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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Sep 09. 2018

반항하는 인간의 길

감각하라!




대상화하라!


자기의식을 가진 반항하는 인간의 길, 첫 번째 길은 대상화야. 대상화라는 말이 조금 낯설지만 절대 어려운 말이 아니야.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한다', '인간을 대상화하면 안 된다'와 같은 말을 할 때, 대상화라는 것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상대를 규정하는 것을 뜻 해! 친구들이 나를 보고 '바보'라고 부를 때, 친구들은 나의 수많은 모습 중에서 '바보'같은 모습 만으로 대상화한 거야. 장님들이 코끼를 만지고 나서, 절굿공, 돌, 무, 널빤지, 통나무로 대상화하는 거야. 그러니 대상화는 나만의 방식으로 대상을 규정하는 거야.


인간은 대상화하지 않고는 살지 못한단다. 그러니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대상화하는 것 자체를 나쁘게 보아서는 안돼! 어떤 사람은 세상을 보면서 '돈'될 것을 중심으로 세상을 대상화하고,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면서 대상화 하면서 예술작품을 만들고, 연애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성을 중심으로 세계를 대상화할 거야. 그러니 대상화 자체는 문제가 아니야. 똥인지 된장인지 우리는 대상화해야 해! 먹을 수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내 맘에 드는지 안 드는지 끊임없이 대상화를 해야 해! 그래야 우리는 선택을 할 수 있거든.


대상화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누군가가 대상화를 해주게 되어 있거든. 이거 먹어, 대학은 어딜가, 수행평가는 이렇게 하고, 학원은 여길 다니며, 내가 시킨 대로 움직여! 어릴 때는 부모, 학교에서는 선생님, 대학에서는 교수나 선배, 사회에서는 직장상사가 언제든 나 대신 대상화를 해주거든. 하지만 나 스스로 대상화를 하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가 된단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대상화하는 연습을 해야 해!


잠깐 사족으로 이야기하면 남성이 여성을 혹은 여성이 남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인류는 멸망할 거야. 성적 대상화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야. 현대 자본주의 문명은 이 성적 대상화의 욕망을 금기시하고 억압하면서 교묘하게 소비의 논리로 치환하거든. 그런 가짜 교양에 휘둘리면 안 돼! 자본주의는 세상에 대한 인간의 모든 욕망을 자본에 대한 욕망으로 치환하거든. 그래야 자본주의가 작동하기 때문이야. 마찬가지로 인간을 노동자, 일꾼, 글쟁이 등으로 대상화하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먹고사니? 그러니 대상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상황과 맥락에 맞지 않는 대상화가 문제인 거야.


또한 매 순간 대상화는 바뀐단다. 나는 가정에서는 가장, 학생들 앞에서는 선생님, 아이들 앞에서는 아빠, 부모님 앞에서는 아들이 되거든. 집에서도 어떤 때는 집을 치우는 청소부이고, 닭장을 만들 때는 목수가 된단다. 매 순간 우리는 다양하게 대상화가 되는 거야. 현실에서 우리는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고, 다양한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단다. 하지만 사회, 역사, 문화, 시스템은 우리를 단 하나로 대상화하려고 하거든.


'학생'이 왜 그러니? '아빠'는 왜 그래? '남자/여자'가 되어서? 와 같은 말을 할 때, 혹은 들을 때, 일방적으로 대상화하는 거야. 학생이라고 꼭 공부만 해야 할 필요 없고, 아빠라고 꼭 권위적이어야 할 이유가 없고, 남자가 남자다울 이유도, 여자가 여자다울 이유도 없거든. 그러니 특정한 사회적 가치, 질서, 역사, 문화가 내 본성과 다르게 나를 대상화할 때, 내 몸은 그 충돌을 느끼거든. 스트레스가 쌓이고, 화가 쌓이고, 반항하고 싶어 진단 말이야.


그래서 진정한 반항의 첫 번째는 대상화야! 당신은 날 '공부만 해야 하는 학생'이라고 '대상화'하지만 난 노래를 부르는 '래퍼'예요. 당신은 날 남성다운 '남자'로 규정하지만 난 여성스러운 '화가'예요. 당신은 날 여성스러운 '여자'로 규정하지만 난 남성스러운 '격투기 선수'예요. 더 나아가서 당신은 소설 <소나기>를 풋풋한 연애소설로 읽지만, 난 소나기를 지질한 연애소설로 읽어요. 당신은 이 영화가 재밌다고 말하지만, 난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 대상화는 자기의식을 가진 존재가 마친 신처럼 세상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이야. 거기에는 세상이 규정하는 것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검토하고 살펴보고 의문을 가지면서 자기만의 대상화를 하는 거야.


학생들은 일단 맞고 틀리고에 상관없이, 다른 사람이 어떻게 규정했는지, 사회나 국가가 어떻게 정의 내렸는지 상관없이 첫째, 나 스스로 대상화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좋아. 관심 있는 분야, 주제, 지식에 정보에 과감하게 대상화하려고 해야 해! 둘째, 혼자 살 것이 아닌 이상, 내가 대상화한 것이 설득력이 있어야 해! 기존의 대상화가 어떤 점에서 아쉬운지,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나처럼 대상화하는 것이 왜 지금, 이 상황에서 더 적절한지 설득할 수 있어야 해!

- 뒤샹, <샘 Fontaine>


초현실주의 작가 뒤샹. 모두가 예술작품은 위대한 것, 아름다운 것, 고상한 것이라고 대상화할 때, 그는 고물상 귀퉁이에 버려진 소변기를 출품하고 제목을 <샘 Fontaine>으로 붙여. 이 작품이 위대한 이유는 기존의 허위에 가득 찬 예술을 비판하기 때문이야. 예술은 그렇게 고상한 것이 아니다. 예술은 귀족들의 놀이가 아니다. 예술은 일상이고, 일상적 삶 또한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거야. 뒤샹이 작품이 위대한 이유는 최초로 이 작업을 했거든. 새로운 방식으로 예술을 대상화한 거야.


뱅크시는 영국에서 활동하는 그라피티 예술가야. 사람들은 그림을 하얀 도화지에 그려야 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는 도시의 비어 있는 벽에 어느 날 밤 홀연히 나타나서 그림을 그리고 사라져. 도화지가 아니라 벽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 기존의 방식을 뛰어넘어 자기만의 예술을 대상화한 사람이야. 우리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대상화된 세계를 수동적으로 따르거나, 아니면 내가 주체적으로 대상화하는 것 사이에서 매 순간 선택해야 해! 느끼고, 감각하고, 지각하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가 선택한 대상화를 하거나 아니면 '사회, 국가, 문화, 역사'가 강제한 대상화를 하게 되어 있단다.



자기의식을 가진 주체적 존재가 부조리에 저항해야 하는 첫 번째 지점이 바로 여기야!





감각하라!


이제 우리는 저항의 지점을 찾았거든 돌파구를 마련해야 해! 최후의 보루, 아지트를 만든 거야. 저항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감각으로부터의 저항이야. 내가 느끼고 지각하고 감각하는 모든 순간에 대상화가 작동하거든. 이렇게 느껴야 해! 이 부분이 중요해!라고 외부에서 강제된단 말이야. 여기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감각, 자기만의 느낌을 면밀히 느껴야 해! 내가 좋아하는 소리, 발 끝에 닿는 흙의 감촉, 나와 다른 동물을 만졌을 때의 느낌, 똥 술 메주가 발효될 때 나는 향기, 질퍽한 흙에 떨어지는 빗소리. 이 모든 것들을 감각하는 내 몸이 저항의 단초가 되는 거야.



도시는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킨단다. 특히 아파트는 우리의 감각을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키거든. 그러니 아파트에 살면 저항하기 어려운 보수적 인간이 되는 거야. 너무 편하고, 주변을 돌아보면 하나같이 나와 똑같거든. 똑같은 위치에서 똥을 싸고, 똑같은 위치에서 밥을 먹고, 똑같은 위치에서 사랑을 나누거든. 그러니 그들의 감각은 비슷해질 수밖에 없어. 그래도 인간은 다른 사람과 달라지고 싶은 욕구가 있단 말이야. 그러니 도시에서는 극단적 경쟁을 할 수밖에 없어. 좀 더 넓은 아파트, 좀 더 좋은 냉장고, 청소기, 좀 더 높은 내신 등급을 원하는 거지. 다양하지 않으니 몇몇 요소에서 극단적 경쟁을 하게 되는 거야.


우리의 오감은 끊임없이 새로운 냄새와 새로운 시각적 자극과 소리를 들어야 하거든. 자극에는 역치가 있어서, 익숙해지고 나면 우리는 새로운 자극을 기대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야. 그런 점에서 우리의 뇌는 '자극에 반응하는 뇌'야. 끊임없이 자극을 기다리고,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자극받길 원하거든. 자본주의의 마케팅은 '자극에 반응하는 뇌'를 아주 예민하게 읽어 낸난다. 우리가 스스로 감각하기 전에 그들은 우리 앞에 우리가 감각해야 할 거의 모든 것들은 보여주거든.


그러니 대형마트, 백화점 음식센터에서 새로 나온 요리를 먹고, 새로 나온 영화를 보고, 새로 나온 음악을 듣고, 광고를 보면서 세계를 경험하기 전에 우리의 감각은 상품을 경험하는 거야.  소비를 통해 감각이 요구하는 욕구를 채운단다. 우리의 모든 감각은 상품과 연결되어 있어. 더 나아가서 상품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감각은 죽은 감각이야. 자본주의는 우리의 감각을 통제하면서 작동하는 거야. 그래서 자본주의는 인간의 감각, 삶을 획일화시키지 않으면 절대 작동하지 못해! 학교, 군대, 공장, 병원, 텔레비전은 우리의 삶, 취향, 감각을 끊임없이 획일화시키는 장치거든. 이렇게 획일화시키면서 동시에 새로운 입시, 유행, 질병, 상품 등을 끊임없이 만든단다. 그래야 멀쩡한 것도 버려가면서 소비를 하거든. 소비가 미덕이 되는 사회, 인간의 모든 감각을 상품과 연결시키는 전략. 소비를 하지 않고는 감각을 느낄 수 없도록 만드는 전략에서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거야.


그러나 인간은 감각-상품의 연결에서 미묘한 분열을 느끼거든. 내가 느끼고자 하는 것과, 느껴지는 것 사이의 미묘한 불일치. 이것을 감각하고, 이것을 언어화하는 것이 필요해! 바로 이 지점이 반항하는 인간이 사유해야 할 두 번째 지점이야. 대부분은 이러한 불일치를 다른 상품의 소비로 치환, 대치하지만, 그럼에도 이 미묘한 불일치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예술가, 과학자, 경영자들이야. 이들은 서로 다른 목적으로 감각-상품의 불일치를 사유하거든. 예술가는 감성적 초월, 과학자는 이성적 초월, 경영자는 상품의 초월(새로운 상품)이 목적이야.


자본주의는 친절하게도 우리를 대신해서 세계를 대상화하고, 그 모습을 우리에게 상품으로 보여주거든. 세계가 만들어 놓은 대상화에 우리는 수동적으로 따라가면 되거든. 소비하기 위해 돈을 버는 대상화된 존재가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거든. 이 틀에서 벗어나려면 상품-감각의 고리에서 세계-감각의 고리로 전환해야 해! 그러니 자기의식을 가진 주체적 존재는 자신의 감각에 예민해야 해! 나의 느낌, 고통, 아픔, 즐거움, 기쁨, 쾌락이 어디서, 어떤 감각에서 유래하는 찾아야 해!


단언컨대 인간은 단 한 번도 상품을 욕망한 적이 없어! 그것은 우리가 상품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이 등장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어. 인간은 세계를 욕망하지 상품을 욕망하지 않아!




그러니 '감각하라!'는 반항하는 인간의 두 번째 길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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