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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Sep 16. 2018

나를 초월하는 인간 되기

이념에 대하여




주체의 완성, 타자의 출현 


사춘기가 되면 부모님과 사소한 것으로도 충돌하잖아. 부모님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충돌하기 때문이야. 감각의 대상화에서 충돌하는 거지. 나와 엄마가 방을 정리하는 방식에서, 옷을 개는 방식에서, 화장실에 똥을 싸고 물을 내리는 방식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머리카락을 치우는 방식에서 주체의 완성은 필연적으로 타자의 출현을 의미해! 이것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거야. 자기의식을 가진 존재는 이제 자기의 완결성, 자기의 세계를 만들려고 하거든. 자기만의 왕국을 세우려는 거야. 그런데 세상에는 이러한 자기의식을 가진 존재가 나만 있는 것이 아니잖아. 아빠, 엄마, 선생님.... 자기의식을 가진 존재가 자신의 세계를 만들면 만들수록 타인이 만든 세계와 부딪칠 수밖에 없거든. 


사람이 결혼을 하고 같이 살게 되면 혹은 친구와 기숙사, 자취를 하게 되면 우리는 서로 다른 삶의 방식에 서로에게 충격을 받는단다.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이혼하는 사람도 있고, 사이가 나빠지는 친구도 있고. 이 상황을 지속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결혼생활, 동거생활을 유지하는 거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서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경계를 잡거든. 절대 양보 못하는 부분, 양보할 수 있는 부분. 그래서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 경계가 생기는 거야. 사람들은 모두 감각을 다루는 자기만의 방식이 있거든. 그 방식이 충돌하면 리듬이 깨진단 말이야. 이것을 일치시키기란 사실상 정말 어려운 거야. 이 어려운 과정을 거치고 나면 서로가 서로를 용인하는 새로운 질서가 생긴단다. 



학기초를 떠올려보면 짝이랑 경계를 나누고, 민감한 서열싸움을 하고, 학교에서 나대는 애, 지질한 애는 누구고, 조용한 애는 누구며, 힘 좀 쓰는 애는 누군지 탐색전이 이어지잖아. 당연한 거야. 그러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규칙이 생기거든. 이것은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면서도 상호 용인 하에 이루어지는 거야. 이것은 마치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균형 가격을 찾아가는 것과 비슷해. 내가 영향을 미치면서, 동시에 내가 영향을 받는 그런 되먹임 구조야. 나의 행동에 누군가가 영향을 받고, 영향을 받은 누군가는 또 누군가에 영향을 주고, 그 영향을 받은 친구가 나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 학급 내의 보이지 않는 관계, 구조가 만들어졌는지 단언하기 힘들어. 하지만 분명한 건 그 구조에 내가 동참했고, 어떤 식으로 내가 만들었다는 데 일조했다는 거야.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변화는 불가능하거든. 



물질은 고체, 액체, 기체 상태가 있어. 이 상태는 온도와 압력에 따라 변하거든. 신학기 새로운 학급은 위 그래프의 삼중점에 있는 상태야. 다양한 요인이 작용해서 '기체'처럼 자유로운 개인의 형태로 학급이 운영될지, '액체'처럼 느슨한 형태의 자율적 구조가 생길지, '고체'처럼 정해진 시스템과 규칙으로 바뀔지는 학급 구성원의 상호작용. 담임선생님의 성향, 학교 전체의 분위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거든. 그런데 이 보이지 않는 질서가 한번 자리 잡히면 어지간하면 균형을 유지한단다. 외부적 개입, 새로운 전학생이 오거나 혹은 누가 전학 가거나, 아니면 학교 시스템이 바뀌거나 하지 않는 이상 이러한 질서는 지속적으로 유지될 뿐만 아니라 강화되는 경향이 있거든. 기체가 액체가 되고, 액체가 고체가 되는 상태변화는 특정한 임계점을 넘을 때 발생하는 데, 마찬가지로 관계의 상태가 특정한 임계점을 넘게 되면 충돌이 일어나고 상태의 변화가 일어난단다. 그래서 한 번 정해진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한 거 야. 





이성의 작용 


우리의 이성은 이러한 상황을 조율하고 관리하고 통제하고 기획하거든. 우리의 이성은 단순히 자기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학급 안에서 나의 위치를 규정한단 말이야. 이성은 전체 속에서 나를 규정하는 의식으로 작동해! 학급이라는 하나의 공동체 속에서, 가정이라는 부부 사이의 관계 속에서 습관이든 관성이든 나는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해야 할까를 묻는 사고. 공동체 속에서 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묻는 이성. '나는 나야'라고 규정하는 개별적인 자기의식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자기를 규정하기 때문에 이성을 '공동체 속의 자기의식', '보편적 자기의식'이라고 규정할 수 있어. 이성은 자기의식을 초월해서 더 넓은 범위까지 자기의식을 실현하도록 하거든. 


그런데 우리의 이성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 해! 첫째, 공동체 속에서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이야. 커대란 대의명분보다, 지금 당장 학교, 학급이라는 관계에서 내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거야. 거기에는 본능적으로 나의 위치, 타인에 대한 판단, 나의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생각하거든. 그러니 이성은 내 감각과 경험에 기반하지 않은 추론을 하는 거야. 즉, 이성은 '내가 경험하고 감각한 것을 넘어서는 종합적인 생각'을 의미해. 내가 모르는 것도 추론, 유추해서 대응하고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뜻해. 그래서 인간이 혼자 완전히 자립적으로 살지 않는 한. 자기의식은 이성으로 진화할 수밖에 없어. 


둘째, 이성은 나의 이익과 공동체의 이익을 일치시켜서, 자기의식을 실현하는 방식으로 작동해! 나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공동체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택하는 거지. 그래서 우리의 이성은 이 공동체를 어떻게 하면 잘 구성할 수 있을까? 충돌 없이 잘 돌아가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단 말이야. 예를 들면  '학급이 잘되기 위해서',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와 같은 표어, 이념을 도출해서 공동체 구성원들과 조율하는 거야.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학급규칙을 만들고, 법을 만들어 구성원이 모두 이 규칙, 규범을 따르도록 하는 거지. 그러니 두 번째 이성은 최종적으로 구성원들이 동의할 수 있는 특정한 이념을 도출할 수밖에 없어. 그 결과 법, 윤리, 규칙이 생기는 거야. 


공동체 속에서 나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것은 도구적 이성, 주관적 이성이라고 볼 수 있다면, 공동체와 나의 이익을 일치시키는 이성을 실천적 이성, 보편적 이성이라고 볼 수 있어. 이성은 나의 조건과 주변 현실을 종합해서 최선의 선택을 하려는 인간의 정신활동이야. 그러니 이성은 현실에 기반하지만 동시에 현실을 초월하는 정신활동이라고 할 수 있어. 이러한 이성의 활동을 통해 우리는 현실의 문제를 극복하는 거야. 


이성은 처음에는 학교와 같은 작은 공동체를 통해 기반으로 형성되지만 점점 상호작용하고 확대되면서 지역, 국가, 민족, 세계에 이르는 단계에 도달할 거야. 인터넷이 발달하고, 소통, 교류가 증가할수록 그 속도는 빨라질 거야. 엄밀하게 말하면 지역, 국가, 민족, 세계와 같은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야.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의 이념이 실현된 것이야. 그것은 자기의식이 부조리에 저항하기 위해서 하나의 이념으로 요청한 결과인 거야. 즉, 시민의 요구로 지역의 이름을 바꿀 수도 있고, 경기도였다가 서울이 될 수도 있으며, 남한과 북한이지만 통일이 될 수도 있는 거라고. 그러니 애당초 지역은 없어. 우리의 이념이 마치 지역을 객관적 실체인 거처럼 인지되도록 할 뿐이야. 우주에서 보면 지구의 땅 어디에도 국경선이 없단다. 





옆 학교와 축구시합을 할 때, 기아와 롯데가 야구시합을 할 때, 국가대표 시합을 할 때, 올림픽을 할 때 좀 더 나아가 극단적인 전쟁으로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이 대립할 때 우리는 하나의 이념인 승리를 위해 뭉치게 되어 있거든. 여기에 뭉치지 않으면, 넌 왜 그러냐며 질타를 받을 거야. 자기의식은 이성으로 진화되고, 이성은 이념을 만들고 이념은 최종적으로 전체 인류를 통합하는 정신으로 진화할 거야. 인간의 교류가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이러한 보편적 정신을 더 많이 요구할 거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이러한 보편적 정신이 더 많이 반영될 거야. 




'인류의 보편적 관점에서, 인륜적 차원에서'와 같은 말을 쓸 때. 시대정신, 촛불정신, 민주주의 정신, 기업가 정신과 같이 우리가 '정신'이라는 말을 쓸 때, 인간의 생각, 이념이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자기실현을 한 것으로 보면 돼! 우리 헌법 제일 앞에 뭐라고 나와 있니?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3.1 운동, 4.19 이념을 계승한다'라고 명료하게 나와 있잖아. 법은 인간의 이성이 자기의식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을 종합한 최종적이고, 구체적인 결과물이기 때문이야. 이념이 없는 법은 없단다. 그래서 부조리를 자각한 자기의식은 이성을 매개로 세상을 향해 자기를 '투사'하는 거야. 자기를 던지는 거지. 이것은 세계 속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시킬 이념, 정신을 만드는 거야. 그래서 투사는 자기의식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를 적극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드는 행위야. 



그래서 '투사하라!' 반항하는 인간의 세 번째 길이 되는 거야. 





이념의 폭력성 


앞에서 언급한 내용들은 근대 관념론을 정리한 거야. 생각이 어떻게 자기실현을 통해서 세계를 변화시키는 가에 대한 내용이거든. 단순하게 말하면 관념론이고, 주체철학이라고 볼 수 있어. 어떻게 인간을 세계 속에서 '주체'로 정립시키고 더 나아가서 세계를 만드는 가에 대한 문제거든. 그래서 근대철학을 주체철학이라고 하는 거야. 


솔직히 말하면 난 이들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아. 하지만 이들이 위대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인간이 위대 해지는 지점을 면밀하게 탐구한 사람들이거든. 그런 점에서 관념론은 보수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높아. 지금 위대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이 자신의 힘, 능력, 권력, 자본을 옹호하는 논리로 쓰일 가능성이 있거든. 그런 점에서 관념론은 보수의 철학이야.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이 만큼 왔다고, 너도 열심히 하면 될 거 아니야!' 이와 같이 말하는 사람들의 기본 논리는 앞에서 말한 '자기의식이 세계 속에서 자기를 실현'하는 것과 같은 논리 구조를 가지고 있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보의 논리도 이것과 같아. 대상의식→자기의식→이성→정신으로 진화하는 과정이 진보라고 보는 거야. 이 진보의 끝에 와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덜 진보된 사람을 돕고, 구원한다는 선민의식을 가진 경우가 많거든. 아프리카의 원시사회보다, 베트남보다, 남미보다 우리가 더 진보했으니 우리는 잘난 거야. 반대로 선진국인 미국, 유럽 등지에는 열등감을 느끼지. 남들보다 자신이 진보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을 시대 이념, 시대정신을 실현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러 들거든. 그래서 자기의식을 가진 존재의 자기실현은 파시즘, 독재로 갈 수밖에 없는 위험성이 있어. 독재는 강력한 자기의식의 실현, 주인으로 우뚝 선 남성성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해. 강력한 지도자에 복종하는 대중과 이를 추종하는 세력들은 항상 시대정신의 모습으로 나타나거든. 


아이에게 회초리를 들면서 엄마는 말하지 '다 너 잘되라고 때리는 거야', '네가 아프면, 엄마의 마음은 찢어져' 자기의식을 가진 엄마가 자신의 이념,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아이를 때릴 때, 학교 선생님이 학생을 야단칠 때, 회사에서 상사가 야근을 시키며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야라고 말할 때, 국가가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개인을 억압할 때, 모두 동일한 논리가 작동하거든. 이 극단적인 사례가 나치즘이야. 국민들은 강력한 독일을 원했고, 히틀러는 빈틈을 잘 노리고 적절한 선전, 선동으로 나치는 독일 국민의 시대정신이 된 거야. 92.11%의 전폭적 지지로 당선된 히틀러. 히틀러는 세계에 투사하여 자신의 제국을 만든 거야. 


1933년 11월 12일 독일 총선


이것은 독일 국민들이 강력하게 원한 거야. 누구는 속았다고, 말하고 싶겠지. 혹은 이럴 줄 몰랐다고 말하고 싶겠지. 하지만 시대정신이 폭력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야. 이것은 동전의 양면이야.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1928)'과 김구의 '나의 소원(1929)<백범일지>'은 비슷한 시기에 쓰였어. 읽어보면 둘 사이의 논리적 유사성이 아주 크단다. 오스트리아의 독일계 가정에서 태어난 히틀러는 핍박받는 독일을 보면서 위대한 독일을 만들기 위해 정당을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강력한 독일을 위해 자신의 '투사'하거든. 그래서 히틀러는 독일 민족주의의 선봉에 선 지도자가 된 거야. '나의 소원'도 읽어보면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길 원한다는 민족주의의 이념이 강하게 들어 있어. 



근대에 발명된 각종 **주의는 어떤 이념, 정신을 담고 있어. 이들은 서로 다른 듯 보여도 사실은 하나야. 동전의 양면일 뿐이거든.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나의 이념이 다른 어떤 것보다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지. 자본주의, 민주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과학주의가 관념의 진화 과정에서 자신들이 최고 정점을 찍어야 한다는 거야. 그러니 이들의 사고구조는 아주 유사해! 좌파와 우파가 서로 극단적으로 싸우는 듯 보여도, 이들은 비슷한 지반 위에 서 있거든. 그러니 좌파인 사람이 어느 날 우파의 선봉대로 가 있고, 우파인 사람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좌파진영에 머무는 거야. 


그래서 **주의라는 말이 나오면 '**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고방식'으로 이해하면 돼! 우리는 자본주의, 민주주의라는 말을 자주 쓰기 때문에 '자본, 민주'라는 것을 하나의 실체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 수많은 '주의'는 인간의 사고방식에 불과해, 다만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여겨져서 우리는 그것이 특정한 사고방식임을 망각하거든. 예를 들어 자본주의는 자본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고방식이야. 그냥 단순하게 돈이라고 생각해볼게!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은 돈의 유무로 판단되는 거야. 민족주의는 민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고방식이야. 다른 어떤 것보다, 민족의 통일성, 정체성을 형성하고 유지, 확대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길 거야. 마지막으로 과학주의는 과학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고방식이야. 사람 사이의 정, 꽃의 아름다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이들에게는 '꽃은 어떻게 피는가, 어떻게 분류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거지. 여하튼 우리가 **주의라는 말을 쓸 때, **주의를 이념이라고 이야기해! 





폭력과 성스러움 


이념은 희생양을 먹고살아.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서 노동자의 희생을 당연시하고,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 타민족은 억압하고, 공산주의를 위해서 다른 당을 와해시키거든. 이들의 희생은 성스러운 제의의 모습을 띠거든. 


사랑하기 때문에 때리는 거야. 

기업의 발전을 위해서 

민족의 영원함을 위해서 

선진국에 도약하기 위해서 


극단적 폭력은 항상 선의 모습으로 나타난단다.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도 그것이 폭력인지 모르는 거야. 서로 극단적으로 충돌하는 두 사람을 생각해보자. 한쪽이 자기 스스로도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면 극단적인 충돌이 일어나지 않아. 서로가 올바르다고 확신하는 순간, 극단적 충돌이 발생하거든. 그래서 자기의식이 세계에 자기를 투사할 때 폭력성을 띨 수밖에 없어. 이것은 이성이 가진 폭력성이야. 이성은 세상 모든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세계를 자신의 이념에 맞게 대상화하거든. 그 대상화 과정에서 많은 것은 배제가 되어버리는 거야. 


공부는 못하지만 노래는 잘하는 내가 배제되고

이익은 되지 않지만 기업의 미래 먹거리가 될 뛰어난 아이디어가 배제되고 

다른 민족의 뛰어난 창의성이 배제되고 

지켜야 할 전통이 배제되고 


그런데 배제는 항상 숭고함으로 나타나, 위대한 희생으로 나타나거든. 고사상에 돼지를 올릴 때. 심청이가 효의 이념을 위해 인당수에 빠질 때. 마을의 안정을 위해 처녀를 재물로 받칠 때. 민족을 위해 자살폭탄 테러를 시도할 때. '국가, 이념, 정신'은 이런 방식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단다. 



1억 이상의 희생자를 낸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 학살 

600만을 죽인 나치의 유대인 학살 

참전국 250만 명 사망, 희생자 80%가 민간인인 한국전쟁

30만을 죽인 일본의 난징학살

100만의 희생자, 700만 난민을 발생시킨 발칸반도 내전 


20세기 '국가, 이념, 정신'은 끔찍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학살을 숭고의 이름으로 진행했단다. 그리고 지금도 진행하고 있을 거야. 이러한 일들이 바로 정신의 위대한 승리를 나타내는 근대에 일어난 거야. 자기의식의 위대한 승리는 궁극적으로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흐를 가능성이 아주 높아. 혹자는 잘 관리하고 통제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해. 그래서 시민사회를 키우고, 언론을 활성화하고, 소비자운동을 하면 되지 않겠냐고 말해. 단언컨대 궁극적 해법이 아니야. 현실의 권력은 끊임없이 진보하고, 재생산되며, 관리되고, 통제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순식간에 변신하거든. 그러니 이 싸움 절대 쉽지 않아. 더군다나 이들은 이성과 감성을 매개로 논리적으로 설득하기 때문에 순식간에 동화된단다. 그러니 정신 차리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폭력을 휘두르는 작은 히틀러가 되고, 이명박이 되고, 박근혜가 되는 거야. 



이명박은 세상을 돈, 이익 중심으로 보고, 자기의식을 적극적으로 실현한 인물이야. 그리고 속였든, 설득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10명이 나온 대통령 선거(2명사퇴)에서 절반에 가까운 48.7%(11,492,389/23,732,854) 투표자가 이명박을 찍었어. 그가 대통령에 나올 때, 이미 전과가 10개나 넘게 있었다고 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표자의 절반은 이명박을 찍었거든. 이명박은 자기의식을 세계에 투사하여 적극적으로 자기의 세계를 만든 거야. 안타깝게도 그것을 바로 우리 국민이 원한 거야. 독일 국민이 나치를 원했듯이 우리도 이명박을 원한 거야. 이명박을 원한, 그리고 이명박처럼 되길 바란 우리의 자기의식이 이명박을 만든 것이거든. 그러니 이명박은 어떻게 보면 이명박을 찍은 우리의 꼭두각시인 거야. 자기의식을 강조하는 주체철학은 언제든 이명박 같은 사람이 나타날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어. 그리고 그것은 조심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야. 폭력은 성스러움을 매개로 나타나거든.   





악의 평범성 


우리는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가!'라며 탄식을 해. 철학자 한나 아렌트도 똑같은 질문을 하거든. '어떻게 잔인하게 6백만이 넘는 유태인을 죽일 수가 있지?' 아이히만은 나치 유대인 수송을 책임지며 유대인 학살에 적극 가담한 사람이야. 1963년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참관하면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잔악한 악마가 아니라, 평범한 관료에 불과하다는 알게 돼! 국가가 시킨 것을 충실히 수행하는 관료. 영혼 없이, 나에게 주어진 일을 착실하고 성실하게 해내는 관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거야. 심지어 학살을 집행하기 전에 유대인과 자유롭게 대화하고 그들의 걱정을 함께 염려해주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거지. 


아무리 개인이 착하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도 그가 속한 사회가 악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도록 구조화되어 있다면 개인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악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어. 환경을 아무리 보호하고 싶어도. 사회가 환경을 오염시킬 수밖에 없도록 구조화되어 있다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환경을 오염시킬 수밖에 없는 거야. 차를 타기 싫어도 출퇴근하려면 1시간 이상을 가야 하고, 1회용 종이컵을 쓰기 싫어도 커피를 마시려면 쓸 수밖에 없고, 각종 포장지의 낭비가 싫어도 택배를 주문하면 2~3겹의 포장지와 뽁뽁이를 받을 수밖에 없거든. 그러니 아렌트는 현대사회의 악은 구조에 있으며, 그 구조 속에 살아가는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악'하거나 '선'하게 될 수 있다는 거야. 


우리 사회의 구조는 '우리를 악하게 만들까? 선하게 만들까?' 학생부종합이 도입되면서 학교는 극단적 경쟁의 양상으로 바뀌었고, 아파트와 같은 독립된 주거공간이 생기면서 사회적 연대감은 사라졌고, 등학교 출퇴근길에 늦지 않으려면 경쟁적으로 뛰어야 하고, 줄을 서야 하는 이 구조는 매 순간 우리도 모르게 우리를 악하게 만들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단다. 그러니 악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단다. 


-Zdzislaw Beksinski, <vomit>


난 위의 두 그림이 같은 그림으로 보여. 히틀러에 경배하는 독일 국민. 거대한 얼굴, 그의 입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가는 벌래 같은 인간들. 국가사회주의의 거대한 모습 앞에 스스로 노예가 되고, 종이 되면서 하일 히틀러를 외쳤던 독일 사람들과 뭐가 다르니? '국가, 사회, 이념'은 끊임없이 우리를 대상화한단다. 때로는 국가의 일꾼으로, 군인으로, 직장인으로...



그러니 저항은 내 감각으로부터, 세상이 규정하는 대상화에 대한 투사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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