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나무도 설계에 반영하다

- 연보라빛 향기의 집을 지으리

by 이지현



라일락을 꼭 심으리라



집을 지으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멋진 라일락 나무를 심는 것이었다.


은근한 연보랏빛 향기, 청춘의 한때 '라일락꽃향기 흩날리던 교정에서 우리는 만났죠'란 노래, '첫사랑'이나 '젊은 날의 추억'이란 매우 서정적인 꽃말, 엘리엇이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꽃을 피워내'라고 노래할 때의 역설적 힘, 미국의 시인 휘트먼이 링컨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쓴 시등 만인 지상의 꽃 같은 라일락을 심으리라.


돌아오는 봄이여, 너는 정녕 세 가지를 가져온다.

해마다 피는 라일락과 서쪽 하늘에 떨어지는 별과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 관한 그 추억을.


-휘트먼, '라일락 꽃이 마지막으로 뜰에 필 때' 중


어쨌거나 서울에서 한 뼘 땅에 나무도 한그루 심으려면 설계가 필요했다.


라일락 설계


설계 미팅을 할 때 문 앞에 라일락을 한 그루 심고 싶다고 하자 모두 대찬성이었다. 팀장님이 대뜸 컴퓨터에 저장된 라일락 나무 이미지를 턱 얹는데 모두의 얼굴엔 꽃 같은 미소가 넘쳤다. 3D로 보기만 해도 라일락 향기가 온 골목을 감돌고, 집이 그 자리에 있을 동안 내내 안개처럼 그 향기가 머물 것만 같았다.

그리고 준공을 향해 달려가는 중에 대문 앞에 붉은 벽돌로 쌓은 작은 화단이 생겼다. 그렇게 라일락 집이 되었다.


화단이 생겼으니 라일락을 찾아야 했다. 인터넷을 검색했다. 아차, 라일락 한 그루를 사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 줄이야.

나무 농장들에 연락을 하니 직접 와서 사가라 했다. 그건 불가했다. 시간을 낼 수도 없거니와 멀쩡한 차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그냥 주차만 하다가 집 계약과 동시에 매매해버렸기 때문이다. 문제는 마음에 드는 나무가 없었다.


며칠간 라일락만 열심히 검색하다 보니 눈에서도 라일락 향기가 마구 뿜어져 나올 듯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한 신문기사를 읽고 바로 이거다, 하고 농장 주인의 블로그로 들어가서 구매 댓글을 달았다. 분양 마감날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전화까지 했다. 마감은 벌써 끝났고, 꼭 사고 싶으면 다음 해에 분양할 라일락을 예약하라고 했다. 어린 묘목 치고는 다소 거금을 주고 라일락 두 그루를 선점했다.


농장 사장님은 내년 분양에서는 내가 1등이라고 했다. 살면서 해보지도 못한 1등을 처음으로 해봤다.

소백산의 정향나무 농장에 대해서 읽는 순간 꼭 여기서 라일락을 사야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참 난데없는 데에 결의를 다졌지만 직접 와서 가져가라고 하면 소백산까지 가자고 딸과 둘이 마주 보며 결심까지 했다.

토종 라일락에 대한 집념으로 기자직까지 버린 이야기는 감동을 넘어서 일종의 경이고 쉽게 전염되는 병처럼 마음을 들뜨게 했다. 반드시 그 토종 라일락 나무여야만 했다.


나무가 오는 시간을 기다리면서 얼굴도 모르고 색깔도 모르는 나무지만, 마치 오래 기다리던 연인이 올 날처럼 마음이 애틋하고 울렁거렸다.




마침내 라일락



토종 라일락은 정향나무로 불린다. '정향나무 농장'에 4월 말 경에 나무를 받고 싶다고 하자, 그때는 꽃 필 때라 나무도 스트레스를 받아서 식재를 할 수 없다고 한다. 급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그 말이 매우 초현실적으로 들릴 정도로 꽃나무에 실연당한 것처럼 쓸쓸하기까지 했지만, 그 경직된 가지를 뚫고 나올 여린 잎들과 연한 꽃잎들만 해도 마음이 아린데 뿌리내려 살던 곳에서 함부로 데려올 수는 없었다.


시공이 늦어지는 바람에 꽃나무가 오는 시간도 늦었다. 원래 3월 초에 받기로 예약했었지만, 5월 중순에 이사가 이루어지는 바람에 꽃나무마저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꽃은 내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대문을 여는 순간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므로 잠시의 시간을 못 기다릴 이유가 없다. 농장 사장님이 문자로 '하늘땅만큼 아름다운 정향나무를 보내주겠다'라고 하니 기다리는 것쯤이야.


게다가 나무는 자신이 자란 그 땅에서 얼마간 더 머물 수 있을 것이니 좋을 것이다. 생명 있는 것은 다 자기가 뿌리내리고 살던 곳을 떠나야 된다면 한동안 아플 것이다. 잠시라도 그곳에 머물면서 서서히 떠날 준비를 하는 것도 좋다.


공부하는 선비의 집에는 예부터 배롱나무를 심었다. 나무껍질이 없이 매끈한 목백일홍은 청렴을 배워야 하는 선비에게 제격이었다. 그런데 배롱나무는 중부지방의 추위를 견디기 힘들다고 해서 포기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라일락과 배롱나무를 다 심었을 것이다. 그것도 생명인데 욕망 때문에 추위로 살이 아플 나무를 심을 수는 없다.


라일락은 연보랏빛의 연약한 색과는 다르게 매우 강인하다. 양지에서 키우면 아주 잘 자란다. 그런 라일락의 끈질긴 생명력을 더 사랑했던지 모른다.


마침내 이사를 하고도 여러 달이 지난 시월 중순에야 제대로 살지 걱정이 앞서는, 잎이 져서 앙상한 라일락 나무 두 그루 받았다. 정향나무라고 하든 라일락이라고 부르든, 고향을 떠나온 나무가 몸살을 앓나 조바심했더니 그래도 올봄에 꽃을 피웠다. 한 그루는 톡톡히 몸살을 앓는지 꽃도 제대로 피지 못하고 시들하다가 아래서 다시 곁가지를 치더니 푸르게 올라오는 중이다. 부엽토로만 반드시 식재하라는 엄명까지 잘 지켰다. 거미줄이 마구 치기에 난황유도 만들어서 매주 섬세하게 뿌렸다. 그랬더니 싱싱하다.


어릴 때 살던 집은 백여 평의 마당에 온갖 꽃나무가 무성했다. 천리향의 향기는 골목을 들어서던 순간 화안했고 아직도 그 향기는 추억과 그리움이다.


이제 라일락 나무도 골목을 오가는 사람에게, 또 아이들에게 집에 대한 추억을 향기로 던질 것이다. 동네를 오가는 사람들이 무슨 나무의 향기인지 묻곤 한다. 어린 라일락도 향기뿐이다. 집이 세월에 익을 동안 라일락도 같이 자랄 것이다. 나무 한그루도 어떤 인연으로 만나 향기를 전한다. 하물며 사람이야.


라일락 꽃이 필 때면 그 향기 아래서 휘트먼의 라일락 시를 읽으며, 라흐마니노프의 '라일락'을 들으면 딱 제격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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