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에 사는 동생이 가전제품을 사러 홈디포(Home depot)와 로우즈(Lowes)를 방문했다. 이 대형매장은 집수리와 집 인테리어 등을 하는데 필요한 물품을 파는 곳으로 코로나 와중에도 붐빈다고 한다.
사진을 보냈는데 바로 이곳 가전제품 코너에 삼성과 LG가 몇 개 안 되는 디스플레이 쇼룸에 나란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인기도 좋다고 한다.
대형매장의 삼성과 LG 디스플레이 쇼룸, 동생이 보낸 사진
예전에는 한국 제품이 가격 대비 품질이 좋은 제품에 속했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찾는, 싼 제품이 아닌, 가전제품으로 이름을 내고 있으며 디자인과 성능에서도 전혀 뒤지지 않는 제품이라고 한다.
미국 시장조사업체들의 조사에서도 소비자 만족도가 아주 좋은 브랜드로 뽑혔고, 별점도 '아주 좋아'로 나온다고 했다.
일본 브랜드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데 LG와 삼성이 미국에서 선방하고 있다고 하니 가전제품 하나로도 한국의 이름을 알린다는 말이 즐겁다.
동생이 사는 곳은 실리콘밸리의 팔로알토로 그런 곳에 우리 가전제품이 들어가 있다는 것만도 자부심을 가질만하다.
‘삼성전자 분기 영업이익 10조 원 시대’라는 상상도 못 할 숫자의 뉴스를 보면서, 소설화된 <삼성 컨스피런스>를 생각한다. 이 책은 기업과 과학의 연계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옳은 점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면도 있을 것이다.
지금 삼성은 평택에 세계 최대 반도체 공장을 건설했다. 공장을 가동 중이라는 뉴스를 볼 때마다 이 책은 마치 삼성의 미래를 미리 내다보면서 쓴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음은 또 뭘까.
거위 간과 인재 사냥
이 책은 다루기 힘든 굵직굵직한 문제가 일단 겉으로 보인다.
삼성의 반도체 사업 문제, 인재 사냥꾼인 바이스로이 재단, 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자금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 회수 문제, 실종된 과학자들의 문제, 대한민국 교육이 문과 지향이어야 하는가, 이공계 지향일 것인가의 문제 등등.
물론 이 작품의 말미는 삼성전자의 선방으로 끝난다. 나열한 다른 문제들은 다 저변으로 깔리거나 사라진다.
이런 문제들을 거론하면서 현존하는 사람들의 실명을 그대로 쓰거나, 고인이 된 사람들의 실명을 전면에 드러냄으로써 소설이 허구라는 면을 독자들은 잠깐 망각한다. 그래서 작가는 아이러니하게도 음모(컨스피런스)의 뒷면을 결국 제대로 드러낼 수 없었을지 모른다.
이 책의 인재 사냥꾼인 바이스로이는 거위 간을 스카치와 함께 먹으면서 많은 결정을 한다. 하필이면 왜 거위 간일까.
세계 3대 요리로 치는 것은 철갑상어알과 송로버섯, 그리고 거위간이다. 그런데 거위 간은 포도주와 어울린다는데 여기서는 반드시 독한 스카치에 곁들여 먹는다.
거위 간을 비대하다는 뜻의 푸아그라라고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바이스로이가 거위 간을 먹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거위 간을 비대하게 해서 요리하는 것은 고대 로마, 혹은 고대 이집트의 요리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거위 간을 비대하게 하려면 거위 사육장을 어둡게 하고 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다리를 묶어 놓고 강제로 사료를 먹여 간을 크게 만든다.
이처럼 거위 간을 강제로 비대하게 만드는 법이 마치 바이스로이가 과학영재들을 일찌감치 장학금 및 일체의 모든 생활비 등의 돈으로 묶어놓고 비대하게 만들어 그 후에 그들을 더 비싼 값에 회사들에 넘기는 방법과 유사하다.
바이스로이는 스스로 로마 유적 중의 최고라고 간주하는 폐허의 로마 포럼에 앉아서 꼭 거위 간을 먹는다. 거위 간을 먹으면서 황제의 궁전을 생각하고, 그 궁전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며 거위 간을 먹었을지 생각한다.
그러면서 ‘지금 남은 것은 무엇인가. 흙, 흙 밖에는 남은 것이 없지 않나.’ 고 사건기자인 정의림에게 말한다.
그렇다. 남은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놓은 문화며 문명이다. 그러니까 바이스로이가 신봉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단지 기술일 뿐이다.
로마 포럼 이미지
어릴 때 이웃집에 거위를 기르는 집이 있었다. 거위 두 마리가 홍시 색깔의 주둥이와 발을 드러내면서 그 집 마당을 돌아다니는 것을 학교서 돌아오는 길에 보곤 했다. 그러면 거위는 꺽꺽거리면서 달려들 듯 허스키한 목소리를 내면서 사납게 짖었다.
거위와 오리를 착각했던 나는 거위가 사납게 겅중거리며 달려들자 몹시 놀랐었다. 어른들은 거위가 개보다 더 집을 잘 지킨다고 했다. 그 후로 거위란 무섭고 사납지만 집을 잘 지키는 짐승이구나 생각했다.
바이스로이는 바로 이렇게 집을 잘 지키는 거위처럼, 과학영재들을 자신을 지키는 존재로 전락시켰던 것일까.
꿈을 부르는 이름
이 책을 읽다 보니 거위의 운명이 바로 인간의 손에 숙명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간을 꺼내먹기 위해서.간은 우리 몸에서 만능에 가까운 역할을 하는 중요한 기관이다. 그래서 간에 대한 의미심장한 상징들이 도처에 있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이유로 바위 절벽에 묶여 헤라클레스가 구해주기까지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았다.
우리 고전문학 속에서 용왕은 토끼의 간을 먹으면 병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인 윤동주는 시, <간>에서 시대적 고민을 토로하는데, 여기서 간은 곧 양심이다.
바이스로이가 한국의 과학인재들을 온갖 구속으로 묶어 두는 설정은 또 한편 한국의 과학자들이 설 자리가 얼마나 열악한가를 드러내는 역설이기도 하다. 우리말에 간도 쓸개도 다 빼주었다는 말이 있다. 가진 것 전부를 다 주었다는 의미다.
바이스로이가 거위 간을 즐기듯이 한국의 과학자들의 간도 쓸개도 다 빼가는 설정은 이 작품이 비록 허구적이라 하더라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런데 한국의 교육에서 이공계를 육성해야 한다는 설정은 이 작품만으로는 다소 무리가 아닐까. 현재는 이과를 많이 선택한다. 대학별 선발 인원수도 많고 학과도 다양해서 많은 학생들이 문과보다는 이과를 더 선호한다. 인문학의 부재 시대다.
우리의 과학 인재에 대한 열망으로 이공계 육성 문제를 거론했지만, 모든 문제는 균형 잡힐 때 바람직하다.
바이스로이가 거위 간을 좋아하는 것보다는, 왕희지가 거위를 좋아하여 <황정경(黄庭经)>을 써주고 거위 기르는 도사에게서 거위를 사간 이야기가 훨씬 마음에 와 닿는다. 거위 모양이 왕희지 필법에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왕희지의 거위를 아끼는 마음이 더 가슴에 와 닿는 것은 동서양의 자연물을 대하는 모습의 차이 때문일까.
삼성이 현재 뉴스에 오르내리고 있는 상황에서 이 책의 설정은 흥미진진하다. 국내에서 보는 삼성과 국외서 삼성을 바라보는 눈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시선이 필요할지 모른다. 국내외적으로 많은 변수가 있는 상황에서 경제적인 문제는 개인이든 국가든 매우 중요하다.
오프라 윈프리는 ‘저는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지만, 누가 그 미래를 결정하는지는 압니다.’라고 했다.
힘든 삶을 겪어낸 후 자신을 찾은 사람의 말답게 무조건적인 낙관은 위험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연 우리 모두의 그 미래를 누가 결정할까. 신일까. 아니면 바이스로이 같은 거대한 어떤 권력일까.
아니, 바로 자신이다.
스스로 미래의 삶을 만들어가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이나 힘에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일어설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