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서울 큰 아버지 댁에 가신 틈에 기습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나와 형제들 전혀 배려하지 않은 처사였다. 할머니는 고부갈등 중이었으니 할머니가 미워서 복수하고 싶었다고 해도 애착의 대상이었던 할머니와 준비 없는 이별을 겪을 자식들은 안중에도 없는 처사였다.
치밀하게 본인들이 살 집을 마련해 놓고 전쟁 피난하듯 기습적으로 분가했던 것이다. 자신을 괴롭힌다는 생각을 한 본인 시어머니에 대한 복수였다.
우리 삼 형제를 한 번도 양육해보지 않았던 엄마, 본인 말로는 우리를 안고 있으면 할머니 질투가 심해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10살, 8살, 5살이었던 우리를 키우기 힘들다고 여름 방학 외갓집에 보내버렸다. 갑작스러운 이사, 전학도 스트레스였는데 전학하고 맞이하는 첫여름 방학 때 낯선 외갓집과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낯설었던 나는 밤새 할머니 보고 싶다고 울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외할머니는 할머니집에 전화를 했고 나를 바꿔주었다. 할머니는 내일 버스 타고 나를 데리고 오겠다고 했다. 나는 울음을 그치고 편히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나를 데리러 올 수 없었다. 엄마가 외할머니를 다그쳤다고 했다. 할머니집에 전화한 것, 할머니 못 오게 하라고. 애들 빼앗기면 안 된다고..
나중에 30이 넘어 어른이 되고 고모를 통해 들었다. 펑펑 울었다. 할머니 집에서 분가한 후 엄마는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절대 못 가게 했다. 명절에도..
그 기억은 저 멀리 사라지고 중학교 때부터 시작된 고등학교 입시와 대학 입시 준비로 밤늦게 오는 생활이 반복되고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기억은 저 멀리 사라졌다. 내가 고1이었던 시기 큰아버지께 연락이 왔다. 할머니가 많이 보고 싶어 한다. 1년만 할머니 집에서 학교 다닐 수는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입시 준비에 정신없던 상황이라 그럴 수 없었다. 분가 후 할머니에 대한 온갖 욕을 듣고 자란 내가 할머니를 좋게 볼 수가 없었다. 큰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했다. 입시 준비 때문에 힘들고 엄마가 싫어한다고만 대답했다.
내가 22살이 되고 할머니는 임종을 앞두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한테 울면서 말했다. 그동안 안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그저 눈물만 흘리셨다. 그렇게 가신 할머니가 내 가슴속에는 항상 죄송한 마음과 슬픔으로 남아 있다. 무엇 때문에 앞만 보고 살아왔던 걸까.. 엄마는 할머니가 미웠으면 됐지 왜 천륜까지 끊으려고 했던 걸까.. 결국 자식은 본인 소유물이고 본인 상처받은 감정만 생각한 나르시시트였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때 88 올림픽 그림을 그리는 방학 숙제가 있었다. 엄마는 내가 그리려고 하자 못하게 하고 본인이 호돌이를 멋지게 그려냈고 나는 엄마의 그림으로 금상을 받았다. 본인이 상 받은 것처럼 엄청 기뻐했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 그림, 글짓기는 모두 엄마의 작품이었고 엄마는 그 시절 모아놓은 쇼핑백 두 봉지 가득 상장들을 결혼하고 얼마 있다 주었다.
엄마는 초등학교 때 받은 그 상장들을 자랑스럽게 남편한테 자랑했지만 솔직히 나는 받기 싫었다. 지금 저 드레스룸 구석에 처박혀 있다. 내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내 방을 상장으로 도배해 놓고 집에 오는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것이 엄마의 일이었다.
그 당시는 엄마가 나를 자랑스러워하는구나 생각했다. 아니었다. 엄마는 철저한 나르시시트였고 나를 통해 본인이 받은 상장을 자랑스러워하는 거였다. 자식은 철저한 본인을 돋보이기게 하기 위한 트로피였다.
상견례 자리에서 엄마는 시어머니께 내 흉을 보기 시작했다. 내가 배운 것이 하나도 없어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야 한다고. 내가 밥도 못하고 요리도 못하고 정리도 못한다고 시어머니 앞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결혼초부터 고부 갈등의 씨앗을 뿌린 거였다. 시어머니는 너 친정엄마가 하나도 안 배우고 시집왔다고 해서 내가 가르쳐야겠다고 하시며 살림, 육아, 요리 등 간섭을 해댔다.
엄마한테 따졌다. 시어머니 초면에 왜 그런 소리를 했냐고. 내가 15년 넘게 서울 살았는데 엄마가 내가 요리 못하는지 집안일 못하는지 어떻게 아냐고.. 나는 억울했다.
나는 요리를 제법 잘했다. 동생이랑 같이 살며 건강상 이유로 집밥을 계속해 먹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되려 역정을 내며 시어머니가 그럴 줄 몰랐다고. 나를 잘 부탁한다고 했다는 말이라고 했다. 기가 막혔다.
고부갈등으로 힘들었던 결혼 초기 나는 엄마에게 하소연을 했다. 엄마는 본인도 겪었던 시집살이를 말하며 나의 힘듦을 공감하는 것 같았다. 낯선 부산으로 시집보내지 말걸 후회한다고 했다. 남동생은 나에게 엄마가 내 전화받으면 힘들어한다. "누나 힘들어도 잘 이겨내라. 엄마한테 말하지 마라. " 남동생의 전화를 받고 나는 엄마한테 좋은 이야기만 하려고 했다.
사촌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이모가 내 험담을 하더란다. 이모는 내가 크고 나서 따로 연락한 적도, 만난 적도 없다. 이모는 사촌 언니한테 엄마의 말을 전달했다. 자기 덕에 시집 잘 갔으면서 은혜도 모르고 시집살이 그거 뭐라고 징징댄다고..
충격이었다. 사촌언니는 너 엄마 남처럼 생각하고 절대 힘든 거, 좋은 거 내색하지 말라고 했다.
엄마한테 전화해서 따졌다. 이모한테 내 이야기했냐고.. 엄마는 이모한테 자식들 이야기도 못하냐고 되려 중간에서 말 전달한 사촌언니 욕을 했다.
나는 그럼에도 엄마 아빠 챙긴다고 코로나 전부터 서울, 부산, 일본, 대만, 제주도며.. 결혼해서도 남동생네, 여동생네, 우리 아이들 남편까지 대가족 다 동원해서 여행을 다녔다.
친정 갈 때마다 엄마랑 2주 이상 시간 보내며 엄마랑 함께 했던 시간이 의미 없게 느껴졌다. 엄마의 모성 기대하지 말자. 나의 애정 결핍은 채워질 수 없다. 나의 아이들과 남편이 내 가족이다.
현재 나는 행복하게 살고 있다. 자상한 남편과 고부 갈등이 해결되고 평화롭게 지내는 시댁관계, 두 딸까지.. 나의 엄마의 아킬레스건인 고부 갈등을 중재하는 듬직한 남편.. 엄마는 결혼 후 이사하고 얼마 안 되어 집에 놀러 왔다. 정리 안 하고 산다고 지적부터 하며 내 옷장을 뒤지더니 속옷을 보고 버리라고 했다. 낡은 속옷 입으면 오서방 바람난다고.. 살도 빼라고 했다.
그때는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나 놓고 보니 행복하게 사는 것 같은 나에 대한 엄마의 질투였다.
나르시시트 엄마.. 본인의 감정과 욕구가 더 중요하고 공감을 못한다, 자식을 통해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크다. 딸의 불행에는 동조하지만 딸의 행복
은 질투한다.
엄마의 젖을 빨던 저 아득했던 기억, 엄마 냄새에 대한 기억으로 모성을 갈구했던 나 자신.
내면 아이 치유를 하며 성인이 된 내가 어린 아이였던 나를 안아주었다. 예쁜 빨간 코트, 흰 털 스웨터, 예쁜 구두, 털 바지 입혀주며 무릎 꿇고 고맙다고 했다. 멋지게 성장해주어 고맙다고.. 이제 나에게는 나의 내면 아이를 안아줄 힘과 능력이 있다. 그리고 나의 또 다른 내면 아이, 나의 두 딸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르시시트 엄마에게 벗어나는 방법은 물리적, 심리적 거리두기. 나는 여전히 엄마랑 잘 지낸다. 단지 예전보다 내 개인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엄마도 그저 타인일 뿐이다. 그리고 엄마와 관계가 더 좋아졌다. 미움과 분노가 많이 사라졌다.
내가 두 딸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 나는 이런 엄마가 없었지만 나의 두 아이에게는 '우리 엄마'가 되어줄 수 있으니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