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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Aug 26. 2018

사랍답게 사는 법

망각 vs 자살 vs 반항



사람 되기!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윤동주, <아우의 인상화>

       


우리는 '사람이 돼라, 인간이 돼라!'는 소리를 종종 들어.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이와 같은 말을 할 때, 인간은 다른 존재와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는 거야. 사람은 사람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사람다움, 인간다움을 가질 때, 진정한 사람이 되는 거야.





세계 : 사물 vs 생물


사물은 생명이 없고, 사람은 생명이 있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여. 적어도 인간은 생명이 있고, 살아 있잖아. 보통 생물이라고 하면 항상성(恒常性)을 유지하는 존재를 가리켜. 항상성은 자신의 성질을 유지한다는 거야. 이 과정에는 먹고-싸는 물질대사의 과정도 있고, 나와 비슷한 존재를 만들어 내는 생식의 과정도 포함되어 있어. 또한 상황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는 성질도 가지고 있거든. 그래서 '사물'은 외부 환경에 수동적으로 반응하지만 '생물'은 능동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라고 볼 수 있어.


아무것도 안 하고 늘어져 있으면 '시체'처럼 누워 있다거나?,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면 머리가 '돌'이니?라는 말을 할 때, 능동성 없이 수동적인 우리의 모습을 '시체'나 '돌'로 표현한 거잖아. 그런 점에서 사물은 세상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능동적이지는 않아. 생물은 이 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항상성'을 유지하는 존재야. 대부분의 생물들은 이 과정이 DNA에 프로그램되어 있단다. 생물들은 자신의 본능에 따라, 자신을 더욱더 강화하는 전략을 취하거든. 그 과정을 생존, 진화라고 보면 될 것 같아. 사물은 주어진 조건에 수동적으로 반응하지만 생물은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고, 생존하기 위해서 노력하거든.


그래서 사물과 생물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을 항상성이라고 생각하며 될 것 같아. 스스로 항상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가 가장 중요한 차이야.





생물 : 식물 VS 동물


생물은 크게 식물과 동물로 나누어져. 식물은 주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거든. 물론 물에 떠다니면서 사는 식물들도 있지만 식물들은 동물보다 상대적으로 수동적이야. 하지만 사물보단 능동적이거든. 주변의 사물들, 환경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때문이야. 반면 동물은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반응하지. 짖기도 하고, 물기도 하고, 꿀을 모으기도 하고. 식물은 주어진 자극에 대해서 반응이 상대적으로 느리다면, 동물은 자극에 대한 반응이 빠른 편이야.


예를 들어 나무 가지 하나를 꺾었다고 해봐. 그런다고 해서 나무에 큰 변화가 갑자기 생기는 것은 아니잖아. 반면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의 발을 실수로 밟았다면 바로 깨갱하는 아픈 소리를 낼 거야. 식물은 가지가 꺾이면 그것을 대체할 가지를 조금씩 차근차근 새로운 가지를 만들거나, 기존의 가지가 더욱더 크게 자라도록 만들 거야. 식물은 사물처럼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봄의 새싹을 틔우고, 꽃을 날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거든. 따라서 사물이 자극에 대해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반응이 없다면, 생물은 빠르건 느리건 자극에 대한 반응이 있어. 이 과정에서 자신의 항상성을 유지하고, 종을 유지하거든.


사물과 생물의 차이가 항상성 유지에 있다면, 식물과 동물의 차이는 바로 '의식'으로 규정할 수 있어. 식물은 반응하지만 뇌라는 중앙집중적 장치가 없거든. 그래서 식물의 반응은 미시적이고, 물리-화학적 반응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어.


하지만 동물의 반응은 즉각적이야. 사건이 벌어지면 중앙집중적 장치인 뇌를 통해서 그에 대한 반응을 즉각적으로 제공하거든. 물론 반응의 속도나 양상은 동물마다 다르겠지만, 반응의 중앙집중적 통제에 따른 직접성은 식물보다 훨씬 강하고, 자극에 대한 대응 또한 훨씬 주체적이야.


그래서 식물은 반응을 주관하는 '의식이 없는 생물'이라면, 동물은 자극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의식이 있는 생물'이라고 말할 수 있어.





의식 : 동물 VS 인간


동물과 인간은 모두 의식을 가졌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야. 뇌라는 중앙집중적 장치를 통해서 동물은 즉각적인 반응을 하거든. 우선 의식이 뭔지 잠깐만 정리해보자. 아래는 다음 국어사전에서 발췌한 '의식'의 정의야.


의식[意識]


(1)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나 사물에 대하여 인식하는 작용.

(2) 사회, 역사 속에서 형성되는 사물이나 일에 대한 견해나 사상. 예) 엘리트 의식.  

(3) 삶이나 역사와 같은 대상에 대한 올바르고 제대로 된 인식이나 판단. 예) 그 지식인은 의식 있는 삶을 살고자 한평생 노력했다.  

(4) [철학] 감각하거나 인식하는 모든 정신 작용.

(5) [불교] 사물을 분별하여 생각하는 마음. 육식(六識) 또는 팔식(八識)의 하나이다.


의식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나 사물에 대하여 인식하는 작용'으로 설명되어 있어. 그러니 의식은 기본적으로 '인식하는 작용'으로 볼 수 있어. 의식은 사물을 인식하는 거야. '저기에 컵이 있구나, 저기에 밥이 있구나, 이것은 볼펜이고, 저것은 책이야'라고 할 때 우리의 의식이 작동하는 거야. 의식하는 '주체'의 입장에서 보면 의식은 주체적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가 되는 거지. 의식이 없다면 우리는 자극에 반응할 수 없잖아.


그런데 의식은 사물을 항상 '대상화' 시키거든. 배가 고플 땐 뭐든지 먹을 것으로 보이고, 잠이 올 땐 선생님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리는 것과 같아. 동물들은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을 대상화시킨단다. 대상화시키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동물은 자신의 감각기관을 활용해서, 사물을 감각, 지각하거든. '아! 저기에  뭐가 있구나'라는 의식은 모두 감각하고 지각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거지. 그런데 감각과 지각에만 머물지 않고 동물 또한 자신이 감각한 사물을 대상화할 수 있어. 예를 들면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으면 토끼를 먹이로 대상화한 거야. 그러니 동물들은 모두 대상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먹을 수 있는 것/없는 것, 나를 잡아먹는 것/아닌 것, 내가 잡아먹을 수 있는 것/아닌 것. 이러한 것으로 동물은 자기만의 기준으로 사물을 대상화하는 거야. 이렇게 대상화하지 못하는 동물은 살아남지 못해! 천적인지 먹이인지 구분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살아남겠니?


그런데 동물의 의식은 사물이 주어질(눈앞에 나타날) 때만 발생해! 앞에 사냥감이 있을 때, 주인이 밥을 줄 때, 천적이 앞에 있을 때, 동물의 의식은 작동하거든. 그래서 동물의 의식은 자극에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반응이지만, 동시에 대상이 주어질 때만 반응하기 때문에 수동적이기도 한 거야. 그래서 동물의 의식은 본능인 거야. 자극이 주어질 때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의식을 가진 거지. 동물의 뇌는 그런 점에서 기계적인 뇌, 반응하는 뇌라고 볼 수도 있어.


이렇게 사물이 주어질 때, 그것을 나와 관계된 어떤 대상으로 떠올리는 의식을 '대상의식'이라고 부를게!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로 대상의식을 가지고 있어. 배고플 때, 치킨, 피자를 보면 침이 질질 나오고, 이상형이 지나가면 자기도 모르게 눈이 돌아가고, 부모님, 선생님의 눈치를 볼 때 대상의식이 작동하는 거야. 하지만 우리 인간이 동물과 가장 큰 차이점은 대상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의식할 수 있다는 거야. 피자가 없어도 피자를 떠올릴 수 있고, 짝사랑하는 여친/남친이 눈앞에 없어도 하루 종일 생각할 수 있단다. 그래서 인간은 대상이 주어질 때만 의식하는 본능적 존재가 아니라, 대상이 주어지지 않아도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동물하고 다른 거야. 이것을 자기의식이라고 할 수 있어. 자기 스스로 대상을 떠올리는 거야.


이렇게 사물이 주어지지 않아도, 나와 관계된 어떤 대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의식을 '자기의식'이라고 부를게!


그러니 의식은 ‘의식하는 주체’와 ‘의식하는 대상’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거야. 의식은 주체와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거야. 동물은 의식이 조금 더 대상에 종속되어 있다면, 상대적으로 인간은 의식은 주체의 의지에 따라 형성된다는 점에서 다른 거야. 그래서 의식은 사물을 내가 필요한 어떤 것으로 대상화하는 것을 의미해! 인간과 동물은 모두 의식이 있지만 인간은 대상의식을 넘어서는 자기의식을 가지고 있단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상상력이야. 없어도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 능력,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능력. 문학, 신화, 종교, 수학, 과학 등의 인간의 모든 학문은 우리 인간이 바로 자기의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야.


개를 가르쳐서 ‘앉아!’라고 하면 앉고, ‘서!’라고 하면 스는 개는 말 잘 듣는 똑똑한 개처럼 보이지만, 개에게 이것은 끊임없는 반복에 의한 대상의식에 불과해! 그것은 스스로의 경험과 체험으로 떠올린 행동이 아니야. '앉아라는 말'과 '앉는 행동'을 1:1 대응으로 만든 대상의식에 불과해! 학생들이 공부할 때, 끊임없는 암기로, 2차 함수는 무엇이고, 원자, 분자는 무엇인지 주구장창 외운다고 한들. 그것은 대상이 주어질 때야 떠올리는 수동적 반응에 불과해! 끊임없는 훈련으로 파블로프에 개처럼 떠오르는 암기된 지식은 그래서 죽은 지식이야. 인터넷에서 찾으면 나오는 내용들이야. 따라서 내가 사람이 되려면 '자기의식'을 가져야 해! 생각하고, 사고하고, 사유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 사람이 되는 거야.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동생은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이 된다고 말해. 하지만 윤동주는 이 답을 설익은 대답이라고 생각해. 식민지 시대에 조선인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거든. 일제시대에 '자기의식'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힘든 거야. 아우의 얼굴이 '슬픈 그림'인 이유는 그 어려움을 윤동주가 알기 때문이야. 진정코 사람답게 사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동생의 얼굴에서 슬픈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 거지. 그래서 '자기의식'은 '자기가 한 짓을 떠올리는 의식'이야.


조금 어렵게 말하면 '자기를 스스로 대상화시키는 의식'이야. 공부를 해야겠다고 열심히 계획을 하고, 지키지 않은 나를 보며 자책할 때, 다이어트해야지 다짐하며 폭식 후 거울을 보며 내가 나를 욕할 때, 게임에 빠진 나를 보며 자책할 때. '나쁜 짓을 저지른 대상화된 나'가 있고, 그것을 '야단치는 나'가 있는 거야. 나를 스스로 대상화해서 나를 바라보는 능력. 바로 자신에 대한 성찰, 반성이 이루어질 때 자기의식이 작동하는 거야. 그래서 진짜 사람이 되려면 자기의식을 가져야 해!



그래서 철학하기는 자기의식을 가진 주체적인 인간되기. , 사람되기.





부조리 살기


그런데 자기의식을 가진 존재는 근원적으로 세상과 부딪칠 수밖에 없어.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학교는 왜 가야돼지? 학원은? 직장은? 놀기도 해야 하고, 친구도 만나야 하고, 게임도, 스마트폰도 해야 하는데. 도대체 이 많은 것을 어떻게, 왜 하라는 거야? 인간은 자유롭고 주체적이다고 말하지만 실제 현실은 자유라곤 없거든. 


부모님은 공부해라. 학교에서는 떠들지 마라. 컴퓨터, 스마트폰 그만해라라고 끊임없는 규제, 통제가 들어온단 말이야. 나는 자유로운 존재로 자기의식을 가진 존재이지만 실제 현실은 하나도 자유롭지 않은 거야. 까놓고 이야기해서 누구는 금수저로 태어나고 싶지 않겠니? 누구는 교육의 천국이라는 핀란드에 태어나고 싶지 않았을까? 내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전적으로 내 선택이 아니거든. 나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잖아. 또한 '왜 나는 이렇게 짜리 몽땅하게 태어났을까?' '머리는 크고 배는 볼록에 나는 왜 연예인처럼 태어나지 않았을까?'


내가 잘못했으면, 내가 벌을 받을 것이고, 내가 열심히 노력했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을 것을 기대해! 우리는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행동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질 각오를 할 거야! 그러나 국가, 민족, 가정, 부모, 외모 등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잖아. 어쩔 수 없이 타고난 것이잖아. 내 삶의 많은 부분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에 대해서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하거든. 그래서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은 곰곰이 생각한단다. 자신의 문제와 환경을 말이야.


그리고 깨닫게 돼! 인간이 참 부조리하다는 것을 말이야.


우리는 자기의식이 있기 때문에 자유롭게 생각하고, 사고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어. 하지만 자기의식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느낌을 받는 거야. 나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대상화할 수 있지만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거든. 실제 현실은 구속되고, 억압당하고 있고, 갑갑하고, 벗어나고 싶단 말이야. 자기의식을 가진 존재는 끊임없이 세상과 나를 대비시켜 볼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자기의식을 가진 존재가 도달하는 결론이 바로 부조리야. 자기의식을 가진 존재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것은 인간은 부조리한 존재라는 거지.


묶여있는 개를 생각해보자. ‘왜 나는 개로 태어났을까? 왜 나는 묶여있을까? 이 세상은 너무 부조리해!’라고 생각하는 개, 닭, 소는 아마 없을 거야. 동물을 자기의식이 없거든. 하지만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은 최종적으로 부조리를 자각할 수밖에 없단다. 그래서 사춘기가 되면 자기의식이 생기면서 불만이 쌓이는 거야. 몸도 크고 마음도 크면서 자아가 생기거든. 이것은 돈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야. 잘생기고 못생기고, 키가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니야. 어떤 조건에 있든, 사람이면 모두 부조리를 느낀단다. 부조리를 느끼지 못한다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아이에 불과한 거야. 극단적으로 말하면 대상의식만을 가진 동물에 불과한 거야.





망각 vs 자살 vs 반항 


이 부조리를 자각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첫 번째 선택이 망각이야. 내가 부조리를 깨닫고 있다는 것을 망각해버리는 거지. 그러면 아무런 문제가 없거든. 망각은 그래서 회피하는 거야. 어떤 점에서 종교 또한 망각과 비슷한 것이 있어. 여하튼 이런 경우 부조리는 우리의 무의식에 남아서 화, 스트레스, 편집증, 강박 등으로 나타날 거야. 열성적이고 광신적인 기도의 모습은 강박 증상과 상당히 유사하거든. 이들은 마치 부조리가 없는 것처럼 행동해! 망각의 길은 인간의 길이기보다, 동물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어. ‘묶여 있는 개이지만 난 행복해! 난 즐거워! 언젠간 구원받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거지. 주변의 환경, 조건에 맞추어 아무런 의심 없이 살아가는 거야. 그래서 ‘망각하기’는 '동물-되기'야.


망각하지 않는 이상, 부조리를 자각한 인간은 그 부조리를 잊으래야 잊을 수가 없단다. 하지만 부조리의 무게가 너무 크다면 망각조차 못한다면 부조리를 자각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이 없어. 그래서 부조리를 자각한 인간이 할 수 있는 두 번째 선택은 자살이야. 부조리의 무게가 인간을 완전히 짓눌러버리는 거야. 이것은 부조리로부터 도망가는 거야. 삶의 무게, 대상이 짓누르는 무게로부터 도망가는 거지.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이 부조리를 짊어지고 산단다. 그래서 까뮈는 부조리를 자각한 인간을 시지프 신화에 비유해서 설명해!

끊임없이 언덕으로 돌을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 그는 어마어마하게 큰 돌을 산 정상으로 온 힘을 다해 밀어 올려.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전진하지. 마침내 그가 밀어 올린 돌이 산꼭대기에 올라왔을 때의 안도감! 성취감이 들 거야. 하지만 그는 곧 돌을 산 밑으로 다시 굴려야 하고, 터벅터벅 산길을 내려올 거야. 유일하게 시지프가 쉬는 순간이면서, 유일하게 성취감을 느끼는 순간일 거야. 자기 앞에 놓여있는 커다란 돌덩이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 그것을 밀어 올리면서 조금씩 앞으로 걸어갈 때의 힘듦, 노동, 버팀 그리고 꼭대기에 도달해서야 느끼는 짧은 쉼의 순간이 인간에게 허락된 기쁨의 시간이라는 거야. 그래서 부조리를 자각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세 번째 선택은 반항이야.


우리는 열심히 공부해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진학해. 앞에 어마어마하게 큰 입시라는 돌덩이를 밀어 올리는 거지. 입학하고 나면 한 두 달 즐겁다가, 다시 학점, 취업이라는 또 다른 돌이 우리 앞에 놓일 거야.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취업하면 이젠 결혼하고, 애 낳고, 집 사고, 아이 키우는 커다란 돌들이 우리 앞에 어느 순간 크기도 모양도 무게도 다양한 큰 돌이 앞에 있는 거야. 그 돌은 우리가 선택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우리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가정, 사회, 국가, 역사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거야.


내가 온전히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내 인생'. 자기의식을 가진 존재가 궁극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부조리'인 거야. 그런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이 부조리를 나름의 방식으로 꿋꿋이 이겨내고 버텨낸단다.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사람도 이 부조리를 꿋꿋이 버텨낸 위대한 사람인 거야. 학생들도 마찬가지야. 어떤 학생은 가난해서, 어떤 학생은 가정이 화목하지 못해서, 어떤 학생은 부모님이 없어서. 어떤 학생은 머리가 나빠서라며 자신 앞에 놓인 부조리에 힘들게 맞서고 있을 거야. 그래서 부조리를 마주한 사람이 선택하는 방법은 '반항'이야. 그러니 '반항'은 인간됨의 실현인 거지. 반항으로 부조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야. 그저 끊임없이 평생 동안 부조리를 안고 살아가는 거야.


https://youtu.be/WS_ob7lzZ_M

아쉽지만 보험이 내 삶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많고 많은 나라, 많고 많은 가정 중에서 하필이면 내가 여기에 태어난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야. 하지만 세상이 ㅈ 같다고 해서, 내 삶을 ㅈ 같이 살 필요는 없거든. 그러니 ‘반항하는 인간’은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이 선택하는 삶의 길이 되는 거야. 그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일상적인 행복과 무관할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 유복한 것과도 관계가 없어. 그저 자신의 주어진 모든 순간에 맞서는 것! 조금 힘들 땐 피하고, 쉬고, 머뭇거리더라도 다시 꾸역꾸역 자신의 길을 가는 것! 부조리를 자각한 인간이 선택한 길이 되는 거야.


목줄에 묶여 있는 개는 자살하지 않아.


하지만 인간만이 유일하게 부조리함을 느낀단다. 지금 뭔가 부조리하게 느껴진다면 우리는 진짜 '인간'인 거야. 그러니 충분히 자신감을 가져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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