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일본 서점 대상의 번역 부분에 선정된 <아몬드>는 청소년기의 성장을 그리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타인과의 공감 문제를 다룬다.
"누구나 머릿속에 아몬드를 2개 가지고 있다. 귀 뒤쪽에서 머리로 올라가는 깊숙한 크기도 생긴 것도 딱 아몬드. 복숭아씨를 닮았다고 해서 아미그달라나 편도체라고 부른다. 남들이 웃는지 우는지 잘 모른다. 내겐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두려움도 희미하다. 의사들의 진단은 감정표현 불능증, 알렉시티미아, 증상이 깊고 나이가 어려 아스퍼거 증후군은 아니고 다른 발달 문제가 없어서 자폐도 아니다."
주인공 선윤재가 공감능력을 상실한 채로 태어났다고 소설 속에서 말하지만, 이는 마치 현대 사회의 닫힌 문 앞에서 우리 모두가 공감 능력을 상실한 것처럼 공허하고 슬픈 은유다.
그러나 공감의 확대가 점층적으로 번져가는 모습에서 한 줄기 희망을 전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감정이 서서히 번져가는 모습을 그리는 한 폭의 수채화 같다. 그렇게 감정은 조금씩 엷게 번져 간다.
편도체는 주로 공포와 같은 감정적 표현과 반응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타인의 생각, 의도 등의 상태를 파악하고 행동의 의미를 알아차리는 사회적 활동과 공감 활동에 관여한다고 정의한다.
1970년대 처음 보고된 정서적 장애로, 아동기에 정서 발달 단계를 잘 거치지 못했거나, 트라우마를 겪은 경우, 선천적으로 편도체가 작은 경우, 특히 마지막은 공포를 잘 느끼지 못한다.
다만 공포 불안감 등과 관련된 편도체의 일부는 후천적인 훈련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보고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후천적 훈련이다. 이 소설에서도 바로 이 후천적 요인이 주인공 선윤재의 공감능력을 기르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한다.
'선천적으로 머릿속의 아몬드 편도체의 크기가 작은 데다 뇌 변연계와 전두엽 사이의 접촉이 원활하지 못해 그렇게 된 거. 편도체가 작으면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가 공포심을 잘 모르는 것이다. 공포심 둔화 외에 나처럼 전반적인 감정 불능까지 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지능 저하의 소견이 없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다.'
감정 불능의 윤재가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이다. 그러나 지능 저하가 없는 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듯이 지능의 정상적 활동은 이후 스스로를 자각하는 가장 중요한 힘이 된다. 그리고 서서히 거나 혹은 심 박사의 말처럼 '연습'을 하거나 감정의 점진적 나아감을 경험한다.
감정도 노력을 먹고 자라는 것
윤재는 삼시 세끼 엄마가 먹이는 아몬드를 먹는다.
아몬드 형태의 감각 중추의 이름에 하필이면 그 많은 단어 중에서 견과류 아몬드가 선정되었을까. 치매에 걸리지 않으려면 견과류를 먹으라고 하는데 그런 연상도 얼마간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전두엽의 인지 감각기능을 자극하는 것은 이미 학자들 사이에 연구된 바다.
그 유명한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도 편도체 관련 자극이 나온다. 편도체는 우리에게 가능한 모든 감각들이 닿는 곳이다.
음식은 다양한 감각의 집합체다. 눈으로 음식의 색을 보는 시각, 각 재료들이 만드는 부드러움 혹은 소리를 내어 씹어먹거나 깨물어 먹을 때 아작아작 소리가 나는 청각적인 면, 달콤하거나 구수한 냄새로도 전하는 후각, 입안에서 쓰거나 신 미각적인 면 등, 음식 한 접시는 이 모든 감각의 총체화며 감각을 일깨우는 종합적 판타지다.
그럴 때 윤재의 감각의 깨어남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음식과 관련해서 살펴볼 수 있다. 아직 어린 윤재가 사람들과 먹는 음식들은 우동, 메밀국수, 맥도널드 햄버거, 피자, 빵 등이다.
소설 속에서 심박사는 윤재의 감각을 깨어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심 박사와 윤재가 대화를 나누는 순간은 늘 음식이 앞에 놓여 있다.
심박사는 윤재에게
"편도체가 작게 태어났지만 노력을 통해 가짜 감정이라도 자꾸 만들다 보면 뇌가 그걸 진짜 감정으로 인식할지도 모른다."
"사람의 머리란 생각보다 묘한 놈이거든, 가슴이 머리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게 사람이란다."
라고 하면서 그러면 편도체의 크기와 활성화에 영향이 생겨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기 쉬워질 수도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윤재는 지난 16년간 꼼짝 않던 머리가 이제 와서 변할까라고 의문을 품지만, 심박사는 포기하지 않고 '연습을 하면 조금 나아가는 것', '너한테서 질문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굉장한 변화', ' 노력을 해보자.'라고 말한다.
심 박사 같은 어른이 있어서 삶의 변화가 찾아오고, 그걸 무조건 거부하지 않는 순수한 아이가 있어서 언제나 희망이 있다.
이때 두 사람은 우동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눈다.
감정의 등가물인 우동
<아기 울음 멈추는 방법에 관한 음향심리 연구: 우동 먹는 소리의 경우>를 연구한 논문에 의하면, 우동 먹는 소리가 귀에 들려오면, 아기는 태아 시절의 경험을 기억하여 안도감을 연상하면서 울음을 그치게 되는 것으로 판단한다.
그럴 때 심 박사와 윤재가 우동을 먹으면서, 감정도 노력과 연습을 하면 변화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대화는 매우 시의적절하다.
우리에게 우동은 어떤 감정의 등가물인 경우가 많다.
일본 동화 <우동 한 그릇>에 담긴 이야기 속 우동은 따뜻하다. 우동집 주인은 매년 12월 31일에 두 아이와 한 여인이 찾아와 처음에는 한 그릇만, 다음 해는 두 그릇만 주문하지만 그때마다 반인 분씩을 더 준다. 그들이 찾아오지 않아도 이제 그날은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린다. 어느 날 건장한 두 청년과 노부인이 찾아오고 우동 세 그릇을 주문하며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거창한 외식이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음이 뜨끈해서 눈시울이 촉촉해지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여기서는 사실 가케소바 즉 메밀국수가 우동으로 번역되었다. 일본은 그 해의 마지막 날에 메밀국수를 먹는 풍습이 있다.
일본 풍습에서 섣달 그믐날에 먹는 메밀국수는 해를 넘기면서 무사하기를 혹은 안좋은 일은 잊기를 기원하면서 먹는 음식이다. 가난한 모자가 찾아와서 주문하는 국수를 더 주는 것은 가게 주인의 따뜻한 인정이다. 그리고 가난한 모자는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이제 현실의 고단함에서 벗어난 모습으로 우동집을 찾아온다. 이때 우리는 메밀국수의 마법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물론 <우동 한 그릇>의 우동에 대해서 이어령은 <축소 지향의 일본인 : 그 이후>에서 검약과 자기 자신에 주는 포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보았다.
<아몬드>에서는 따뜻한 우동이 어울린다. 우동하면 떠올리는 그 소박하게 마음을 적시는 따뜻함. 윤재와 심 박사의 대화 사이에는 그래서 우동과 메밀국수가 놓여 있다.
따뜻한 우동을 연상하거나 바라는 것은 아마 우리식의 정서일 것이다. 그러기에 일본 동화 <우동 한 그릇>의 메밀국수도 우동으로 번역하지 않았을까.
방학이면 서울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무궁화열차가 대전에 잠시 정차하면 그 잠깐의 시간에 사람들은 가락국수를 먹으러 우르르 내렸다. 물론 그것은 우동이다. 간이 우동을 한 그릇 먹으려고 얼른 내리는 사람들은 먹으러 가는 것보다 아마 열차의 향수, 겨울의 온기를 느끼러 간 것이리라.
이처럼 우동은 마음을 따뜻이 데우는 감각 장치에 매우 탁월하다.
원초적 고향 같은 익숙한 맛의 메밀국수
심 박사가 윤재와 대화를 나눌 때는 우동만이 아니라 메밀국수도 나온다. 심박사는 청소년기엔 메밀만으론 칼로리가 너무 낮다며 왕새우튀김도 시켜준다.
그때 윤재는 자신의 몸이 겪고 있는 이상한 증상들을 털어놓는다. 윤재는 감기 증상인거 같아서 약을 먹었다고 말한다. 사실은 이제 윤재는 막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무반응과 무감각에 더 가까웠던 윤재는 그 또래의 아이들이 거쳐 가는 사랑의 느낌에,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몸이 더웠다. 맥박이 귀밑에서 팔딱거렸다. 손끝에서도 발가락 끝에서도 작은 벌레들이 몸을 기어 다니는 것처럼 간질간질했다. 별로 상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머리가 아팠고 어지러웠다.'
고 생각한다. 도라의 머리카락이 자신의 얼굴에 닿던 순간 그 감촉과 냄새와 공기의 온도를 생각한다. 그러면서 감각의 깨어남을 경험한다.
소설 <아몬드>에 나타난 메밀국수를 우리는 백석의 시 <국수> 속의 그 공동체적 따뜻함을 느끼는 모밀국수,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그 메밀의 아련하고 애틋한 음식으로 먼저 떠올린다.
심 박사와 윤재가 만나서 먹는 음식이 우동이거나 메밀 국수일 때 이 두 가지 음식은 윤재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고 진지하게 털어놓게 만드는 매개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의 변화는 익숙하고 정겨운 느낌을 가진 음식 때문일 가능성이 더 농후하다.
심박사는 윤재가 맡게 되는 헌책방 위에서 빵집을 하는 사람이다. 빵 냄새는 무언가 그리운 것을 떠올리게 했고,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이나 설명하기 힘든 사소한 기억의 한 장면 같은 것을 되새기게 만든다. 빵을 좋아하던 아내가 죽은 후에 빵집을 하는 심 박사의 행동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지만, 심 박사에게는 빵이 중요한 게 아니라 빵의 냄새 즉 감각이 그리운 것이었고, 빵집에는 곰보빵 우유식빵 크림빵만 팔지만 보기보단 맛있다고 윤재는 생각한다.
즉 타인의 감정에 대한 공감이 비로소 싹트기 시작하는 것이다.음식 냄새로.
세상과 마주 보는 용기를 가르치는 어른도 필요하다
윤재의 미성숙한 감각은 심박사라는 어른을 통해 조금씩 깨어난다. 마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제제와 뽀르뚜가를 연상하게 한다. 상처와 가시 투성이의 세상과 마주하는 용기를 가르치는 어른이 있는 세계는 얼마나 따뜻한가.
윤재는 자두맛 사탕을 다양한 감각으로 느낀다. 그리고 정신을 잃고 무의식 속에서 사탕 맛을 느끼기까지 하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눈을 떴을 때 눈 앞에 심 박사가 있는 경험도 한다. 그만큼 심박사는 이 소설에서 따뜻한 어른이다. 아이가 성장해가는데 어른의 역할은 마치 거대한 산맥처럼 단단하고 의지할 버팀목이다.
물론 이 소설에는 세상의 문을 여는 경험을 하게 만드는 어른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도라도 있다.
윤재는 도라를 '어디에서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아이로 기억한다. 도라의 머리칼이 얼굴을 스치자 '갑자기 가슴속에 무거운 돌덩이'를 느끼거나, 도라가 '누구나 알고 있는 노래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꿔 부를 줄 아는 아이'라고 인식할 때, 또 다른 세상의 감각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타인과의 공감을 형성하는 순간이다.
윤재가 할머니가 살해당하고 어머니가 식물인간이 되자 어머니가 운영하던 헌책방을 물려받으면서도 공감의 형성대는 넓어진다.
'책방은 수천수만 명의 작가가 산 사람, 죽은 사람 구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인구 밀도 높은 곳, 그러나 책들은 조용하다. 펼치기 전까진 죽어 있다가 펼치는 순간부터 이야기를 쏟아낸다.'
고 느끼면서 마치 헌책방의 책처럼 펼치기 전까지는 조용했던 감각의 세계가 이제 서서히 깨어나는 찬란한 경험을 배우게 된다.
우동과 메밀국수를 탁자에 두고 따뜻한 대화들이 오가면서 윤재가 알게 되는 현실은 그렇게 희망적이지 않다.
심박사는 윤재가 살아가면서 부딪칠 때 드러날 현실에 대해 감추거나 은폐하지 않는다.
'몰랐던 감정들을 이해하는 게 꼭 좋기만 한 일은 아니란다. 세상이 네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달라 보일 거다. 날카로운 무기로 느껴질 수도 있고 별거 아닌 표정이나 말이 가시처럼 아프게 다가오기도 하지. 길가의 돌멩이를 보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대신 상처 받을 일도 없단다. 하지만 자신이 하루에도 수십 번 차이고 밟히고 굴러다니고 깨진다는 걸 알게 되면 돌멩이의 기분은 어떨까.'
심박사는 감각이 없는 돌멩이가 되느니 차라리 부서지고 깨지면서 상처를 받더라도 세상을 마주할 용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 소설은 얼핏 장애 소설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두꺼운 갑옷을 벗어버리고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한 소년의 무감각은 세상에서 숨기 위한 갑옷을 걸친 듯하지만, 마침내 그것을 뚫고 들어오는 창을 씩씩하게 받는다. 세상과의 공감이 어떤 형태이든지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우리가 살아야하는 현실이다.
자신의 생일에 할머니가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도 아무 감각조차 느끼지 못했던 윤재는 이제 '할멈은 아팠을까 지금의 나처럼'이라고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그 순간 델만큼 뜨거운 뭔가를 느끼면서 '내 안의 무언가가 영원히 부서졌다.' 고 한다.
이 부서짐은 마치 헤세의 <데미안>에서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는 알 깨기의 장치처럼 고통스러운 성장통이다.
어머니가 식물인간에서 깨어나자 윤재는 어머니가 무언가를 해냈다고 생각하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윤재가 불가능한 무언가를 해냈다고 말한다.
'느껴져, 내가 속삭였다. 비로소 나는 인간이 되었다.'
윤재는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순간 모든 껍질을 벗고 다시 태어난다. 그 공감을 알게 되는 감각의 태어남을 지켜봐 준 사람들 속에는 따뜻한 어른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