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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Aug 09. 2021

식사 공간의 이분법적 인간 존재

-   『인간의 증명』, 모리무라 세이이치


이분법적 인간의 증명




『인간의 증명』은 지상 최고(고도, 가격, 음식 등)를 자부하는 초호화 레스토랑의 가장 우아한 시간대에 일어난 살해 사건을 다룬다.

그곳 스카이 다이닝은 ‘42층으로 150미터나 되는 곳으로 단숨에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야만 하는 곳이다. 그 엘리베이터 안은 뉴욕의 할렘가에서 온 흑인 조니 헤이워드가 칼에 찔린 채 죽는 현장이 되는 매우 아이러니한 공간이다.


‘인간의 증명’이란 의미심장한 제목이 매우 포괄적 의미를 산재한 것만 같아서 처음부터 호기심이 생겼다. 더구나 작가는 마쓰모토 세이초와 더불어 일본의 미스터리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모리무라 세이이치가 아닌가. 그러니 어떻게 스토리를 풀어나갈지 주목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에는 여러 군상들이 '인간의 증명'을 위해서 소환된다. 그러나 결국 초호화 레스토랑을 갈 수 있는 사람들과 뉴욕의 할렘가란 극명하게 대조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세계로 이분되는 세상을 볼 수 있다.


초호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흑인 조니 같은 할렘가의 인물은 절대로 갈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조니는 바로 그곳에까지 와서 죽음을 택한다. 어머니인 야스이가 자신을 살해하려 한 그 칼을 스스로 더 깊숙이 찔러 넣은 채로 죽지만, 왜 하필이면 작가는 그 꼭대기 층에서 살인을 말하는지 주목해야 한다. 

작품 속 공간도 의미심장한 도쿄와 뉴욕이다. 이 같은 거대한 대도시는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전후 사회에서 더욱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의 삶이 나뉘는 모든 것을 가진 공간이다. 작품의 첫 장면인 초고층 호텔의 스카이 다이닝 같은 곳이야말로 물질의 집약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외식 산업의 역사에서 살펴보면 1940년대 초에 레스토랑이 출현한다. 전쟁을 거쳐 파괴된 일본은 한국 전쟁을 사이에 두고 자본적으로 우세해진다. 

자본이 집약되는 도쿄는 야스이 교코 같은 인물을 불러 모으는 곳이었다. 초호화 레스토랑에 가기 위해 급행 엘리베이터가 존재하듯이, 시골 생활이 맞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대도시로 몰려드는 것은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다. 혹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서는 외면할 수 없는 공간이기도 했다.


여기서는 대부분의 인물이 '인간의 증명'에 참여하고 있지만,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은 탐구가 있어야 하고, 지금도 끊임없이 연구되고 있겠지만 문학으로 발현될 때는 추리소설이야말로 인간의 실체를 잘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이 저지르는 온갖 범죄는 바로 인간의 본성과 본질을 부정하고 자신을 내려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짐멜이 문화란 “영혼이 자신에게 이르는 길”(den Weg der Seele zu sich selbst)이라고 말할 때 바로 인간이 저지르는 범죄는 이 인간이 빛나게 이루는 문화를, 가장 순수해야 하는 영혼이 거스르면서 빚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심층적으로 고양되어야 하는 인간의 심성이지만, 거대한 자본으로 간주되는 물질이 마치 스펀지처럼 흡수해서 인간의 순수함을 멍들게 하고 마침내는 파괴한다.


야스이 교코로 드러나는 인간의 물질화는 자신의 자식들을 결국 다 파괴하기에 이른다. 

흑인과의 혼혈로 태어난 자식인 조니나, 자신의 야망을 위해 자식의 진정한 바람을 깨닫지 못한 채 결국 교통사고를 일으켜 다른 사람을 죽게 하고 암매장하는 또 다른 자식 고오리 요헤이의 탈선을 가져온다. 이는 바로 인간의 탐욕과 야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밖에도 인간의 증명을 위해 등장하는 인물들은 불륜을 사랑이라 믿는 자와, 광란의 마약파티에 매일같이 파묻혀 사는 젊은 청춘들과, 쓰레기 더미에 범벅된 할렘가의 인물들로, 결코 그 자리서 벗어나기 힘든 존재들이다.

따라서 초호화 스카이 다이닝과 빈민굴이 이분화되어 존재하는 세계 속에서 인간의 증명이 과연 올바로 이루어나 질까.


 


모성의 이데올로기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밀짚모자 시다. 일본의 서정시인 사이조 야소의 시집과 깊은 산속에 있는 온천 등이 대도시와는 유리된 인간의 다른 면을 보여주려는 시도로 나온다. 서정이야말로 인간의 감성을 건드리는 가장 원초적인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시의 마지막 연들을 살펴보면,  



어머니, 그 모자는 정말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때 우리 곁에 피었던 말나리꽃은

벌써 져버린 지 오래겠지요.

그리고 가을에는 회색 안개가 그 언덕을 뒤덮고

그 모자 아래서는 밤마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렸을지도 몰라요.

어머니, 분명 지금쯤

오늘 밤 그 계곡에는 조용히 눈이 내리고 있겠죠.

오래전 반들반들 빛나던 그 이탈리아 밀짚모자와

그 안에 제가 쓴 Y.S라는 머리글자를 감추듯, 조용히, 쓸쓸하게.   



왜 인간의 본질을 밝히려는 데 부성이 아니고 모성이어야 한다고 누구나 생각할까.

모성이야 말로 가장 순수한 인간의 본질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사실은 편견이다. 심각할 정도로 숭배하는 신화이자 이데올로기다. 자식을 위하는 데는 모성이 더 강하다는 강압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작품에서 야스기 교코가 가장 인간의 본질을 잃은 자로 나타나고, 그리고 결국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모성으로 회귀하는 자로 나타난다.

한 여성을 통해 모성이란 본질로서 인간의 이중적인 면을 담으려 한 것도 사실은 억지다. 인간의 증명을 초고층 호화 레스토랑과, 도시락에 적힌 서정시가 있던 산속 깊은 곳의 온천으로 대비시켜 보려 한 점도 자칫 강요된 사고일 수 있다.


초호화 레스토랑에서 ‘한 끼 식사에 쓰는 돈은 백 명의 굶주린 사람들을 먹일’ 수가 있다. 그곳에 가는 사람들은 허기 때문에 가지 않는다. 다만 그 ‘대금을 지불할 수 있는 재력’을 과시하기 위한 장소기 때문에 간다.

그와 대비해서 이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무네스에가, 야스이의 실체가 고스란히 숨겨진 산속 온천에서 먹는 ‘더운밥과 국, 민물 생선회. 자작하게 조린 잉어 조림. 팽이버섯, 고사리. 미나리. 청나래고사리. 물냉이 표고버섯 두릅 등의 산나물을 중심으로 튀김과 무침을 푸짐하게 차려낸’ 식사를 할 때, 인간의 본질은 바로 이런 자연적이고 서정적인 데서 위안을 받는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식의 일기장으로 모범적인 모자가정을 이루었다고 가시적인 명예에 빠졌던 야스이의 비뚤어진 존재는 인간의 본질을 훼손하고 거부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과연 야스이에게만 이 모든 인간의 굴레를 씌워야 할까. 또한 인간의 본질이 서정성에 의해서 회복되리란 것도 사실은 매우 순진한 희망이다.


어쨌거나 ‘인간의 증명’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사건이 벌어져야 적나라하게 인간의 껍질이 벗겨지면서 증명된다는 점에서 추리소설이야말로 그 단면을 드러낸다고 믿어도 좋다. 

어떤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그 모든 것이 수면 아래 깊이 가라앉아 있기 때문이다. 무네스에가 찾아간 그 산속 깊은 곳의 댐 아래 가라앉을 텅 빈 마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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