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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Dec 10. 2020

땡깔 나무집 할매의 노을빛 인정

- 조롱박 덩굴이 있는 골목 풍경이 부른 돌절구가 있던 땡깔 나무집



조롱박 덩굴로 덮인 골목 풍경이 부른 추억 하나



일본에서 약학을 공부하는 아이가 갑자기 구기자를 사서 보내달라는 카톡을 보냈다. 일본 약대는 병원과의 협업을 많이 하는데 마침 의사가 아이의 얼굴만 보고는 상태를 말하면서 구기자를 먹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뼈가 가늘어 보이는 사람은 구기자가 맞고, 뼈대가 굵은 사람은 오미자가 맞다는 진단이다. 


일본 약대 공부 이야기를 들으면 가끔 양약을 공부하는지 한약을 공부하는지 헷갈린다. 바싹 마른 풀떼기를 수십 개 늘어놓고 식물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신이 곡할 노릇인 시험도 있었다. 마르고 나면 그게 그걸 텐데라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또 시험이니까 그런대로 눈을 부릅뜨고 외워서 통과를 했었다. 


마침 한살림에서 구기자 환을 팔고 있어서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사서 보냈다. 구기자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진시황이 찾던 전설 속의 불로초라거나 장수 식품 등으로 이름이 있으니 먹어도 별 문제는 없었다. 



여름 내내 옥상 위는 조롱박 넝쿨로 덮여 있고, 고무 화분들은 고추들로 익어갔다


집을 나와서 상수역으로 가는 골목길에는 여름 내내 옥상 전체가 조롱박 덩굴로 덮인 집이 있었다. 그 집의 할머니는 그냥 흰 러닝 셔츠를 입은 채 아침이면 대문깐에 서 있었다. 대문 위를 바라보면 큰 고무화분이 빙 둘러 죽 있다. 거기서는 고추가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붉어지도록 주렁주렁 열렸다. 

두 계절을 나는 출근을 하면서 조롱박이 커가는 모습과 고추가 익어가는 모습을 눈여겨보면서 갔다. 그러니 골목이 심심할 리가 없었다. 


문득 구기자에 대한 기억이 한줄기 휙 지나가고, 조롱박 집 할머니를 보며, 오래전 땡깔 나무 할매가 그리워졌다. 


우리가 그 집을 땡깔 나무집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집의 울타리가 그 땡깔 나무로 둘러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땡깔 나무가 얼른얼른 익기만 기다리느라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훗날 땡깔 나무라고 우리들이 불렀던 것이 구기자나무인 줄 알게 되지만 그때는 그런 이름으로 불렀다. 당시 입에 넣어 불고 다니던 것을 통칭해서 땡깔이라고 불렀다.





 노을빛으로 빛나던 골목과 돌절구가 있던 집



땡깔.


땡깔 나무의 시퍼런 열매가 다 익으면 노을빛이 되었다. 다홍빛의 열매가 익을 무렵 우리는 주저 없이 그 다홍빛 열매를 몰래 따서 달착지근한 열매 속을 쪽 빨아먹고 껍질로 꽉꽉 소리를 내어 불고 다녔다.

땡깔 나무 열매가 얼마나 많이 열렸던지 조금만 따도 한 움큼이었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주먹이 조그마해서 땡깔이 한 줌 가득했을 것이다. 

그 골목의 반을 땡깔 나무가 길게 차지하고 있어서 땡깔이 익어갈 무렵은 그 좁고 어두운 골목이 다홍빛으로 다 환했다.


구기자나무, 구글 이미지


고무로 만든 땡깔을 팔았지만 우리는 고무 내음보다 달착지근한 이 열매를 서리하는 걸 퍽 즐겼다. 

또 우리가 입에 불고 다니는 열매는 꽈리도 있었는데, 이 꽈리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동네에서는 땡깔 나무집 뜰에 딱 한그루 있었다. 

그 꽈리를 손에 넣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니 이 땡깔 열매만 학교를 마치고 오는 우리의 서리 감이었다. 열매의 껍질은 매우 섬세해서, 아주 조심해서 구멍을 파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개의 땡깔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 움큼 정도의 열매가 필요했다. 그것도 재수가 좋아야 꽉꽉 불 수 있는 땡깔이 되었다. 


다홍빛 열매가 노을처럼 그 집을 두를 때쯤이면 땡깔 나무집 할매는 울타리 밖에서 감시를 했다. 아이들의 서리를 막느라고 긴 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서있었지만 걸음이 잰 아이들의 서리를 막을 재간이 없었다. 열매를 서리해서 걸음아 날 살려라고 뛸 때면 땡깔 할매는 겨우 그 자리에서 발만 구르고 서있곤 했다.

땡깔을 한주먹 훑어서 달아나다 보면 어느새 주먹은 이미 터져버린 땡깔로 다홍 물감을 터뜨린 듯 붉었다.


실은 땡깔 할머니는 우리가 누구네 집 자식들인지 다 환하게 알았다. 그런데도 땡깔 서리로 집에서 야단맞은 적이 없는 것을 보면, 땡깔할매는 우리의 땡깔 서리를 그저 눈 감아 주고 있었던 거 아닐까. 언젠가 한 번은 이러기도 하셨으니까.

조금씩만 따가라고......


땡깔할매집에는 돌절구가 하나 마당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지금의 복고풍적 문화의 눈으로 본다면 돌절구가  마치 집집마다 있었던 생활소품 정도로 간주되겠지만 실은 그 시절에도 귀하고 보기 드물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땡깔 나무집에만 딱 하나, 그 집 마당에 돌절구가 놓여 있었다.


동네잔치나 제사, 누구누구 집에 결혼하는 날, 굿하는 날, 명절 등등 동네서 제법 큰일이 벌어지거나, 각 집마다 큰일을 치러야 하는 날에는 땡깔 나무집에 먼저 달려가 저 돌절구를 빌려서 쌀을 빻고, 떡을 치고, 메주콩도 찧었다. 그러다 보니 늘 한 집에만 행사가 있어도 결국 동네 행사로 번져갔다. 늘 돌절구에서 맛있는 것들이 수북수북 있다 보니 고소한 냄새만 맡고도 동네 아줌마들이 하던 일도 팽개치고 모여들었고, 아니, 모여서 수다 떨기가 더 좋았던지도 모르지만, 다 모였다. 

학교 갔다 오던 우리도 늘 땡깔 나무집 앞을 기웃거렸다. 그 집 앞에만 가면 왜 그리도 모든 것이 아련하고 아득하고 갖고 싶고 먹고 싶은 것들만 가득한지.


동네 행사가 딱히 없더라도 나는 그 집 앞을 지나는 것을 좋아했다.

바로 우리 집 대문을 나서면 아주 작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는 집이어서도 그랬겠지만 텅 빈 돌절구에 내린 빗물이 고여있는 모습도 좋았고, 그 위에 꽃잎이나 푸른 나뭇잎이 하나 후르르 떨어져라도 있을 양이면, 어쩐지 얼굴이라도 비춰보고 싶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혹시라도 돌절구 안에 땡감이 떨어져 있지 않은지 지켜보는 이유도 제일 컸을 것이다. 


돌절구 곁에는 큰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감나무가 어찌나 튼실하든지, 늘 대봉 같은 감이 주렁주렁 열렸고, 이 감이 익기도 전에 감꼭지 채로 돌절구 안에 똑떨어진 걸 줍기라도 할 때면 억수로 운이 좋은 거였다.

땡감을 주워다가 뒤주 속에 파묻어 둘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땅에 떨어진 걸 줍는 거보다 모양새가 좋았다.




땡깔보다 더 이쁜 땡깔할매집 딸들



땡깔 나무집은 돌절구와 감나무만 있었던 게 아니다.

우리가 그 집을 기웃거린 이유는 먹을 것이 담길 때가 더 많은 돌절구와, 꽈리를 만들기 위한 땡깔 열매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집의 예쁜 딸들을 보기 위해서도 있다.  

그 땡깔 나무 할매에게는 딸이 셋 있었다. 동네에서 예쁘기로 소문났다. 


경상도 말로 박상, 그리고 꽈리나무 열매, 돌절구(두산백과 이미지)


가을의 메주 철이 오면 동네 사람들은 품앗이를 했다. 오늘은 이 집의 메주 쑤는 날, 내일은 저 집의 메주 쑤는 날, 이렇게 돌아가면서 하다 보면 그 가을은 내내 메주콩을 쑤고, 빻고 하느라고 왁자지껄했고, 동네에 하나뿐인 돌절구가 있는 땡깔 나무집은 늘 북적거렸고, 먹을게 가득했다. 

동네 아줌마들은 메주를 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주전부리를 가져왔고, 전도 부치고, 강정들도 나왔고, 그 귀한 오꼬시도 나왔다. 



위키백과 이미지


땡깔 나무집 할매는 우리들이 땡깔을 너무 서리하는 바람에, 우리에게는 좀 팍팍했던 것 같은데, 그 집 딸들은 하나같이 예쁘고 마음씨가 좋았다.

어느 때 큰 딸 덕자는 가만히 손짓해 불러서 붉게 익어가는 꽈리도 땡깔할매 몰래 하나 똑 따준 적이 있다. 처음으로 손에 넣어본 꽈리였다.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애지중지 하느라 땡깔로 불어보진 못했다. 


우리가 오자마(콩주머니) 놀이를 하면서 덕자 애자 민자야하고 이름을 부르면서 놀아도 화내지 않고 웃기만 하던 여배우보다도 더 예쁘던 언니들이었다. 사실 이름을 부르고 있지만 당시로는 나이가 20대가 훌쩍 넘은 아가씨였다. 


돌절구, 지금은 울타리가 넘실하니 높은 집의 정원이나 장식하거나, 옛날 물건이라고 고상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나 찾을 법한 복고풍의 물건이지만, 돌절구는 그때 그 시절은 동네의 가장 긴요한 생활도구였다.

오직 이 돌절구가 있던 땡깔 나무집은, 돌절구가 필요한 동네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게 문도 그저 땡깔 나무들 사이를 엇비슷이 걸친 허술한 대문이었다.


이제 생각해보니 오래 오래도록 땡깔 나무로 울이 쳐져 있었던 것도 동네 방앗간 노릇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 다홍빛 노을 같던 울타리 사이로 그 집의 대청마루가 환히 드려다 보이고, 그 이쁜 땡깔할매집 딸들도 보이고, 돌절구에 떨어졌을 땡감도 머릿속에 환하고, 구수하던 메주콩 냄새도 화안하던, 돌절구가 있던 마당을 지금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땡깔을 어린 시절 내내 따먹었으니 진시황도 찾았다는 그 불로초라는 전설의 구기자를 내가 실컷 먹은 셈이다. 그러니 나도 불로장생은 아니더라도 땡깔할매 덕에 오래 살 수 있으려나. 그리고 땡깔할매는 그 울타리에서 해마다 열리는 구기자로 오래오래 사셨을까.  


생각해보면 돌절구의 그 아슴한 삶은 콩의 향기는 땡깔 나무와 더불어 노을빛 인정의 향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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