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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Mar 14. 2022

세상 사는 향기

<탈무드>에 무거운 짐을 지고 가던 사람을 한 마차꾼이 태워준다. 그런데 그 사람은 짐을 진 채로 마차에 앉아 있었다. 짐을 내려놓으라고 하자, 태워준 것만도 고마운데 어떻게 짐까지 싣고 가게 할 수 있냐면서 그대로 짐을 지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처럼 나도 아직 마음에서 고마움의 무게를 지우지 못한 일이 있다. 아직도 내 맘에는 짐을 지고 가는 것이다.


가끔 세상이 황량하고 삭막하게 인정이 메말랐다고 말하지만, 길을 나서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매일 주거지에서 일터로 가며 지하철로 이동하는 거리가 거의 왕복 3시간이다. 그동안 내 세상은 지하철 안이다.


서로 먼 길을 갈 것인데도 지하철에서 나이 많은 어르신이 타면 자리를 양보해주는 청년들을 보면 흐뭇하다.

만원 지하철인 데도 노약자나 임부들이 앉으라고 마련한 그 분홍빛 좌석을 그대로 비워둔 것을 보아도 흐뭇하다.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갈 때 그리 무거워 보이지도 않는 짐이지만 그래도 그 짐을 들어주는 사람을 볼 수 있을 때 흐뭇하다. 지하철에 승차하면서 백팩을 앞으로 돌려 매는 젊은이들을 보는 것도 흐뭇하다. 막차 시간에 서로 함께 힘들게 일하고 퇴근할 텐데도 경로석에 앉지 않고 견뎌내는 젊은이들이 흐뭇하다.


그런 어느 날 나도 약수역에서 고마운 일을 겪었다.

상수로 이사 가면서 거주하던 강남에서 미처 운반하지 못한 남은 짐들을 매일 캐리어로 운반했다. 다행히도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가 오가는 역과 환승역에 있어서 어려움 없이 짐을 운반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약수역에서 완전 낭패를 겪었다. 하필이면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고장 나서 이용할 수가 없었다. 캐리어는 꿈쩍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서 그냥 내팽개치고 가고 싶을 정도였다.


3호선 약수역에서 6호선을 탈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찾아보려고 환승역을 빙빙 돌았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계단 꼭대기에 서서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쉬며 한 걸음 내디딜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내 한쪽 팔의 무게가 사라진 느낌에 바라보니 어떤 남자분이 내 캐리어를 번쩍 들고 이미 앞서 계단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내가 계단을 따라 달려가는 걸음보다 더 빨리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계단을 다 내려와서야 그 사람에게 고맙다고 90도 각도로 인사하느라 미처 얼굴도 못 보았는데, 그 사람은 다시 빠른 걸음으로 내 캐리어를 내려놓고 나와는 반대쪽인 차선으로 가버리고 없었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먹먹하게 서 있었다. 사실 아무리 감동적인 일을 가끔 보았다고 하지만 내 차례에도 그런 감동적인 일이 일어날지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아직도 그 고마운 사람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그 고마움은 잊을 수 없다.

그 후는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내가 캐리어를 번쩍 들 정도만 짐을 싣고 다니지만 그날 그 사람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날 어떻게 되었을까.


일주일 내내, 한 달 내내, 그리고 거의 365일 길을 나서면서 나는 수많은 사람을 스치고 지나친다.

흐뭇한 일도 눈살 찌푸리는 일도 많이 본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눈살 찌푸렸던 일은 지나고 나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날 보았던 흐뭇한 일들, 행복이 밀려왔던 일들이 오래 남는다. 나도 그런 흐뭇한 일을 겪었던 사람으로서 그 일들로 세상 사는 향기를 맡는다.


꽃다발을 한 아름 가지고 타는 사람이 있을 때는 자리가 비었어도 앉지 않고 그 사람 곁으로 살살 가서 꽃향기를 오래 맡으며 서서 무료한 지하철의 시간을 보낸다.


나태주 시인의 '사는 일'이란 시를 그래서 좋아한다.



막판에는 나를 싣고
가기로 되어 있는 차가
제시간보다 일찍 떠나는 바람에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두어 시간
땀 흘리며 걷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나쁘지 아니했다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걸었으므로
만나지 못했을 뻔했던 싱그러운
바람도 만나서 수풀 사이
빨갛게 익은 멍석딸기도 만나고
해 저문 개울가 고기비늘 찍으러 온
물총새 쪽빛 날갯짓도 보았으므로

                   - <사는 일> 중에서



차를 운전하고 다닐 때는 몰랐던 것들을 나도 시인처럼 보면서 산다.  

그리고 거북한 일보다 흐뭇하고 행복한 일을 보고 마음에 새기려고 마음먹는다. 멍석딸기와 물총새의 날갯짓은 없지만 사람들이 베푸는 소소한 온정과 인정을 보려고 노력한다.

내 무거운 짐을 들어주었던 그 고마운 사람이 이 글을 보면서 웃음 짓고 있기를 바란다.

아직도 나는 마음의 짐은 그대로 내리지 못하고 싣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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