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현 Oct 13. 2020

추억을 가르치는 시간

- 골목 풍경에서 만나는 꽃들은 봉선화 꽃물들이기를 떠올리게 한다

  

동네 풍경 속의 꽃



동네 풍경 속에는 요즘 보기 힘든 꽃들이 섞여 있다. 맨드라미나 봉선화가 오래된 옛집의 터줏대감처럼 심어져 있어서 마치 시골 거리를 걷는 착각에 빠질 때가 많다. 

예전 시골집의 장독대가 있는 곳이나 우물가는 어김없이 봉선화와 채송화가 피었다. 그 꽃이 없으면 우물가가 아닐 정도였다. 그 풍경을 당인리 근처 이사 와서 보면서 골목이란 어떤 공간도 다 대동소이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웃음을 배시시 깨문다. 


화분에 심긴 봉선화는 골목을 걸어가는 내내 많은 생각을 부르는 추억의 재생 이미지다


어느 날 아이들이 키득거리면서 저마다 손톱 자랑을 하느라고 바빴다. 오랜만에 보는 봉선화 물이기도 한데, 단체라서 신기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수행평가가 봉선화꽃 물들이기였다고 한다. 

손톱에 봉선화 꽃물을 더 진하게 들이거나, 손톱 주위로 덜 삐져나가면 수행평가 점수가 좋다고 한다. 아이들이 내민 손을 보니 손톱이 화안하니 등불들이 달린 것 같다. 


아이들은 점수를 잘 받으려고 별별 방법을 다 써서 꽃물을 들였다고 한다. 손톱 주변에 흰 매니큐어를 바르거나 기름을 바르거나, 영양크림을 바르거나, 있는 대로 지혜를 짜내느라고 골치 썩인 일을 한 마디씩 하는데, 배꼽이 빠질 뻔했다. 그런데 참 그 순간들의 표정이 환하고 밝아서 너무 명랑했다. 

한창 사춘기 아이들이라서 무슨 일이라도 삐딱하고 짜증 날 나이인데, 봉선화 꽃물들이기는 미용과도 관련되어서 그런지 봉선화 꽃보다 더 환한 다홍빛 표정들이다.


수행평가를 내어준 선생님은, 완전히 성공한 셈이다. 선생님은 아마 잊힐지 모르는 추억을 남겨주려 했거나, 아니면 요즘 아이들이 매니큐어를 바르고 다니니까 그걸 방지하려 했거나, 나름으로는 깊은 속뜻이 있었을 것이다.



국어 교과서에 김상옥 시인의 '봉선화' 시조가 있다.



비 오자 장독 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가 웃으실가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 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보듯 힘줄만이 서노나.



시적 화자는 비 온 날 장독간에 핀 봉선화를 보고 어릴 적 누님과 봉선화 꽃물을 들이던 시간을 문득 그리워하며, 시집간 누님에게 편지를 쓰면 누님도 그 편지를 받고 웃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할까, 고 묻고 있다. 

선생님은 어쩌면 이 시조의 시적 화자처럼 언젠가 중년이 되었을 때, 어릴 적 봉선화 물을 들이던 그 그리움의 시간에 대한 추억을 남겨주려 했을지 모른다. 




봉선화 물들이기도 미래를 책임지는 행사였다



우리가 어릴 적에도 이 봉선화 꽃물들이기는 연례행사였다. 화단이나 담벼락 아래, 혹은 장독간에 봉선화가 얼른 피기만을 기다리면서 손톱에 물을 들였다. 그러나 막상 꽃물을 들일 때는 썩 내키지 않았다. 소금을 넣고 꽃을 찧느라고 손가락이 짜고 저렸다.
 
꽃과 잎을 많이 땄다. 꽃이 더 많이 들어가야 꽃물이 더 잘 들 것 같았는데 어른들은 잎사귀가 많이 들어가야 더 붉어진다고 했다. 과학적으로 맞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과학보다 경험이 더 맞는다는 걸 지금에는 깨닫는 편이다.


 

꽃과 잎을 열심히 찧고 나면, 거기에 백반을 넣었다. 꽃물이 더 짙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아주까리 잎으로 손가락들을 칭칭 동여맸다. 그때는 아주까리 잎사귀도 흔했다. 똑 봉선화 꽃물을 들이던 때 뒷집 마당에 퍼렇게 넓은 잎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꽃물을 들이기 전에 아주까리 잎사귀를 얻어와서 마치 손가락처럼 잘 갈라진 잎사귀들을 미리 찢어놨다. 

 
손가락에 물을 들이던 그때부터가 고역이었다. 손가락을 쳐 매고 하룻밤을 자야만 했다. 자다가 손가락에서 빠지지 않도록, 또 빠져서 이불에 물이 들까 봐, 이불 밖으로 손가락을 빼고 자느라 아침에 일어나면 온 팔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면 손가락에 칭칭 매었던 아주까리 잎은 마른 채 바닥에 이미 떨어져 있었다. 혹은 엄마 몰래 자기 전에 손가락에서 아주까리 잎을 살짝 빼내고 잘 때도 있었다. 희한하게도 빼버리고 잔 것을 들키곤 했는데, 봉선화 물들이는 것도 어른들 경쟁이었던지 우리 손톱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꽃물이 사라질 때까지 내내 뒤통수에 꾸중을 달고 살았다. 그것도 못 참느냐였다. 그것도 못 참으면서 나중에 무엇을 하려는지 모르겠다는 말로, 봉선화 꽃물 들이기는 우리의 미래를 책임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손톱 주위가 쪼글거려서 저리고 따가웠지만 그래도 손톱은 꽃물이 들었다. 다홍빛으로 고왔다. 

너무 진해서 까만 빛이 감돌 지경이면 잘 된 거였다. 누가 더 꽃물이 잘 들었는지 학교에 가면 서로의 손톱을 비교하곤 했다.


봉선화 물이 남아있을 때까지 첫눈이 오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고 친구들끼리 키득거리기도 했다. 

물론 첫눈이 올 때까지 그 봉선화 물은 남아있어 본 적이 없었던 거 같다. 우습게도 그때 나는 남쪽 지방에 살아서 눈이라고는 강산이 한번 변할까 말까 한 시간에나 구경을 하던 지방이었다. 

그래서 첫사랑은 누구에게나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가끔 꽃물이 남아있더라도 첫사랑 같은 게 있을 나이도 아니어서 첫사랑이 이루어지는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이런 연례행사가 없다. 대청마루가 없어서 그런지, 아파트 문화가 만연해서 그런지 봉선화 꽃구경도 힘들 지경이다. 가끔씩 누가 뿌린 씨로 꽃이 난 건지 봉선화가 보일 때면 그때는 별로였던, 그러나 지금은 아련한 추억인 그 봉선화 꽃물 들이던 시간이 떠오른다. 대청마루에 앉아서 들이던 꽃물, 가을이 오면 가장 먼저 기억을 칭칭 매어두곤 한다.
 
수행평가를 내준 그 선생님도 틀림없이 봉선화 꽃물을 들이던 그 추억에 대한 그리움을 매어 두고 살고 있는 분 이리라. 추억하나 없는 가난한 생활을 벗어나도록 가르치는 일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먼 먼 어느 날, 문득 우리 앞에 스쳐 지나가는 사소한 일들이 그리운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될 수 있다면 그 시간만이라도 얼마나 화안한 것이겠는가. 봉선화 그 다홍빛 꽃물 드는 가을의 시간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이별의 주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