 가지고 있거든.
자! 이제 우리가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수능과 내신을 걱정해야 하는 학생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설계해야 하는 자본가라고 생각해보자. 어떤 것이 가장 좋을까?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말 잘 듣는 사람들이 많으면 가장 좋을 거야.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다 주고,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을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노동자들. 그리고 국가는 자신의 돈벌이에 최대한 간섭을 하지 않거나, 오히려 돈벌이를 더 잘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노동력이 항상 적절한 가격에 공급되고, 쉽게 통제할 수 있으며, 돈을 들이지 않고도 필요한 인력을 마음대로 뽑고, 마음대로 자를 수 있는 세계. 경제가 그 어떤 문제보다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모든 상품의 가격결정권을 자신들이 가지고, 심지어 내가 손하나 까닥하지 않더라도 돈이 차곡차곡 쌓이는 세계를 기대하지 않을까?
우선적으로 이들은 정치적 측면에서 절대군주의 힘을 약화시키려 할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힘,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에게 집중되는 민주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어. 그래서 이들이 추구하는 정치질서는 민주공화제가 될 수밖에 없어. 이들은 중세사회에 변방에 있던 사람들이야. 이들은 더 이상 절대군주의 공개처형에서 권력의 화려한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잔인함, 폭력성을 느끼게 되고, 자신이 쌓은 부에 대한 위협으로 인지하는 거야. 이제 처형은 비공개로 바뀌었고, 권력은 자신의 힘을 드러내는 방식보다는 논리성, 합리성의 이름으로 작동하도록 할 거야.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이들은 다른 어떤 가치보다 경제적 성취를 중요시 여겨. 이것이 바로 이들이 지금까지 생존해온 비결이거든. 이전에는 천대받던 이들에게 경제적 부는 자신의 근면함과 성실성을 드러내는 징표로 작용해. 그래서 이 시대를 지배하는 이념은 힘, 권력이 아니라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지식이야. 어디에 무엇이 있고 이것을 어디에 팔면 그 차익이 얼마가 된다는 지식, 사람들의 필요를 예측하고 그것에 맞는 공급을 할 수 있는 기술, 체계. 무식하게 힘만 센 놈이 지고, 세상을 논리적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예측 가능하며, 미래를 설계하는 지식이 이 시대를 좌우하는 이념이 된 것이지.
사회적 측면에서 이들은 소통 가능한 합리성, 개인과 개인 간의 자유롭고 합리적인 계약, 개인의 대등한 관계를 중요시 여겨. 또한 천부인권에 따른 자유권, 평등권, 행복권, 생명권, 참정권 등과 함께 소유권을 인간이 가진 당연한 권리로서 여기는 사고방식이 나타나는 거야.
또한 이들은 과학적 측면에서 천문학이나 항해술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이해가 누구보다 밝았어. 자연스럽게 과학 또한 당연하게 이들의 몫이었지. 유명한 과학자들 중 상당수는 유대인이었단다. 상당수 유대인이었던 이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가족끼리 똘똘 뭉치는 성향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 이들의 가족주의의 모습을 띠고 있거든. 성에 따른 역할 구분, 아이, 어른이 해야 할 역할 등이 가족 안에서 명확히 구분되는 거야. 유대인의 탈무드는 이들이 지켜야 할 규율과 같은 것으로 이들의 정체성, 방향성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어.
여하튼 근현대는 도시상인, 유통업자들이 자신의 에너지, 강도를 마음껏 발휘에서 전 세계의 수많은 사회, 집단, 개인, 가족들을 포섭하고 있고, 동시에 일부는 배제하고 있는 상황이야.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 이유는 그들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만 큼 매력적이기 때문이야. 그들의 매력이 돈이건, 권력이건 간에 사람들이 도시 상인이 그린 미래에 매혹되지 않으면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을 거야. 이러한 경향들은 누군가가 주도적으로 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의 생산력이 상업, 산업에 의해서 집중되면서 나타나는 동시다발적 현상이야.
즉, 이들은 시대의 아방가르드였던 거야. 이들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따른 거지. 이들이 돈만 밝힌 사채업자였다면 누가 이들을 따르겠니? 이들은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 거야. 새로운 물건, 기술, 지역, 맛을 열었거든. 우리가 한 때 미국 문화에 열광했던 것처럼 바나나, 피자, 맥도널드, 스팸에 열광했던 것처럼 근대는 상인, 자본가, 도시 시민들이 만든 장터인 거야. 시골 오일장을 일상화한 것이 근대야. 매일매일 축제가 열리고 판타지를 실현하는 공간으로서의 도시를 바로 이들이 만들었거든.
이들의 권력은 미시적으로 작동해. 절대군주의 권력이 거시적이고 과시적인 형태로 작동했다면, 이와달리 이들의 권력은 소리 소문 없이, 작동했는지도 모르게 작동해. 중세에서 산업은 농업, 가내수공업 형태라서 거대한 구조를 이루고 있지 않아.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공장에 모여서 필요한 물건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분업화하면서 생산성을 극대로 끌어올리거든. 따라서 통일된 행동, 신체적 제약이 반드시 필요하게 돼! 다양성을 제거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필수적 전제가 되는 거야.
예를 들어 공장이 돌아가는 데, 이들이 쓰는 언어가 다르고, 생활방식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면 생산성이 오르겠니?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광장에 시계가 설치되고, 그 시간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각인하게 되는 교육이 실행되지. 수도원의 일과표가 학교, 공장에도 똑같이 적용되면서 신체를 통제하는 규율을 만들고, 바람직한 자세로 앉는 법, 효율적으로 일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거야. 성적, 품행에 따라서 개별 학생, 노동자들이 기록 관리되며, 그 기록을 토대로 서열을 매기고, 성취동기를 부여하지. 그래서 매 순간 학생, 노동자, 환자는 끊임없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주입받는 단다. 자아는 사회적 요구를 잘 수행하는 '우월한 나'와 '열등한 나'로 분열되고 '열등한 나'는 학교, 부모, 상사,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부응하지 못하면서 양심의 가책, 죄책감을 느낀단다. 이러한 모든 과정이 이성, 합리성의 이름으로 진행되거든. 그러니 여기에 저항하기가 어려운 거야. 논리가 있거든.
감옥에서는 일망감시체계가 작동해. 가운데 감시탑에서는 감옥 안의 상태를 볼 수 있지만, 죄수는 감시탑 안에서 나를 감시하는지 어떤지 모르거든. 그런데 문제는 감시탑에 간수가 없어도, 죄수들은 마치 간수가 있는 것처럼 조심해서 행동한다는 거야. 나를 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간수가 있건 없건 조심조심 생활한다는 거지. 자습시간에 선생님이 뒤에 있을 때, 딴짓을 못하는 것처럼, 학생은 앉아 있고, 선생님 서서 강의하는 교실의 구조에서, 관리자는 위에 있고 노동자는 일을 하는 공장의 구조에서, 사장은 보이지 않지만 사장실 안에서는 밖이 보이는, 이와 같은 일망감시체계는 오늘날 각종 cctv로 구현되어 있고, 이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이 구조 속으로 편입되거든. 각종 sns에 내가 무엇을 하는지 스스로 보여주면서, 나를 스스로 구속하는 거야. 이러한 구조는 모두 일망감시체제와 같은 감옥 구조를 띠고 있거든. 이 속에서 길들여진 사람은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제 감시탑이 없어도 알아서 조심하는 생활을 한단다. 양심이 내 속에서 이렇게 해, 저렇게 해!라고 시키거든. 감시의 내면화 바로 양심이야. 근대적 양심은 근대적 구조, 시스템 속에서 만들어진 거야.
이 양심은 학교에서의 성적, 공장에서의 생산성, 병원에서의 건강, 군대에서의 규율로 나타나. 근대 이전 그 어떤 곳에도 이러한 대규모의 신체에 대한 규율은 없었거든. 유일하게 있었던 곳이 바로 수도원이야. 이 수도원의 규칙, 생활규범을 학교, 군대, 병원, 공장 등으로 확대되면서 사람들은 내 몸에 대한 통제권을 생산, 효율, 건강, 과학의 이름으로 잃게 되는 거야.
자 이제 도시상인, 시민, 부르주아, 자본가들은 아주 좋은 환경을 만들었어. 학교에서 공부하고 나온 아이들은 순종적 신체를 가졌거든 이들의 신체는 50분 일하고 10분 쉬는 것에 최적화되어 있단 말이야. 그리고 적절히 보상을 하면 말도 잘 들어. 심지어 감시 감독을 하지 않더라도 '양심'에 근거해서 이탈하지 않거든. 간혹 이탈자가 생기면 교화를 시키고 그래도 노동자로서 일을 하지 못하면 '정신병'이라는 이름으로 격리시켜버리면 되는 거야. 근대의 미시적 권력 장치는 거대하게 작동하지 않고, 과학, 건강, 생명, 효율성, 합리성의 이름으로 미시적으로 작동하거든. 그러니 거부하고 저항하기 힘든 거야. 그리고 이 장치에 잘 순응하면 적절한 보상도 준단다. 승진도 시켜주고, 좋은 대학도 보내주며,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연봉도 주거든.
과거 중세사회에서는 광인, 난쟁이, 장애인 등이 모두 한 마을에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단다. 하지만 근대는 노동을 하지 못하는 정신을 가진 사람은 규율을 통해 양심을 내면화할 수 없기 때문에 이제는 사회에서 배제되어버리고 격리되어버리는 거야. 그래서 이들은 환자가 되고, 정신병자가 되는 거지. 과거의 절대군주는 이런 것에는 아예 무관심했단다. 이들은 나에게 복종하느냐 하지 않느냐, 세금을 잘 내느냐 마느냐 외에는 큰 관심도 없었고, 그들의 삶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지도 않았어. 하지만 근대를 만든 이들은 미시적 권력을 작동시켜 끊임없는 감시, 통계, 계량화를 통해서 인간을 적절히 통제 가능한 상태에 놓이도록 끊임없이 연구하고 규정하거든. 그래야 가장 효율적으로 자신의 원하는 세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야.
이들은 우리를 '대상화'한 거야. '스스로 생각하고 사고하는 존재'로 대상화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하나의 장치가 되도록 만든 거야. 더군다나 미시권력은 우리들의 자기의식을 일깨우지! 넌 동물이 아니야. 하나의 주체라고. 그런데 왜 이렇게 수동적으로 늘어져 있니. 열심히 공부하고 자아실현을 해서, 너의 세계를 만들라고! 세계에 너 자신을 던지란 말이야. '최선을 다해'라고 말하면서 세계에 '투사'하길 요구해! 성적을 올리고, 더 큰 집을 사고, 승진을 하라고 하는 거야.
미시권력은 주체의 자기의식을 근대적 양심으로 만들어버리거든. 세상에 나온 모든 자기계발서의 문제점이 바로 이것이야. 너도 열심히 하면 스티브 잡스가 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고, 스카이 갈 수 있어. 그래서 자기계발서는 '초월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 거야. 현실을 초월할 것 같지만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환상과 같은 거야. 이쯤에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자유로운 존재로서 인간, 세계와 인류, 시대정신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열망은 진짜 인간의 열망인가 아니면, '이들이' 만들어낸 사고방식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의심을 통해서 인간이 자신을 초월하여 세계를 구성하도록 만드는 계기였다면, 이제 이러한 생각을 하도록 한 사람은 누구인지 물어야 하는 거야.
이제 '철학하기'는 '누가 나에게 생각을 강요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