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도 잘해요

남편은 있습니다만...

by 초록빛보라

지난 주말에 남편이 어머님과 함께 외가 모임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매년 모이는 모임이지만 편도로 3시간이나 걸리는 거리 때문에 늘 남편이 운전을 하고 나와 아이들은 인사도 드릴 겸 같이 나서곤 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자식과 손자까지 데리고 오는 분은 우리 어머님뿐이었다. 그나마 1박 2일로 가서 갈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당일치기로 다녀 올 예정이라니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가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아 남편만 가기로 하고 나와 아이들은 집에 남았다.


오랜만에 독박 육아의 날이다. 뭘 할지 고민이 많았다. 오전엔 집에 있다가 엄마 퇴근 시간에 맞춰 친정에 갈까? 아니면 오랜만에 애들 낮잠 재우고 그 시간에 책을 읽을까? 아니면 동생네에 가서 조카들이랑 같이 놀까? 그런데 바깥나들이를 못 한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엄마 아빠가 일이 있어서, 엄마 아빠가 기분이 안 좋아서, 아이들이 감기에 걸려서, 지역에 코로나가 갑자기 확산되어서.. 여러 가지 이유로 여섯 번의 주말을 그냥 흘려보냈다. 언제 갑자기 추위가 닥쳐와 예쁜 단풍을 다 날려버릴지 몰라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나는 용감하게도 혼자서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을 하리라 결심했다.


이젠 어디로 갈지 정할 차례다. 이미 두 아이들을 데리고 나서본 경험이 있기에 각오를 단단히 했다.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공룡을 좋아하는 아이들을 위해 주말이면 끝나는 고성 공룡 엑스포에 데리고 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더니 운전도 그렇고 줄 서기는 특히 더 힘들다며 만류를 했다. 운전이 힘들지는 않은데, 내가 생각하기에도 줄 서는 것은 힘들 것 같았다. 화장실 한 번 제대로 갈 수 있을까 생각이 들자 금세 포기가 되었다. 그럼 어디가 좋을지 의견을 구했더니 친구 하나가 합천에 있는 대장경 테마파크를 추천해 준다. 값도 싸고 넓고 볼 것이 많다는 것이다. 길 찾기를 해보니 시간도 왕복 2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래, 결심했어!




토요일이 왔다. 가기로는 했지만 몇 시에 출발할지, 점심을 싸서 갈지 식당에 갈지, 몇 시에 돌아올지 아무것도 정한 것이 없었다. 늦잠 잘 수 있는 유일한 날이라 그런지 자꾸 마음이 느긋해지기만 했다. 먼저 일어난 아이들이 엄마를 깨워 흔들었다. 마침 이 날 둘째가 새벽에 이불에 지도를 그려 아이를 씻기고 이불을 갈아주고 했던 참이라 너무 피곤했다. 정신은 깨어있어도 그냥 누워있고 싶어 있던 건데 아이들은 얼른 일어나라고 채근을 했다. 9시였다. 눈 감고 더 쉬고 싶었지만 배 고픈 아이들을 위해 벌떡 일어났다. 아이들에게 간단히 아침을 먹이고 이제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 데리고 외출 준비를 해 본 엄마 아빠들이라면 알 것이다. 혼자 하는 외출 준비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지를. 아침 먹은 설거지도 해야겠고 새벽에 오줌 싼 이불도 빨아야겠고, 물과 수저, 간식, 여벌 옷 등 이것저것 준비만 해도 벌써 2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어차피 남편이 엄청 늦게 올 예정이어서 설거지, 빨래를 남겨놓아도 저녁에 피곤한 몸으로 직접 해야 했기에 차라리 가기 전에 해놓자 싶어 더 부지런히 움직였다. 겨우 12시가 넘어서야 준비가 끝났다.


그런데 친구들 단톡방에 사진이 불쑥 올라왔다. 합천을 추천해 준 친구가 가족들과 황매산 억새를 보러 가서 찍은 사진이었다. 나는 아직 출발하지도 못했는데 벌써 산 중턱에 올라가 있는 친구를 보니 나도 빨리 나서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생각이 스쳤다. 실내는 추울 때 가도 되잖아? 이제 더 추워질 텐데 단풍 다 지고 억새풀 져버리면 바깥나들이는 엄두를 못 낼 것 같으니 차라리 실내보단 밖이 낫겠다 싶어지는 것이다. 아이들 등산하기 어떻냐고 물으니 길이 잘 닦여져 있고 넓어서 유모차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럼 잘 걷는 꼬꼬마들도 못 갈 이유가 없지! 이렇게 급히 행선지가 변경되었다. INTJ인 내가, 뼛속까지 J였던 내가 점점 사람이 되어간다. 곧바로 동네 김밥집에 김밥 3줄을 주문하고 곧장 등산 길에 나섰다. 오랜만의 가족 외출이라 아이들은 소풍 간다고 엄청 좋아했다. 나는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얘들아, 오늘 하루 잘 부탁해.




산 주차장까지 가는 데 1시간 40분이 걸렸다. 이 정도는 투정 없이 잘 가는 아이들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지! 주차하자마자 내려서 길가에 쪼그려 앉아 김밥을 먹었다. 먹으면서 눈은 계속 주변을 살폈다. 화장실은 어디 있는지, 산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레이더망을 치밀하게 움직였다. 정상에 가까운 주차장이 만차여서 아래쪽에 대었는데, 오르막 경사로를 걷는 게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자마자 다시 차에 타고 정상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후 3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마지막 가을을 즐기려는 등산객들은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20분 정도 더 기다리고 겨우 정상 주차장에 주차를 할 수 있었다.

소풍엔 김밥이죠!


등산을 시작했다. 시작하자마자 둘째의 단골 멘트가 시작됐다. "엄마, 힘들어요. 못 가겠어요." 급기야는 얼마 가지도 못했는데 못 가겠다고 멈춰서버리는 녀석. 쿨하게 "엄마, 간다."하고 다시 천천히 올라가니 찡찡거리는 둘째에게 첫째가 손을 내민다. "형아가 손 잡아줄게." 그것도 두 손으로 동생 손을 꼭 잡고 올라가는 첫째가 어찌나 든든하고 기특하던지. 지나가시는 어른들이 모두 예쁘다고 칭찬까지 해주니 엄마는 어깨가 으쓱하고 뿌듯했다. 엄마까지 앞질러 가더니 첫째가 둘째에게 조곤조곤 말한다. "손 잡고 가면 안 힘들지?" "응." 아이고 예뻐라 예뻐 이 녀석들.


그런데 정상에 가면 준다고 했던 과자를 빨리 먹어야겠다고 난리다. 그래, 먹자 먹어. 벤치가 보이길래 얼른 앉히고 과자와 주스를 꺼내 주었다. 울상이던 둘째도 활짝 웃음꽃이 핀다. 사진 찍자고 하니 눈웃음도 쳐준다.


그런데 우리끼리 사진 찍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는지 지나가시던 등산객 한 분이 세 명 같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셨다. 부탁하기가 죄송해서 안 찍었던 건데 감사하다고 넙죽 인사하고는 포토존으로 총총 걸어갔다. 포즈를 잡고는 김치! 하트! 몇 번의 사진을 찍고 다시 감사 인사를 했다. 해가 넘어갈 때가 되어가서 그런지 날이 쌀쌀했고 정상까지 가는 것은 포기했다. 대신 억새 군락지 쪽으로 들어갔다. 길은 좁았지만 넘치는 억새풀들이 정말 아름다웠다. 아들들에게 돌아가며 찍사를 시키고 두 아들과 번갈아가며 사진도 찍었다. 고인 물이 나오면 돌 던지기도 했다. 멀리 던지는 방법을 알려주었는데 성공하니 신난다고 쌈바춤을 추는 첫째. 요즘 쌈바춤을 추는 로봇에 빠지더니 흥이 더 넘친다. 그냥 계속 걷고 보고 놀면 되니 힘든 줄도 몰랐다.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저녁은 친정 식구들이랑 먹어야겠다 싶어 고깃집 예약을 부탁하고는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남은 과자까지 마저 먹고 차에 올랐다. 이제 집에 가는 길만 남았구나. 피곤했는지 또 금세 잠에 드는 녀석들. 고맙다 고마워. 이래서 엄마가 자꾸 씩씩해진다. 올해 둘 다 데리고 멀리 처음 간 건 지하철 체험이었다. 차로 40분 거리인 대구 3호선 종점까지 갔다가 차를 세워놓고 지하철을 탔다. 달성공원에 내려 동물 구경도 하고 간식도 먹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돌아왔다. 역세권이 따로 없었다. 두 번째는 포항 바닷가에 친구네 캠핑에 따라나섰던 것이다. 왕복 4시간 정도였는데 이때는 사람들이 많아서 주차부터 힘들었다. 그래도 독박을 여행으로 해내면 뿌듯함은 배로 왔다. 그래서 갈수록 더 씩씩한 엄마가 되는 것이다. 이젠 등산까지 했으니 다음엔 또 무슨 도전을 해볼까. 아들들아, 엄마 열심히 따라와 줘. 엄마의 로망이 뭔지 아니? 너희들이랑 같이 지리산 둘레길, 제주도 올레길 걷고, 자전거로 국토종주하고, 종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것이란다. 10년 후면 될까? 그때까지 엄마는 건강 잘 지키고 있을게. 우리 꼭 지리산부터 걷자!


황매산 억새 군락지에서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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