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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Dec 26. 2020

엄마가 던진 용기와 희망, 초콜릿에 관한 은유

- <포레스트 검프>, 아들의 기말시험 숙제 중의 하나였다



아들의 영화보기 숙제 4가지 중의 하나였다



대학도 코로나로 온라인 수업을 하다 보니 숙제가 영화보기라고 한다.

오, 그거 멋진데, 까지는 좋았는데, 영화 보고 영어로 토론한다는 것이다. 그냥 우리말로 써내는 거 아니고?


팀들이 소회의실 같은 방을 하나 만들어서 교수님이 영화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던지면 거기에 대한 평을 나누는 것이다.

자유토론이지만 주어지는 질문에 자유롭게 영어가 되어야 하는 것이 우리 때의 수업방식과 달라도 참 다르다. 우리야 영어로 말하라고 하면 하지도 못할뿐더러 도망가기 바빴다. 온라인 수업이 되니 거기에 최적화된 숙제가 주어지는 모양인데 영화 보는 것까진 멋있어 보인다.

그런데 요즘 교수님들은 영어도 아주 잘해야 하는구나 싶다. 하긴 서울대 교수라면 유학은 당연히 다녀오지 않았을까 싶지만.


  나도 일단은 아들과 영화 얘기라도 해야 탁구공 같은 대화가 오갈 것이니 영화 네 가지를 다 대보라고 했다. <포레스트 검프>, <코코 샤넬 (애니메이션)>, <쇼생크 탈출>, <캐치 미 이프 유 캔>이라고 하는 것을 나는 한글로 받아 적었다.

 



인생이 초콜릿이면 상자 속 어느 것을 먹어도 초콜릿



가끔 운명은 우연히 주어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과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그렇게 운명이 올까.

<포레스트 검프>에서는 벤치에 앉은 주인공이 금빛 리본의 초콜릿 상자를 들고 있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포레스트 검프>, 포레스트가 제니를 만나러 가기 직전의 벤치, 운동화의 대비를 주목할 수 있다. 오른쪽은 엄마의 임종 직전, 넷플릭스 이미지


인생이 초콜릿 상자라면 사실 어느 것을 골라도 다 초콜릿을 고르고 있는 것이다. 초콜릿에 들어있는 부재료가 각기 다를 수 있겠지만 민트든, 씹히는 것이든, 위스키가 들어있는 봉봉 초콜릿이든 그 끝 맛은 결국 달콤한 초콜릿 맛이다.  


이 작품에서 엄마는 아들에게 인생에 대해서 단 한마디로 가르쳐주고 싶어 했다.


"인생이란 한 상자의 초콜릿 같단다."


이 세상의 어느 엄마가 자식에게 인생은 어떤 방식으로든 결국 달콤하고 살만한 곳이라는 것 외에 말하고 싶겠는가. 엄마가 한 말의 의미는 어떤 형태로든지 인생은 견딜만하고 달콤한 끝이 있고, 각각 다른 한 상자의 초콜릿을 먹더라도 우리 삶은 결국 아픔보다는 달콤함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포레스트의 엄마 역시 소아마비의 아들을 대할 때도, 지능지수가 현저히 낮아서 학교 입학이 불가할 때도, 엄마가 먼저 꿋꿋하고 씩씩했고, 아이를 포기하지 않는다.


엄마의 씩씩한 희망이 포레스트에게 점염되어서 비록 포레스트가 지능이 낮아서 인지하지 못할지라도 어떤 삶이 앞에 닥쳐오더라도 두려워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열망과 희망을 대신해주고 있다. 



<포레스트 검프>,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것만 생각하는 주인공, 넷플릭스 이미지


초콜릿의 주원료인 카카오 종자의 약 5%는 테오브로민으로 폐의 평활근을 이완시켜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만든다고 할 때, 초콜릿은 삶의 무기력함을 상쇄시킬 수 있는 음식이다. 또한 초콜릿에 들어있는 소량의 페닐에탈아민은 인간이 사랑을 느낄 때 두뇌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화학물질로 감정을 고조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초콜릿의 트립토판은 미미하나마 마약 효과를, 카페인은 각성효과와 흥분제의 역할을 한다고 하니 초콜릿은 언제나 새로운 감정을 가지도록 유도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그럴 때 초콜릿의 은유는 삶에 대한 좌절이나 체념, 무력함과는 먼 것이다. 포레스트의 엄마가 아들의 여러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믿고 지지하는 모습을 보면 이 영화 속의 진정한 인생 승리자는 바로 엄마다. 



포레스트 같은 아들을 가진 어떤 엄마를 만났었다



 아들이 남자 중학교 2학년이 시작되던 해였다. 학기초의 학부모 모임이 있어서 반 전체 엄마들이 강당에 모였다. 그 학교 강당은 마치 영화관처럼 좌석이 되어 있어서 모임이 끝나고 나니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한 느낌이었다. 아들을 키우는 엄마들의 얼굴은 모두들 잘해봐야지 하는 비장한 의지까지 넘쳐흐르고 있었다.


강당을 막 나서는데 복도를 어떤 아이가 막 뛰어왔다. 교실에서는 수업 중인데 얼굴이 찌푸려지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 뒤를 어떤 아이가 마구 달려오는 것이었다.

아차, 뒤에 달려오는 아이가 아들이 아닌가. 어이가 없어서 나는 서서 손짓으로 너 무슨 짓이냐고 하면서 다른 엄마들 보기 민망해서 고개를 절로 숙였다. 뒤따르던 아들이 어처구니없어 선 나를 보더니 나중에 집에 가서 말하자면서 그대로 뛰어갔다.


평소는 이름도 부르지 않게 착한 아들이었는데 밖에서는 이랬었구나 하는 생각에 하늘이 다 노랬다.

나는 엄마들 틈에 끼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리고 죄인처럼 뒤쳐져서 나오는데 문득 어떤 엄마가 나를 불렀다.

내 얼굴보다도 더 얼굴에 구름처럼 수심이 가득한 엄마였다. 다른 엄마들의 희망으로 반짝반짝하는 얼굴과는 딴판으로 한 번이라도 웃어본 적이나 있을까 싶은 그런 얼굴의 엄마였다.


앉아서 이야기할 엄두도 안 나니 그냥 서서 이야기 좀 하자는 말에 그러시라고 했다. 그러면서 앞에 달려간 아이가 자기 아들이라고 하고, 우리 아들은 그런 아들을 잡으러 가는 것이라고 했다.


"아들을 사실 특수학교에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저는 아들이 정규과정을 밟게 하고 싶었습니다. 장애학교에 가기엔 아직은 좀 더 나은 형편이라서 학교에서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도록 보내고 싶었어요. 그래서 억지로 이렇게 보내고 있답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포레스트 검프>, 지능지수가 80은 되어야 학교 입학이 가능하다고 하자 엄마는 사람은 누구나 다르며, 겨우 5가 모자랄 뿐이라고 한다, 넷플릭스 이미지


엄마는 남들과 다르지 않다고 거듭 말한다.  살면서 그런 엄마를 만나는 것이 바로 인생의 행운인 셈이다. 넷플릭스 이미지


그 엄마는 죄인처럼 거듭거듭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담임선생님의 덧붙임에 의하면 그 아이는 자폐가 있는 아이지만 장애학교에 보낼 정도로는 아주 심각하지는 않아서 생활 기록부를 살펴서 같은 초등학교 나온 아이를 찾다가 우리 아들을 선정해서 그 아이를 담당하는 것으로 결정했었다고 했다.


중1학년 때도 당연히 같은 반에 같은 짝으로 우리 아들이 그 아이를 다 돌봤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2가 되자 또 한 반에 넣어서 짝이 되어서 돌보는 중이라고 했다. 수업시간에도 번번이 괴성을 질러대면서 바로 뛰어나가기 때문에 그렇게 잡으러 다녀야 하는 것이었다.


전혀 몰랐던 일이었다. 사실 한 블록만 걸어가면 강남의 유명한 특수학교가 있었다. 그런데 그 엄마의 마음은 아직은 그곳에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엄마는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데려오면 운동장에 그대로 서서 학교 수업을 마칠 때까지 아이를 기다리면서 서 있다고 했다.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모르니 그렇게 하루 종일 꼬박 운동장에 서 있는 것이다. 세상에 말도 안 되는 일이 나도 모르게 있었던 것이다. 

가끔씩 내가 시험담당 학부모 차례가 되어서 가 보면 그 엄마는 늘 그렇게 운동장에 마치 돌부처처럼 서 있었다.


나중에 아들이 집에 왔을 때 이미 들은 이야기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 아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서 나가는 일이 많은지 물어봤다.

그 아이가 특히 소리를 지를 때는 다른 사람들이 화를 낼 때라고 했다. 선생님의 표정이 갑자기 변해서 떠드는 아이들을 나무라던지, 아이들이 큰 소리로 서로 떠들면 싸우는 것인 줄만 알고 그렇게 뛰쳐나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왜 중1때부터 그런 짝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냐고 하니 아들은 '그냥 짝일 뿐인데요' 라고 했다.  

어쨌거나 아들은 그 사건으로 중학교 때 성적은 이미 내려놨고, 엄마한테 성적 면죄부를 받은 셈이었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부 좀 못해도 누군가를 도우면서 또 다른 공부를 할 테니까.


그 아이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정규 고등학교를 가지 못했다.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도 그 엄마는 최선을 다했다. 다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엄마는 그래서 포레스트 검프 같은 아들을 둔 엄마가 되는 셈이다. 어떤 상황이 와도 초콜릿 먹기처럼 희망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다.




인생은 사실 초콜릿 상자가 아니었지만, 초콜릿 상자 같은 삶을 원한다



영화가 관통하는 것은 미국의 어두운 역사와 유명인이던 평범한 사람이던, 인간의 죽음이다. 포레스트의 운동화가 진흙투성이인 것과  벤치에 앉은 다른 사람의 운동화가 희게 대비되는 것은 삶의 고단함과 역정을 의미한다.


포레스트의 이름도 남북전쟁의 영웅이자 KKK 단 두목의 이름이었다. 엄마는 인간은 가끔 이 사람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을 한다면서도 그 이름을 아들에게 지어주는 의미는, 인생을 살면서 늘 말도 안 되게 사는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명심하라는 것이었다.


왼쪽부터 새가 되길 바라는 희망과, 이후 달리기를 하면서 사람들과 함께 뛸때의 희망, 결국 새와 깃털은 달리기로 이어지며 희망이 된다.


포레스트는 살아가는 내내 다양한 삶의 차별과 시련을 경험한다. 아이들에게 야유와 멸시를 당하고, 월남전에 참전하고, 새우잡이 배를 타고,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이나, 알던 사람들의 죽음을 쭉 훑고 간다.

그런데도 포레스트는 나중에 어떤 지능이 탁월한 사람보다도 인생에 대한 의미를 한 줄로 꿴다.


"가고 싶은 곳을 가기 위해 뛰었는데 그게 삶의 기회가 될 줄 몰랐어요."


'검피즘'이라는 말까지 생긴 영화지만, 사실 인생이나 운명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두면 그대로 흘러갈까. 아니다. 그 흘러가는 삶 곁에 누구보다 아들을 사랑하는 엄마가 있었다.

월남전에서 사귄 새우잡이에 만족하는 소박하고 순수한 친구가 있었다. 댄 중위 같은 명예를 존중하고 동료를 살리지 못해 회한에 몸부림치는 휴머니즘 정신이 투철한 인물이 있었다. 

인생을 계속 실패하지만 좋은 친구로서 또 연인으로서 남았던 제니가 있었기에 모든 것이 제 자리로 갈 수 있었다.


거기에 주변인을 그대로 믿는 포레스트 검프 같은 인간이 있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깃털이 내려앉았다가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에서 깃털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장면은 초콜릿과 같은 인생, 즉 어떤 묵묵한 슬픔의 순간이 와도 인생은 꿈을 꾸면서 희망을 가진다는 의미로 보인다.


이 영화가 엘비스 프레슬리, 케네디 형제, 포드 대통령과 레이건 대통령 암살 시도, 베트남 전쟁, 인종차별 문제, 흑백차별 문제 등 그 외도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싶어 하지만, 그 화두는 한마디로 엄마의 말에 집약되어 있다.


"남들과 똑같은 기회를 얻게 하겠어요. 정상이란 의미가 뭐죠. 겨우 5점이 모자라잖아요."


엄마에게 자식은 어떤 경우에도 정상이어야 하고, 이 사회는 어떤 상황에도 차별이 없는 곳이어야 한다.   

'남들과 똑같은 기회'가 주어지는 삶이어야 한다.

그래서 포레스트는 바버가 사망할 때 평생 잊기 힘든 말을 들었다고 한다.


" 집에 가고 싶어"


그 집은 언제나 아들을 믿어주고 용기를 주며 지지해주는 엄마가 있는 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벤치에 앉아서 제니에게 갈 버스를 기다리던 포레스트 검프는, 또 다른 포레스트 검프를 만나면서 또 하나의 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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