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집을 쓰다

by 이지현

가죽나무 베어진 담벼락이 떠오를 때면

가죽나무 높이만큼 자란 그리움이 울타리를 친다.


아무래도 기억의 어디쯤

푸른곰팡이로 자라는 진통제 같은 옛집이 점령해

그 옛날의 집은 바닷속처럼 뒤집어졌다가

허연 파도를 물고 달려오다가

세상에 한 번씩 발을 넣었다 뺄 때면

꼭 마음이 그곳까지 걸어간다.


잊고 싶은 일이 많은 생애에

잊히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은 희한하다.

잊고 싶지 않은 일이 있다는 것은 화안한 쓸쓸함이다.

결코 그 옛집에서 행복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오래 묵은 집이 깊이 숨었다가

잿물에 닦은 놋대야처럼 반짝이며 떠오르는 건


지금 진지한 외로움을 겪었다는 것이다.

지금 눈먼 그리움을 알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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