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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Dec 23. 2020

몬드리안의 추상화 같은 골목 풍경

- 추억을 소환하는 아득하고 따뜻한 시간


마치 소설 <날개>에 나오는 집처럼



집에서 바라보면 추억 샘을 매우 자극하는 풍경이 늘 펼쳐진다. 요즘 사랑하는 풍경이다.

고정창을 통해서 바라보는 골목 풍경은 마치 한 폭의 인화된 사진처럼 늘 그 자리에 머물고 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아련하게 떠오르는 어떤 뭉클함. 그 어떤 멋진 풍경보다도 마음을 울리는 정경이다.  


골목.

문득 소리 내어서 불러보면 잃어버린 것들이 퍼드득 거리며 솟는다.

사람 사는 모습이 저리 환하게 드러나는 것이 정겹고 따뜻하다. 누군가 나 외에도 맞은편에서 살고 있구나, 그렇게 느끼는 감정은 매우 낯설면서도 익숙한 상념을 자아낸다.  



집 맞은 편의 계단 위 길게 선 주택들, 2019. 6월, 당인동



맞은편 동네 골목의 마주 보는 계단을 올라가면 이렇게 길게 자리 잡은 집이 있다. 처음에는 매우 특이하고 신기했다.


처음 이 골목집을 보는 순간 생뚱맞게도 이상의 <날개>에 나오는 구절을 떠올렸다.


‘33번지’ 유곽에, ‘18가구’가 서로 어깨를 맞대고 늘어져 있는 동네'


<날개>에서 주인공인 '나'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그 집에서 탈출하기 위해 또 다른 자아인 아내를 뛰어넘으려고 아달린을 먹지 않고, 아내가 주는 돈을 사용하고, 아내의 화장품도 만지작거리다가 거리로 나가고, 마침내 미스꼬시 옥상에 올라간다.


물론 이 골목집은 18가구도 아니고, 다만 길게 늘어서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끝으로 걸어가면 또 다른 집들이 잇닿아 나온다. 그러니까 집들은 끝나는 게 아니다. 골목은 그렇게 물결처럼 흘러가고 있다.  

그 길게 늘어선 길이가 매우 정겹다. 아파트의 기계적인 공동체적 시스템과는 분명히 다른, 나른하고 느리면서도 게으른 무언가를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집마다 창호가 유사하고 아궁이 모양이 똑같다는 이상의 소설 속 구절이 아니어도 그 구조의 공통분모가 오히려 더 다정하고 정겨워 보이는 골목 풍경이다.


전원을 찾아서 집을 짓는 것도 즐겁겠지만, 이렇게 동네 한복판에 집을 짓고 보니 그것도 꽤나 가슴 뭉클한 추억에 잠기게 하는 일이다.

골목길의 풍경에서는 어떤 장면을 보더라도 단박에 저 옛날의 추억들을 바로바로 소환한다. 그만큼 골목에 대한 향수가 깊어진다.



집의 맞은편 계단, 저 위를 올라가서 그 이상의 <날개> 속 같은 집이 있다. 2020년, 8월, 당인동


가끔 저 계단 위에 젊은이들이 앉아서 그저 먹먹히 있다. 그리고 엄마 손을 잡은 어린아이가 올라간다.

저녁이면 어떤 집에서 나온 아저씨가 화분에 물을 자유롭게 뿌린다. 이렇게 사람을 보는 즐거움이 있어서 어떤 순간은 외롭지 않다.

  

어린 날, 구불구불한 골목길에서 저녁 늦도록 놀다가 엄마의 꾸지람을 듣던 날들이 불현듯 떠오르기도 한다.

우와우와 몰려다니던 그 동네 친구들이 지금은 어디서 다 무엇을 하는지 몰라도, 한 번씩 잘 있으려나 하고 떠올려보면서 잠잠히 웃어보는 추억도 행복하다.




혼자 느림의 삶을 새기며 걷는 길



골목길은 느림과 명상의 길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은 마치 삶의 한 구비처럼 낯익다. 조형적 요소들이 연쇄반응처럼 나타난다. 공중에 걸린 전선줄조차 어떤 집에서 어떤 집으로 보내는 송신의 협화음처럼 느껴진다. 


골목길에서 느끼는 창호들, 길의 넓고 좁아짐, 담장의 얼룩들, 담벼락의 낡은 색채들.

그 모든 것들이 골목을 지탱하고 그대로 우리의 기억의 장으로 살아남아 있다. 쭉쭉 곧은 길들만 익숙한 현대인들이 그래도 골목을 찾는 이유는 바로 이런 구부러짐과 돌아서서 나타나는 뜻밖의 풍경을 그리워하기 때문이 아닐까.


골목의 시간은 다르다.

러시아워의 아우성이나 대로변의 소음이 골목길에 도달하면 오래된 안개처럼 가라앉는다.

아파트의 콘크리트에서 느끼는 황량하고 거친 길에 지친 도시인이라면 이제 골목길의 소박하고 순진한 시간을 즐길 수 있다. 골목길로 스며들어서 내려앉는 시간들은 우리를 잠잠히 명상하고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 느림은 이제 삶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


골목에서는 걸어야 한다. 어릴 때는 친구들과 더불어 뛰었고, 이제 어른이 되어서는 혼자 걷는다. 그렇게 걷는 곳으로 서서히 변해가는 곳이 골목이다.

차들이 함부로 진행하는 대로변과는 다른 공간으로 골목은 이제 인식되어야 하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리고 골목 안에서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아늑하고 평화로워야 한다.


골목은 머무르는 곳이다. 

머무른다는 것은 마치 고향 같은 시간을 준다는 의미와 유사할 것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오고 잠시 평화로움을 간직했다면 골목은 성공했다. 그래서 나는 골목 속에 집을 짓고, 가게를 만들면서 그런 작고 소박한 성공을 바랐고, 핑크빛으로 집을 페인트 칠했다.


처음에 '집을 핑크로 페인트 해주세요'라고 했을 때 건축사와 시공사가 거의 비슷한 반응을 보였었다.

핑크빛 집이라니(갸우뚱). 그러니까 핑크는 집을 칠하기에는 적합한 색깔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나와 식구들은 한치의 의심도 없이, 한 점의 의혹도 없이 처음부터 핑크 집을 기획했고, 끝까지 밀어붙인 셈이다. 가끔은 뜻밖인 곳이 골목이니까.  


도시인들이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어디서 가져올 것인가. 도시는 아파트와 골목으로 나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아파트서 살고 있으면서도 골목에 대한 로망은 쉽게 저버리지 못할 것이다.

편리함과 기억에 대한 공존의 대비적 문제일지도 모른다. 


골목이 아닌 곳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쩌면 도시 속에서는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일지 모른다. 골목으로 흡수되는 것이 어쩌면 무모한 돌진일지도 모른다.

나도 오랫동안 그랬다. 아파트의 편리함과 오르락내리락하는 아파트의 황금만능적 성격 때문에서도 그럴지 모른다.


몬드리안의 추상화, 선들은 골목 같고 네모난 컬러 도형은 집들 같다



사람들 사이에 묻혀 있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들의 심리는 바로 도시가 만들어낸 쓸데없는 공허한 심리다. 골목을 자주 다니다 보면 자신을 발견할 수도, 그리고 혼자 거니는 또 다른 사람을 보면서 군중 속의 고독이 만든 사회적 부산물이 얼마나 삶을 지치게 하는지 알 것이다.

골목을 떠올릴 때면 무언가 아득하게 그리워지는 그런 시간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이제 도시적 생태에서는 필요하다.


간혹 몬드리안의 추상적 회화를 볼 때면 나는 골목을 떠올린다. 좁고  골목의 자유로움이 화가의 추상화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가늘고 얇은 그 직선은 골목을 극단적으로 추상적으로 압축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나누어진 각 면들, 그 공간 속에서 각자의 집을 가진 골목 속 풍경을 상상해본다. 그 공간 속에 남아있는 소리들도 들어본다. 온갖 소리, 소리들.



골목은 추억이고 따뜻하고 아득한 그리움이다.

골목을 사랑한 작가, 김기찬의 사진 속에 남은 골목 안 풍경은 사실은 그 시절 그 시간 우리의 마음속에 남은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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