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속으로
. 2021
왼쪽부터 겉 표지를 들추면 양장본의 초록색 표지, 겉표지, 오른쪽은 뒤 표지
이상화는 1901년 4월 출생으로 대구 본토박이다. 아버지는 그가 4세 때 별세했지만 유복한 가정으로 가난을 모르고 살았다. 이상화의 백부는 '우현서루'를 설립한 이일우로, 교육에 엄격해서 보통학교가 아닌 집안의 강의원에서 조카와 자식 교육을 한다. 백부는 명망이 높아 독립투사도 길러냈고, 여학교 설립과 부인 야학을 만들어 개화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일제의 도의원 자리와 중추원 참의 자리도 마다하면서 지조를 지켰다. 강의원을 운영한 홍주일은 천도교 대구교구장을 지냈으며, 이상화는 그의 민족사상 및 종교적 사상의 영향을 다분히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상화는 15세에 비로소 경성 중앙 학교에 입학한다.
1919년 3. 1 운동이 대구에는 다음날 전해진다. 이상화는 계성학교로 친구 백기만은 대구 고보로 전달하여 독립운동에 대한 호응을 얻는다. 1923년에 이상화는 일본 동경으로 가는데 이때는 프랑스로 가려는 목적이었다. 동경에서 '아테네. 프랑스'에 다니면서 불어를 배우다가 일본 대지진 당시에 조선인의 대학살 사건이 벌어지고, 상화도 잡혀서 죽기 직전에 우여곡절 끝에 살아,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1926년에 경향파에 가맹하면서 시각을 사회로 돌리며 이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나온다.
1927년 상화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내려오지만 5년 정도 후는 파산을 한다. 1934년에 생계유지 겸 <조선일보> 경북 총국을 경영하지만 이재에 무관심하고 초연한 성격이어서 경영란에 빠진다. 친구 백기만은 그런 상화를 '수단을 가리지 않는 추악한 세상에 살기에는 너무도 관대하고 인자하고 이욕에 초연' 한 성격이었고, '다혈질 성격이나 정염은 한낮의 태양 같고, 이지는 청명했고, 의지는 확고한 인물'이라고 한다.
1973년 정음사 발간 초판, 값은 500원, 시집 안쪽에 실린 이상화 시비가 있는 묘소 입구 사진, 시집 목차
1935년에 상화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큰형 이상정을 만나러 갔다가 다음 해에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 돌아온다. 여성 편력도 멈추면서 비로소 묵묵히 내조를 하던 부인과 가까이 지내게 되고, 교남 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친다. 학교에 권투부를 창설하면서 '피압박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전한다.
이때 문학인과의 교류는 이육사 등이 있다. 위암으로 사망하면서 상화의 상중에 서울의 빙허 현진건에게 부고를 보냈는데, 마침 빙허의 부고가 상화의 집에 도달했다. 결국 두 사람은 한날에 서거한다. 상화는 가족묘지에 안장되는데 그의 나이 43세였다.
이상화의 4형제들은 모두 포용력이 있고 신체도 거구였지만, 상화만은 체형이 약간 작았지만 미남이었다. 백기만은 이상화의 모습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는데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미남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백조》동인으로 활약하던 이상화와 빙허 현진건은 당시 장안의 2대 미남이었다.
시집 목차, 각 시들은 대부분 시들이 실린 잡지 및 지면이 표기되어 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백기만은 기미운동 직후부터 1928년까지를 시단의 초창기라고 한다. 그 이유로는 기미독립운동 이후에 시인들이 배출되었고,《폐허》, 《창조》, 《백조》, 《금성》등의 동인지들이 탄생하여 시단이 형성되었기 때문으로 본다.
바로 이때 나온 시인 중에서 이상화야말로 '명예의 월계관을 쓰고 전 시단사에 군림하는 탁월한 시인'으로 본다. 그리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나의 침실로>를 쓴 상화야말로 괴테에 버금가는 시인이 되었을 것이나 애석하게도 요절했다고 안타까워한다.
백기만이 이상화의 유고 시 16편을 발굴해서 시집 <상화와 고월>에 싣고 있는 실증적 조사는 참고할 만하다.
그의 시들 중에 교과서나 시험에 등장하는 작품으로는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통곡> 등이 있다.
시인의 영시도 한 편 실려있다. 시 <통곡>이 짧지만 강렬하다
비탄의 맛
독립만세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만연했던 절망과 허무는 문단에도 영향을 끼친다. 당시 <폐허廢墟>지의 창간 전후와 <백조> 시대에 즈음해서 일본에서 유입된 서구 문예 사조의 흐름들도 퇴폐와 허무적이면서 낭만적인 경향이었다.
특히 안서 김억의 첫 번역시집인 『오뇌의 무도』에 실린 시들의 경향도 센티멘탈이나 낭만이 거의 대부분으로, 이는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이때 <白潮>의 동인이었던 이상화는 「末世의 欷嘆」, 「나의 寢室로」 등의 시들을 발표하면서 주목받는다.
이상화도 이런 절망과 허무의 경계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몇 편의 시에는 '술'의 이미지가 등장하는데 시 <청년>에서 '흰 옷 입은 나는 비수悲愁의 임자 / 느껴울 빚은 술의 생명'이라고 하거나, 시 <비음 緋音>에서 '술 취한 장님이 먼 길을 가듯 / 비틀거리는 자국엔 핏물이 흐른다.'라고 할 때의 화자는 절망한 듯이 보인다.
시 <말세의 희탄末世의 欷歎>에서도 '낮도 모르고/밤도 모르고/ 나는 술 취한 몸을 세우련다'라고 할 때는 세기말적 몰락으로 회생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실제로 시 <대구 행진곡>에서는 '착하고 귀여운 술이나 부어 다고 / 숨 가쁜 이 한밤은 잠자지도 말고서 / 달 지고 해 돋도록 취해나 볼 테다.'라고 함으로써 술이 그가 처한 상황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처럼 보인다.
이처럼 비탄과 절망의 상황에서는 공간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시 <나의 寢室로>에서 '마돈나'를 반복해서 부르며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疲困하야 돌아가려는 도다'고 할 때 '목거지'가 과연 무엇을 말하는지 관심대상이었다.
이상화의 시에 '목거지'라는 어휘가 나오는 나머지 두 편의 시를 살펴보면, 시 <낮에도 밤>에서 '광명의 목거지란 이름도 모르고 술 취한 장님이 먼 길을 가듯' 에서와 시 <나는 해를 먹다>에서 '보기 좋게 잘도 자란 과수원의 목거지다.'로 미루어서 목거지는 어떤 길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경상도에 살면서 아는 바로는 목은 좁은 길의 의미였다.
이상화는 18세 되던 해 봄에 중앙 고보를 3년 수료한 후에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 내려왔다가 그 여름에 말없이 집을 떠나 38일간 금강산을 비롯해 강원도 일대를 끼니도 굶고 방랑하면서 노숙한다.
시대적 상황에서 비롯된 패배와 절망감은 당대에 병리적 멜랑콜리를 드러낸다. 우울은 만연했고, 점염되었다. 그러나 이상화의 시가 전반적으로 술의 이미지로 점철되었다면 우리는 그의 시에서 병리학적 우울로만 해석하겠지만, 그러나 그는 다음 단계로 나아감으로써 긍정적으로 변모한다.
어쩌면 유랑의 세월이 그를 확대되는 공간으로 인도했을지 모른다.
들판으로 나가다
이상화 시에서 들판과 과수원으로 공간이 확대되면서 이전에 가졌던 우울과 허무에서 벗어나는 것을 발견한다.
시 <나는 해를 먹는다>에서 '벼 이삭 배부르게 늘어져 섰는 / 이 벌판 한가운데 주저앉아서 / 두 볼이 비자웁게 해 같은 능금을 나는 먹는다.'라고 하거나, 시 <청량세계淸凉世界>에서 '빛살에 다 쬐인 능금과 벼알에 배부른 단물이 빙그레 돌면서 그들의 생명은 완성이 될 것이다.'라고 할 때 패배와 상실감에 젖었던 마음은 능금이 익고, 벼가 여무는 들판으로 나서면서 긍정적으로 변한다.
이 벼는 시 <어머니의 웃음>에서 '나른한 몸으로도 / 어둔 부엌에 / 밥 짓는 어머니의 /나보고 웃는 빙그레 웃음'이라고 말하며 화자에게는 매우 따뜻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긍정적인 대상이다.
이상화의 어머니는 거인이라고 할 정도의 거구이며 대구의 유명 부인들이 몰려들 정도로 후덕했다. 그런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며 벼와 밥의 시간은 아무래도 그의 우울을 오래 가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상화의 대표시라고도 할 수 있는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이르면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라고 하면서 이제 벼가 자라는 논길은 그의 이상과 꿈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공간으로 변한다.
한반도는 기원전 2400년경부터 벼를 재배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적인 고고학 개론서 ‘현대 고고학의 이해(Archaeology)’에는 한국이 쌀의 기원지로 명시돼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고 한다. 이 최신 개정판에서는 쌀의 기원지가 한국이며, 연대는 BC 1만 3000년 전으로 기록되었다고 하니 우리 민족이 쌀의 민족, 농경민족인 것은 확실하다.
그럴 때 이상화의 시에서 벼가 자라는 논길이 시인이 무한히 걸어가 보고 싶은 이상향으로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마침내 시 <가상>에서 '단맛 뵈는 엿만이 아니다 / 단맛 넘어 그 맛을 아는 맘/ 아무라도 가졌느니 잊지 말라고 /큰 가새로 목탁치는 네가 / 주는 것이란 어째 엿뿐이랴'라고 한다. 단맛을 넘어선 맛을 느끼게 될 때 비통과 절망의 상황에서 벗어날 꿈을 꾸는 것이다.
이상화는 현실의 절망감에서 비롯한 부조리한 것들에 대해 술을 마시며 패배감으로 비통해했다. 그러나 곧 벼가 있는 논길과 달콤한 과일이 열매 맺는 과수원이 있는 벌판으로 나가면서 긍정적으로 변한다. 이때 '나의 침실'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나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인 벌판으로 공간이 확대된다.
그 들판에는 벼와 보리가 자란다. 대구지방에서는 맨드라미나 혹은 들마꽃으로 불리는 민들레가 자라는 곳이다. 민들레의 홀씨는 날아서 사방에 꽃들을 다시 피운다. 민들레를 그가 시에 인용한 것은 봄의 기운이 퍼져나가길 기원해서이리라.
그가 현실을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만 간주하지 않은 것은 그의 시만이 아니라 그의 가계를 살펴볼 때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대구의 명문가에서 성장하면서 그는 독립운동에 가담도 하고, 좌절도 하고, 다시 독립운동의 기운에 젖으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변모시켰다. 그렇기에 그를 저항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해도 어색하지 않다.
개인적인 공간, 즉 밀실인 침실에서 웅크리고만 있었다면 좌절과 허무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술을 마시던 개인적이고 좁은 공간에서 그는 우리 민족의 생명력을 이끌고 유지하는 들판으로 공간을 확대해서 나섬으로써 마음속의 염원과 이상을 실현시키는 것이다.