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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빛보라 Oct 23. 2021

쿨하지 못해 미안해

전학 가는 별이에게 보내는 편지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교직에 들어와서 간간히 새로 들어오는 아이들을 맞이하고 있던 아이들을 보내는 일들이 생겼다. 특별히 보내면서 너무 서운했다거나 새로 맞이하면서 엄청 반갑고 좋았던 기억은 없다. 전학생이 오고 가는 일은 단지 여러 업무 중 하나일 뿐이었다. 오는 아이들은 빠른 시간 내에 파악해서 반 아이들과 친해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했다. 가는 아이들은 나이스에 지금까지의 출결 사항이나 창의적 체험활동 수업 내용, 수행평가 일부 내용을 기재해 넣어야 했다.


올해는 예년과 달리 개학하는 3월 2일부터 2명의 전학생이 배정되어 있었다. 아직 새 학기 인사를 나누지 못해 서로 서먹한 반 아이들과 같은 출발선에 서게 되었기에 다행이라 여겼다. 뒤로 배정된 번호를 가나다 이름 순으로 다시 재배정해주었다. 그중 한 명에게 자꾸 마음이 갔다. 개학 후 일주일 동안 교과 수업을 진행하지 않고 학급 세우기 활동을 하던 중이었다. 의자를 큰 원으로 둥글게 앉도록 해 서로 마주 보며 자기소개를 하게 했다. 이 아이의 순서가 되었고 아이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아이의 얼굴은 순식간에 달아올랐고 긴장한 손을 숨길 책상마저도 치워진 상황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이가 순간 너무 안쓰러웠다. 그러면서 다른 아이들이 수군거리기 전에 이 아이의 긴장을 풀어줄 생각으로 말했다.

 “생각 못 했으면 순서를 바꿔서 다른 아이들 다 하고 나중에 할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이었지만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을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를.     


며칠 뒤 학기 초에 늘 조사하는 조사서를 받아 들었는데 어머니께서 적은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가 다른 사람들의 집중받는 것을 힘들어해요.’ 어쩐지 나의 학창 시절이 생각났다. 친구들과 놀 때는 거리낌이 없었지만 발표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던 아이가 나였다. 발표를 안 한다고 일부러 시키는 선생님은 만난 적이 없기에 별일 없이 조용조용 넘어갈 수 있었다. 그랬던 내가 교사가 되고 나니 아이들이 손을 들어주지 않는 수업이 얼마나 힘든지 겪게 되었다.

 “어떤 의견이라도 좋아. 틀려도 좋으니 어떤 내용이든 발표해 볼 사람?”

하지만 대한민국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그 말의 뜻을 이미 알고 있었다.

 ‘틀리면 잘못됐다고 지적하실 거잖아요!’

늘 그렇듯 말하기 좋아하는 아이들만 계속해서 손을 들었고 수많은 격려에도 다른 아이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손을 들었다. 부끄러워하면서 쭈뼛거리며 손을 들었길래 놓치지 않고 시켜주었더니 조곤조곤 조용한 목소리이긴 했으나 발표를 했다. 해냈다! 어찌나 기특하던지. 그 후로도 자주는 아니었지만 간간히 발표를 해냈다. 어릴 때의 나보다 나은 아이를 속으로 많이 응원했다. 그리고 학기를 보내며 알게 된 건 아이가 말보다는 글에 재능이 있다는 것이었다. 글똥누기를 하면 어찌나 진지하고 섬세하게 적는지, 과제를 내고 나면 어떻게 적어올지 항상 기대가 되었고 아이는 매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국어 시간에 그림을 보고 상상하여 이야기를 만드는 활동도 잘했고, 주어진 이야기의 뒷이야기를 만드는 활동도 잘했다. 단지 아이는 말하기가 힘들었을 뿐이었다. 글 표현은 탁월했다.


여름 방학을 지나고 2학기가 개학한 지 한 달이 되던 날, 그 아이와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내게 와서 말했다.

 “선생님, 별이 전학 간대요!”

듣자마자 “진짜?” 하면서 속으로 울고 있는 내가 느껴졌다.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지금 아이들과 이제 제대로 소통하면서 간간히 발표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또다시 새로운 학교에 덩그러니 던져질 아이가 안타까워서였고, 또 하나는 나름 우리 반 모범생인 아이가 전학을 간다는 것이 아깝고 속상해서였다. 사실 학기 초부터 너무 힘들게 하는 아이는 전학 갔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도 했는데, 왠지 모르게 편애를 저지르는 것 같은 이런 모순적인 감정이 죄책감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그럴 수 있지.' 하는 생각으로 나를 다독이며 별이와 헤어질 마음의 준비를 시작했다.


코로나로 인해 전교생이 모여서 하는 학예 발표회는 못하게 되었지만, 학교에서 정해진 기간 내에 각 반에서 자체적으로 발표회를 할 수 있었다. 마침 그 기간이 별이가 전학 가기로 한 그다음 주였다. 고민하다 반 아이들과 의논하여 한 주 일찍 발표회를 열기로 했다. 특별한 추억을 선물해주자는 데 마음이 통한 것이다. 결정을 해 준 아이들이 고맙고 기특했다. 너희들 참 많이 자랐구나.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준비한 날이 왔다. 책상을 복도로 다 빼고 의자만 놓아 관람석으로 만든 뒤 창문 쪽 빈 공간을 무대로 만들었다. 블라인드에 현수막도 달았다. 전교에서 일 등으로 학예 발표회를 하는 반에 다른 반 아이들도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렸다. 나는 칼림바 연주를 준비한 별이가 떨지 않고 무사히 공연을 마치길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앞 순서는 미처 마음의 준비를 못해서 긴장될 것이고 너무 뒷 순서도 기다리면서 더 긴장할 것 같아 딱 중간 순서로 배정해주었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악보도 없이 씩씩하게 앞으로 걸어 나온 별이. ‘에델바이스’ 곡을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박자도 놓치지 않고 훌륭하게 연주했다. 감동의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 함성과 박수가 터졌다. 별이는 연주를 마치자마자 부끄러운 듯 빨리 인사를 하고 자리로 들어갔다.


발표회 1부를 마치면서 나도 특별 연주 선물을 준비했다. 플루트를 한다고 아이들한테 이야기는 했었지만 마스크 벗는 것이 부담스러워 한 번도 연주를 해주지 못한 참이었다. 그래도 발표회 때는 꼭 연주해주고 싶었다. 가는 아이뿐만 아니라 우리 반 모든 아이들을 위해서. 수업 때는 말 많고 혼도 잘 내는 선생님이지만 무대에 서면 너희들처럼 똑같이 떨고 긴장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마침 10월이라 딱 좋은 곡이 생각났다.


혹여나 너무 기대했다가 실망하면 어쩌나 싶어서 연주하기 전에 말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한 가지 문제가 있어.”

“뭔데요?”

“선생님이 화요일에 밥을 먹다가 입술을 깨물어서 너무 아파. 연습해보니까 잘 안 되더라고.”

“아파도 참고 하시는 거예요?”

“응, 그러니까 잘 못해도 이해해 줘.”

크고 작은 무대에 여러 번 서봤지만 항상 떨었다. 숨을 불어넣어 부는 악기에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고, 공연이 끝나면 뿌듯함보다는 잘 해내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이 컸다. 그러면서도 악기가 좋아서 계속해오고 있다. 그런데 일부러 떠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마음먹으니 신기하게도 떨리지 않았다. 너무너무 감사했다. ‘별아, 보고 있니? 선생님이 해냈다! 선생님도 해냈어!'


마지막 순서로 우리 반 까불이의 피아노 연주까지 마쳤고 학예 발표회가 드디어 끝이 났다. 몇몇 아이들이 별이에게 준비한 선물을 전하고 서로 껴안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울음이 터진 별이. 토닥토닥 달래주며 작별 인사를 하는 아이들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6학년 졸업식 때 친한 친구와 서로 다른 중학교로 간다고도 껴안고 울던 나였다. 하물며 친구가 지역을 이동해 전학을 가는 게 얼마나 아쉽고 서운할지 알기에 서로 충분히 나누고 추억할 시간을 주었다.


별아, 전학 가서도 좋은 친구들과 선생님과 항상 행복해. 사진작가로 꿈이 바뀌었다고 나에게 와서 부끄럽게 말했던 너를 잊지 않을게. 발표하려고 용기 내 손 들었던 너를 오래도록 기억할 거야.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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