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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Aug 23. 2021

국화꽃 저버린 뜨락에 서서 그리울 선생님

- 고 이수인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인생의 전환점이 되던 날을 회상하다

늘 그렇듯이 지하철 막차를 타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날의 뉴스보다는 브런치를 먼저 열어서 내 브런치를 구독하시는 분들의 글을 읽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브런치에 새로 올라온 글들을 또 읽는다.


그러다가 문득, 새글로 올라온 어떤 작가님의 글에서 22일에 이수인 선생님이 타계하신 부고를 접했다. 가슴 한 귀퉁이가 철렁했다.

어린 시절의 일이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선생님.

사실 뉴스를 미리 보았더라면 하루 종일 너무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수업을 종일 열 시간도 넘게 하느라 뉴스를 볼 시간이 없었던 것이 오히려 나았다.

브런치 작가님도 이수인 선생님을 열 살 무렵인 어린 시절에 직접 뵈었다는 글이 있어서 유심히 보면서 내 기억도 순식간에 그 시절로 떠났다.




그때 이수인 선생님은 마산 KBS 어린이 합창단을 맡고 계셨다. 합창단을 선발하는 기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나와 연년생 동생은 합창단 시험을 보러 갔다. 방송국은 신마산의 거의 끝에 있어서 아주 멀었다. 어린 우리에게는 집과 방송국은 양극처럼 먼 곳이었다.

옥색 하늘거리는 한복을 입은 엄마는 내가 본 제일 예쁜 엄마의 모습이었다. 엄마는 자식을 그 이후 줄줄이 낳느라고 이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데 그날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어린 내 눈에도 이뻐서 엄마를 쳐다볼 정도였다.

그렇게 화사하게 차려입은 엄마를 보면서 방송국이란 아주 중요한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방송국에 간다는 사실은 온갖 치장을 공들여하고 가는 매우 특이한 날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방송국은 거의 다 퇴근하고 적막했다. 엄마가 약속을 했던 분이 나오셨다. 그분은 동생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의 남편분이어서 결국 동생의 선생님 추천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그분이 잠시 기다리라면서 들어가더니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단호한 얼굴의 선생님이 약간 구부러진 어깨로 나오셨다. 그 선생님에게 인사를 시켰지만 나는 매우 긴장을 해서 목이 콱 잠겼다. 그분이 바로 이수인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합창단 선발은 끝났는데...'라고 하셨다.


엄마가  한 번만 시험 봐주십사 하고, 또 그분이 이왕 왔으니 노래나 시켜보라고 하자 선생님이 웃지도 않고 피아노 앞에 앉으셨다.

그때 나는 선생님은 굉장히 엄하고 원칙이시구나하고 생각했다.

모두들 동생이 먼저 노래를 부르게 했다. 당연히 노래 시험은 동생을 위해서 온 것이었다. 나는 동생이 방송국에 다니게 된다면 늘 그렇듯이 혼자 먼 길을 보내기 힘드니 따라다니는 보조로서 오게 될 것이었다. 엄마는 아무리 쳐다봐도 별 볼 일 있어 보이지 않는 나아주 오랫동안 관심 밖이었다.

동생이 유치원 다닐 때도 나도 초등학교 1학년으로서 먼 길이지만 동생을 데리가는 것은 내 담당었다.


동생이 노래를 꾀꼬리처럼 부르자 이수인 선생님이 그 무표정한 얼굴이 달라지며 웃으셨다. 그리고 갑자기 상냥하게 돌변하시면서 매우 좋아하셨다. 노래를 이것저것 마구 부르게 하더니 웃기까지 하셨다.  

동생은 이쁘고 늘 웃는 얼굴이어서 누구라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아이였다.

나중에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내내 수석에 전교 1등만 하던 아이에, 얼굴은 <스잔나> 영화가 대 유행을 할 당시는 주연배우 리칭과 완전히 닮아서 길 가던 사람들까지 우두커니 서서 저기 리칭 간다고 하던 그런 탁월한 미모와 두뇌와 노래까지 완벽한 아이였다. 게다가 착하기까지 해서 지금도 선량하기가 그지 없는 아이다. 어릴 때부터 그런 동생이니 담임선생님이 방송국에 근무하시던 남편분에게 시험을 보게 해달라고 했던 모양이었다.


동생의 노래는 당연히 그냥 통과였고, 이수인 선생님이 바로 합창반에 넣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자 나는 이미 주눅이 들 대로 든 터라 목소리도 나오지 않아서 점점 더 기어 들어갔다.

선생님이 엄마를 쳐다보면서 '안 되겠는데요'라고 했다. 엄마가 사색이 되어서 다시 한번만 더 시켜봐 달라고 했지만 나는 노래를 못했다. 집에 가면 이제 엄마에게 혼날 일만 남았을 것이지만 합창반이 아니어도 이렇게 먼 신마산까지 올 동생과는 같이 오겠다고 결심했다.


엄마와 또 그 분과 이야기하던 선생님이 다시 피아노 앞에 앉으시더니, '이번이 마지막이다. 목소리 크게 하고 입 크게 벌리고 배에 힘주고 크게 불러봐라'라고 하셨다. 나도 이판사판이다 싶어서 목소리만 크게 내질렀다. 그러자 동생처럼은 아니지만 목소리는 좋으니 가르치면 못하지는 않겠다는 뜻으로 말하면서 동생과 함께 합창반이 되었다.


아마 엄마가 동생을 혼자 보낼 수 없으니 꼭 나도 합창반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이후에도 서울로 대학을 보낼 때도 동생이 서울에 가니 혼자 못 보내 나도 할 수 없이 보낼 수밖에 없다고 했던 엄마였다. 그러니 엄마가 사정사정했을 것이었다.

선생님은 아마 그런 내가 무척 측은했을까. 아니면 특별한 분이시니 노래가 아니라도 또 다른 생각이 있었을. 그건 나도 어려서 잘 모른다.

어쨌든 그 이후 방송국에 가는 날은 부리나케 집에 와서 가방도 집어던지다시피 하고 버스를 타고 동생과 신이 나서 갔다. 특별한 날이었다.




선생님은 지휘를 늘 하셨는데, 그 모습이 매우 힘이 넘치고 단호했고, 직선적이었고, 짧은 스타카토처럼 명확하고 깔끔했다. 다른 방송국들에 노래 부르러 가거나 할 때는 연습을 목이 터져라하곤 했지만, 노래를 부른다는 일이 그렇게 행복한 일이라는 것은 이수인 선생님 때문에 알게 된 것이었다.

어렸지만 노래하는 방법과 합창을 하는 방법, 어느 누구도 튀어선 안된다는 조화의 암묵적 규칙, 그런 것들을 배웠다. 선생님은 귀신같이 어느 누가 목소리가 살짝 튀기만 해도 또, 또 하면서 될 때까지 노래를 부르게 시키는 스파르타식 합창 교육을 했다.

음정이 틀릴 때는 피아노의 음을 탁탁 짚으시며 그 소리와 맞을 때까지 노래를 하게 했다.

어느 날 동생의 담임선생님 남편분이 서울로 발령받아 가시면서 이수인 선생님도 같이 서울로 가게 되었다. 이수인 선생님이 탁월한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서 서울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이 떠나시면서 방송국은 문득 적막하고 이상하게 휑하니 넓었다.

그 이후에 몇 번 우리는 방송국으로 다녔지만 이전 같지 않아서 곧 그만두었다. 그래도 하등 섭섭할 게 없었다. 그만큼 이수인 선생님이 합창반을 지휘하지 않으니까 노래할 의욕을 상실한 셈이었다.


서울 KBS 어린이 합창단을 맡은 선생님을 생각할 때마다 서울 아이들이 부러웠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계속 합창단을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음악 선생님이 담임선생님에게까지 부탁해서 나를 제발 합창반에 보내달라는 부탁까지 하게 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수인 선생님 앞에서 처음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합창반은 안된다고 했던 내가, 그 이후 노래만 하면 삶이 반짝거리고 희망이 생기고 용기가 났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이수인 선생님이 나를 합창반으로 받아들여주었을 때부터 내 인생은 혼자 나아지고, 혼자 자신감을 마음속에 기르고 있었을 것이다. 별로 뛰어나지 못하다고 엄마가 생각해서 대학원도 못 가게 해서 결국 내가 학비를 벌어서 다닐 테니 제발 가게만 해달라고 사정했을 때도 좌절이나 시련 같은 것은 나와 멀었다. 언젠가는 방법이 있을 거라는 긍정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살아오면서 일어서려고 마음을 먹는 순간 늘 이상하게도 언제나 좋은 운도 따라주고 주변에 늘 돕는 사람이 생겼다. 대학원 학비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순간에도 갑자기, 조교를 하라는 엽서까지 마산에 도착하면서 등록을 포기하려는 그 순간에 나는 서울로 달려올 수 있었다.

이렇게 그 이후도 어떤 힘든 일이 일어나도 내가 일어선 힘은 이수인 선생님이 나를 합창반에 받아들여주던 순간 생기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어린 꼬마아이가 그때부터 좌절을 겪게 되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의령 출신이신 선생님도 마산을 고향처럼 생각한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 태어난 고향은 아니고, 전혀 행복한 시간들도 아니었지만 마산은 이상하게 그런 곳이다. 그냥 그리운 곳.

마산에서 산 시간보다 서울에서 산 시간이 두배가 넘지만,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나는 태어난 곳도 아니면서 마산이라고 한다.

여고 시절에 곧 유명해질 분이시라면서, 합창반 선생님이 소개하던 테너 엄정행이 마산을 지나다가 들렀던 적이 있다. 그때 합창실에서 엄정행이 여고생들을 위해 육성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때 부른 노래 중의 하나가 <목련화>였고, 앵콜 앵콜이라고 여고생들이 환호성을 지르자 이수인 선생님의 <고향의 노래>를 불렀다. <가고파>등 몇 곡을 더 불렀지만 <고향의 노래>는 늘 마음을 울리는 노래다.  

그 노래를 부를 때면 그냥 마산이 떠오르고 그립다. 여고를 다닐 때 그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며 너무 힘들어서 고개를 돌리면 거기 멀리 가고파의 바다가 출렁거렸다. 합포만이었다.   


언젠가 아주 오래전에 어느 SNS를 통해 이수인 선생님께 인사를 남긴 적도 있다. 마산 합창반이었던 어느 꼬마에게 살아가는데 용기를 주셔서 너무 감사드린다는 인사였는데 읽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수인 선생님이 합창반에 받아들여주던 바로 그 한순간이 늘 인생의 전환점이기도 했다. 학교밖에서 처음으로 어디에 속한 것이었다.


이제 선생님이 타계하셨다는 글을 보니 그냥 눈물이 돈다. 노래를 부르자, 안되겠다고 고개를 젓던 선생님이 무슨 생각에선지 받아주던 일은 한 아이의 힘든 시간을 꺾지 않던 깊은 배려였을 것이다.

선생님은 영영 아름다운 노래처럼 으실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a_Vs9vkcpNc

이수인 작곡, 엄정행 노래의 '고향의 노래', 연젠가 엄정행이 직접 불러주었던 이 노래를 듣던 여고 합창반 교실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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